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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백성호
관심
“삶이 고통의 바다”라고 여기는 우리에게 “삶은 자유의 바다”라고 역설하는 붓다의 생애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백성호 종교전문기자가 ‘붓다뎐’을 연재합니다. ‘종교’가 아니라 ‘인간’을 다룹니다. 그래서 누구나 읽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종교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사람들은 지지고 볶는 일상의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며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에게 붓다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가 돼라”고 말합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돼라”고 합니다. 어떡하면 사자가 될 수 있을까. ‘붓다뎐’은 그 길을 담고자 합니다.
20년 가까이 종교 분야를 파고든 백성호 종교전문기자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예수를 만나다』『결국, 잘 흘러갈 겁니다』등 10권의 저서가 있습니다. 붓다는 왜 마음의 혁명가일까, 그 이유를 만나보시죠.
③ 똥 푸는 사람의 죄책감…붓다의 해법은?
# 옆구리 출생, 더 깊은 뜻이 있네
불교는 인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다시 한국과 일본으로 건너갔다. 동북아의 불교는 인도 불교의 본질을 공유한다. 그렇지만 나라마다 역사와 전통과 문화가 다르다. 그래서일까. 동북아 선(禪)불교에서는 붓다의 옆구리 출생 일화에 대해 더 깊은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뭐랄까. 붓다 탄생 일화에서 불교의 본질적 메시지를 읽으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선사였던 고우(1937~2021) 스님은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하루는 내가 아는 스님이 찾아왔다. 생각할수록 이해가 안 된다며 내게 물었다. 부처님이 어떻게 마야 부인의 옆구리로 태어났느냐고 말이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했다. 거기에는 분명 어떤 숨은 뜻이 있지 싶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한마디 했다. ‘그건 중도(中道)다!’” 고우 스님은 붓다의 옆구리 출생이 불교의 핵심 이치인 ‘중도’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왜 그럴까.
붓다가 탄생한 네팔의 룸비니 동산. 뒤에 보이는 흰 건물이 마야 데비 사원이다. 사원 근처의 동산에는 불교 유적이 보인다. 백성호 기자
사람에게는 태어나는 길이 있다.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가, 아버지에게서 아들이, 아들에게서 손자가 태어난다. 그렇게 위에서 아래로 태어난다. 그냥 태어나기만 하는 게 아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기질을 상당 부분 물려받고 태어난다. 평온한 성품의 부모에게서 평온한 성품을, 불같은 성품의 부모에게서 불같은 성품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좀 더 높지 않을까. 그러니 자식이 부모를 닮는다고 하지 않을까.
불교는 그걸 ‘윤회(輪廻)’라고 부른다. 윤회가 뭘까. 죽고 다시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게 윤회의 본질적인 뜻은 아니다. 윤회는 원인(因)과 그에 따른 결과(果)를 말한다. 내가 A라는 씨앗을 심으면 A라는 싹이 트고, B라는 씨앗을 심으면 B라는 싹이 튼다. 그게 윤회다. 우리의 출생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와 엄마가 심은 씨앗이 나에게서 싹이 튼다. 현대 과학은 그걸 ‘유전자(DNA)’라고 부른다.
엄마의 자궁을 통해 아래로 태어날 때, 우리에게는 ‘물려받음’이 있다. 그런 물려받음은 계단식으로 착착 내려온다. 1에서 2가 나오고, 다시 2에서 3이 나오는 식이다. 그래서 2는 아버지인 1을 닮고, 3은 아버지인 2를 닮는다. 어찌 보면 그게 윤회의 수레바퀴다.
# 인도에서 생겨난 숫자 ‘0’
붓다의 출생 일화는 다르다. 그는 옆구리를 뚫고 나왔다. 그건 ‘없음’이 ‘있음’이 되는 사건이다. 1이 1과 만나 2가 되고, 2가 다시 1과 만나 3이 되는 식이 아니다. 옆구리 출생은 아무것도 없는 0에서 1이 툭 튀어나오는 사건이다. 수직적 내려감이 아니다. 공간적 이동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0(없음)이 1(있음)을 뚫고 나오는 차원 너머의 이동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럼 싯다르타가 옆구리로 태어나기 이전은 무엇인가?” 불교는 그걸 ‘공(空)’이라고 부른다. 숫자로 표현하면 ‘0’이다. 붓다의 옆구리 출생에 담긴 의미는 그래서 더욱 심오하다. 고우 스님이 “옆구리 출생은 중도”라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스투파(탑)를 세웠던 벽돌 유적의 흔적이 룸비니 동산에 남아 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순례객들이 룸비니에서 명상을 하고 있다. 백성호 기자
그리스도교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그 말씀이 곧 하느님(하나님)이다. 거기서 하늘이 창조되고, 땅이 창조되고, 인간이 창조된다. 모든 창조의 근원, 그 진리의 자리가 하느님이다. 불교에서는 진리의 자리를 ‘공(空)’이라고 표현한다. 아무것도 없어서 허무한 자리가 아니다. 태어난 적도 없고 소멸한 적도 없는,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적도 없는, 본래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근원의 자리. 그게 ‘공(空)’이다.
가끔 받는 질문이 있다. 요지는 이렇다. “기독교에는 진리의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다. 그런데 불교는 진리가 공(空)이라고 하지 않나. 결국 텅 비어 있다는 말이다.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다. 나는 그게 너무 허무하게 느껴진다. 그에 반해 기독교에는 하나님이 있고,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 그 점에서 기독교는 불교보다 더 높은 종교가 아닌가.” 이와 비슷한 질문도 여기저기서 종종 받는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좀 안타깝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눈에 보이는 1, 2, 3은 알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0은 모르기 때문이다. 불교의 ‘공(空)’은 아무것도 없어서 허무한 자리가 아니다. 모든 것이 창조되고, 모든 것이 소멸하는 근원의 자리. 그게 바로 ‘공(空)’이다.
# 나는 있는 나다
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안다. 수학에서 ‘0’의 발견이 얼마나 혁명적인 사건인지 말이다. 0으로 인해 수(數)는 무한대로 펼쳐질 수도 있고, 0으로 인해 수는 없음으로 포맷될 수도 있다. 바로 이 ‘0’이라는 근원의 숫자가 다름 아닌 인도에서 나왔다. 인도에서 생겨난 숫자를 아라비아 상인들이 교역로를 통해 유럽으로 전하면서 ‘아라비아 숫자’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이다. 불교의 ‘공(空)’과 ‘0’이라는 오묘한 숫자는 서로 통한다.
룸비니 동산에 있는 아름드리 보리수. 싯다르타 왕자는 훗날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이룬다. 백성호 기자
구약성경의 탈출기에는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는 대목이 등장한다. 모세가 말했다. “제가 하느님을 만났다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사람들이 제게 하느님의 이름을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그러자 이런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있는 나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에 의해 창조되지 않았고, 소멸된 바도 없다는 의미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있는 존재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다.
그동안 종교계를 취재하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를 진지하게 대하듯이, 이웃의 종교도 그렇게 대하면 참 좋겠다. 왜냐하면 0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이해가 풍성해질 수 있듯이, 하느님을 통해 0에 대한 이해도 풍성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도 그런 식이면 참 좋지 않을까.
짧은 생각
경북 문경의 금봉암에서
생전에 고우 스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고우 스님은
‘똥 푸는 사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고우 스님은 붓다 당시의 일화를 통해 사람이 만든 계급의 본질을 풀어서 설명했다. 중앙포토
인도에서
똥 푸는 사람은
천민 계급입니다.
아주 낮은 카스트에
속합니다.
2500년 전이었습니다.
붓다가
길을 지날 때면
늘 후다닥
도망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길에서
붓다를 보기만 해도
그 사람은
죄라도 지은 듯이
항상
도망쳤습니다.
하루는
붓다가 그 사람을
불러서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유를 물었습니다.
“왜 자네는
나만 보면
달아나는가?”
똥 푸는 사람이
답했습니다.
“황송해서요.”
“무엇이 황송한가?”
“제가 천민이라서요.”
그 말을 듣고
붓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분이라는 건
많이 가지고,
힘 있는 사람들이
만들었을 뿐이다.
거기에 속지 마라.”
인도 룸비니 일대에서 만난 인도의 여성들. 고대 인도 사회에서 계급을 나누는 기준은 깨끗함과 더러움이었고, 또한 피부의 색깔이기도 했다. 백성호 기자
고대 인도에서는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 등
상층 계급은
깨끗한 사람들이고,
하층 계급은
더럽고 오염된 사람들이라
믿었습니다.
깨끗함과 더러움,
그게
계급을 나누는
경계선이었습니다.
인도에서는
카스트 제도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최하층 계급을
‘언터처블(Untouchable, 불가촉천민)’이라고
부릅니다.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오염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똥 푸는 사람이
붓다를 보자마자
달아난 데는
이러한
사회적 인식이
있었습니다.
브라만교는
깨끗함과 더러움을
나누지만,
불교에서는
깨끗함과 더러움을
나누지 않습니다.
둘의 본질이
하나라고 말합니다.
혹시
이런 게송을
들어보셨나요?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그렇습니다.
붓다는
진흙에서 연꽃이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진득진득하고 더러운
진흙과
아름답고 깨끗하기만 한
연꽃을
둘로 보지 않았습니다.
진흙의 바탕과
연꽃의 바탕을
하나로 보았습니다.
인도에서는 고대 사회부터 소를 숭상하는 종교적 전통이 있다. 특히 흰 소를 소중히 여긴다. 백성호 기자
그렇기에 가능합니다.
진흙에서 연꽃이
튀어나오는
놀라운 사건이 말입니다.
그래서
붓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번뇌가 곧 보리다.”
번뇌가 바로
깨달음의 지혜라는
뜻입니다.
왜 그게
가능할까요.
둘의 바탕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어떤 문제로 한참 고뇌하다가,
솔루션을 딱 찾으면
“아하!” 하고
깨달음의 지혜가
올라오지 않습니까.
왜 그게
가능할까요.
번뇌의 정체와
깨달음의 정체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붓다는
똥 푸는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차별적인 신분 제도는
지배 계급이 만든 거다.
너와 브라만의
본질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저
위안의 한마디를
던진 게 아니라,
인간과 세상의
이치를
설한 겁니다.
붓다는 사람의 본질은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햇다. 고대 인도사회에서는 혁명적 선언이었다. 백성호 기자
그럼
물음을 던져봅니다.
그런 붓다와
우리의 본질은
차이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우리에게도 말합니다.
“네 안의 붓다를
찾아라!”
에디터
관심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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