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아름다운 사람, 마음이 행복한 사람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 세상에 회자되는 많은 글들을 보면 잘못 인용된 글들로부터, 임의로 내용을 변경하고 인용하는 저작권을 침해하는 글이며, 제목 또한 잘못 소개되는 많은 이야기를 들을 보게 됩니다.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에 썼다고 “노년유정(老年有情)”이라는 글 또한 “정약용의 다산 연구소”에 따르면 정약용의 글이 아니라고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노년유정”이라 알려진 글의 원문은 1998년 한맥문학에 등단하여 지금까지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채 시인(1961년생)의 “마음이 아름다우니 세상이 아름다워라”라는 시(詩)입니다. 원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이 아름다우니 세상이 아름다워라”
밉게 보면 잡초 아닌 풀 없고, 곱게 보면 꽃 아닌 사람 없으되
내가 잡초 되기 싫으니, 그대를 꽃으로 볼일이로다.
털려 들면 먼지 없는 이 없고, 덮으려 들면 못 덮을 허물없으니
누구의 눈에 들기는 힘들어도 그 눈 밖에 나기는 한순간이더라.
귀가 얇은 자는 그 입도 가랑잎처럼 가볍고, 귀가 두꺼운 자는 그 입도 바위처럼 무거운 법
생각이 깊은 자여! 그대는 남의 말을 내 말처럼 하리라.
겸손은 사람을 머물게 하고, 칭찬은 사람을 가깝게 하고, 넓음은 사람을 따르게 하고, 깊음은 사람을 감동케 하니, 마음이 아름다운 자여! 그대 그 향기에 세상이 아름다워라.
그런데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많은 법적 소송은 “명예훼손과 무고에 대한 고소고발”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갈등과 다툼과 미움속에서 지옥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채 시인의 고백처럼 이런 사람이 정말로 필요한 시대임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 그래서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사람...그 사람을 오늘도 세상과 현실을 원하고 있습니다. 떻게 하면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답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음이 행복한 사람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법”이라고...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히브리서13:9)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린도후서3:4-5)
마음이 행복한 사람, 어떻게 하면 될까요?
성경은 인간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기1:27-28) 그리고 인간에게만 영혼을 담아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되니라.”(창세기2:7) 더불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도서3:11) 그래서 인간 행복의 문제는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조건이 갖추어져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본질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도 행복을 찾아 몸부림치는데 왜 인간에겐 원치 않는 실패와 불행이 계속 찾아오는 것일까요? 바로 인간의 본질이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영적 문제와 거기서 비롯되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그 무엇, 여러분은 그런 존재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 인간의 운명과 팔자를 좌우하고, 가정과 국가를 불행하게 만드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흑암 세력, 사탄과 귀신의 역사는 과연 없는 것일까요? 신들린 무속인들이 분명히 있다고 존재하는 귀신의 역사가 없는 것일까요?
성경은 불행을 가져다주는 존재의 이름을 사탄 혹은 마귀, 그의 졸개들을 귀신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지금도 사탄과 귀신들은 인생과 가정을 무너뜨리고, 사회와 인간관계를 무너뜨리고, 타락 경제를 만들고, 흑암 문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모르게 하고, 하나님과 멀어지도록 일을 꾸밉니다. 사탄은 언제든지 교묘하게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섬기게 합니다. 그리고 이상한 종교를 만들어서 헛되고 공허한 인생을 살게 합니다. 문화와 레져라는 명목으로 쾌락을 주는 척하면서 참 행복을 빼앗아 가기도 하고, 흑암의 조직을 세워 영혼을 황폐화시키고, 지옥에 들어갈 때까지 인간을 괴롭힙니다. 성경은 이 사탄이 거짓의 아비요, 멸망시키는 자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과연 이 사탄의 역사를 이기는 길은 없을까요? 하나님은 인간의 참된 행복과 참된 성공을 회복시켜주시기 위하여 친히 그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구원자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사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단번에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감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자마다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이란 인생의 껍데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를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이 멸망받는 죄(원죄, 자범죄, 조상의 죄)와 운명에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의 권세와 그 운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가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소유나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구이며, 내가 가진 인생 해답이 무엇이냐의 문제입니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구원의 본질적인 행복, 그 행복을 주는 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수기6:24-26)
“제7계명~ 간음(姦淫)하지 말라”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십계명 중 일곱 번째는 “간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래 시대를 아시고 주신 계명이 아닐까요? 오늘날 수많은 부부와 가정들이 간음이라는 불륜으로 인해 깨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2019년 OECD(세계경제협력개발기구)의 통계를 보면 한국의 이혼율은 1950년대에 비해 2000년대에 이르러 13.6배나 증가했으며 최근에는 그 증가율이 더욱 빨라지고 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의 이혼율은 9위에 자리했으며 아시아에서는 1위를 차지했습니다. 특히 인구를 고려했을 때 우리나라 이혼율은 심각한 상황이라고 밝혔습니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조기 이혼 뿐만이 아니라, 황혼 이혼이 급증하고 있는 추세라고 합니다. 그 가장 큰 배경이 바로 “간음(姦淫)”입니다.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예레미야17:9)라고 말씀합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쾌락은 끝이 없고, 그 결과는 결국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보고서1:15) 그래서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디모데전서5:6)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간음하지 말라”고 하는 경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과 이웃에 순결함을 보존하고, 정숙하지 못한 생각, 말, 행동을 금하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5장 3절에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그 이름도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 보면 계속 음란에 빠져있는 자는 그 육체를 사탄(마귀)에게 내어 준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문화는 점점 더 음란 문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점점 더 성이 상업화 되고 있습니다. 상업화 되면서 점점 더 전문화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 후대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간음(姦淫)”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부부간이 아닌 남녀가 성적 관계를 맺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더욱 깊은 영적인 의미들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행위적인 간음을 금하는 것입니다. 행위적인 간음은 대표적인 육체의 일로서 구원조차 받지 못할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고린도전서6:9-10, 레위기20:10) 둘째,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행함으로 간음한 것이 아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만으로도 이미 간음했다고 말씀했습니다.(마태복음5:27-28) 마음에 음욕을 품을 때는 결국 행위적인 간음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셋째,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영적인 간음이 더 무섭다고 말씀합니다.(골로새서3:5-6) 인간의 타락과 음란은 인간의 정체성과 본질적인 가치를 잃어 버린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이 정말 소중하고 가치있는 존재임을 안다면, 인간은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본질적인 존재의 회복, 그것이 바로 복음(福音)의 목적입니다.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봄이면 배가 고팠습니다.
가장 넘기 힘든 보릿고개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자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부모님과
부모님을 공경하며 순종하는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모깃불을 피워 놓고
멍석 위에 온가족이 함께 앉아
반짝이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며
하루의 삶을 정리했습니다.
가을에는 들판에서 메뚜기를 잡고
배가 고프면 밭에서 가지도 따 먹고
달 밝은 밤에는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호롱불 밑에서 밤이 깊도록 숙제를 하다가
잠이 들었던 추억도 생각납니다.
겨울에는 수북이 쌓인 흰 눈을 보며
온 가족이 방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동치미에 김이 뭉실뭉실 나는 찐 고구마를
먹으며 부모님이 들려주시는 옛 이야기를
들었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풍요로움 속에서 가정이 깨어지는 현실을 보면서.
가난했으나 정다운 가족들과 지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행복의 길,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꼭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사도행전16:31)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브리서13:8)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2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