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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고’라는 타이틀을 움켜쥔 폭염의 기세도 ‘여름휴가’에 대한 한국인의 의지는 꺾지 못한다.
주5일 근무제, 주5일 수업제가 정착되었어도 여름휴가에 대한 애착은 굳건하다.
마치 명절 때의 귀성처럼. 바다로, 계곡으로, 산으로 우리는 진격(?)했다.
바다에서는 그늘, 계곡에서는 자리를 팔고 있었다. 더러는 바가지요금이라는 부비트랩도 만났다.
이런 우리를 언론에서는 ‘행락객’이라 부른다.
나는 이 말이 싫다.
술집을 유흥업소라고 부를 때 풍기는 퇴폐성 같은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형편없는 재료를 인공조미료로 버무린 음식 맛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일삼아 다른 말을 찾아낼 것까지는 아닐 성싶다.
우리의 ‘행락문화’가 바뀔 때 자연스럽게 새로운 말이 등장할 것이다.
[월간산]화양구곡의 제2곡 운영담(雲影潭). 구름이 비치는 못이라는 뜻이다.
아무튼 나는 행락객의 한 사람으로서, 이름 높은 한 계곡을 찾았다.
화양계곡. 백두대간의 청화산 서쪽 기슭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괴산군 청천면 이평리 어름에서 역시
백두대간의 조항산과 대야산이 내려 보내는 계류를 안고 서쪽으로 허리를 틀어 달천으로 흘러든다.
이 물줄기가 화양천인데, 가령산과 도명산 북쪽 골짜기에서 달천을 만나는 화양동 입구까지 약 4km 구간을
화양계곡이라 부른다.
화양계곡은 화양동계곡, 화양동천, 화양구곡이라고도 한다.
‘화양동계곡’이라 할 때 ‘동’은 골짜기를 뜻하므로 ‘초가집’이나 ‘역전앞’ 같은 조어다. 이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조선 유학자 우암 송시열의 자취가 짙게 배인 곳
[월간산]도명산 동쪽 능선 기슭에서 도명산 정상 북쪽을 바라본 모습. 가령산과 대야산 줄기가 겹쳐 보인다.
앞서 나는 화양동천 또는 화양구곡이라는 왠지 근사해 보이는 이름을 두고 굳이 화양계곡이라고 했다.
지금의 나(행락객)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계곡, 동천(洞天), 구곡(九曲)이라는 말 사이에 가치 개념의 차이는 없다.
계곡은 이 낱말이 가리키는 대상의 지리적 속성을 일컫는 명사다.
동천 또한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표준국어대사전)을 뜻하지만 ‘신선이 사는 세계’라는
인문적 의미가 더 두텁게 얹혀 있다.
구곡은 확연히 다르다. 역사적, 문화적 개념의 용어인 것이다.
물론 아홉 번 굽이쳐 흐르는 계류라는 의미를 유추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구곡의 의미를 헤아릴 수 없다.
아홉 또한 실제가 아니라 상징이다.
[월간산]화양구곡의 제4곡 금사담(金沙潭)과 암서재(巖棲齋).
금사담은 물속으로 보이는 모래가 금싸라기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암서재는 송시열이 1666년에 처음 지은 집으로 이곳에서 학문을 닦고 후진을 길렀다.
구곡은 중국 남송의 성리학자인 주자(朱子, 1130~1200)의 ‘무이구곡(武夷九曲)’에서 비롯되었다.
무이산은 중국 동남쪽에서 최고의 경승으로 꼽히는 산으로 주자가 54세 때 이 산에 들어왔다.
주자는 ‘구곡’을 설정하고, 제5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지었다.
무시로 배를 띄워 무이구곡을 따라 흐르며 ‘무이도가(武夷櫂歌)’ 10수를 비롯한 많은 시를 남겼다.
고려 말에 들어온 성리학은 조선의 사상적 바탕을 이루며 16세기에 이르러 퇴계 이황, 율곡 이이 같은 이들에 의해
독자적인 학문의 세계를 꽃피웠다.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는 존숭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저마다 ‘무이구곡’을 차운하고, 경승지마다 자신의 구곡을 구현했다.
퇴계가 ‘무이도가’를 차운하고, 율곡 이이가 황해도 해주 석담에서 고산구곡을 설정하고 ‘고산구곡가’를 지은 것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 구곡이 있다.
이름과 장소가 부합하는 것만 꼽아도 곡은구곡, 선유구곡, 무흘구곡, 도산구곡, 죽계구곡 등 수십 개다.
이 중 괴산에 있는 것만 해도 화양구곡을 비롯해 갈은구곡, 쌍곡구곡, 선유구곡, 고산구곡, 풍계구곡,
연화구곡 모두 7개나 된다.
화양구곡은 조선의 유학자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자취가 짙게 배인 곳이다.
이름부터가 그렇다. 원래 황양목(회양목)이 많아 황양동이라 불렀으나,
선생이 거처를 이곳으로 옮겨와서 중국을 뜻하는 중화(中華)의 ‘화’와 일양래복(一陽來服)의 ‘양’을 따서
이름을 화양동이라 고쳤다고 한다(국립공원관리공단).
[월간산]도명산 정상부 서쪽 암릉.
송시열이 화양동을 은거지로 택한 것은 60세가 되던 1666년(현종 7년)이다.
효종의 장례 때 상복을 입는 문제로 남인과 대립이 극심해졌고, 마침 화양동의 승경에 반해 지은 집이 완성되어서
거처를 옮긴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둥지를 튼 것이 아니었다.
83세가 되던 1689년(숙종 15년) 노론의 영수로서 왕세자의 책봉에 반대하다가 사약을 받고
죽을 때까지 20여 년간 바깥세상과 이곳을 드나들었다.
이곳에 있을 때 벼랑에 명나라 황제 의정의 어필 ‘비례부동(非禮不動)’을 모각하고,
문인들과 주자의 책을 교감하거나 속리산을 유람하는 등 은일의 시간을 보냈다.
현재 전하는 화양구곡의 이름은 문인 권상하가 지은 것이고 송시열은 위치만 정했다고 한다.
화양구곡은 ‘제1곡 경천벽―제2곡 운영담―제3곡 읍궁암―제4곡 금사담―제5곡 첨성대―제6곡 능운대―
제7곡 와룡암―제8곡 학소대―제9곡 파천’이다.
달천과 만나는 화양천의 하류에서부터 상류로 거슬러 오른다.
앞에서 나는 행락객으로 화양계곡에 든다고 했지만 사실 화양구곡은 거쳐 가는 길이고, 주는 도명산(643m)을 오르는 것이다.
산의 들머리와 날머리 모두 화양구곡이어서 자연스럽게 산수를 노닐 수 있으니 행락치고는 제법 품격이 높은 셈이다.
산행 코스는 지극히 단순하다.
제6곡 능운대로 연결되는 화양3교에서 도명산 북쪽 기슭으로 올라 정상에서 제8곡 학소대로 향하여
북쪽 기슭을 흘러내리는 것이다.
능선을 걷는 일은 정상부의 암릉을 제외하고는 없다.
단조로워서 지루할 수도 있는 길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것이 ‘도(道)’의 실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至道無難)”고 했다.
“가리고 차별하는 짓만 꺼린다면(唯嫌揀擇)”면 말이다.
승찬 스님의 <신심명> 첫 구절이다. ‘
도명산(道明山)’이라는 이름은, 산 아래 채운암이라는 암자에서 도통한 이가 나왔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했다.
비탈에 난 산길이 대부분 그렇듯이 오로지 오른다.
좌고우면할 것 없이 오로지 오를 일이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된다. 관광버스 한 대가 그대로 산을 올랐다.
스마트폰에서는 남의 취향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노래가 수시로 들려오고, 별로 유쾌하지 않은 농담들이 흩날린다.
아차, 이건 아니다. ‘간택’하는 내 귀가 문제다.
그렇게 나는 몇 대의 관광버스에 한참 동안 실려 갔다.
[월간산]정상 오르는 길. 바위에 솟은 소나무가 작은 숲을 이루었다.
온 몸이 땀으로 흥건하다.
아니, 이건 땀이 아니다. 몸뚱이 자체가 물주머니다. 바람도 없다.
그런데도 별로 덥지 않다. 햇볕을 가려주는 숲, 숲의 시원한 날숨 그리고 산의 높이 덕분이다.
활엽수 일색이던 숲이 등성마루에 다가서자 소나무에게도 자리를 내어준다.
소나무 사이로 도명산 정상 북쪽의 바위 벼랑과 가령산(642m)의 겹쳐진 모습이 버티어 선다.
도골선풍(道骨仙風)이다. 능선 아래로 난 길이 편안하게 느껴질 즈음 커다란 바위봉우리가 성큼 다가선다.
정상부의 암릉이다. 안전시설이 잘되어 있어서 위험한 구석은 없다(속리산국립공원 안에 든 산답다).
아이 데리고 와 놀 수 있다면, 이곳이 바로 이상향
정상부는 둥글고 넓적한 바위를 얼기설기 올려둔 것 같은데, 군데군데 소나무가 가득 선기(仙氣)를 머금고 섰다.
문득 한 생각이 인다.
이 나무는 얼마나 부드럽기에 이렇게 바위 속으로 스며들 수 있었을까. 소나무는 지극히 부드러운 나무다.
투명할 정도로 밝은 나무다. 소나무는 바위와 한 몸이고 또한 하늘에도 속해 있다.
이것이 도(道)의 실상이 아닐까.
정상에서 북쪽으로 돌아 미끄러져 내리자 바위 벼랑에서 세 부처가 기다란다.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는 선각 마애불상이다.
수인(手印)과 도상의 특징이 분명하지 않아서 어떤 불보살인지 알 수 없다.
추상화가의 그림 같기도 하고, 아이가 그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 마음대로 약사여래, 지장보살, 미륵이라고 생각한다.
이 불보살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애당초 이 아스라한 바위 벼랑에 다가서지 않았을 것이다.
마애불을 뒤로하면 편안한 숲길이 화양구곡으로 미끄러진다.
구곡엔 물놀이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21세기 구곡의 풍광이다.
나는 이 모습이 결코 구곡문화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라 보고 싶지 않다.
18~19세기의 화양구곡 또한 은일지사의 거처가 아니라 서인 노론계의 자기 과시적 공간으로 변해 가지 않았던가.
오히려 주자의 ‘무이도가’야말로 오늘의 우리에게 더 직절하게 다가온다.
무이구곡의 제9곡을 읊은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모름지기 인간 세상 속에 별천지가 있거늘(除是人間別有天).’
‘바로 여기’를 떠나서 이상향을 찾지 말라는 곡진한 당부로 새긴다.
오늘 화양구곡에서 물놀이하는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자기의 아이를 데리고 와서 똑같이 놀 수 있다면,
이곳이 바로 이상향일 텐데. 그럴 수 있을까. 정말 걱정이다. 아직도 폭염이다.
[월간산]도명산 정상 아래 암벽의 마애불(충북도 유형문화재 제140호).
[월간산]화양구곡 가의 느티나무 그늘에서 피서를 하는 가족들. 늙은 느티나무는 예로부터
화양구곡이 사람들과 가까웠던 것을 알게 한다.
[월간산]화양3교에서 화양천 상류를 바라본 모습. 계곡 가로 피서 온 사람들이 들어 차 있다.
첫댓글 별천지를 어느 세월에 찾아가 볼가나.
아름다운 관광지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잘 보고 가네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