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수(遼水)는 지금의 요하(遼河)가 아니라, 조백하이다(1)
◉중국의 요수 위치가 계속 바뀌게 된 사실
지금의 요하(遼河)는 예전의 요수(遼水)가 아니다. 그 이유는 지금의 요하는 명나라 때 붙여진 지명이기 때문이다. 요수에 대한 기록은 기원전 11세기의 제나라왕 강태공이 산동지방의 왕으로 있으면서 주무왕과 함께 요수(遼水)에 갔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때의 요수는 최소한 지금의 영정하 보다 남쪽에 있는 강이었을 것이다.
또 서한군국도(西漢郡國圖)에 표시된 그림을 보면 현도와 낙랑, 요서, 어양, 우북평 등이 모두 만리장성의 안쪽에 표시되어 있고 요수(遼水) 역시 만리장성 박에서 만리장성 안쪽으로 흐른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및 요동은 모두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여 이 땅을 빼앗은 이후 연장성 안쪽에 설치한 연5군(燕五郡)이므로 당연히 연장성(만맂장성)의 안쪽 땅이었다.
서진군국도(西晉郡國圖)에 표시된 그림 역시 혀도, 대방, 낙랑, 요동, 요서 등이 모두 만리자엉 안쪽에 그려져 있고, 요수(遼水)가 만리장성 밖에서 나와 만리장성 안쪽으로 흐른다.
이 요수(遼水)는 지금의 조백하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연나라 진개가 지금의 북경시 조양구(朝陽區)로 추정되는 조양으로부터 지금의 천진시 부근인 양평(陽平)까지 쌓은 연장성 의 안쪽에 이들 지역이 모두 포함된 것이다. 이후 서한(前漢)이나 서진(西晉) 시대에도 이 만리장성이 유지 되었기 때문이다.
요수는 중국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강을 지칭 했던 것으로 보이며, 역사적으로 여러 시기에 걸쳐서 강의 명칭이 변경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현재 요수에 대해서는 영정하, 조백하, 난하 및 현재의 요하 등 여러 설이 있다. 수경(水經)이 쓰여질 당시와 수양제 및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할 당시 건넌 요택과 요수(遼水)를 문헌 기록으로 검토해 보면 지금의 북경을 지나는 조백하로 비정된다. 그 이유를 설명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요수의 상류에 위치해 있었던 현도군(玄菟郡)은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당시 좌12군 8번째의 침략경로에 위히한 곳이다. 현도군의 속현인 서개마현(西蓋馬縣)은 좌12군 4번째에 위치해 있었다. 또 당태종의 이세적도 요수를 건너 현도를 공격하였는데, 이때 건넌 요수는 조배하로 추정된다.
이 기록을 보면 현도는 고구려 서쪽 국경지대 서북쪽에 위치해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현대의 한국 역사학자들은 현도가 평안북도 산악지방과 압록강 주변에 설치되었다가 압록강에서 멀지 않은 무순(撫順)으로 옮겼다고 주장하며, 한국 고대의 역사지도에도 현도를 압록강변과 평북 산악지대로 표시하고 있다. 이는 수양제 조서의 역사기록과 전혀 배치되는 잘못된 위치 기록이다.
한국 역사학자들의 이같은 개탄스러운 주장은 중국 동북공정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낙랑이 평양지역, 현도가 평북과 압록강 중부지역, 옥저가 함경도 및 연해주 지역, 임둔은 원산과 강원도 지역으로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각종 역사적 문헌기록을 검토해 보면, 현도는 고구려현 지역으로 지금의 조백하 상류에 존재했다고 보아야 마땅하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태종이 침략한 현도의 위치
현도군에 대한 설명은 삼국사기 고구려 보장왕 3-4년 기록에 정확한 위치가 설명되어 있으며, 결코 평북이나 푸순이 될 수 없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보장왕 3년(AD 644) 당태종은 유주와 계주(지금의 천진시) 등지를 순행하면서 고구려 연개소문의 죄를 요동과 갈석에서 묻겠다고 하면서 1차 고구려 정벌계획을 밝힌다. 이듬해(AD 645년),
”4년 여름철 4월 이세적은 요수를 건너서 현도에 이르렀다. 고루려의 성읍주민은 크게 놀라 성문을 닫고 수비에 들어 갔다......오월 현도성이 함락되고 남녀 8천명이 모두 죽었다. 이세적은 더 나아가 요동성 아리에 이르렀다“{四年 夏四月 世勣 自通定 濟遼水 至玄菟 我城邑大駭 皆閉門自守....五月城陷 男女八千口沒焉 李世勣 進至遼東城下}.
위의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현도는 당태종이 요수를 건넌 다음 고구려의 현도성에 다다른 것이다. 즉 현도성은 요수의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요수(遼水)는 수경 기록과 수양제 및 당태종 당시 지금의 조백하임이 분명하다.
◉수경(水經)과 수경주(水經註)에 기록된 요수의 위치는 조백하
《수경》은 전한(前漢,BC202~AD 8) 시대에 상흠(桑欽)이라는 사람 지었디고 하기도 하고, 작자 미상이라고도 한다. 주석이 추가된 수경주는(水經注)는 515년 북위(北魏)의 학자 역도원(郦道元, 472~527년)이 『수경』에 자신의 견해를 자세하게 주석을 붙여서 쓴 책이다. 수경주(水經註)에서는,
”[수경]의 소요수(小遼水)
또한 현도군 고구려현에 요산이 있는데 소요수가 나오는 곳이다(又玄菟髙句麗縣有遼山小遼水所出)라고 하였고, 수경주에서는
[수경주]
고구려현(縣)은 옛 고구려(髙句麗) 호(胡)의 나라이다. 한(漢)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우거(右渠)를 평정하고 현도군(玄菟郡)을 이곳에 두었는데 왕망이 하구려(下句麗: 유리왕 때 이곳이 고구려 땅이었으므로 하구려라고 한 것임)라고 하였다....소요수는 또 흘러서 대요수로 들어간다. 사마의(사마선왕)가 평정한 요동땅이다. 공손연을 잡아 참수한 강이 바로 이곳이다
(縣故髙句麗胡之國也. 漢武帝元封二年平右渠, 置玄菟郡于此. 王莽之下句麗. 水出遼山, 西南流逕遼陽縣, 與大梁水㑹. 水出北塞外, 西南流至遼陽, 入小遼水, 故地理志曰..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小遼水又西南, 逕襄平縣....
.小遼水又逕遼隊縣, 入大遼水. 司馬宣王之平遼東也, 斬公孫淵于斯水之上者也)“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경 주의 기록을 보면,
소요수가 흘러가다가 대요수에 합쳐진다고 하였으므로 이 대요수와 소요수가 요수임을 알 수 있다. 또 소요수의 발원지인 현도는 고구려 오랑케 나라 땅이라고 하였고, 한무제가 현도군을 설치한 곳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또 전한 말 왕망은 고구려를 침략하였다가 고구려 장수의 목을 베고 철수하였는데, 이때 현도는 고구려 땅이어서 현도에 있는 고구려를 왕망은 하구려(下句麗)라고 나라 이름을 비하하였다.
소요수는 북쪽의 국경지대에서 나와 요양(遼陽)에 다다른다고 하였으며, 서남쪽으로는 양평현(陽平縣)을 지난다고 하였다. 또 사마의가 공손연을 참수한 곳이라고 하였다.
**참고: 소요수가 양평현을 지난다고 했는데, 양평현(陽平縣)은,
”연나라 진개가 서쪽의 조양(朝陽)에서 동쪽의 양평(襄平)에 이르는 성을 쌓아 동호(고조선)을 방어했다“고 했는데, 양평은 요동의 속현으로 지금 평주 노룡현 서남에 있다”(後漢書 李賢이 註)고 하였는데, 이 노룡현 지역은 지금의 진황도시 부근이다. 양평현은 한(漢)나라 때 요동군 속현이었고, 만리장성의 안쪽에 설치된 현이다.
[수경]에 (대요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방현(房縣) 서쪽을 지난다(又東南過房縣西) 【수경주】에는 대요수는 오른쪽으로 백랑수와 합친다. 백랑수는 우북평군(右北平郡) 백랑현(白狼縣)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흘러 [우북평군 광성현(廣城縣)을 지난다...백랑수(白狼水)는 또한 동북쪽으로 흘러 창려: 진황도시 남쪽현(昌黎縣) 옛 성을 지난다(遼水右㑹白狼水, 水出右北平白狼縣, 東南, 北流, 西北屈, 逕廣成縣.....白狼水又東北, 逕昌黎縣故城)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이 요수(遼水)가 창려현(昌黎縣) 엣 성(城)을 지난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려(昌黎)는 험독현이 있고, 조선의 도읍인 왕검성(王儉城)이 있었던 곳이믈로 수경의 기록과 일치하며, 낙랑군에 있었다고 하였다.
『사기』 삼가주(三家註) 권115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집해에 서광이 말하기를 창려에는 험독현이 있다. 색은에 위소가 말하기를 옛날 읍의 이름이라고 했다. 응소가 주를 달았는데, 지리지에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 신찬이 말하기를 와검성은 낙랑군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다. 정의(正義)를 하면 왕검성은 낙랑에 있는 것이다(集解 徐廣曰 昌黎有險瀆縣 索隱 韋昭云 古邑名 徐廣曰 昌黎有險瀆縣 應昭注地理志 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 王儉城在樂浪郡 浿水之東也 正義 臣瓚曰 主險在樂浪郡也(史記 三家註 卷115)
“현재 북경시(北京市) 경내를 흐르는 주요 하천은 영정하(永定河), 조백하(潮白河), 북운하(北運河) 및 거마하(拒馬河) 등이 있어 모두 발해만으로 유입된다.
북송 시대(AD 1044년) 쓰여진 무경총요(武經總要)에는 “조선하(朝鮮河)가 흘러내려 90리를 가면 고북구(古北口)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북경 시내에서 동북쪽 밀운현(密雲縣)에 고북구 지명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으며, 고북구 가까운 거리에 조하(潮河)가 있고, 가까운 곳에서 백하(白河)와 합쳐져 조백하(潮白河)가 된다. 무경총요에 기록된 조선하는 이후 조선하가 조하(潮河)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하였다. <출처: ”심백강의 발해 조선 역사“>
이 글을 보면 북경 시내를 지나는 강이 여러 곳이며, 밀운현 부근에서 조하와 백하가 합쳐진다고 하였는데, 수경주(水經註)에 기록된 소요수와 대요수가 합쳐지는 지역이 이 지역으로 비정될 수 있다. 또 수경주에는 우북평(지금의 북경)을 지나는 강이 소요수, 대요수 및 패수를 비롯하여 여러 강이 있는데, 이는 오늘날 북경시 경내를 흐르는 강이 여러 강인 점과 일치되는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은 수경과 수경주의 기록을 검ㅌ토해 보면 소요수(小는遼水)는 옛 고구려(髙句麗) 오랑케(胡)의 나라에 속한 고구려현(高句麗縣) 요산(遼山)에서 발원한다. 한무제 때는 이곳에 현도를 설치한 곳이지만, 고구려 2대 유리왕 때는 이곳이 고구려 땅이어서 고구려를 침략한 왕망이 이 곳을 하구려라고 비칭(卑稱)하였다.
소요수 및 대요수가 합치친 후
우북평과 창려(진황도시 남부)를 지난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북평은 지금의 북경지바이며, 창려(진황도시 남부)는 지금의 진황도시 갈석산 부근이므로 요수는 지금의 조백하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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