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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영숙 용인천주교공원묘역서 정일우 신부님 2주기 추모미사를 드리다
정일우 신부님을 생각하면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이 먼저 떠오른다. 그냥 신부님! 하고 달려가면 걱정이나 근심을 한순간에 내려놓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사진제공- 최영숙 1977년 경 신천공소에서 정일우 신부님과 엄마(왼쪽 첫 번째)와 교인들이 함께 찍은 사진
우리 친정집은 오래도록 똘똘이 만신을 믿었다. 그런데 성당을 다니게 되었다. 계기는 소가 죽은 것이었다. 목장을 했던 그 당시 소는 집안의 큰 재산이었다. 집안의 기둥소가 시름시름 앓자 엄마와 할머니는 늘 그러했듯이 똘똘이 만신 집을 드나들었고 굿을 하고, 만신이 정성을 드려도 소는 차도가 없었다. 그러다 뼈만 앙상히 남은 채 죽고 말았다. 아버지는 도살장에 가서 기둥소가 죽은 이유를 알았다. 소의 위에 커다란 못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고름이 한 말이 넘게 나왔다고 했다. 아버지는 대대로 집안에 모시고 있던 신주 독을 깨고 다시는 만신 집에 다니지 못하게 했다. 그 후, 어린 날, 할머니를 따라 검바위의 똘똘이 만신 집을 가면 다락 가득 있던 과일들과 음식들을 더 이상 먹지 못하게 되었다. 무서우면서도 신기했던 굿하는 모습도 집에서는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굿을 하면 신대가 가장 빨리 올랐다던 우리엄마는 그 후 영세를 받으셨다. 아버지는 제사를 모시는 천주교를 좋게 보셨기 때문에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엄마가 성당을 다니시는 것을 허락하셨다. 엄마는 신심이 무척 깊으셨다. 늘 기도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사진- 제정구 장학회 제공 정일우 신부님이 어린이들과 노는 모습
정일우 신부님이 신천교구에 부임해 오셨을 때 처음 뵈었던 모습은 예수님인가 하는 것이었다. 인자한 미소와 수염은 그림에서 보아온 모습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아마 저분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버지는 외국인 신부님이 한국말을 하는 것을 신기해하고 술도 같이 잘 받아 준다고 좋아하셨다.
신부님 강론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집에서 가족들에게 라면 끓여주고 성당에 나오지 마세요. 가족들을 위해서 하시는 일들이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때 신부님이 강론 중에 말씀하신 것은 신앙생활의 지표가 되었다. 또한 그 당시 결혼할 즈음이었다. 시댁은 불교였다. 천주교 신자였던 나는 결혼 후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걱정이 많았었다. 신부님께 어떻게 하냐고 여쭤보았다. 신부님은 “ 집안 분란 일으키지 말고 그때그때 화살기도를 해라.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하느님은 모두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씀해주셨다.
그 후 신부님을 뵙지 못했다. 간간히 바람처럼 안부만 전해들을 뿐이었다. 단식을 하시고 회복을 못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었다.
사진- 최영숙 정일우 신부님 빈소
2014년 6월 2일 신부님이 선종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에게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알려주셨던 정신적인 지주인 신부님이 영영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에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빈소를 찾았다. 신부님을 애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추모하고 있었다.
사진- 최영숙 정일우 신부님 영결미사를 드리다
2014년 6월 4일 오전 8시 30분 예수회센터 성당에서 영결미사를 드렸다.
정일우 신부님은 1935년 미국 일리노이주 필로 출생, 1966년 사제 서품, 1973년 청계천 판자촌 내 사목 활동, 1977년 복음자리 마을 건립, 1979년 한독주택 마을 건립, 1985년 목화마을 건립, 1986년 고 제정구 의원과 막사이사이상 공동수상, 1994년 특수사목 농촌사도직 ‘누룩공동체’ 거주 등 신부님의 일생은 빈민과 농민들과 함께 한 생이었다.
조사는 성심 수녀회 손인숙 수녀와 신명자 베로니카가 읽었다.
고 제정구 전 국회의원의 아내 신명자여사는 조사를 통해 "오늘 여기 계신 한분 한분 신부님께 깊은 은혜와 영향을 받지 않으신 분이 없을 건데 감히 못난 제가 가장 잘 못 산 제가 신부님 영전에 조사를 하다니 용서 하십시오. 신부님 장례식 조사는 정구였어야 하는데요. 신부님과 저희들의 인생이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함께 한 가족들의 맏이 이기 때문에 제 몫이 되었나 봅니다. 신부님과 저희들의 만남은 행운이고 축복 이었습니다. 변혁을 꿈꾸고 데모 제적 복학을 되풀이하던 일급 꼴통 정구가 신부님을 만난 건 큰 축복 이었습니다. 그와 결혼한 저 또한 이 행운과 축복을 함께 누렸습니다.
그리고 공동체 식구들 천도빈 도빈위 복음자리 한독 목화 상계동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 모두에게 신부님과 함께 한 시간은 그 누구도 가져다 줄 수 없는 정말 큰 축복이었습니다. 모든 일들이 신부님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 이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키워내고 단련시켜 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신부님의 자유로움, 기다림, 장난과 익살, 해학, 깊은 영성에서 나오는 넉넉함, 낙천적인 기질 ,날카로운 혜안, 그 안에 푹 빠져 저희들은 자랐습니다.
벽이 누렇게 되도록 온종일 피워대던 담배연기 속에 끝도 없이 이야기를 나누시던 신부님. 물싸움을 하고 온 집을 뛰어다녀 물바다를 만들어 놓기도 하고, 누구보다 끼가 많고 신명이 많아 술 한 잔에 밤새워 춤을 추시던 신부님 밤이면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둘둘 게임을 했던 날들, 우리의 영혼을 휘저어 놓는 그리움이 되어버린 신부님과의 미사, 빙그레 웃으시며 비스듬히 기대어 담배 한대 피우시던 그 조용한 기다림. 다 나열 할 수 없는 숱한 신부님의 매력들그 안에서 저희들은 자랐습니다.
신부님이 계셨기에 저희들은 눈부시게 빛나던 시절이 있었고 신부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저희도 찐하게 화끈하게 신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시시하게 안 살았습니다. 신부님과 더불어 가능한 삶이었습니다.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편찮으셨던 지난 십 년. 전 참 신부님께 잘 못해드렸습니다 핑계도 많았습니다. 한 달 전쯤 신부님 제가 하는 꼴이 맘에 안 드시지요 했더니 아니라고 해 주셔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정구 아플 때 아침부터 밤까지 매일 매일 병원 계단과 복도에서 기도하시며 안타까워 하시던 신부님 전 정말 너무 잘 못해 드렸습니다. 편찮아 계셔도 신부님, 한 하늘 아래 함께 숨쉬고 살아 계시다는 게 얼마나 감사했는지, 달려가 뵐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이었는지 모른답니다.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린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저희들 , 신부님의 존재는 컸습니다. 많이 그리울 것입니다. 많이 아플 것입니다. 저희들은 신부님의 그 빛을 그 향기를 아득해지지 않게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뒤에 오는 이들도 그 길을 따라 가도록 그렇게 그렇게 가 보겠습니다. 정구에게 늘 묻듯이
신부님께 묻고 또 물으며 가겠습니다.
신부님 뵈러 가는 날, 영혼이 된 정구 손 잡고 무덤 위에 잔나비 휘파람 불며 뛰놀겠습니다
신부님 평안히 하느님 품에 영면 하시옵소서."
"시시하지 않게 살았습니다."라고 당당하게 신부님께 전하는 조사 내용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 기나긴 세월을 그냥 알 수 있었다. 이분들은 정말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조사였다.
정일우 신부님은 천주교용인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사진- 최영숙 진혼무를 추다
신부님의 무덤에서 진혼무를 추었다.
“가지소서, 주님 그리고 받으소서. 모든 저의 자유와 저의 기억과 저의 지성과 모든 저의 의지를, 제가 가진 것과 제게 있는 모든 것을. 당신께서 이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주님, 당신께 이를 돌려 드립니다. 모두 당신 것이오니, 모든 당신 뜻대로 하소서, 제게는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주소서. 이것으로 저는 넉넉합니다.(로율라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234)
정일우 신부님 영결미사 순서지에 쓰인 글은 신부님의 인생을 아니 모든 수도자의 삶의 자세를 바라보게 하는 글이었다. 한 번이라도 이렇게 겸손해졌는가 하는 생각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사진 - 제정구 장학회 제공 정일우 신부님과 제정구 전 국회의원
그렇게 또 2년이 흘렀다. 2016년 6월 2일 천주교용인공원묘지에서 2주기 추모미사가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오전 10시경 도착했다.
<정일우 이야기>를 읽으면서 신부님을 더욱 이해하게 되었다. 음악과 춤과 사랑이 넘치는 농촌가정에서 자란 신부님은 형과 누나와 함께 말을 달리던 시절을 그립게 추억했다. 아버지는 무척 유머러스하고 긍정적인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라디오에서 음악이 흐르자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춤을 청했다고 한다. 음식이 탄다고 하자 아버지는 그럼 춤을 추고 탄 음식을 먹으면 된다며 어머니와 춤을 추셨다고 한다. 신부님의 호방함과 넉넉함, 정태춘을 좋아했던 그 음악적 감성과 늘 유쾌하고 유머러스했던 그러함에도 불의와 가장 낮은 곳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모든 것을 던졌던 신부님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부님은 1969년 9월 11일 당시 3선 개헌을 반대하는 학생들이 연행되는 것을 보고 “대한아 슬퍼한다. 언론자유 시들어간다!”며 1인 시위를 해서 추방위기에 몰렸었다. 신부님은 “복음은 입으로만 살고 있다.”는 자각에서 1973년 11월 청계천 판자촌으로 들어가서 첫날밤에 청년 제정구를 만나고 의기투합한 깊은 두 사람은 그곳에 살면서 공동체를 만들고 판자촌이 철거될 때 투쟁하여 복음자리 등을 만들고 막사이상을 공동수상했다.
오랜 세월 신부님과 인연을 맺었던 복음자리 제정구장학회의 신명자 여사가 무덤에 놓을 음식을 정성스럽게 준비해왔다. 신명자 여사는 “정일우 신부님은 친구고 시아버지 같고 뭐든지 다 된다. 단식을 너무 오래 하셔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아프실 때 잘 못했다. 우리가 모셔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했지만 수도자시니까 할 수 있는 게 적어서 마음만 그랬다.”며 아쉬워했다.
사진 최영숙 추모미사를 드리다
조진배 바오로 신부님이 정일우 신부님 추모 2주기 강론을 했다.
“정일우 신부님을 떠올리면 먼저 ‘자유로움’입니다. 제가 20대 일 때 신학생이었고 공장에 다니면서 노동체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학교를 떠나 결혼을 할 것인가, 예수회에 입회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할 때 양성담당을 맡고 있던 신부님을 찾았을 때 줄담배를 피우시면서 ”예수회가 입회를 허락했다고 해서 반드시 입회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구신부로서 기쁘게 살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을 때 내 마음을 좀 더 분명히 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 떠오르는 단어는 ‘자발적 가난’입니다. 정일우 신부님의 자유로움은 바로 ‘자발적 가난’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 가난을 선택했습니다.
또 떠오르는 단어는 ‘사랑’입니다. 정일우 신부님은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 자발적 가난의 삶을 선택하고자 했고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고자 했습니다. 신부님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던 철거민들이 정 신부님을 참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말하곤 했다.”고 했다.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는 감동적인 강론이었다.
사진 최영숙 정일우 신부님 무덤 앞에 상을 차리다
2주기 추모 미사에서 신부님을 마지막까지 돌보았던 이동춘(1960년생)글라라 씨를 만났다. 이 씨는 “신부님을 병원에서 간병을 했고 댁인 평창동에서 마지막까지 모셨다. 신부님은 끝까지 당신은 선교를 하겠다고 하셨다. 한국은 너무 잘살아서 미얀마에서 선교를 하고 또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겠다.”고 했다.며 “신부님이 교수직을 박차고 나와서 예수님을 본 받으신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편찮으시니까 내가 만났지 어떻게 만났겠나 싶어 웃으시거나 화내시거나 즐거웠다. 일주일 휴가를 내고 신부님 1주기, 2주기 모두 참석했다.”고 했다.
생전에 음악을 좋아하셨던 신부님께 노래를 불러주는 박준(1960년생) 토마 씨를 만났다. “86년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신부님이 아버지시다. 신부님은 일화 너무 많은데 87년도 민주화 항쟁 때 학생들과 항상 명동성당 언덕에서 스크럼 짜고 반전. 반핵가를 부르고 ”양키 고 홈“을 외쳤다. 그러면 신부님은 “나만 빼고, 나만 빼고.” 그러셨다. 그러면 학생들과 시민들이 보고 웃었다. 유머러스하고 칼 같은 분이었다. 신부님은 로만칼라를 하지 않았다. 이것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만날 때 권위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들이기 때문에 부족한 불효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로만칼라를 하지 않고 평상복을 입고 있는 영정사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진 - 제정구 장학회 제공 복음자리 벽돌집을 짓다
민경자(1946년생)베아타 씨는 “정 신부님과는 빈민 활동을 시작하면서 가깝게 뵈었다. 복음자리에 들어가고 제 선생님과 두 분이 많이 다녔다. 그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역사회에 들어가지 않았다. 최초로 신부님이 청계천이든, 복음자리든 실제로 몸으로 실천하셨다. 또한 정신적 지주였다. 신부님은 소박하고 겸손했다. 일을 하면서 앞으로 나서는 것을 못 봤다. 빈민 활동을 해도 옆으로 가고 뒤로 가라. 앞으로 나서서 하지마라. 고 하셨다. 지역사회 사람들 사회에 묻혀 들어가서 사셨다. 신부님은 뒤에서 도와주셨다. 당신은 늘 추리닝차림이었다. 소박한 차림으로 사셨고 섬세하고 예민하고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고 회고했다.
강행순씨는 “정일우 신부님이 계셨기에 그 서슬 퍼런 시절에 그나마 제정구 선생님이 보호받는 부분이 있었다.”고 했다.
사진 - 최영숙 정일우 신부님 2주기
유시찬 보나벤뚜라 신부님은 <정일우 이야기> 책의 ‘능구’ 선생님에서 “너랑 나랑 다른 점은 난 다소 애매모호하게 이야기하는데 넌 훨씬 더 분명하게 이야기 하는 거야. 내가 머리 수준으로 알아듣고 입으로만 떠들어 대고 있는 것을 신부님께서는 온전히 몸으로 체화해서 삶 속에서 그대로 살아내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능구’란 별호가 생긴 것이라고 짐작된다. 범인인 우리 눈에 그저 구렁이 담 넘어가듯 두루뭉술하고 죽도 밥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선인들과도 어울려 거침없이 술잔을 기울이시고 악인들과도 아무렇지도 않게 밥상을 함께 하신다. 마치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신부님 안에 얼마나 크고 뚜렷한 원리가 내재되어 있고 매 순간 맹렬하게 움직이고 있는지는, 적어도 내 눈에는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원리요. 복음의 원리요. 예수님의 삶의 원리에 대한 깊은 확신이 터 잡은 운신이, 신부님과 이야기 나누다 보면 그대로 포착된다. 능구렁이처럼, 혼돈처럼 보이는 그 곳이야말로 생명을 잉태하고 생명을 낳고 키워내는 곳이 아닌가. 밝음과 어둠이 하나로 뒤엉켜 휘돌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어우러지고, 선과 악이 상생하며 하늘로 치솟는, 바로 이 자리가 하느님 자리고, 사람의 자리고, 생명의 자리이지 않는가. 신부님은 서슴없이 그 자리에 깊게 머물고자 하신다. 거기에서 모든 죽어가는 생명들을 되살려내려고 하신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능구’라고 애칭을 부르는 그 말에는 신부님을 가장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제정구장학회 제공 복음자리에서 김수환추기경을 모시고 정일우 신부님 환갑잔치를 열다
,송환>을 찍었던 김동원 감독이 정일우 신부님 다큐를 만들고 있었다. 김동원 감독은 3주기 때 꼭 완성해서 약속을 하겠다고 했다.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정일우 신부님의 기록은 한 사제의 기록일 뿐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신부님들도, 청년도 신부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늘 말없이 안아주는 그냥, 인정해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만났던 것이다. 당신의 그늘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알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능구’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늘 그 깊고 따스한 사랑을 기억하겠습니다.”고 했다. 그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나 또한 그 깊고 넓은 사랑을 이미 받았기 때문이다.
돌아오면서 정일우 신부님께 깊은 인사를 드렸다.
첫댓글 정일우 신부님, 김수환 추기경님, 제정구 의원님.
현대사의 큰 이름이라 생각됩니다.
큰 흐름을 읽고 따르는 그들을 마음에 새겨 봅니다, 오늘.
정일우 신부님을 생각하면 빙긋 웃음이 나오는, 언제 생각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이런 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고맙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배려와 나눔의 진정한 의미를 가장 잘 아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런 분들이 있기에 아직 세상은 살 만한 곳이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