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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일명 普虛, 성은 洪氏, 본관은 洪州, 호는 太古, 시호는 圓證, 탑호는 寶月昇空이다. 옥천면 대원리에서 문하시중 판이부상서 洪廷의 아들로 출생하여 1313년 13세에 출가하여 양주군 회암사 廣智에게서 불경을 배우고 가지산 하총림에서 도를 닦았다.
1325년(충숙왕 12) 승과에 급제했으나 출사하지 않고 1333년 용문산 상원암과 성서의 감로사에서 고행하였다. 1337(충숙왕 6) 겨울 송도 전단원에 머무르면서 ‘無’ 자를 탐구하여 깨달은 바가 있다. 1341년(충혜왕 2) 삼각산 중흥사 동쪽에 절을 짓고 태고사라고 하였다.
1346년(충목왕 2) 중국에 가서 湖州 霞霧山 淸珙의 법을 계승하여, 臨濟宗의 시조가 되었다. 1348년 귀국, 가평군 설악면 설곡리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불도를 닦았다. 1352년(공민왕 1) 공민왕이 광명사에 원융부를 짓자 왕사가 되어 원융부에 머물다가 신돈의 횡포가 심해지자 소설사로 돌아갔다.
신돈이 죽은 뒤 국사가 되고, 우왕이 즉위하자 영원사에 있다가 1382년(우왕 8) 소설사로 돌아가 82세로 입적하였다. 화장 후에 舍利 100매를 얻어 양산사와 사나사와 청송사, 소설암 등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북한산에 ‘寶月昇空’의 탑비가 있다. 선교일체론을 주장, 선과 교를 다른 것으로 보던 당시의 불교관을 바로잡고, 일정설을 정리하여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또 왕도의 누적된 폐단과 정치부패, 불교계의 타락 등에 대하여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저서로는 『太古和尙語錄』 2권과 『太古遺音』 6책이 있다. 2001년 설악면 소설암에서 양촌 권근이 지은 「미원현 소설산암 원증국사사리탑비명」 비편이 발견되었다. (옥천면)
조선말기 성리학자. 자는 面述, 호는 華西, 시호는 文敬, 초명은 光老, 본관은 벽진, 李晦章의 아들이다. 1792년 양근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 출신이다. 3세에 千字文을 떼고 6세에 십팔사략을 배웠으며 12세에는 상서를 익혔다. 1808년(순조 8) 한성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에 불정이 있음을 보고 이를 단념, 오로지 학문에만 전심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화서는 14, 5세 때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마에 주력할 계획을 했었다. 16세에 화서는 부친 우록헌이 글을 배우던 임종주(1734-?)의 아들 영서 임노(1755-1828)를 만나보았다. 또 21세에는 지평에 가서 죽촌 이우신(1762-1822)을 만나보았다.
1813년(22세)에 학문을 스승에게서 이어받지 않고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화서는 번잡한 세상을 떠나 쌍계사와 고달사 등 절간이나 조용한 곳을 찾아 ‘위기’ 공부에 전념하였다. 공부함에 있어서 화서는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주자의 학문을 연구하였다. 화서는 『朱子大全』을 읽고서는 그 학문이 진실로 주자 이후의 正宗임을 깨닫고 주자 다음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화서는 항상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주자를 종주하지 않으면 공자의 문정에 들어갈 수 없고 송자를 헌장하지 않으면 주자의 계통에 접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화서는 매일 동틀 무렵에 일어나자마자 꿇어앉아 『詩經』의 억시와 주자의 「경재잠」을 외우고 난 후에,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 가묘에 참배하였다. 이 「경재잠」도 「백록동학규」와 마찬가지로 화서의 인격형성과 생활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나아가 그 학파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화서의 학문은 성과 경을 수양의 근본으로 하였고, 사소한 일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화서는 主敬하는 공부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천만가지 善도 이에 따라 생겨나고 천만가지 악도 이에 따라 소멸된다고 하였다.
1824년 33세에는 가평에 있는 조종암을 답사하고, 계획한 바 있었으나 실현하지 못했는데, 존화양이의 취지로 ‘見心亭’을 세우려고 하였던 것이다.
면암 최익현은 「華西李先生神道碑銘」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선생의 학문은 『소학』과 『주자가례』로 근본을 삼고, 『대학』 『논어』『맹자』『중용』으로 주를 삼았다. 그런 다음 경사에 미쳐 차근차근 순서가 있었으며, 주자를 공자 후의 일인자라고 여겨 경서의 주석을 위시하여 『朱子大全』『朱子語類』에 이르기까지 사랑하기를 부모와 같이 하였고 공경하기를 神明과 같이 하였다.
이어 『宋子大全』을 읽었는데, 정주의 전체와 춘추의 대용이 이 책에 있음을 보고는 시조리와 종조리가 참으로 주자 이후의 정종이라고 생각하여, 그 존숭하고 심복하기를 주자 다음으로 하였으니, 그 문로의 정대함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선생의 知行 공부가 敬 으로 일관하게 된 것이다. 비록 시대는 주자·송자와 다르지만 사실은 서로 부합하는 것이다.”
화서는 「閭塾講規」를 만들어 교육을 실시하였다. 화서의 여숙강규 중에서 강계 9조목은 화서의 교육철학이 담겨져 있는데, 그 첫째와 여덟 번째 조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무릇 같이 강학하는 사람들은 인원수만 채워 입으로 읽기만 일삼지 말고 반드시 내 몸에 돌이켜서 체험할 것을 생각하여 마음으로는 그 묘리를 깨닫고 몸으로는 그 실천에 힘쓸 것.
이 조목은 서론으로 요지는 강학자의 실천을 강조한 것이다. 배우고 실천하지 않으면 배움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화서는 知行竝進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조선말기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화서학파들의 현실참여는 이런 화서의 실천교육의 영향에서 가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⑧ 북쪽 오랑캐들(청국인)은 의관을 부숴 없애고 서쪽 귀신들은(서양인) 心術을 좀먹고 있으니, 마땅히 몸을 꼿꼿이 하고 다리를 세우며 마음을 밝히고 눈을 부릅떠 성현들의 가르침과 父祖의 유업을 추락시키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니, 이것이 선비된 사람의 철두철미한 법문인 것이다.
독립유공자. 정치가. 호는 夢陽, 본관은 함양, 呂鼎鉉의 첫째 아들로 양평군 양서면신원리에서 출생했다. 우무학당 등에서 한학을 공부한 후 1907년 고향집에 광동학교를 세우고 신교육에 헌신했다. 그리고 강릉에 초당의숙을 세워 민족의식을 초취하던 중 국권이 피탈되고 학교가 폐쇄되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선교사 클라크를 따라 서간도의 新興武官學校를 견학하며 국외에서의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학교를 중퇴,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남경 금릉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다가 상해로 가서 1918년 신한청년당을 발기하여 김규식을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는데, 일본정부는 이를 자치운동으로 회유하고자 그 해 11월 그를 도쿄[東京]로 초청하였으나 오히려 장덕수를 통역관으로 삼아 일본의 조야 인사들에게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1920년 영국식민지정책을 비난하다가 영국경찰에 체포되어 일본경찰을 경유하여 본국에 압송되어 3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33년 출옥,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는데 1936년 신문이 일제에 의하여 정간되자 사임한 후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안재홍 등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불인정으로 실패하였다. 12월 조선인민당을 창당, 1946년 29개의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으나 반대하여 탈퇴하였다.
또,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으나 극좌 · 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친 하던 중 1947년 서울 혜화동 사거리에서 7월 19일 극우파 韓智根(=한현우)이란 19세 소년으로부터 2발의 권총사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2005년 3·1절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追敍되었다. (양서면)
한국사에 있어서 19세기 후반기는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기로서, 일대 사회변동기였다. 동양적 질서 속에 안주해 있던 전통사회가 봉건적 양반지배체제의 해체와 제국주의적 외세의 침략이라는 역사적 상황에 처하면서, 민족적 모순의 극복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특히 양평지역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지리적여건으로 중앙의 소식을 가장 빨리 접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의병의 봉기는 양평지역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1894년(고종31) 여름 안승우가 그의 향리인 지평에서 모병활동을 전개한 것이 양평지역 을미의병의 효시다. 일제가 무력을 앞세워 경복궁에 불법 난입한 이른바 갑오변란에 대한 반발로 전개한 이 모병활동은 결국 중단되고 말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는 개항 이후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운동 중 최초로 기록될 만하였다. 그뒤 양평지역에서의 의병운동은 같은 해 9월, 경상도 안동에서 거병하여 올라온 서상철(徐相轍) 의병부대에 의한 경기도 이천 단월지역 전투와 광주 곤지암지역 전투로 이어져 한국 근대 의병운동사에서 항일의병의 기점을 마련하였다.
양평지역의 화서학파 유림들은 1895년 10월의 을미사변과 11월의 단발령 공포에 대한 반발로, 1896년 초에는 안승우와 이춘영이 지평에서 거병을 결의하여, 이필희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지평의진(紙平義陳)을 결성하였다. 양평지역의 지평의진은 1896년 1월 17일 충북 제천에 입성하여 28일에는 유인석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제천의진(提川義陳)을 결성, 4월까지 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계기로 의병이 다시 일어난 1907년 초까지 계속되었다.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에 나타나는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경기지역의 항일의병사상은 그 전파 속도와 심도가 가장 깊고 빨랐다. 1907년 8월 1일부터 12월 말까지의 화공작전에 의해 불탄 가호수는 타 지역에 비하여 경기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양평의 경우 용문산 일대 사찰과 양평읍 시가지가 불타버려 용문사(龍門寺)의 귀중한 문화재가 소실되었고 옥천면에서 옮긴 옛 양근군 소재지 관아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게 되었다. 일본군의 진압 방법이 강경하고 악랄한 만큼 피해가 컸다. 특히 1907년 군대해산 직후 항쟁의 양상은 연합전선으로 발전하여 좀더 조직적으로 항쟁을 시도해 나갔다. 한편 마전ㆍ지평ㆍ가평ㆍ포천ㆍ광주ㆍ이천ㆍ여주 등지의 주민들은 의병들의 활동에 매우 우호적이고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의병활동 당시 우리 나라에 와서 의병들의 활약상을 그린 영국인 맥켄지(F.A.Mckenzie)가 양근지방에서 만난 의병장에게 보초를 왜 세우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졌을때 그 의병장이 멕켄지에세 "보초를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한국인들이 다 우리의 보초 입니다."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1907년부터 1908년에 걸쳐 양평에서도 의병에 참여한 사람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1907년 군대해산기에 권중식은 양근에서 기의하여 수년 동안 항전하였고, 용문면 출신 김상기는 단양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1907년 이강년과 함께 거의하여 충북 일대와 강원도ㆍ경상북도 삼도에 걸쳐 의병활동을 하였다. 1907년 7월에는 한갑이 지평에서 거의하여 홍천,인제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같은 해 7월 20일 경에 유덕상ㆍ김성선ㆍ전성환ㆍ윤성칠ㆍ호근영등은 의병장 조인환의 부하로 서종면 문호리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8월 4일에는 양평출신 조인환이 정미7조약과 군대해산 등 내정간섭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제를 몰아내고자 의병을 모집하여 양평을 습격하고 관아, 세무서, 우편소, 일본인 가옥 등을 파괴ㆍ방화하였다. 이무렵 양평의 권득수는 양주ㆍ양평ㆍ이천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가산을 정리하고 병마를 구입하여 용문산을 근거지로 항전하였다. 권득수 부대는 서종면 문호리에서 강을 건너다 일본 헌병대와 접전하여 헌병 2명을 사살하고 중과부적으로 후퇴하여 다시 용문사너에 주둔하였으나, 권득수는 밀고자에 의하여 9월 1일 피살되었다. 이외에도 양평의 민기회, 지평 마천에사는 이연년, 옥천면의 김춘수, 지평 출신 정영운, 지평 양곡의 이성서와 이창준 부자(父子)등이 의병활동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