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서재, 소를 기다리다.
나는 여기서 소를 기다린다. 아침에 나간 소는 아직도 저기에 누워있는데도 말이다.
서재에서 커튼을 올리면 308동과 309동 사이로 누워있는 소의 형상이라는 와우산(臥牛山) 마루가 세 뼘쯤 보인다. 십년쯤 전에 집을 줄여 이곳으로 이사하면서 서재도 말도 안 되게 줄었다. 그나마 아침마다 청주의 진산 와우산 마루를 대할 수 있어 다행이다. 상당산 우백호인 백화산 등마루로 퍼지는 동살을 맞을 수 있는 것도 덤이라면 덤이다. 백화산의 한 줄기인 발산은 여신의 부드러운 오른팔처럼 청주 북쪽 마을들을 포근하게 안아 끄트머리에 마애비로자나부처님을 이루고 무심천으로 스며든다. 그렇게 큰 품안에 아주 작은 느림보 서재가 안겨 있다.
앉아있는 자리는 좁은 달팽이집이지만, 상상만은 와우산, 백화산, 발산이 품어 안은 수름재 그 언덕이다. 여기서 나는 수필을 공부하고 수필을 쓰고 수필 강의를 준비한다. 아무리 큰 사람도 앉을자리는 한 평을 넘지 못한다. 그러나 사유의 자리는 한 평을 다 채우지 못할 수도 있고 일만 평이 부족할 수도 있다. ‘수필은 일상의 철학적 해석이다.’라는 나의 정의에 따라 해석이나 상상하는 자리로 부족함은 없다. 상상은 공간이나 시간에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서재로 드는 좁은 벽에는 청곡 선생이 친 난초가 사시로 청초한 꽃 한 송이를 피우고 있다. 암향부동은 상상으로 감지한다. 바로 옆자리에 지금은 화가가 된 제자 양영주가 중학교 때 그린 수채화 한 점이 걸려 있다. 욕심 없는 그림 속에서 오래된 초가집 돌담을 돌아 우공(牛公)이 어슬렁어슬렁 느림보 걸음으로 돌아 나올 것만 같다. 이제 나이 들어 내려놓을 걸 내려놓으면서도 나간 소를 기다리는 마음만은 버릴 수 없으니 상상이나 사유만 있으면 서재는 충분하다.
서재에 걸린 부모님 사진은 그분들에 대한 그리움을 깨우치면서도 아픔을 어루만져 준다. 서른 몇 살에 어느 여고에서 귀거래사를 수업할 때 누군가 찍어준 사진이 나를 젊음에 머물게 한다. 첫 작품집 『축 읽는 아이』 출판기념회 사진은 수필에 대한 첫마음을 깨우친다. 중요무형문화재 56호 종묘제례 초헌관으로 봉행한 사진도 언제나 내 발걸음 꼿꼿하게 한다. 나를 낳아 기르신 건 부모님이지만 나를 홀로 서게 한 것은 교직이다. 선생을 직업으로 하면서 나는 집을 장만하고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공부시켰다. 뿐만 아니라 나는 아이들을 가르친 것보다 아이들에게 배운 것이 더 많아 수필가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사진들을 치울 수가 없다.
은퇴 이후 수필에 전념하면서 나를 키운 것은 느림보 서재에 꽂혀 있는 책들이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자리에 『소학』 『논어』 『장자』 『노자』 『시경』 『문심조룡』이 있다. 논어는 나를 붙잡아 두지만 노자는 내게 감긴 이념의 사슬을 풀어준다. 문심조룡을 가끔 한 구절씩 읽으며 교만함을 다스린다. 스승이신 최운식 교수님의 『생명을 관장하는 북두칠성』과 몇 권의 저서들은 사유의 원형이 되었다. 안성수 교수의 『수필 오디세이』는 수필 강의의 주추를 놓아주었다. 신재기 교수의 『수필 창작의 원리』 와 서른 권 남짓 이론서나 평론집은 작품 창작이나 수필 강의의 기둥이 되고 서까래가 되었다. 나는 수필은 일상의 철학적 해석이라고 늘 말한다. 철학적 교양이 있어야 깨달음의 눈을 뜨게 되고 철학적 사유와 상상을 하게 마련이다. 신영복 교수의 『담론』이나 『강의』 같은 몇 권의 책이 바로 가까이에 꽂혀 있다. 박찬국 교수의 니체 해설을 읽으면서 존재에서 관계로 이어지는 화두를 깨달으면 우리네 수필도 일상을 철학으로 개념화하는데 모자라지 않다.
21세기 수필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면 새 시대를 읽어야 한다. 한국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 그리고 우리 청주의 역사를 정리한 도서들을 모아 읽고 여기저기 서재 구석에 쌓아두었다. 최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수필에 섹슈얼리즘의 수용을 위해 사들인 문학과 섹슈얼리즘, 에코페미니즘, 한국인의 DNA 같은 책들은 방문하는 이들에게 민망할 때도 있다. 몇 권이나 될지 알 수도 없는 시집은 꽂아 놓고 수필집은 쌓아 놓았다.
좁은 서재에 책상은 둘이나 된다. 앉은뱅이책상은 독서를 할 때, 의자 책상은 글을 쓸 때 사용한다. 서재는 너저분하다. 읽는 중인 책, 읽어야 할 책, 방금 들어온 책으로 책상 위나 주변이 늘 어지럽다. 아내는 정리되지 않아 너저분한 내 서재에 불만이다. 그러나 너무 좁아 정리할 수도 없다. 그래도 어떤 책이 필요하면 바로 찾아내고 책이 한 권 없어져도 금방 알아챈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중에도 정리된 서가가 있다. 내 졸저를 꽂아놓은 한 칸이다. 『축 읽는 아이』 『손맛』 『풀등에 뜬 그림자』 『여시들의 반란』 『가림성 사랑나무』 『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부흥백제군 발길 따라 백제의 산성 산사 찾아』는 수필집이다. 『덩굴꽃이 자유를 주네』는 수필선집이다. 『해석과 상상』은 평론집이고 『느림보의 수필 창작 강의』는 창작 이론집이다. 『윤지경전』은 고전소설 윤지경전을 초중학생이 읽기 좋게 다시 쓴 소설이다. 내 저서로 서가 한 칸을 다 채우지 못해 다행이다. 그 자리에 목성균 선생의 수필집 『누비처네』를 꽂았다. 그래도 공간이 남아 손광성 등이 번역한 『아름다운 우리 고전수필』을 꽂을 수 있었다. 이제 지금 계획하고 있는 마지막 수필집이 완성되면 존경하는 목성균 선생님에게는 죄송하지만 『누비처네』 는 옆 칸으로 이사해야 할 것 같다.
내 서재가 여기에만 머물러 있으면 내 안에서 나가버린 마음인 소를 만날 수 없다. 상당산 법계사 가는 길을 매일 두 시간씩 걷는다. 나에게는 수행의 길이고 구도의 길이다. 법계사 심우도(尋牛圖)의 동자승처럼 법계인지 진여인지 소인지 깨달음을 찾으러 간다. 수필은 붓이 가는 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붓을 닦아 쓰는 수행의 길이다. 수행을 걸으며 사유하는 과정이라면 온 세상은 어디나 느림보 서재가 될 것이다. 걷노라면 문득 와우산에 누워있던 착한 소가 벌떡 일어나 어슬렁어슬렁 느림보 서재로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2023. 3. 19.)
첫댓글 선생님 서재가 눈에 보이는 듯 훤히 그려집니다.
'수필은 붓을 닦아 쓰는 수행의 길이고 수행을 걸으며 사유하는 과정이라면 온 세상은 어디나 서재가 될 것이다.'
선생님 말씀처럼 온 세상 어디나에서 전하는 말씀을 듣고 경전을 깨우치는 법을 배워 깨달음을 찾아야겠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본질을 바로 찾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