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눈물
송 희 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감정의 눈물을 흘리는 유일한 존재다. 이는 슬픔이나 분노를 자아내기도 하지만, 행복함과 감사함을 느끼게도 한다. 나는 요즘 인생 후반전에 가속도가 붙어 나날이 더 소중하고 귀하게 느껴진다.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는 순간의 일들이 더 곱씹어지고 되짚어 보게 된다.
여자의 경우 그 감정 표현이 섬세하다, 그에 바하여 남자의 눈물! 남자는 흔히 가슴으로 운다고들 말한다. 남자들은 기질 상 여자처럼 세세하게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며, 대범한 면이 있다. 여자처럼 얼굴에 감정 표현을 바로 표출하지도 않고 가슴으로 품고 있다. 우리 집의 경우, 난 감성적이나 남편은 이성적인 편이다. 부부로 45년 차 그와 살아오면서 난 의아스럽고도 새롭게 놀란 일이 몇 번 있다.
아주 오랜 적 이야기로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당시 내가 창밖의 여자였던 것 같다.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다녀와 우리가 살 집의 안방으로 들어섰다. 그 당시 홀 시모님의 건강 상태가 갑자기 암인 걸 알게 되어 다급하게 우리의 결혼이 진행 되었다. 대전이 텃밭으로 가족과 함께 사는 집이었다. 암 선고를 받으신 시모님께서 혼기에 찬 둘째 아들을 두고는 눈을 못 감겠다는 말씀에 서둘러 결혼을 한 것이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면 당연히 인사를 새사람으로서 어른이신 어머니께 절을 올려야 함을 잘 알고 있다. 당시에 시동생과 시누이는 직장이 객지라 주말이나 집에 올 때다.
시어머니와 큰 시누님은 집에 계실 줄 알았는데 안방에 들어서니 아무도 없는 빈방이었다. 덩그러니 우리 둘만 서 있었다. 나도 휑한 안방에 영문도 모른 채 이방인 새색시로 의아스러워 엉거주춤 서 있었다. 신혼여행서 돌아오면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다 반기며 맞이해 줄 줄 알았다.
갑자기 남편은 전화기 옆으로 가서 서 있더니 참았던 눈물을 '큭 큭!' 거리다가 봇물 터지듯 울음을 터트리며 우는 거였다. 나는 그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자들이 우는 건 많이 봐 왔어도 젊은 남자가 직접 내 앞에서 목 놓아 우는 뒷모습을 처음 접한 것이다. 아마 그때 시모님은 큰일을 치르시느라 몸 상태가 안 좋아져 치료차 어딜 가셨던 것 같다. 나 또한 남편과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가슴에 요동치며 눈물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나는 결혼하자마자 이들 모자의 끈끈한 사이에서 큰사랑과 섬김으로 정성을 다하고자 굳게 다짐하고 노력하며 살았다.
나도 어느새 세월이 흘러 내 나이가 시모님이 일찍 가신 나이를 훌쩍 넘어섰다. 두 아들은 서른을 넘어 결혼했고, 그 중 둘째 아들은 결혼 7년여 만에 어렵사리 득남하였다. 지금은 그 손주가 첫돌을 지나 잘 자라고 있다. 잉태 소식을 들은 그 순간의 감회를 우리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잉꼬부부같이 사이가 좋은 둘째네가 후손 소식이 없어 우리로선 매일 기도만 하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일산 사는 둘째 아들로부터 잉태 소식 전화가 왔다. 외출에서 귀가해 거실에 들어와 소파에 앉으려는 남편에게 난 그 소식을 급히 전하였다.
"여보! 우리 집안에 진짜 축하할 경사가 났어요. 둘째네가 이번에 정말 임신이 되었대요. 내년 봄이면 우린 세 손주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겠네요."
"어! 정말?"
하더니 남편은 감격에 겨워 털썩 주저앉아 흑흑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가슴에만 품어 온 손주 기다림에 새 소식을 듣고 그 기쁨을 눈물로 또 쏟아내었다. 나도 손을 잡아 일으키며 거실 예수님의 십자고상 앞에 같이 서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최근 얼마 전에는 남편 절친 아내의 마지막 말이 지금도 생각하면 내 귓전을 울려 나를 숙연하게 한다. 남편은 대학 시절 절친이 지금까지 죽마고우로 지내는 친구가 몇 명 있다. 그중에 대구에 사는 친구는 현재도 왕성한 사업가다. 그 아내 또한 번족한 장손 집 며느리로 시부모님 모시며 작은 사업을 했다. 가정에서나 사업 쪽 둘 다 원만하게, 효부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그렇게 바쁘고 폭넓게 살다 보니 과부하가 걸린 모양이다. 유방암이 발병되어 투병 생활을 12년이나 하였다. 처음 수술 후 3년 만에 재발하여 9년여 전심 노력하며 투병하였다.
그녀는 나의 폐암이란 급보에 놀라 대구서 내 건강을 염려하며 격려의 전화가 자주 왔다. 그러기를 한 달여가 지나자, 전화가 뜸해졌다. 나도 그때는 수술 후 초창기라 힘든 상태로 나보다 건강하고 바쁜 줄로만 알았다. 궁금하던 차에 그렇게 부부가 최선을 다해 투병에 노력했는데 12년을 앓다가 하늘나라에 갔다는 비보가 왔다. 남편 대학 절친 세 명의 부부는 서로 멀리 서울과 대구, 제주도에 산다. 졸업한 지가 몇십 년이 흐르고 일이 달라도 지금껏 만남이 계속되며 우정은 쌓여가고 있다. 얼마 전에는 그 친구들이 우리가 사는 대전으로 와서 만남을 가졌다. 대구 친구가 5년 전에 떠난 아내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귓전에 맴돌고 있단다. 들릴 듯 말듯 작은 소리로 그의 아내가
“여보! 나 좀 안아주세요. 손도요."
그 소리를 한 후 6시간 만에 운명을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내게 하는데 내 남편 얼굴에는 어느새 소리 없는 눈물이 흐르고 있다. 나도 너무 목이 메어 남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
인생살이에서 누구나 희비애락을 겪는다. 사람끼리 서로 기대며 부부는 더욱 동고동락하며 산다. 남자는 강하고 삶의 고통과 슬픔을 가슴으로 품고 살아간다. 여자보다 강한듯하나 큰 슬픔과 기쁨에는 드물게 표출하는 눈물에 더 함축된 깊이가 있다. 그 눈물에는 또한 내면의 정화와 치유가 되기도 한다. 바다의 모래알같이 많은 인연 중에 부부로 만나 산지 우리는 반백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혹여 남편의 가슴에서 분출된 눈물이 또 솟구친대도 나 또한 보듬으며 함께하는 영원한 반려자로 지킬 것이다. 남은 삶은 현실을 초연히 관조하며 조금은 아쉬운 저녁노을로 아름다운 마지막을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