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기에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의병장으로서, 효자로서, 학자로서 충과 효와 학문으로 영원한 불멸의 혼을 남긴 난고(蘭皐) 남경훈(南慶薰:1572~1612)이 있다. 그가 살았던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는 난고가 강학했던 난고정(蘭皐亭)이 남아 있다. 또한 정자보다 더 오랜된 난고 종택, 난고불천위사당, 난고의 손자인 남로명(南老明)이 지은 만취헌(晩翠軒) 등이 그대로 남아 전한다. 난고의 16세 종손 되는 남응시옹(86)은 내외분이 건강한 기력으로 후원에 매화나무를 기르면서 선대의 정신을 면면히 계승해 가고 있다. 난고 종택은 400년 동안 한 번도 양자를 들여온 적도 없고, 다른 사람의 글을 빌린 적도 없다고 하였다.
# 經史子集 애독…예학에 밝았던 난고
지수( ) 정규양이 쓴 난고 행장(行狀)에 의하면, 난고는 대대로 급제한 사대부가 후손인 남의록(南義祿)의 아들로 태어났다. 남의록은 퇴계 제자인 유일재(惟一齋) 김언기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하여 토벌한 공로로 조산대부 판관벼슬을 지냈다.
난고는 어린 시절, 가정에서 효경(孝經)을 받아 읽고 신명처럼 받들어 실천하였다.
훗날 가학(家學)을 계승한 난고는 부친의 명으로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당시 영해부사였던 우복(愚伏) 정경세는 손을 두드리면서 그를 칭송하였다고 한다. 승지(承旨) 조덕린이 지은 난고 묘갈명에는 우복이 난고의 글을 보고 크게 기특하게 여기면서 '이는 과거 정도의 문장이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향시에 장원을 하였고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난고는 혼란한 당시 조정에서 벼슬할 뜻이 없었다. 오직 고인들의 전적과 경(經)·사(史)·자(子)·집(集) 읽기를 좋아하며, 오로지 정밀히 분석하고 의리를 연구하여 몸을 닦고 행동을 삼가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다. 특히 예학에 대한 깊은 연구로 당시 사대부들이 의문점을 그에게 물어서 결정할 정도로 확고한 판단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 20세 때 부친과 함께 의병활동 투신
난고의 부친은 영해에서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향병을 모집하였다.
당시 난고는 20세의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부친을 따르려 했다. 그러자 부친은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하되고 자식된 자가 높은 베개에 편안히 누워 있을 세월은 아니다. 너가 약관의 나이로 전란에 임하여 나라 위해 목숨 바칠 의리를 알고서, 한 몸 죽고 삶을 계산하지 않으니 내 어찌 자식 사랑하는 애정 한 생각으로 너의 가상한 뜻을 막겠느냐(國事至此, 此非臣子高枕安臥之日也. 汝以弱年, 惟知臨亂死上之義, 而不計己之有無, 則吾豈可以 情一念, 沮其志尙乎)"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서 부자가 함께 출두하니 고을에서 모두 이들의 충의심에 감동하여 의병에 서로 다투어 참가하였다. 난고 부자는 경주성 전투에 참전, 경주성 수복을 위한 문천회맹(蚊川會盟)에서 결사항쟁을 서약한 후 경주성을 수복하였다. 그 후 영천성 전투, 당교전투, 팔공산회맹 등을 통해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 창녕 화왕산 전투에 참가하여 망우당 곽재우 장군에게 군대의 선발, 교육, 보급 방법 등을 제시한 난고의 승전전략책은 의병전사에 길이 빛나는 탁견이었다. 왜란 7년 기간 중 5~6년 세월을 전투장에서 보내고 돌아와서는 논공행상에 참여하지 않고 오직 성인의 글을 읽고 실천하는 데에 전념하였다. 현재 망우공원 임란호국영남충의단에는 부자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 35세에 고향 돌아와 난고정 짓고 강학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가 쓴 난고정 기문에 따르면, 난고는 의병에서 돌아와 벼슬에 뜻을 접고 사는 집 동산의 작은 연못위에 정자를 처음 지으니 선조 39년(1606)이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본래의 정자는 퇴락하여 무너졌다. 유림에서 난고를 추모하는 광산서원(光山書院)을 삼광동(영해면 묘곡1리)에 세우고, 1684년에 서원 안에 난고정을 복원하였다. 그러나 대원군 서원 철폐 때 모두 훼철되고 말았다. 1868년에 다시 난고 종택 옆에 복원하게 된 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난고정 본래 현판 글씨는 권진모(權進模)의 글씨였으나 도난당하고, 조선 헌종 때 영해부사인 남상교가 쓴 글씨가 남아있다.
척암은 '당시 난고(蘭皐)라고 이름을 지은 뜻을 감히 섣불리 말을 못하겠으나 아마도 두문(杜門)독서를 하면서 분수 밖에 경영을 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자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올 때 언덕에 핀 향기로운 난을 보고 불우한 마음을 의탁하여 부른 의란곡조(蘭曲操)에 느낌이 있어 스스로 비유함이 아닌지 모르겠다'라고 서술하였다.
# 아버지 대신 옥살이 병얻어 41세에 운명
난고의 부친 조산공은 임란 평정 후 자제들은 학업에 전념토록 하였고, 자신은 나라의 유사시를 대비하여 무과시험에 병과 1등으로 급제하여 왜군의 재침을 대비하였다. 예빈시주부, 군기시판관 등을 역임하였고 만년에는 탐관오리 영해부사의 가혹한 농민수탈에 농민을 대표하여 탄핵하려다가 감옥에 갇혀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난고는 순찰사에게 나아가 원통함을 호소하고 자신이 늙은 부친의 옥고를 대신 받겠다고 피눈물로 간청하였다. 순찰사는 효성에 감동하여 부친을 사면하였고, 난고는 부친 대신 감옥에 갇혀 추운 겨울을 나면서 병을 얻어 1년 후에 운명하니 41세의 장년(壯年)이었고 나라의 간성(干城)이었다.
난고의 아들 안분당(安分堂) 남길(南佶)은 진사 시절 성균관에 당시 광해조의 폐모사건 가담자가 있음을 알아채고 지우인 성이성(成以性)에게 '백설이 장차 어지러이 날릴 것 헤아리니(白雪調將亂)/ 봄(朝廷)기운 더욱 차구나(靑陽氣更寒)/ 풍진세상에 모름지기 각자 보전해야 되리니(風塵須各保)/ 세상일 절로 단서가 많구나(世事自多端)'라는 한 수의 시를 남기고 초연히 낙향하여 부친 난고의 뜻을 계승함으로써, 훗날 폐모사건 주동자 색출 과정에서 성균관 진사가 모조리 연루되는 화를 면했음은 유명한 일화이다.
증손자 되는 만취헌(晩翠軒) 남로명은 대과에 급제함으로써 문호가 크게 열렸고, 난고의 자손에 진사 28명, 문과급제자만 8명이 배출되었으니 충효의 가문을 누가 번창하지 않는다고 말했던가.
# 문장·시 뛰어나…난고선생 유고 1책 전해
난고는 문장과 시가 뛰어나 당시 남산문장(南山文章)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특히 "예란 집에서 날마다 행하는 것이니 익숙히 강론하지 않으면 그릇되기 쉽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주자가례의 요점을 뽑아 선현들이 의심한 문제점을 설파, 주석을 붙여 동이(同異)점을 판별하고 그릇된 곳을 고증하여 사례해의(四禮解義) 2책을 저술하였다. 난고선생 유고 1책이 전하고 있다. 난고종택의 남종통기(南宗通記) 등 많은 전적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귀중한 학술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