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Religious people find God useful. Gospel people find him beautiful" 종교적인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유용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만, 복음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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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명문장은 종교와 복음의 본질적 차이를 보여준다. 결국 복음은 하나님 그 분 그 자체를 찾는 것이고, 종교는 하나님으로 인한 유익을 찾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목표이지만, 종교는 결국 자기유익이 목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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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도>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 행복 그 자체이다." 라고 말한다. 누군가와 결혼을 하는데, 결혼을 통해 얻을 유익 때문에 사랑을 고백한다면 그 사랑이 진실한 것이겠는가? 그 사람 자체를 보고싶고 헤어지고 싶지 않을 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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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내가 여호아께 바라는 한 가지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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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앙의 본질이 흐트러지고 하나님을 유용하게 이용하려는 시도들이 쉬워지는 시대를 살아가는 것 같다. 자크 엘률의 말처럼 기술사회가 되면서 사람들과 만남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만남을 통해 내가 받을 유익이 목적이 되는 사회 속에서 점점 삭막해져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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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경영을 하는 회사에서도 윤리경영이 결국 매출의 상승에 이바지하고, 내부 직원들의 애사심을 고취시켜서 결국 회사에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회사의 유익을 위한 윤리이지 윤리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윤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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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를 하면서 성경 속에 흐르는 하나님 그분의 인격,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물도 없고 양식도 없다고 불평했지만, 정작 물과 양식뿐 아니라 온 세상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는 것을 간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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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인생의 비전이 아닐 수도 있다. 가슴 벅찬 삶, 내가 원하는 무엇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원함 자체가 변화되어야 한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다윗처럼 하나님이 한 가지 소원을 아뢰라고 말한다면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고백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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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신앙이란 내가 원하는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원함 그 자체가 변화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바라보고 감격하며, 나도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해 영광의 짐을 질 수 있는 영적 희생의 자세를 가지며 살아가는 것이다. 간절한 원함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되기를, 하나님 그분을 만나고 그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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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고백했다. '잡힌바 된' 즉 신앙이란 먼저 사로잡히는 것이다. 매료되는 것이다. 그분의 아름다우심에 매료되어,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열정의 삶이다. 하나님은 유용의 대상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대상이다. 그 아름다움 그 자체를 사모하며 감격하는 복음의 본질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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