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밝은 달에
밤 늦도록 놀며 지내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내 아내) 것이었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
본디 내 것이다만은(내 아내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겠는가.
* 옛글자가 지원되지 않아, 아래아는 ㅏ 로, 반치음은 ㅈ 으로 표기함 *
● 배경 설화
신라 제 49대 헌강왕 때에는 서울에서 지방까지 집과 담이 연이어져 있고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다. 길거리에 풍악이 그치지 않고 비바람도 사철 순조로웠다.
헌강왕이 개운포(지금의 울산)에 놀이를 베풀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에서 잠시 쉬고 있었는데,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일고, 천지가 캄캄하여 앞길조차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괴이하여 좌우에게 물어보니 일관이 여짜옵기를 "이것은 동해용의 조화이오니, 무슨 좋은 일을 행하여 이를 풀어야겠습니다."라고 한다. 그래서 소관 관리에게 칙령을 내려서 용을 위하여 그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하였는데, 이 칙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다 개었다. 그래서 거기를 개운포(開雲浦-구름이 개인 포구)라 불렀다.
동해의 용은 기뻐서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어전에 나타나서 왕의 덕을 찬송하여 노래하고, 음악을 올리며 춤을 추고, 그 한 아들을 왕께 주었다. 함께 서울에 와서 정치를 보좌하게 하였다. 이 용의 아들이 처용이다. 왕은 처용을 오래 멈추어 두기 위해서 아리따운 아내를 주고, 또 벼슬을 주었다.
처용의 아내는 절세의 미인이어서 역신이 그를 흠모해서 사람의 모양으로 변신을 하고, 어느 날 밤 그의 집에 이르러서 몰래 함께 자고 있었다. 처용은 바깥에 나갔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둘이서 함께 자고 있는 지라 자기는 노래를 부르고 춤추며 물러났다. 이 때에 역신은 모양을 나타내고 처용의 앞에 꿇어 앉아서 "제가 공의 부인을 흠모하여 지금 범했는데, 공이 보시고도 노여워 하지 않고 도리어 노래를 부르시니 이 후로는 공의 모습만 있는 곳이라도 결코 들어가지 않고, 피하리다." 하고 사죄하였다.
그로부터 나라 풍속에 처용의 그림을 문간에 붙여서 역신의 해를 피하곤 하였다.
이때 처용이 지어부른 노래를 <처용가>라 하고, 춘 춤을 처용무라 하여 후대까지 전해내려왔다.
한편 설화에서는 처용을 동해 용왕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당시 울산 지방에 있었던 호족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혹은 당시 신라에 내왕하던 아라비아 상인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 문이나 지붕에 처용 그림을 붙이게 된 기원
이 노래는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조에 실려 있다. 처용은 용왕의 아들로 경주에 들어가 예쁜 아내를 얻고 급간 벼슬을 하였다. 밤에 그의 아내가 역신과 함께 동침하는 것을 보고 이 노래를 불렀더니 그 역신이 물러났다고 한다. 뒤에 처용의 화상은 역신을 내모는 기능을 하여 문신(門神)이 되었다.
● 처용은 무당이다?
역신(疫神)을 물리치기 위한 축사(逐邪-사악함을 쫓음)의 노래이다. 따라서 이 노래는 집단적인 주술성을 띠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의 가사는 매우 개인적이며, 보통 사람들의 공통적인 정서가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이 노래에 쓰인 영탄의 표현 기법은 분노와 슬픔, 체념과 관용의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함축하면서 전체적 긴장과 갈등을 고조시킨다. 이러한 양면성으로 인하여 이 노래는 종교적, 역사적, 축사 및 벽사진경의 시각으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전반 4구는 아름다운 아내를 탐한 역신의 침범을, 후반 4구는 역신에 대한 처용의 관용 또는 체념을 노래하고 있다.
배경설화에 의하면, 결국 역신은 처용의 관용에 감복하는데, 이리하여 처용의 형상이 벽사진경의 효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처용은 무당으로, 처용의 형상은 부적으로 이해되기도 함으로써 이를 무가(巫歌)로 분류하기도 한다.
역신이 처용의 너그러운 태도에 감복하여 자신의 본체를 밝히고 물러간 내용과 관련하여 무속(巫俗)에서는 아무리 악한 신이라도 즐겁게 하여 보낸다는 풍속과 한국인의 여유있는 생활의 예지를 엿볼 수 있다.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라는 말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처용의 초월적 관용성을 보여 주는 것으로, 체념은 결코 무력함이 아니라 하나의 아름다운 결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처용의 이야기는 뒤에 처용무, 처용희 등으로 극화되었으며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도 이 노래와 춤이 지속되었고, 12월 그믐에 잡귀를 몰아내는 나례 때에 처용놀이를 하기도 했다. 처용랑 망해사 설화에는 망해사 창건에 얽힌 이야기와 그리고 몇 차례에 걸쳐 나라가 망할 것을 신이 미리 예고했지만 왕과 신하들은 방탕한 생활에 젖어 끝내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처용가>의 내용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민속학의 관점에서 처용을 무속과 관련하여 보는 견해와
둘째, 정치사의 관점에서 처용을 지방 호족의 아들로 보는 견해
셋째, 신라 시대에도 멀리 서역(지금의 인도) 지방과 교역이 있었다고 보아 처용을 이슬람 상인으로 보려는 견해 등이 있는데, 처용을 무속과 관련하여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할 듯하다. 이는 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자고 있는 것을 보고도 '노래를 부르고 춤추며 물러났다'고 하는 것은 상식의 범주를 벗어난 무격사회에나 있을 법한 풍습이기 때문이다. 또한 악신(惡神)이라도 즐겁게 해서 보낸다는 무속의 풍속과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 작품 정리
* 출전 : 삼국유사
* 연대 : 헌강왕
* 형식 : 8구체
* 성격 : 축사(逐邪), 벽사진경 (酸邪進慶-사악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를 맞아들임)
* 주제 : 아내를 빼앗은 역신을 쫓은 벽사의 노래
* 의의 1) 벽사진경의 민요에서 형성된 무가
2) 의식무 또는 연희의 성격을 띠고 조선 시대까지 계승
3) 현전하는 신라 최후의 향가
* 시상 전개
1 - 4구 : 역신의 침범
5 - 8구 : 처용의 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