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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서원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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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 |
전라 |
충청 |
경기 |
황해 |
강원 |
평안 |
함경 |
계 | ||
명종 |
12(5) |
3 |
1(2) |
1(2) |
1 |
1 |
2(4) |
1 |
22(13) | ||
선조 |
25(3) |
3(9) |
7(3) |
6 |
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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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1(2) |
63(22) | ||
광해군 |
12(3) |
5(4) |
6(1) |
2 |
1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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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29(9) | ||
인조 |
11(9) |
6(7) |
5(1) |
2(2) |
(1) |
2(2) |
1(2) |
1(1) |
28(25) | ||
효종 |
10(2) |
5(3) |
2(1) |
4 |
3 |
2(3) |
1 |
(1) |
27(10) | ||
현종 |
14(6) |
8(4) |
8(3) |
5(2) |
2 |
4 |
4(1) |
5(3) |
46(23) | ||
숙종 |
76(61) |
27(40) |
27(25) |
19(8) |
5(8) |
4(8) |
6(15) |
2(9) |
166(174 | ||
경종 |
2(5) |
3(4) |
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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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2) |
(4) |
(2) |
8(20) | ||
영조 |
6(46) |
4(22) |
1(14) |
1(7) |
1(16) |
2(14) |
1(17) |
2(9) |
18(145) | ||
정조 |
(2) |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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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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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
순조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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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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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1) | ||
미상 5(9) 1(14) (6) (3) 1(3) (7) (1) 7(43) | |||||||||||
계 |
173(151) |
77(108 |
60(58) |
41(28) |
22(30) |
13(40) |
18(47) |
13(30) |
417(492 |
위의 표는 조선시대에 건립된 서원의 수를 시대별, 지역별로 살펴본 것이다. 숙종이후에 가면 사우(祠宇)와의 구별이 모호해져서 사우까지 서원으로 통칭되었다. 따라서 사우까지 포함하여 본 서원의 수는 909개소에 이른다. 평균해서 1개 읍에 3개소 정도가 있었던 셈이 된다. 이 통계에 나타난 서원의 건립 추세를 중심으로 조선 서원의 변천을 살펴본다면 ①明宗대까지와, ②宣祖~顯宗, ③肅宗~英祖 초, ④영조 17년 이후의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모두 22개소가 건립되었던 ①의 시기는 초창기에 해당한다. 이때는 4개소에 사액이 내려졌다. 이로 보아 이 시기에 서원이 이미 교학기구로서 인정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황 및 그 문인들에 의한 서원 보급 운동이 거둔 하나의 성과일 것이다. 이 시기는 서원의 내용면에서도 장차의 서원 발전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고 있었다.
도산서원
서원의 전반적인 면에 걸친 건전한 운용을 도모하기 위한 규정으로서 각 서원별로 院規가 작성되었고, 또 지방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향촌사림을 중심으로 하여 書院田, 奴婢의 마련 및 魚物, 소금 등 현물조달 체제의 영속화를 통한 안정된 재정기반의 구축이 추진되었다. 명종말 선조 초에 활발한 사림의 공급은 바로 이러한 서원의 건전한 운용을 바탕으로 하여 가능하였던 것이다.
사림세력은 明宗말의 文定王后 죽음을 계기로 尹元衡 등 權臣세력을 축출하는데 성공하고 宣祖의 옹립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그들의 출신기반이었던 향촌사회의 주도권은 물론 정치의 실권까지 장악, 이제는 사회전반을 이끌어가는 명실상부한 주도세력이 되었다. 앞에서 말하였던 ‘사림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림의 시대’ 도래를 예측한 퇴계에 의해 미리 준비되었고, 비록 일부 지역에 국한되기는 했으나 실제로 다수의 사림을 양성하여 사림계 관료층의 형성에 기여해 왔던 서원이 이 ‘사림의 시대’를 맞아 널리 보급되고 큰 발전을 보게 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우선 양적으로 볼 때, 표에서 보듯 서원은 현종말까지 106년간 193개소 (연평균 1.8개소)가 설립되었으며 사액된 곳은 91개소에 이른다. 지역별로는 초창기의 경상도 일변도에서 점차 벗어나 전라, 충청, 경기도 지역까지 확산되고, 한강이북지역에서도 점차 보급되고 있음을 본다. 有形的인 측면에서 드러나는 서원 발전의 樣相인 것이다.
서원발전의 양상은 질적인 면에서도 찾아진다. 무엇보다도 서원의 본래 기능이라고 할 강학활동이 이 시기에 활발히 이루어졌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강학이란 송대의 朱熹나 陸九淵같은 대학자가 각기 武夷精舍나 象山書院 등의 서원에서 수천명의 선비들을 모아놓고 경전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학설을 주장하고 강의하던 형태에서 유래하였다. 宋代의 朱子學이나 明代의 陽明學의 발달은 주로 이러한 서원에서의 강학활동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국가에서 운영하는 관학에서도 교사에 의한 강학이 있겠지만 그것은 과거시험에 대비한 章句의 해석이나 단순한 지식의 전달에 불과한 것이어서, 天理와 인성을 논하는 고도의 철학체계와 理의 실천을 통한 군자로의 인격완성을 가르치는 서원의 그것이 같을 수는 없었다. 院規에 규정된 바에서 보는 藏修가 서원에 거처하는 유생 스스로의 분발에 의한 자발적인 수기, 수양에 초점을 두었다면, 이를테면 이 강학은 名儒 碩學(또는 그 제자 문인)에 의한 학문연구와 心性啓發을 목표로 하는 서원기능의 중요한 하나의 측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 서원이 발전하는 단계에서 활발한 강학 활동이 이루어질 것임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영남지방에서는 퇴계의 학통을 이어받은 鄭逑, 鄭經世, 張顯光, 張興孝, 李玄逸 , 趙德隣 등이 혹은 陶山書院에서, 또는 道南( 尙州), 臨臯 (永川), 玉山(安康 )서원 등에서 퇴계가 주장한 主理 중심의 性理設을 강론하거나 퇴계의 禮設을 기초로 하여 禮學연구를 심화시키면서 사림들에게 이를 강의하였다. 마찬가지로 경기와 호서지방에 설치된 서원에서는 金長生, 金集, 宋時烈, 宋浚吉, 尹宣擧, 兪 棨, 權尙夏, 朴世采 등의 유학자들이 栗谷 李珥와 牛溪 成渾의 성리설에 입각하여 주자학을 이해하고 경전의 내용을 해설하였다. 특히 충청도 연산의 書院은 조선예학의 태두라는 김장생을 제향하는 곳인 만큼 그 문인들에 의한 예학의 연구와 강학이 활발하여서 조선예학의 메카가 되기도 하였다. 17세기의 조선학계를 양분하는 主理派, 主氣派니 또는 영남학파네 기호학파네 라고 하는, 學統과 師承관계에 따른 학파의 형성과 주자학의 발달은 이를 통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요컨대 17세기의 시기에 있어서 서원은 유생 스스로의 분발과 자기 수련인 장수를 기초로 한 위에서 저명한 유학자나 그 문인들에 의한 강학활동이 활발하였고 그런 과정에서 형성되는 학파의 확산을 위해 제향기능 역시 강화되는 질적인 발전을 보이고 있어서, 藏修, 講學, 祭享 기능의 본격적인 가동을 통한 사림양성기구인 학교의 성격을 확립하였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이르면 서원은 더 이상 학교로서의 존재에만 머물지 않았다. ‘사림의 시대’가 본격화하면서 이제 서원은 바로 그 사림이 정치, 사회적 활동을 벌리는 향촌에서의 據點 내지 기반이 됨으로써 정치, 사회적 기구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림의 집권 후 얼마 안 되어 발생한 朋黨은 대체로, 學緣을 매개로 한 學派에 따라 결정되는 측면이 강하였다. 퇴계문인이 주축이 된 영남학파가 南人으로, 花潭 徐敬德이나 南冥 曺植의 학맥은 北人, 그리고 율곡, 우계의 문인들인 기호학파가 西人이 되었던 것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각 학파 형성 거점으로서의 서원은 곧 붕당결성의 토대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원은 의리명분 문제와 관련된 事案을 놓고 이를 公論化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토론이나 논쟁에 대해 향촌별 사림들의 견해를 조율하고 수렴하며, 나아가 자기들이 지지하는 붕당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는 장소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율곡과 우계를 문묘의 제향인물에 포함시키려는 서인측의 움직임과 효종임금의 승하에 따른 喪服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비롯된 서인, 남인 사이의 논쟁인 禮訟에서 자기당의 주장을 지지하는 儒生들의 상소가 서원을 근거로 하여 빗발쳤던 것은 그 좋은 예였다. 서원은 이제 본래의 강학, 장수, 尊賢의 기능 이외에 사림의 정치활동 근거지로서의 역할을 더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하나 덧붙일 것은 서원에서의 사림활동이 중앙의 정치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림이 향촌에 기반을 둔 사회세력이었으므로 정치이전에 향촌문제가 먼저였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원이 나오기 전부터 훈척세력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留鄕所의 復立운동을 추진했었다. 이제 그런 방해나 제한이 없어진 마당에 서원이 향촌활동의 근거지가 되었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서원은 사림의 향촌활동 터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 서원의 건물구조에서 보이는 특이한 현상은 기숙사로서의 東,西齊가 쇠퇴하여 축소되거나 아예 講堂의 좌우 夾室로 들어가 버리는 반면, 강당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지는 양상을 보이는 점이다. 충청도 연산의 서원(金長生제향, 논산군 연산면 소재) 이나 魯城의 魯岡서원( 尹煌제향, 논산군 노성면 소재) 이 그런 예에 속한다. 그것은 이 시기의 院規 속에 출입유생에 대한 식량지참을 의무화하는 규정이 들어가 있는 데서 보듯이 재정부족으로 인해 儒生 공동 생활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불필요한 東,西齊를 줄이고 그 대신 사림의 회의나 회합을 여는, 활동 및 집회 공간의 확보가 더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서원도 18세기를 전후한 시기인 숙종 대에 들어가면 커다란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 무엇보다도 앞의 표에서 보듯이 서원수가 급격히 증가되어 濫設의 양상이 나타난다. 숙종일대 46년간 모두 166개소가 세워졌고 이때 와서 서원과 별다른 구분이 없어지게 된 祠宇 數(174개소)까지 합하면 실로 340개소에 이르러 연평균 7.4개소가 새로 세워지는 셈이다. 앞선 시기의 1.8 개소에 비하면 엄청난 증가율이라 하겠다. 뿐만아니라 이런 남설과 함께 이제는 제향인물의 선정에 있어서도 유학자여야 한다는 원칙이 무너지면서 政爭에 희생된 인물이나, 孝誠과 學行으로 한 고을에 알려진 일개 儒生, 한때 善政을 베풀었다는 守令, 그리고 심지어는 단지 그 후손이 귀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써 평범한 인물까지도 포함되게 된다. 당시의 양식있는 인사들은 이런 현상을 가리켜 일정한 기준없이 함부로 제향하는 濫享, 猥享이라하여 폐습으로 간주하면서 국가의 적절한 통제를 요구하기까지 하였으나 그런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사실 숙종대의 위와 같은 서원 남설은 바로 이런 남향과 외향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서원의 남설과 남향, 외향 현상은 그 설립이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서 정치적 목적에 따라 좌우되었던데 원인이 있다. 숙종 때는 종전과 달리 정권이 서인과 남인 사이에 네 차례나 바뀌었다. 그런 과정에서 山林과 外戚세력의 결합에 따라 명분논쟁위주의 색채가 노골화되면서 2명의 왕비(仁顯王后 閔氏, 禧嬪 張氏)가 폐위되기도 하고, 宋時烈, 같은 山林을 포함한 관료 수십명이 희생되는 등 명분 의리론을 앞세운 격렬한 정쟁이 계속되었다. 여기서 각 붕당은 自派의 정치적 명분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自派系 인물의 道學과 忠節을 드러내고 일반사림으로부터의 지지여론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원래 사림의 존경을 받는 인물을 제향하는 서원이 바로 이런 목적에 유용한 기구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민비의 폐출에 반대하다가 죽임을 당한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사후 불과 20여년 사이에 40여개소의 서원에 제향되었던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송시열은 도학자이기도 하여 혹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상소를 올렸다가 죄를 입은 유생까지 제향대상에 포함되어서는 서원이 각 黨派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정치적 이유 때문에 고삐가 한 번 풀리게 되자, 서원은 이제 사림의 공론과 무관하게 향촌사회의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따라 특정 인물을 제향하는 祠堂으로 화하였고 그것이 위에서 말 한 대로 行誼있는 儒生, 善政을 베푼 守令, 한 집안의 조상을 제향하는 濫享 , 猥享과 서원의 濫設을 가져왔던 것이다.
서원의 이러한 남설, 남향은 필연적으로 그 질적인 저하를 수반하고 사회적 폐단을 야기하였다. 특정인물에 대한 제향의 우선되다보니까 본래부터 제향의 기능만 가졌던 사우와의 혼동을 초래하였다. 이에 더하여 사우 역시 제향 공간 이외에 소규모나마 書齊를 좌우협실에 둔 강당형태의 강학공간을 추가하는 경향이 일어나 그러한 활동을 부채질하였다. 이제 서원은 사우와 그 명칭만 다를 뿐 제향중심이란 기능면에서는 동일해졌다. 그러나 그에 반비례하여 재정상의 문제로 인해 그나마 부진하던 강학활동은 더욱 위축되게 마련이었고 유생장수의 풍경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따라서 서원은 날로 증가하지만 斯文은 갈수록 침체하고 의리 또한 어두워질 뿐이라는 書院無用論까지 대두하게 되며 이것이 뒷날 서원철폐의 한 명분이 되는 것이다.
5. 書院의 弊端과 그 對策
서원의 폐단에 대해서는 이미 임진왜란 때 임금 선조에 의해 글만 가지고 떠드는 文勝의 폐를 가져 온다는 지적이 있었고, 仁祖때는 부적격자의 제향이 문제가 되었으며, 특히 효종 8년 충청감사 徐必遠에 의해 鄕校衰退 유발, 軍役弊 초래의 원인, 제향인물 시비로 인한 분쟁촉발, 祭需 부담으로 인한 관청경비의 소모란 4가지 면으로 그 폐단이 통절히 고발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때마다 서원 폐단이 논란되고 그에 대한 적절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는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肅宗말까지의 국가시책은 道學을 일으키며 국가의 원기인 사림을 북돋우고 바르게 이끌어가야 한다는 원칙론이 우세하였기에 서원장려책의 방향을 별반 벗어나지 않았다.
서원에 대한 통제책이 본격화하는 것은 전국적으로 173개소의 서원(祠宇까지 포함시킨 것임)을 훼철하는 강경책을 취한 英祖때부터였다. 그가 이와 같이 강경책을 취하게 된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숙종 연간의 濫享 ,猥享에 따른 濫設로 영조 17년의 시점으로 볼 때 전국적으로 서원, 사우의 수가 1000개소에 육박하고, 그에 따른 군역폐, 관청경비 부담의 증가, 제향인물 시비를 둘러싼 향촌양반사이의 끊임없는 분쟁 등, 서원이 야기한 폐단에 있었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계기는 그가 취하던 蕩平策의 실시와 밀접하게 연관되고 있다.
탕평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영조는 붕당간의 政爭을 유발하고 격화시키는 요소를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고 있었다. 따라서 탕평파에 의해 당쟁유발요인으로 간주된 서원에 대한 훼철이 단행되었던 것이다. 이후 통계에서 보듯이 서원증설의 경향은 크게 꺾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원에 대한 통제책은 正祖와 哲宗 연간에 다시 몇 차례씩 취하여지고 적지 않은 서원들이 禁止令에 저촉되어 철폐되었다. 그것은 주로 이 시기 서원이 보였던 두 가지 폐단 때문이었다.
하나는 서원이 미치는 사회적 폐단이었다. 서원훼철과 같은 강경조치로 인한 禁令의 강화는 지방관의 서원에 대한 물질적 지원을 거의 단절케 함으로써 그나마 빈약하였던 서원재정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따라서 그 타개책으로서 제향인물의 후손들로부터 재정적인 보조를 구걸하는가하면, 禁令을 무릅쓰고 일반백성을 서원에 예속시켜 군역을 면제시켜주는 대신 금품을 징수하는 예부터 있어오던 방식을 자행하였고 심지어는 白晝에 백성을 서원에 잡아들여 恐喝 , 私刑을 가하여 토색질을 일삼는 불법마저 서슴지 않는 對民作弊가 비일비재하였다. 특히 대민작폐와 관련해서는 중앙권력의 비호를 받는 서원일수록 심하였으며 그중에서도 세도정권의 이념적 상징이던 宋時烈을 제향하던 華陽洞書院의 횡포는 집권세력으로서도 용납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 정도였다.
이 시기 서원 폐단의 다른 하나의 측면은 서원이 제향자의 後孫에 의해 운영됨으로써 사림의 공적인 기구가 아니라 한 門中이나 同姓集團의 私的기구로 변모되는 경향이 심화된데 있다. 서원은 본래 사림의 공론에 의해 건립 운영됨으로 후손은 원칙적으로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서원건립과 유지에 박대한 비용이 소모됨으로 인해 초창기부터 후손들의 물질적 지원은 적지 않았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후원에 그칠 뿐 사림의 이목을 꺼려서 표면에 나서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18세기 이후에 들어오면서 사회경제적인 여건의 변화 속에 이전까지의 사족중심 향촌지배체제가 무너지고 향안과 같은 사족간의 결속에 의한 자체보장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 결과 族譜가 널리 성행하게 되고 門中契나 族産, 墓位土의 마련, 花樹會의 개최 등 門中조직이 강화되는 현상이 현저해졌고, 이것은 얼마 전까지 흔히 볼 수 있었던 同姓村落의 형성으로 집약되었다.
이러한 사회적인 여건은 서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기존 서원에 대한 후손의 관여를 노골화하게 하였고, 마침내 문중의 힘을 모아 자기집안의 顯祖나 仲始祖 등을 제향하고 이를 문중활동의 거점으로 삼고자하는 이른바 문중서원의 건립을 보게 한다. 물론 이런 서원이나 사우는 중앙의 서원통계에는 잡혀있지 않다. 따라서 앞의 서원 건립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의 한 연구에 의하면 그 숫자는 全南지역 만으로서도 무려 105개소 정도라고 한다. (앞의 표에 보이는 중앙에서 파악한 숫자는 全南, 北을 합쳐 185개소이다) 이러한 문중서원은 그 자체로서는 일정한 역사적 기능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원래의 士林藏修나 講學處라는 성격에 비추어 볼 때 그 末弊的 현상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탕평으로 사림정치의 이념이 부정되고, 사회경제적인 변화로 사족의 지위가 동요하는 상황 속에서 ‘사림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고 그 토대인 서원 역시 유명무실한 존재로 쇠퇴의 과정을 밟았던 것이다.
전국에 걸쳐 47개소 (서원20, 사우27) 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철폐한 大院君의 개혁은 이상과 같은 문제점에 대한 파악위에서 그 폐단의 제거를 위해 단행되었다고 하겠다.
6. 서원에 거는 오늘날의 기대
조선시대 서원에 대한 우리의 상식은 아직도 피상적인 이해의 선을 크게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그저 풍기군수 주세붕이 처음 백운동서원을 세웠고, 이황의 노력에 의해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으며 이후 전국에 널리 퍼졌으나, 당쟁을 유발하는 당론(黨論)의 진원지요 백성을 착취하는 지방양반의 소굴이 됨으로써 각종 병폐를 불러일으키다가 결국은 대원군에 의해 철폐되고 말았다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대원군이 취한 여러 정책 가운데서 개혁으로서는 가장 성공한 것이 서원철폐라고 학창시절에 배운 기억은 아직도 우리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서원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상당히 부정적인데도 불구하고, 난데없이 조선시대도 아닌 오늘날 바로 그 서원에 대해 어떤 희망적인 기대를 가져보자고 말하려니, 세상 변한 줄 모르는 완고한 서생의 낡은 푸념정도로 들리지 않을까 염려되는 바 없지 않다. 그러므로 이의 해명을 위해서라도 먼저 조선조 서원의 본래 모습을 다시 밝혀 보고, 오늘날의 세태 속에서 그것이 기여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모색해 보기로 한다.
조선시대 서원은 한 시대를 주도하던 사회세력인 사림의 본거지였다. 사림이란 사(士), 곧 선비의 집단으로서 본래는 일반적인 문사(文士)나 지식인층을 가리켰다.
그런데 16세기 성종, 중종 이후에 들어오면서는 후일 율곡 이이가
“마음속으로 삼대(三代)의 고도(古道)를 그리워하고 몸으로는 유행(儒行)에 힘쓰며 입으로 법언(法言)을 말함으로써 공론을 가진 자” 라고 정의하였듯이, 옛 성현의 가르침을 믿고 그것에 의거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에 대한 철저한 단련과 덕성의 함양[修己] 에 힘쓰며 일상의 사회생활과 정치 활동에서 고도(古道)에 나타난 의리의 실천과 구현을 위해 노력하는 존재로 그 대상이 보다 분명해지면서 범위가 좁아졌다.
같은 문사라도 과거응시를 위해 진부하게 경전의 구절이나 암송하고, 화려한 시구(詩句)와 문체와 사장(詞章)에 힘쓰는 무리는 더 이상 사림의 범주에 들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록(利祿)을 탐내어 위인지학(爲人之學)에 힘쓰는 그들은 심성이 바르지 못한 소인배로 간주되어 군자를 지향하는 사람에서 배제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주도해 나간다는 집권세력이나 무슨 연대 등으로 불려지는 시민단체들, 또 80년대 민주화투쟁에 몸 바쳤다는 숫자로 표시되는 세대들의, 오만과 독선만큼이나 자기합리화에 급급한 도덕자연(道德者然)하는 행태와는 좋은 대비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런 사림은 어떻게 해서 형성되는가? 아비가 양반이면 그 자식이 그대로 양반이 되는 것과 달리 사림은 부형으로부터 물려받는 지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경전의 학습을 통한 각고의 노력과 철저한 자기 수양 및 극기(克己)와 같이 다듬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존재였다.
성문(聖門)에 뜻을 둔 초보의 유생을 가다듬어 사림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학교가 필요했다. 그래서 조선 국가는 서울에 성균관, 지방에 향교를 두었다. 그러나 과거준비 위주로 운영되는 이들 관학에서 몸과 마음을 갈고 닦으며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수행은 바랄 수 없었다. 사림의 양성을 위해서는 별도의 학교가 있어야 하였다. 바로 이것이 조선에서 사림이 대두하던 시기에 서언이 출현하였던 배경이 된다. 이 때의 사림계를 대표하던 퇴계 이황의 서원론과 보급운동이 함께 주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퇴계는 그의 정치목표를 유학의 이상적인 정치모델인 삼대(三代)의 지치(至治)를 현실에 다시 구현하는 데 두었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인심을 바로 하는 데서부터 비롯되며 백성을 바른 길로 가도록 가르치는 교화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임금이 덕을 닦고 성현의 가르침을 힘써 실천하는 것[君德格正]과 함께 향촌사회에서 교화를 담당할 주체인 사림을 양성하고 훈련시켜야 하였다. 퇴계는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도장이 바로 서원이라 하였다.
이러한 논리적 근거 위에서 그는 마침 풍기군수에 임명됨을 기회로 우선 서원을 공인화하고, 나라 안에 그 존재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몇 년 전에 주세붕에 의해 세워진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구하였다. 뿐 아니라 사림이 성현의 가르침을 담은 경서(經書)를 배우고 익히며 실천을 통해 몸을 닦는 내적인 수양공간으로서의 강당, 서재와, 사림의 사표(師表)가 되는 인물에 대한 제향공간으로서의 사묘(祠廟)를, 서원건물의 기본구조로서 정식화하고 원규(阮規)를 지어 서원에서의 학습활동과 제반 운영 방안을 규정하였다.
서원은 마침내 퇴계의 이런 노력에 의하여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 백성을 바른 길로 이끌어갈 교화의 주역으로서 사림을 양성하고, 군자를 목표로 하는 그들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수행 장소이며 실천을 통해 덕성을 함양하는 학교로서 정착하였다.
선조 이후 사림세력이 정계와 향촌사회는 물론 사회전반을 주도하게 되는 ‘사림의 시대’가 본격화하면서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이 크게 발달하게 됨은 말할 것도 없다. 남설에 대한 우려가 사림들 사이에서조차 공공연하게 거론될 정도로 전국적인 보급과 수적 팽창을 본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는 중에 조선의 서원은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기능과 성격을 갖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향사(享祀) 위조로의 전환이며, 학습중심의 학교로부터 교화를 우선하는 사우(祠宇)로 성격이 변해간 것이었다.
종래에는 제향 위주의 서원에 대해 다소 비판적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경전을 통한 장수(藏修)는 지적 능력과 견문을 넓혀 주지만 군자로 나아가는 데는 실천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현의 말씀을 밝히고 실천에 옮긴 선유(先儒)의 존재는 사림에게 지향할 방향을 제시해 주고[定趨向], 후생에서 경각심을 일으켜 학문에 힘쓰게 하는 사표였다. 일찍이 우암 송시열이 남명 조식의 신도비명을 지으면서 그 첫머리에 “남명선생이 이미 돌아가시자 선비들은 더욱 구차해지고 습속은 갈수록 경박해지니 식견 있는 자 선생을 사모함이 더욱 간절하구나. 그러나 사람마다 아직껏 의리를 귀히 여기고 이록을 천하게 보며 벼슬에서 깨끗이 물러남을 가히 높이고 탐내어 무릅씀을 부끄러운 줄 알고 있으니 선생의 공이 실로 크다 하겠도다” 라고 한 말이 이를 증명해준다.
사림은 제향된 선유와 선현을 통해 그 도덕과 의리를 본받고 경전에서 학습한 바를 실천을 통해 현실에 구현할 결의를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정치적 이해나 가문 현양을 목적으로 특정인물이나 자기 조상을 제향의 반열에 올리는 행위는 서원을 망치는 작태였다. 그것은 조선 서원의 몰락과정을 통해 바로 징험되지만, 문제는 그런 풍조가 오늘날에도 여전하게, 아니 오히려 더욱 만연되고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이래가지고서야 곳곳에 서원이 다시 세워진다고 한들 속빈 강정과 다를 바 무엇이며 거기서 무슨 기대를 하고 어떤 현실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조선조 서원에 대한 검토는 이 정도 선에서 일단 그치고, 그러면 오늘날 사회에서 서원에 대해 거는 기대로 눈을 돌려보자.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격심한 변화와 변동을 겪고 있는 것 같다. IT 산업의 발전에 따른 정보화의 홍수 속에 사회구성원 간의, 또는 신 ․ 구세대 간의 간극(間隙)과 격차가 커지면서 조화와 타협 대신 갈등과 대립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소해야 할 정치권은 오히려 과거사 조사다 뭐다하며, 오래 전에 기억의 깊은 못에 가라앉은 낡은 좌우익의 이념을 다시 퍼 올려 분열과 반목을 조장하는데 급급할 뿐이다. 사회구성원 간의 이런 정신적, 사상적 갈등을 필연적으로 기존 가치관의 붕괴를 초래하고 여러 가지 병폐를 유발하게 마련이다. 날마다 신문을 장식하는 흉악범죄는 그것을 나타나내는 한 지표에 불과하다. 권력자의 입에서 거침없이 막말이 쏟아져 나오고 변명과 거짓이 일상사가 되었으며 양심이란 단어는 망각의 늪으로 돌아간 지 오래다. 언젠가 범죄조직으로 막가파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미 우리 사회가 전체로 이런 막가파의 사회단계로 진입했다고 한다면 너무 막말하는 셈이 될까. 아무튼 우리나라와 사회가 지금 정상적이 아니라는 데는 일반의 대다수가 동의하리라 본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수습은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처방과 대책이 나올 수 있겠으나 그것은 결국 인성(人性)의 회복으로 수렴되리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아직까지 반향은 크지 않지만 종교 족에서 이미 그 기치를 세우고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으며, 불안한 마음의 동요를 떨쳐내고 안심입명(安心立命)의 평정심을 되돌리기 위해 산사(山寺)를 찾아 하안거(夏安居) ․ 동안거에 참여하는 보통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런 판단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 인심의 추세가 이와 같다면 그런 인성 및 천인(天人) 윤리의 자각과 수련, 그리고 현실에서의 도덕구현을 위한 예의(禮義)를 근본으로 하는 유가(儒家) 쪽에서도 이러한 시대의 요청에 이제는 적극적으로 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개항 후 서양문명의 도도한 유입 속에서도 면우 곽종석은 언젠가는 서양에서 유학이 발흥하리라 기대했었다. 그만큼 유학에 대한 믿음이 깊었던 것이다. 아무리 서양화(westernization) 가 많이 진행되었다고 하여도 천수백 년에 걸쳐 내려온 우리 유학의 뿌리가 완전히 없어졌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작은 불씨를 살리고 힘을 쌓으면서 정신적 공황에 빠진 이 사회의 구원 요구에 적절히 답한다면 전통 유학의 현대적 중흥이 가시권에 들어오며, 면우가 바라던 서양에서의 유교발흥도 무망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경우 그 유학의 한 줄기인 서원 역시 그동안 문중의 그늘에 가린 채 침묵과 퇴영을 강요받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위에서 말한 유학의 현대적 활용을 위한 연구와 토론의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직면하는 과제를 놓고 세미나가 개최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유능한 강사가 유가적 해결책을 제시하면 이를 둘러싸고 진지한 토론과 논란이 벌어지고 그 과정에서 유학의 현대적 부활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뿐 아니라 서원은 바쁜 일상의 생활에서 벗어나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심신을 재충전할 수련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대다수 서원의 위치와 자연환경이 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조용하기 하려니와 산수가 함께 어우러진 풍광 좋은 곳이니만큼 산사의 동안거나 교회와 성당의 수양관, 피정처에 못지않은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는데다가, 겸하여 오랜 전통의 유가적 분위기에서 오는 절제와 조화의 정제성의 더욱 그 효용성을 높여 주리라 본다.
그렇게만 된다면 서원에 대해 마치 옛날의 사림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의 사회를 정화시키고 인간의 본성을 회복시킬 도덕운동의 역군을 길러내는 본거지로서의 역할, 즉 서원의 현대적 부활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7. 맺음말
우리나라의 서원은 16세기 중반에 처음 출현하였다. 그것은 16세기 이래 鄕村에서는 물론 中央政界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사림세력에 의해 그들 세력의 재생산을 위한 학교이며 향촌이나 중앙에서의 사회, 정치활동을 벌리는 근거지라는 기능을 가졌다. 이를 통해 그들은 많은 사림을 양성하여 정계에 공급하였고, 그 결과로서 16세기 후반 마침내 집권을 실현 이후 18세기 초까지 ‘사림의 시대’를 주도하였다. 서원은 바로 이 ‘사림의 시대’를 있게 한 母胎였고 그것을 유지시키는 핵심기구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서원 역시 18세기에 들어가 蕩平이라든가 경제변화에서 유래된 사회변동에 따른 사림세력의 쇠퇴, 몰락으로 그 역사적 사명을 끝낸 채 양반집안의 門中조직의 하나로 변모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사림의 公的 領에서 벗어나 門中의 手中으로 주도권이 넘어 갔다면, 아무래도 門中의 私的인 理解관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조선후기 서원에 붙여져 온 對民搾取의 소굴이란 흔한 표현은 이런 사정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병산서원 복례문
조선시대의 지방학교였던 서원은 이와 같은 조선시대 역사의 전개과정, 특히 사림이라는 사회세력의 消長과 밀접히 연관되면서 각 시대마다 그 내용과 역할, 기능 등을 변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그 末期的 현상만으로서 서원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인식은 차제에 불식되어야 할 것이며, 儒敎나 이른바 黨爭으로 알려진 朋黨 활동 그리고 총체적으로 이것들을 포괄하는 兩班의 존재와 더불어 그 역사적 기능과 位相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의의가 새롭게 조명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역사는 과거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다. 정초(正初)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연말인가하고 느낄 틈조차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속에서도 한 번쯤은 그 거울을 통해 옛날을 반추하고 오늘을 조명해 보는 것도 좋은 듯하다.
무너진 사회윤리를 다시 세우고 막가는 세상인심을 바로 돌려 잡으며 건전한 상식과 그야말로 정의와 예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사회적 공감대의 형성 및 이를 실천하려는 일대 도덕운동이 절실히 요청되는 오늘의 시점에서 이미 수백 년 전에 그런 역할을 수행해 왔던 사림의 본거지로의 서원에 대해 다시 한 번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 필자 혼자만의 허황환 소망이 아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