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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취려(金就礪)는 언양(彦陽) 사람으로 아버지 김부(金富)는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다. 김취려는 음서로 정위(正尉)에 보임되었고 동궁위(東宮衛)로 선발되어 충원되었으며, 여러 번 벼슬을 옮겨 장군(將軍)이 되어서는 동북계(東北界)를 지켜 대장군(大將軍)으로 발탁되었다. 강종(康宗) 때 변방을 순무(巡撫)하자 변민(邊民)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였다.
고종(高宗) 3년(1216) 거란(契丹)의 후예[遺種]인 금산왕자(金山王子)와 금시왕자(金始王子)가 하삭(河朔)의 민을 위협하여 자칭 대요수국왕(大遼收國王)이라 하고 천성(天成)이라 건원(建元)하였다. 몽고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정벌하자 두 왕자는 휩쓸 듯이 동쪽으로 밀려와 금(金)의 군사 30,000명과 개주관(開州館)에서 싸웠다. 금의 군사가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여 대부영(大夫營)을 지키자 두 왕자는 그곳으로 진격하면서 사람을 보내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군량을 보내어 우리를 돕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너희 땅을 침탈할 것이다. 우리가 후일 황기(黃旗)를 세우면 너희들은 와서 황제의 조칙을 들어야 할 것이다. 만약 오지 않는다면 장차 너희에게 공격을 가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날이 되니 과연 황기를 세웠지만 병마사는 가지 않았다. 다음날 장수 아아걸노(鵝兒乞奴)로 하여금 병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영삭(寧朔) 등의 진(鎭)을 공격하고 성 밖의 재물과 곡식 및 가축 등의 재산을 노략질하여 갔다. 또 다음날에는 의주(義州)·정주(靜州)·삭주(朔州)·창주(昌州)·운주(雲州)·연주(燕州) 등과 선덕(宣德)·정융(定戎)·영삭 등 여러 진에 난입하였다. 모두 처자를 데리고 와 산야에 두루 흩어져 살면서 곡식과 소와 말을 빼앗아 식량으로 하였다. 한 달 남짓 지나 먹을 것이 떨어지니 옮겨 운중도(雲中道)로 들어갔다. 이에 상장군(上將軍) 노원순(盧元純)을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백수정(白守貞)을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김온주(金蘊珠)를 부사(副使)로, 상장군 오응부(吳應夫)를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로, 최종준(崔宗峻)을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시랑(侍郞) 유세겸(庾世謙)을 부사로, 김취려(金就礪)를 후군병마사(後軍兵馬使)로, 최정화(崔正華)를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진숙(陳淑)을 부사(副使)로 삼고는 13령(領)의 군사와 신기군(神騎軍)을 속하게 하였다.
3군(三軍)이 행군을 아뢰고는 조양진(朝陽鎭)에 이르자 조양 사람들이 적이 이미 가까이 있다고 알려왔다. 3군은 각각 별초(別抄) 100인과 신기군 40인을 보내 아이천(阿爾川) 변에 이르러 적과 싸웠다. 관군이 약간 밀리자 신기군 낭장(郞將) 정순우(丁純祐)가 적진으로 돌진하여 둑기(纛旗)를 잡은 자를 참하니 적들은 달아나며 무너졌다. 〈이에〉 승기를 타고 80여 급을 참하였으며, 20여 인을 사로잡았다. 아울러 양수척(楊水尺) 1인을 잡았으며, 소와 말 수백 필과 절부(節符)·관인(官印) 및 병장기를 획득한 것이 매우 많으니, 이에 정순우를 제배하여 장군(將軍)으로 삼았다. 3군이 다시 적과 연주(連州)의 동동(東洞)에서 싸워 100여 급을 베었다. 적 300여 인이 와서 귀주(龜州) 직동촌(直洞村)에 주둔하자 군후원(軍候員) 오응유(吳應儒)가 보병 3,500인을 거느리고 밤중에 은밀히[銜枚] 공격하였다. 산원(散員) 함홍재(咸洪宰)·견국보(甄國寶)·이직(李稷), 교위(校尉) 임종비(任宗庇) 등이 250여 급을 참하였고, 3,000여 인을 포로로 잡았으며 소와 말·병장기·은패(銀牌)·동인(銅印) 등을 얻은 것이 또한 많았다. 3군은 다시 귀주 삼기역(三岐驛)에서 이틀을 싸우면서 210여 급을 참하고 39인을 사로잡았다. 장군 이양승(李陽升)도 또한 장흥역(長興驛)에서 적을 치니 적이 창주(昌州)에서 연주(延州)의 개평(開平)과 원림(原林) 두 역(驛)으로 옮겨 주둔하였는데, 종일토록 행렬이 이어졌다. 관군은 신기군을 보내 추격하려다가 신리(新里)에서 적을 만나 싸워 190급을 참하였다. 관군은 진군하다가 연주에 머물며 광유(光裕)·연수(延壽)·주저(周氐)·광세(光世)·군제(君悌)·조웅(趙雄) 등 여섯 장수에게 사자암(獅子岩)을 지키게 하고, 영린(永麟)·적부(迪夫)·문비(文備) 등 세 장수에게 양주(楊州)를 지키게 하였다
다음날 9명의 장수가 조종수(朝宗戍)에서 싸워 참획(斬獲)한 것이 760여 인이었고, 말·노새·소 및 패인(牌印)과 병장기를 획득한 것이 헤아릴 수 없었다. 적들은 다시 군사를 나누지 않은 채 개평역(開平驛)에 모여 진을 쳤으므로 제군(諸軍)이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우군(右軍)은 서쪽 산기슭을 의지하였는데 중군(中軍)은 들에서 적의 공격을 받아 조금 후퇴하여 독산(獨山)에 주둔하였다. 김취려는 칼을 뽑아 말을 채찍질하며 장군(將軍) 기존정(奇存靖)과 함께 곧바로 적의 포위를 돌파하면서 나갔다 들어갔다 분격(奮擊)하니 적병이 무너졌다. 추격하여 개평역을 지나는데, 적이 역의 북쪽에 매복하다가 갑자기 중군을 공격하여, 김취려가 돌아서서 그들을 치니 적이 또다시 무너졌다.
노원순(盧元純)이 밤에 김취려(金就礪)에게 말하기를,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은데다 우군 또한 이르지 않았소. 처음에 사흘 군량을 준비했는데, 지금 이미 소진하였으니 연주성(延州城)으로 퇴각하여 주둔하다가 나중을 기다리는 것만 못하오.”라고 하였다. 김취려가 말하기를, “아군이 누차 이겨서 투지가 점차 예리하니, 청컨대 그 승기를 타서 한 번 싸워보고 난 후 의논하시지요.”라고 하였다. 적은 묵장(墨匠)의 들판에 포진하고 있었는데, 군세가 아주 성하였다. 노원순이 급히 김취려를 부르고 또 검은 깃발을 휘둘러 신호를 하니 사졸들이 시퍼런 칼날을 무릅쓰고 다투어 나아갔는데 일당백(一當百) 아닌 자가 없었다. 김취려가 문비와 함께 적진을 가로 질러 가는데 〈그가〉 향하는 곳의 적이 모두 쓰러졌으며, 세 번 맞붙어 세 번 이겼으나, 김취려의 맏아들은 전사하였다. 적은 향산(香山)으로 패주해 들어가 보현사(普賢寺)를 불태웠다. 관군은 그들을 추격하여 총 2,400여 인을 참획하였고, 남강(南江)에 빠져 죽은 자도 또한 1,000명을 헤아렸다. 나머지 무리들은 밤중에 창주(昌州)로 도망갔다.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로 길과 그 양 옆이 막혔고 목 놓아 우는 소리가 10,000마리 소가 우는 듯하였다. 어떤 한 사람이 병장기를 버리고, 관인을 자칭하며 곧바로 앞으로 나와 청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귀국의 변방을 소란스럽게 하였으니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만 부녀자와 아이들이야 무엇을 알겠습니까? 청하건대 모두 죽이거나 하지 않고 또 우리를 박대(薄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즉각 하루라도 빨리 스스로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김취려가 사람을 시켜 일러 말하기를, “너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술을 주었더니 재빠르게 마시고 갔다. 잠시 후 아아걸노(鵝兒乞奴)가 공문을 보내어 진술하며 청한 내용이 〈그 관리가〉 말한 바와 같았다. 3군(三軍)이 각각 2,000인씩을 보내어 그 뒤를 밟으니 적이 버린 물자와 군량과 병장기가 길에 낭자한 것을 보았다. 소와 말은 혹 허리가 잘렸고 혹은 그 뒤를 찔렀는데 대개 그것들을 획득하여 다시 쓸 수 없도록 한 것이었다. 파견했던 아군 6,000인은 청새진(淸塞鎭)에서 싸워 당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적을 사로잡거나 죽였다. 평로진도령(平虜鎭都領) 녹진(祿進)도 70여 명을 격살하니 적은 마침내 청새진을 넘어 달아났다.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향산 전투에서 적장 지노(只奴)가 화살에 맞아 죽고 금산(金山)이 그 무리를 총령(總領)한다.”라고 하고, 혹은 이르기를 “사로잡힌 한 부인이 이르기를 ‘나는 아아(鵝兒)의 처인데 나의 남편이 약산사(藥山寺)에 들어가서는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았고, 지노가 그 군사를 총령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관군은 연주(延州)에 머물다가, 적병이 뒤를 이어 대거 국경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듣고는, 오직 내상군(內廂軍)만 남겨 자위(自衛)토록 하고 나머지는 모두 출발하였다. 후군(後軍)은 홀로 양주(楊州)에서 적을 만나 사로잡거나 죽인 자가 수십에서 백 명이었으며 양군(兩軍)이 먼저 박주(博州)로 돌아왔다. 김취려가 보급품 수송을 호위하면서 천천히 행군하다 사현포(沙峴浦)에 이르렀을 때 적이 갑자기 나와 노리며 공격하였다. 김취려가 양군에 급히 고하였으나 양군은 편의만을 지키며 나오지 않았고, 김취려는 힘써 싸워 그들을 물리치면서 결국 보급품을 호송하여 도착할 수 있었다. 노원순이 서문(西門) 밖으로 나와 맞이하고 축하하면서 말하기를, “갑자기 강적을 만나 능히 그 예봉을 꺾고 3군의 보급품을 지고 있는 군사들을 털끝만치도 다치지 않게 한 것은 공의 힘이오.”라고 하고는 말 위에서 술을 들어 축수(祝壽)하였다. 양군의 장사(將士)와 여러 성의 부로(父老)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이번에 강적과 각축을 벌이면서 그 땅에서 싸웠다니 가히 어려운 일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개평(開平)·묵장(墨匠)·향산(香山)·원림(原林)의 싸움에서 후군(後軍)이 매번 선봉이 되어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쳐 우리 노약자들로 하여금 목숨을 보전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돌이켜 보아도 보답할 바가 없어 다만 축수(祝壽)만 할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적들이 다시 모여 많아지자 연일 창주(昌州) 성문 밖에서 군세를 과시하였다. 적 150인이 창주를 침범하자 관군이 그들을 쳐 달아나게 하였다. 관군은 박주에 주둔하면서 밤중에 병졸을 보내 흥교역(興郊驛)에 있는 적을 습격하여 40여 인을 포로로 잡았다. 이튿날 밤에는 홍법사(洪法寺)에서 싸워 이겼고, 다시 그 다음날에는 장군 김공석(金公奭)이 적 100여 인과 주(州)의 성문 밖에서 싸워 50여 인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김공석은 손수 은패(銀牌)를 띠고 있던 자를 베었다. 관군이 성으로 들어가 병졸에게 휴식을 취하게 하였는데, 적은 밤에 청천강(淸川江)을 건너 서경(西京)으로 향하였다. 관군은 적과 위주성(渭州城) 밖에서 싸웠으나 연속하여 패하였는데, 장군 이양승(李陽升) 등 1,000여 인이 죽었다. 경도(京都)에서 이를 듣고 곡소리가 성에 가득하였다. 적이 서경성 밖까지 이르러 안정역(安定驛)·임원역(林原驛) 및 참화사(旵華寺)·묘덕사(妙德寺)·화원사(花原寺) 등을 도륙하였는데 관군은 막아낼 수가 없었다. 적은 얼음을 밟고 대동강을 건너 마침내 서해도(西海道)에 들어와 황주(黃州)를 도륙하였다.
이듬해 김취려(金就礪)를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에 제배하고는 다시 승선(承宣) 김중구(金仲龜)를 보내 남도(南道)의 군사를 이끌고 합세하게 하였다. 김중구는 적과 도공역(陶公驛)에서 싸웠으나 연이어 패하였다. 처음에 중군(中軍)에서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청하였는데, 좌승선(左承宣) 차척(車倜)을 전군병마사(前軍兵馬使)로, 대장군(大將軍) 이부(李傅)를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예부시랑(禮部侍郞) 김군수(金君綏)를 부사(副使)로 삼고, 상장군(上將軍) 송신경(宋臣卿)을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로, 장군(將軍) 최유공(崔愈恭)을 지병마사(知兵馬事)로, 형부시랑(刑部侍郞) 이실춘(李實椿)을 부사로 삼아 앞서의 3군(三軍)을 합하여 5군(五軍)으로 하였다. 이에 이르러 5군이 안주(安州) 태조탄(太祖灘)으로 가서 함께 싸웠으나 대패하고 급히 돌아왔다. 적은 승세를 타고 급히 돌격하였다. 김취려는 문비(文備)·인겸(仁謙)과 함께 거꾸로 그들을 공격했으나 인겸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고, 김취려는 칼을 휘두르며 혼자 싸우다가 창과 화살에 맞았으며, 종기가 나자 돌아왔다. 적이 관군을 추격하여 선의문(宣義門)까지 왔다가 물러나면서, 우봉(牛峯)을 노략질하고 임강(臨江)·장단(長湍)에까지 다다랐다. 이에 다시 5군을 점열하고 오응부(吳應夫)를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대장군 이무공(李茂功)을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소부감(少府監) 권준(權濬)을 부사로 삼고, 상장군 최원세(崔元世)를 전군병마사(前軍兵馬使)로, 곽공의(郭公儀)를 지병마사(知兵馬事)로, 호부시랑(戶部侍郞) 김혁여(金奕輿)를 부사로 삼았으며, 차장군(借將軍) 공천원(貢天源)을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로, 사재경(司宰卿) 최의(崔儀)를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장작감(將作監) 이적(李勣)을 부사로 삼고, 차상장군(借上將軍) 오인영(吳仁永)을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로, 차위위경(借衛尉卿) 송안국(宋安國)을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시랑(侍郞) 진세의(秦世儀)를 부사로 삼았으며, 상장군 유돈식(柳敦植)을 후군병마사(後軍兵馬使)로, 최종준(崔宗峻)을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진숙(陳淑)을 부사로 삼아 적을 방어하게 하였다.
5군이 출발하지 않았는데 유돈식만이 먼저 교하(交河)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오응부가 사람을 시켜 이를 저지하며 말하기를, “적이 적성장(積城場)에 있으니 회군하여야 한다.”라고 하였으나 유돈식은 듣지 않고 4군이 합하여 적을 공격할 것을 청하니 4군이 그를 따랐다. 행군하여 적성(積城)에 이르렀으나 적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적은 동주(東州)를 함락시켰다. 최충헌(崔忠獻)이 아뢰어 말하기를, “거란군이 동주를 지나 그 세력이 남하하려 하는데 5군은 체류하면서 싸우지 않고 그 무리들은 군량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청하건대 오응부를 파면하고 그 아들과 사위의 관직을 빼앗을 것이며 전군병마사 최원세로 그를 대신하게 하고 김취려를 전군병마사로 삼으소서.”라고 하니, 왕이 따랐다. 적이 교하로 향하다가 징파도(澄波渡)를 지나게 되었는데, 관군이 저촌(楮村)에서 더불어 싸워 패주시키고는 관군은 승첩을 아뢰며 이르기를, “적이 풍양현(豊壤縣)의 효성(曉星) 고개에 이르렀기에 관군이 싸우려 횡탄(橫灘)을 건너는데 적병이 후미를 공격해 왔습니다. 좌군(左軍)이 먼저 싸우다가 패주하자 중군(中軍)과 후군(後軍)은 산 바깥쪽으로부터 적의 배후로 나와 쳐 물리쳤고 추격하여 노원역(盧元驛) 선의장(宣義場)에 이르렀습니다. 참획한 적이 매우 많았으며, 우마와 양식을 모두 버리고 달아났습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대정(隊正) 안팽조(安彭祖)는 화살에 맞은 채 돌아오며 말하기를, “적병으로 죽은 자는 2인뿐이고 나머지 죽은 자들은 모두 아군이었다.”라고 하였다.
전군(前軍)과 우군(右軍)은 지평현(砥平縣)에서 싸워 패퇴시키고 말 1,000여 필을 노획하였다. 적이 안양도호부(安陽都護府)를 함락시키고 안찰사(按察使) 노주한(魯周翰)을 잡아 죽였으며 관속들 또한 많이 죽었다. 적이 원주(原州)에 들어갔으나 원주 사람들은 오랫동안 적과 대항하여 버티며 9번이나 싸웠다. 양식이 떨어지고 힘이 다 하였으나 외부의 도움이 없어 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전군과 우군이 연이어 패하자 대장군 임보(任輔)를 동남도가발병마사(東南道加發兵馬使)로 삼고 성 안의 공(公)·사(私) 노예를 뽑아 군대를 충당하고는 그들을 보냈다. 전군과 우군이 양근(楊根)·지평(砥平)에서 적을 만나 여러 번 싸워 금패(金牌)·은패(銀牌)·산자(傘子)를 빼앗았다. 최충헌이 이를 포상하여 곽공의(郭公儀)를 위위경(衛尉卿)으로 삼고,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 오효정(吳孝貞)을 상장군으로 삼았다. 곽공의는 일찍이 뇌물죄로 파면되었었는데, 이때 공으로 복직되었다.
관군이 적을 추격하여 황려현(黃驪縣) 법천사(法泉寺)까지 이르렀다가 독점(禿岾)으로 옮겨갔다. 최원세(崔元世)가 말하기를, “내일의 행로에는 두 갈래가 있는데, 우리는 어디 쪽으로 가는 것이 좋겠는가?”라고 하자, 김취려(金就礪)가 말하기를, “군사를 나누어 서로 협력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소?”라고 하니, 최원세가 이를 따랐다. 다음날 맥곡(麥谷)에서 합세하여 함께 싸워 참획한 것이 300여 급이었으며, 제주(提州)의 하천까지 압박하였더니 시체가 하천을 채워 떠내려갔다. 그 후 사흘 동안 추격하여 박달(朴達) 고개에 이르자 임보(任輔) 또한 장병과 와서 합세하였다. 최원세가 김취려에게 일러 말하기를, “고개 위는 대군이 머물 곳이 아니니 산 아래로 퇴각하여 주둔하려 하오.”라고 하자 김취려는 말하기를, “용병술은 비록 인화(人和)를 중시하지만 지리(地利) 또한 가벼이 할 수 없소. 적이 만약 먼저 이 고개를 점거하고, 우리가 그 아래에 있게 되면, 원숭이처럼 재주를 부려도 또한 통과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에게는 어떠하겠소?”라고 하니, 관군은 결국 고개로 올라가 숙영하였다. 동틀 무렵 적은 과연 고개 남쪽으로 진군하고 먼저 수만 명을 둘로 나누어 좌우의 봉우리로 가게 하여 요해지를 차지하려 하였다. 김취려는 장군(將軍) 신덕위(申德威)와 이극인(李克仁)에게 왼쪽을 맡게 하고, 최준문(崔俊文)과 주공예(周公裔)에게는 오른쪽을 맡게 하였으며, 김취려는 중군(中軍)을 따라 북을 치니 병사들이 모두 죽을힘을 다하여 싸웠다. 관군이 이를 보고는 또한 크게 소리치고 싸우며 전진하니 적은 크게 무너져 남녀 노약자와 병장기, 군수품을 여기저기 남겨 놓았다. 적은 이로 말미암아 과연 남하하지 못하였고 모두 동쪽으로 도망하였다. 추격하여 명주(溟州) 대관산(大關山) 고개에 이르렀으나 장졸들이 무서워하였으므로 물러나 열흘 간 주둔하였다가 진군하니 적은 이미 고개를 넘은 뒤였다.
중군·좌군(左軍)·전군(前軍)이 다시 적을 추격하여 명주 모로원(毛老院)에 이르러 그들을 패주케 하고 옥대(玉帶)·금패(金牌)·은패(銀牌)·병장기를 빼앗았다. 적이 명주를 포위하자 4군(四軍)이 그들을 추격하였는데 후군(後軍)이 미처 따르지 못하여 강주(剛州)에 주둔하였다. 우군(右軍)이 적과 등주(登州)에서 싸웠으나 연이어 패하고 진주(陣主) 오수정(吳守貞)이 죽었다. 적이 함주(咸州)로 급히 옮겨 결국 여진의 땅으로 들어가자 관군은 위축되어 물러나고는 아무도 추격하여 가려는 자가 없었다. 김취려는 중군의 첩문을 받고 군사를 정주(定州)로 이동시켜 적을 살펴보면서 보고하여 말하기를, “적이 함주에 있으면서 우리와 경계를 같이하고 있는데, 닭과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입니다.”라고 하였다. 김취려는 나무 울타리를 쌓고 세 겹으로 해자를 두른 후 이극인·노순우(盧純祐)·신덕위(申德威)·박유(朴㽔) 등 4명의 장수에게 머무르며 지키도록 하고 이동하여 흥원진(興元鎭)에 거점을 잡았다. 적이 여진의 군사를 얻고는 군세를 회복하여 진군하자 김취려는 회군하다 예주(豫州) 생천(栍川)에서 적을 만나 교전하고는 물러났다.
〈김취려가〉 갑자기 병에 걸리자 좌우 장수들이 돌아갈 것을 청하였으나 답하여 말하기를, “차라리 변방의 귀신이 될지언정 어찌 집에서 편안함을 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병이 심해지자 칙서를 내려 귀경하여 병을 치료하라 하니 가마를 타고 개경에 돌아와 여러 달 지나자 나았다. 김취려가 잔류시켰던 부대가 위주(渭州)에서 싸워 연이어 패하자 적은 다시 모여 고주(高州)와 화주(和州)를 노략질하였고, 영인진(寧仁鎭)과 장평진(長平鎭)을 무너뜨리고는 또 예주(豫州)까지 함락시켰다. 이에 5군(五軍) 및 가발병(加發兵)을 혁파하고 3군을 설치하여 문한경(文漢卿)을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이실춘(李實椿)을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이득교(李得喬)를 부사(副使)로 삼고, 공천원(貢天源)을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로, 송안국(宋安國)을 지병마사로, 김혁여(金奕輿)를 부사로 삼았으며, 이무공(李茂功)은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로, 권준(權濬)은 지병마사로, 김연량(金沿亮)은 부사로 임명하였다. 이듬해 적이 다시 크게 이르자 수사공(守司空) 조충(趙沖)을 서북면원수(西北面元帥)로, 김취려를 병마사(兵馬使)로 삼고, 차장군(借將軍) 정통보(鄭通寶)를 전군으로, 오수기(吳壽祺)를 좌군으로, 신선주(申宣冑)를 우군으로, 이림(李霖)을 후군으로, 이적유(李迪儒)를 지병마사로 삼았으며 왕이 친히 부월(鈇鉞)을 내리고는 나아가게 하였다
조충(趙沖)과 김취려(金就礪) 등이 여러 번 적과 싸워 이기니 적은 세력이 궁해져 강동성(江東城)으로 입보(入保)하였다. 합진(哈眞, 카치운) 및 찰랄(札剌, 차라)와 완안자연(完顔子淵)은 거란을 추격하여 토벌하다 곧바로 강동성으로 향하면서 사람을 보내와 군량을 청하였다. 장수들이 모두 가는 것을 꺼리니 김취려가 말하기를, “나라의 이해(利害)가 바로 오늘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그 뜻을 거스르면 나중에 후회한들 어찌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조충이 말하기를, “그것이 바로 나의 뜻이오. 그러나 이는 큰일이므로 적임자가 아니면 보낼 수 없소.”라고 하였다. 김취려가 말하기를, “일을 맡음에 어려움을 사양 않는 것이 신자(臣子)의 본분입니다. 내 비록 재주는 없으나 청하건대 공을 위해 한번 가고자 합니다.”라고 하자 조충은 말하기를, “군중의 일로 공에게 의지한 것이 무거운데 공이 가는 것이 가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듬해 김취려는 이내 지병마사(知兵馬事) 한광연(韓光衍)과 함께 10명의 장군과 군사 및 신기군(神騎軍)·대각군(大角軍)·내상군(內廂軍)의 정병을 거느리고 갔다. 합진이 통사(通事) 조중상(趙仲祥)을 시켜 김취려에게 전하여 말하기를, “과연 우리와 결호(結好)하려면 마땅히 먼저 몽고 황제에게 요례(遙禮)하고 다음으로는 만노(萬奴) 황제에게 예를 행하여야 하오.”라고 하니 김취려가 말하기를,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데 천하에 어찌 두 황제가 있겠소?”라고 하며 단지 몽고 황제에게만 배례(拜禮)하였다. 김취려는 신장이 6척 5촌으로 컸으며 수염은 배 아래까지 내려와 매번 복장을 갖출 때는 반드시 두 명의 여종에게 수염을 나누어 들게 한 뒤 띠를 묶었다. 합진은 그 우람하고 뛰어난 모습을 보고 또 그 말씨를 듣고는 크게 기이하게 여기고는 인도하여 나란히 앉아 나이가 몇인가를 물었다. 김취려가 말하기를, “근 예순이오.”라고 하자 합진은 “나는 아직 쉰이 못 되었지만 이미 한 집안이 되었으니 그대는 형이 되어 나를 동생으로 삼겠습니까?”라고 하며 김취려로 하여금 동향하여 앉게 하였다. 다음날 다시 그 군영에 이르니 합진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여섯 나라를 정벌하면서 귀인을 많이 보았지만, 형의 용모를 보니 어쩌면 그리도 기이하오? 내가 형을 중히 여긴 까닭에 휘하의 군사를 보길 또한 한 집안처럼 하게 되었소.”라고 하였고, 헤어질 무렵에는 손을 잡고 문을 나서면서 부축하여 말에 오르게 하였다. 며칠 뒤 조충이 다시 오자 합진이 묻기를, “원수(元帥)의 나이는 형과 비교하여 누가 많소?”라고 하자 김취려는 말하기를, “나보다 나이가 많소.”라고 하니 이내 조충을 인도하여 상좌에 앉도록 하고 말하기를, “내가 한마디 하고자 하는데 예의에 맞지 않을까 걱정이오. 그러나 친한 정이 있으니 스스로 바깥에 있는 것은 마땅치 않으므로 내가 두 형의 사이에 앉으면 어떠하오?”라고 하니, 김취려가 말하기를, “그건 우리도 바라던 바이나 다만 아직 감히 먼저 말하지 못하였을 따름이오.”라고 하면서 좌정한 후 술자리를 베풀고는 즐거워하였다.
몽고 풍속에서는 잘 드는 칼로 고기를 썰어 손님과 주인이 서로 먹여주는 것을 즐겼는데 〈고기가〉 오갈 때 한 눈을 팔아서는 안 되었다. 우리 군사 가운데 평소 용감하다고 하였던 자도 어려운 기색이 있었는데 조충과 김취려는 앉았다 일어나며 기분을 맞추는 것이 매우 익숙하니 합진 등이 매우 즐거워하였다. 합진은 술을 잘 마셨는데 조충과 더불어 우열을 가려 이기지 못한 자가 벌을 받기를 약속하였다. 조충은 잔에 술을 가득 채워 곧바로 다 들이켰는데 비록 많이 마셨어도 취한 기색이 없었다. 술자리가 끝날 때, 잔을 들고서 마시지 않으며 말하기를, “마실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만약 이겨서 약속처럼 하면 공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하오. 차라리 내가 벌을 받을지언정 주인이 손님을 벌주는 것이 옳겠소?”라고 하였다. 합진은 그 말을 중히 여기고는 크게 기뻐하면서 다음날 아침에 강동성 아래에서 만나 〈함께〉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다.
성으로부터 300보(步) 되는 곳에 멈추어, 합진은 성의 남문에서 동남문에 이르기까지 못을 파게 하였는데 너비와 깊이가 각 10척이었다. 서문 이북은 완안자연에게 맡기고 동문 이북은 김취려에게 맡겨 모두 해자를 파서 도망치는 것을 막았다. 적의 세력이 막히자 40여 인이 성을 넘어 몽고군 앞에서 항복하였고 적의 괴수 감사왕자(𠿑捨王子)는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관리·군졸·부녀자 50,000여 인은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니 합진은 조충 등과 함께 가서 투항하는 광경을 보았다. 왕자의 처자식 및 가짜 승상(丞相)과 평장(平章) 이하 100여 인은 모두 말 앞에서 참(斬)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죽음을 면하게 한 후 여러 군사들로 하여금 지키도록 하였다. 합진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10,000리나 되는 곳에서 와 귀국과 더불어 힘을 합쳐 적을 깼으니 천만다행한 일이오. 예로는 응당 가서 국왕에게 절해야 하나 우리 군사가 자못 많아 먼 길을 가기가 어렵소. 다만 사자를 보내어 감사를 올릴 뿐이외다.”라고 하였다. 합진 및 찰랄은 조충과 김취려에게 동맹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양국이 길이 형제가 되어 만세 자손에 이르기까지 오늘을 잊지 않도록 하였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조충은 호사연(犒師宴)을 베풀었고 합진은 부녀자와 사내 아이 700구 및 우리 민으로 적의 포로가 된 200구를 우리에게 돌려주었다. 나이 15세 전후인 여자로 조충과 김취려에게 각 9인씩과 준마 각 9필씩을 주고 그 나머지는 모두 자신을 따르도록 하였다. 조충은 거란 포로들을 각 주현에 나누어 보내 비어 있는 땅을 택하여 거처토록 하고는 토지를 헤아려 지급하여 농사짓는 민이 되게 하였는데 속칭 거란장(契丹場)이라 하였다.
이 해에 의주적(義州賊) 한순(韓恂)과 다지(多智)가 수장(守將)을 죽이고 여러 성과 연락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추밀부사(樞密副使) 이극서(李克偦)로 중군(中軍)을, 이적유(李迪儒)로 후군(後軍)을, 김취려(金就礪)로 우군(右軍)을 지휘하게 하여 그들을 토벌하였다. 이듬해 추밀부사(樞密副使)에 제배되어 이극서를 대신해 중군을 지휘하였다. 한순과 다지 등이 금나라 원수(元帥) 우가하(亏哥下)에게 투항하자, 우가하는 2인을 유인하여 목을 베고 개경으로 머리를 보냈다. 3군(三軍)에서 여러 성이 역적을 따른 죄를 다스리자고 청하자 김취려가 말하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그 괴수를 죽일 뿐, 위협으로 따른 자는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대군(大軍)이 임하는 곳은 마치 불길이 들판을 태우는 것 같아 죄 없이 화를 입는 이들이 많다. 하물며 거란으로 인하여 관동(關東)이 폐허가 되었는데, 지금 또 군사를 풀어 스스로 울타리를 거두는 것이 옳은 것이겠는가? 나머지는 모두 죄를 묻지 말라.”라고 하였다. 김취려는 곽원고(郭元固)·김보정(金甫貞)·종주질(宗周秩)·종주뢰(宗周賚) 등을 보내 의주로 가게 하여 유민들을 안집(安集)하게 하였다. 종주뢰는 탐욕이 많아 많이 뇌물을 받았고 뇌물이 없는 자에게는 반란 사실을 빌미로 주살하였다. 주(州)의 사람들이 그를 원망하다가 적의 무리 윤창(尹昌) 등을 유인하여 성을 넘어 들어오게 해 종주뢰 등을 죽였다. 곽원고와 김보정이 급히 도망쳐 보고하자 김취려는 판관(判官) 최홍(崔弘)과 녹사(錄事) 박문정(朴文挺)을 보내어 화를 복으로 삼도록 설득하게 하였다. 잇따라 대장군(大將軍) 조염경(趙廉卿)과 장군(將軍) 박문분(朴文賁)을 보내 군사 5,000명으로 토벌하게 하니 윤창 등은 도망하고 적당은 와해되었다.
당시 거란의 남은 무리들이 영원산(寧遠山) 중에 숨어 살면서 때때로 나와 도둑질하여 민의 우환이 되었다. 김취려가 이경순(李景純)과 이문언(李文彦)을 보내 쳐부수도록 하니 북쪽 변경이 안정되었다. 이듬해 추밀사 병부상서 판삼사사(樞密使 兵部尙書 判三司事)에 올랐다가 이윽고 참지정사 판호부사(參知政事 判戶部事)로 옮겼다. 〈고종(高宗)〉 15년(1228)에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守太尉 中書侍郞平章事 判兵部事)가 되었다가 드디어 시중(侍中)에 제배되었다. 〈고종〉 21년(1234)에 죽으니 시호를 위열(威烈)이라 하였다.
〈김취려의〉 사람됨은 절검하고 정직하였으며 충의로 스스로를 지켰다. 군대를 지휘하여 사졸들을 엄하게 하니 추호도 죄를 범하지 않았다. 술이 생기면 즉각 술잔 하나로 최하의 군졸과 똑같이 마시니, 그 까닭에 〈군졸의〉 사력(死力)을 얻을 수 있었다. 강동(江東) 전투의 공은 모두 조충(趙沖)에게 양보하였고, 전투에 임해 적을 제압할 때는 기발한 계책을 많이 내어 큰 공을 이루었으나 한 번도 스스로 뽐내지 않았다. 재상이 되자 얼굴빛을 바로 하여 아랫사람을 이끄니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고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아들 김전(金佺)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다. 김전의 아들은 김양감(金良鑑)·김군(金頵)·김중보(金仲保)·김변(金賆)이다. 김양감의 아들은 김문연(金文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