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에제 18,31)
오늘 복음 말씀은 이번 주간 계속되는 요한복음의 말씀으로서 예수님을 향한 군중들의 적대심이 극에 달하는 장면을 전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특별히 성전 경비병까지 보내어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명한 수석 사제들은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자처하며 신성 모독을 저지르는 갈릴래아 사람 예수를 선동분자 내지는 자신들의 지위와 체제를 위협하는 위험인물로 분류하고 그를 제거하려는 악의적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 같은 계획이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붙잡으라고 보낸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분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인 것 같다며 놀라움을 표현하고 군중들 가운데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분의 말을 듣고 마음의 변화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들은 정세가 더욱 시급해졌음을 느끼며 자신들끼리 모여 대책을 논의합니다. 그들은 서로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요한 11,47-48)
이들이 하는 이 말이 참 인상적입니다. 그들은 예수라는 인물을 다루는 문제에 대해 걱정하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진짜 하느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그 진실의 여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들의 처지와 안위, 현재 그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권력과 권리 그리고 그들의 영향력만을 신경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님이 진짜 하느님의 아들인지 아닌지는 전혀 관심 없고 오직 그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뺏기지 않을 생각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 같은 마음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대사제 카야파의 다음의 말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49ㄴ-50)
한 사람의 희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대사제 카야파의 이 말은 과연 이 말이 대사제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지 충격을 넘어 공포마저도 일으킵니다.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것을 위해 한 사람의 희생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는 이 카야파의 말은 냉혈함을 넘어 비열하게까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제단에서 봉사하는 직무를 부여받은 대사제가 어떻게 이런 말을, 아니 대사제를 떠나 한 인간으로서 다른 한 인간을 향해 어떻게 이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들의 이 같은 비인간적인 마음은 점점 더 고조되어 오늘 복음의 말미에는 그 문제꺼리 예수를 실제 죽이고자 하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에 이릅니다. 파스카 축제를 맞아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올 그 시기를 이용하여 예수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고 있는 이 같은 호전적이면서도 적대적인 분위기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이 이제 곧 실현되어 예수님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올 것이라는 점에서 극적 긴장감을 최고조에 이르게 합니다. 다시 말해, 오늘 복음이 전하는 분위기는 예수님의 수난이 이제 곧 다가왔음을 여실히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복음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왜 예수님이 이 같은 죽음을 당하셔야 하는지, 하느님의 아들이 왜 이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며 결국 십자가 위에서 처참히 죽어야만 했는지 그 이유와 원인에 대한 물음을 제기합니다.
왜 예수님은 이 같은 죽임을 당하셔야만 했을까? 오늘 독서의 말씀이 그 해답을 제시해줍니다.
오늘 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으로서 하느님은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스라엘 왕국이 무너지고 하느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처참하게 붕괴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결국 그 모든 일의 끝에 바빌론의 노예로 팔려가 노예 신세로 전락한 자신들의 처지에 좌절하고 있던 그들에게 하느님은 예언자를 통해 희망의 약속을 전해주십니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해 주십니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에제 37,21ㄴ-22)
왕국의 분열과 붕괴, 이방인들의 땅에 노예로 팔려간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하는 하느님의 이 같은 약속의 말씀은 놀랍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들의 좌절에 빠진 삶, 탄식뿐인 그들의 삶에 이 같은 말씀은 너무나도 큰 희망의 약속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 같은 약속이 다윗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것임을 약속해 주시고 오늘 독서가 전하는 이 같은 하느님의 약속은 바로 오늘 복음이 전하는 다윗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짐을 이야기합니다. 이로써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구약의 시대부터 약속된 하느님의 계약, 곧 당신의 약속을 지키고자 하신 하느님의 뜻의 실현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약속하신 그 구원의 선물, 그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선물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 주고자 하셨던 하느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오늘 화답송의 말씀이 잘 이야기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한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민족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먼 바닷가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예레 31,10)
오늘 영성체송의 말씀처럼 하느님은 두려움과 공포로 이리저리 흩어져 버린 당신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 위해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죽음에 넘기셨습니다. 그 죽음의 순간이 이제 곧 시작됩니다. 사순 시기가 이제 내일 주님수난성지주일로 성주간으로 접어들어 성삼일을 지나 부활의 시기로 접어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오늘 복음환호송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는 사순시기의 마지막 시기에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춤으로서 은총의 사순시기, 기쁨의 부활시기를 맞이하시기를 기도하갰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에제 1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