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해진은 오늘날의 일반적인 군 지역 정도의 범위일 수 있으나, 도서·해안 지역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하여 좀 더 넓은 지역을 관장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완도군은 삼국시대에 백제에 속해 있었으나 그 정확한 지명의 확인은 곤란한 실정이다. 이것은 아마 삼국·통일신라시대에 현재의 완도군을 이루고 있는 도서(島嶼)들이 부근 강진군·해남군·장흥군 등에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완도의 옛 지명과 관련하여 『삼국사기』지리지에는 지금의 강진·해남 일대에 통일신라의 양무군(陽武郡)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 양무군은 백제의 도무군(道武郡)이었다.
양무군 밑에는 4개의 현이 있었는데 그 중 탐진현(耽津縣)이 지금의 강진읍이며, 침명현(浸溟縣)이 해남읍에 해당된다. 이들은 백제시대에 각각 동음현(冬音縣)과 새금현(塞琴縣)으로 불리었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행정구역을 전하고 있는 『고려사』지리지에는 완도가 장흥부의 탐진현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조선시대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청해진이 있었던 완도의 서남쪽은 해남에 속하고, 동북쪽은 강진에 속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조선후기에 저술된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청해진을 강진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지금의 완도군을 이루고 있는 여러 섬들은 지리적·역사적·행정적으로 영암·강진·해남·장흥의 4개 군에 속했던 도서를 통합하여 생겨났다는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청해진이 설치될 때 본부는 지금의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長佐里)의 장도(將島) 일대에 있었지만, 그 관할권이 미치는 지리적 범위는 지금의 완도군 전체와 강진·해남·장흥 등 부근의 남해안 지역을 그 관할구역으로 하였을 것이라 보인다.
죽청리
청해진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들이 아직도 여러 곳에 산재되어 있으나 그 정확한 유적지는 아직도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청해진이 만 명의 병사들이 식수로 사용했다는 청해정(淸海井)이 당목에 남아 있고 청해진의 관아(官衙)가 있었다고 전해진 한들이나 사정몰(射亭몰)에는 지금도 기와편이나 자기편들을 쉽게 주워 볼 수 있다. 특히 죽청리에 남아 있는 지명들 가운데는 그러한 것을 알려주는 것이 여럿 있어 주목된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적어 보기로 하자.
1. 마골창은 군마를 기르고 군마가 쉬던 장소로 돌담(자연석) 성벽이 있었다고 한다.
2. 비죽골은 군마 말먹이는 곳이라고 한다.
3. 이방촌은 외부 손님을 접대하던 곳으로 손님이 쉬고 자고 가는 곳으로 볼 수 있다.
4. 장군배기는 장 장군의 본영관과 본가가 있던 곳으로 장수들이 활쏘기 등의 무예 연습을 하고 함께 무예를 겨루던 곳이라 한다.
5. 대평뜰은 군사들의 훈련장소로 죽청리의 현들녁에 이에 해당한다.
6. 망대(봉화등)은 장섬, 고금도, 신지, 약산, 금일, 옛가리 포진(완도읍) 동망·서망·봉화대 등의 정황을 살피며 장보고 본영관으로 연락을 취했고 여러 섬들과는 신호를 했다고 한다.
7. 부추원은 군선과 상선의 제작소로 알려져 있다.
8. 배둥둥이는 군선 수리소로 쓰인던 곳이다.
9. 옥담터는 해적들을 가두어 두던 곳이다.
10. 장장군 매뚱둥이는 장보고 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11. 장군암(장군바위)는 장보고가 말을 타고 올라가 청해진의 전 바다(해남 강진까지)를 내려다 보며 정황을 살폈다는 곳이다.
12. 사장몰은 군사들의 활연습장소로 알려지고 있다.
고려 삼별초의 난 때에는 엄목(嚴穆)장군이 은거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그곳을 엄목리(嚴木里)라고도 하였다. 선사시대 유적인 지석묘 십여 기가 현존하고 있으며 마골창, 옥담울 장군바위, 한들, 사정몰, 당목, 입왕청(이방청), 엄목구비, 구시골 등 옛날의 찬란한 역사를 암시해주는 지명이 전해지고 있는 지역이다.
설군(設郡)된 이듬해인 1897년 군청을 추후 이곳으로 이전할 계획으로 향교(鄕校)를 창건하였고, 임진왜란 후 평강 채씨(平康 蔡氏), 원주 이씨(原州 李氏)가 산세가 뛰어나고 훌륭해 정착하게 되었으며 그 후 김해 김씨(金海 金氏), 추계 추씨(秋溪 秋氏), 동복 오씨(同福 吳氏)등이 입주하여 촌락을 형성하였다.
일제시대 때부터 군내리(郡內里)의 상수도 수원지를 설치한 산좋고 물좋은 곳으로 해안지대를 비롯하여 마을 곳곳에 해산물 가공공장 등 각종 공장들이 건설되어 200호 이상 되는 큰마을로 확대 발전되고 있다.
입주민이 정착할 당시 대나무가 숲을 이루어 뒤덮고, 파랗고 울창한 깊은 산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은 마을을 가로질러 항상 철철 흘러 죽림(竹林)과 맑고 파란 물을 상징하여 죽청리(竹淸里)라 부르다가 현재는 죽청리(竹靑里)라 표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장보고의 묘?
- 완도읍 장좌리는 해남군 남창에서 연륙교를 건너 완도읍에 이르는 13번 국도의 동해안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완도항을 약 4km앞두고 좌우에 위치한 마을이다. 주민은 6백60여명. 길 왼쪽 청해초등학교 주변이 웃대미, 길 오른쪽 바닷가가 본동네다. 장좌리 서쪽에는 완도군 최고봉인 상황봉(6백44m)이 버티고 있다. 장좌리는 비교적 넓은 들이 펼쳐진 죽청리와 대야리 사이에 펼쳐져 있다. 과연 군사 1만명은 먹일 만한 '한들'이다. 장좌리에는 또 장보고와 관련된 지명과 유적이 많다. 장가네묘(墓)·목 없는 무덤·장군바위·쏠보등·법화사터·관음사터 등이다.
- 목 없는 묘는 목이 잘린 장보고의 시신이 묻힌 곳이라 전한다. 장군바위는 12개의 남방식 고인돌 군(群)으로 이뤄져 있는데, 청해진 장수들이 이 바위들 위에 올라 회의를 했다고 한다. 장보고는 이 장군바위 위에서 4백m쯤 떨어지나 쏠보등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는 전설도 있다. 장도에도 장보고와 그의 가족들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장보네묘 등이 남아 있다.
첫댓글 잘읽어보았소 , 정말 역사의 장보고장군의 사실이 깊은 역사의 글이오. 그런데 혜신 드라마의 한장면은 너무 쉽게 마무리를 하는것같소, 그러한 장면들이 연출될줄알았는데 복부에 칼에 찔러 끝이 될것같소다, 아쉽군요, 더욱더 자세한 내용을 부탁합니다.
드라마를 보니 진짜 뛰어난 사람이더이다 여사공부 잼있게했읍니다...^*^
전 역사공부는 못해요.... 지리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현장 체험으로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