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세종대왕과 함께 가장 위대한 개혁군주였다.
특히 수원화성에 쏱아부운 그의 혁신적인 성곽축조와 개혁도시창조는 융릉과 함께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의 마침표였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난다.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변하면 생육된다.그러니 지극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있다.
.......중용23장/영화 역린 중에서.
정조는 책벌레였다.주위가 온통 책으로 둘러 싸였다고한다.학식이 깊고 다재다능했다.
정약용등 실학파학자를 대거 등용한 것과도 무관하지않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권력은 왕이 아니라 사대부의 손에 있었다.
노론 벽파의 사대부와 백성 사이에서 엄청난 한계를 몸으로 부딪치며 암살의 위험에서
벗어 나고자 했던왕.벽파의 거두,우의정 심환지에게 은밀히 전해진 300 여통의 서찰은
참담했던 왕의 이면이기도했다.
"아,오늘날 나랏일은 머리털까지 다 병들었다.온갖 법도가 다 해이해졌는데도
개선될 가망이 없고,조정의 기강은 확 풀려있고 민생은 곤경에 지쳐있다."
정조의 치세어록 중에서
호국의 달,6월에 사도세자의 융릉에 다녀왔다.
경건한 6월에 세월호참사로 전국이 침잠되어있고 지방선거로 정국은 뒤숭숭하다.
디스크로 심기가 불편한 내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고 심호흡으로도 가슴의 답답함은 가시지 않는다.
그동안 여러차례 휴식의 공간이었던 융건릉이 갑자기 나를 일으켜 인도한다.
조선왕조는 471년간 27분의 왕이 재임하였다.정조대왕은 22대왕이고~
조선왕릉은 왕비의 능까지 40기의 능이 온전히 보존되고 지금까지 제례가 어어진다.
세계에서 한왕조의 능이 이렇게 잘 보존되고있는 것은 유래가 드문 일이라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융릉은 조선왕조 40기의 능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능을 설계하고 조성할 때부터 화성과 마찬가지로 정조가 일일히 관여했다.
매표소입구 죄측에 서있는 수령 140년의 향나무가 먼저 맞이한다.
향은 부정을 제거하여 깨끗히 하는 정화기능을 한다.세속과 성스러운 공간을
분리하여 순수함을 만들기에 제사나 종교의식은 향을 피우므로서 시작된다.
잠시동안 머물러 내 심신의 사악함을 정화시킨다.
매표소입구 정면에는 2009년6월30일에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기념표지석이
세워져있다.
수원화성과 융능같은 동시대의 작품이 세계문화유산에 나란히 등재된 것도 드문 일이고,
세계적으로도 배우자(왕후)를 위한 추모건축물은 많아도 아버지를 위한 건축물이 등재된 것은
희귀하다.
경내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갈참나무가 반긴다.피트치트향이 온몸을 휘 감는다.
예로부터 우리선조들은 가장 좋은 것을 "참"으로 표현하였다.참사랑,참맛,참기름등등.
오늘 본 어느 아파트이름도 참누리울트라 아파트였다.
정조임금은 인근주민들에게 가구당 한 삼태기씩의 재를 가져다 뿌리게 하여 이 숲을 가꾸었다.
융능으로 가는 길목에는 적송이 자라잡고있다.우연의 이치일까? 아니면 내가 잘 못 본걸까?
그중 많은 나무가 정조의 능인 건릉을 향해 비스듬히 서있다.
첫번째 석교는 정조 사후 70년후인 1870년에 놓여졌다.
석교를 지나 왼쪽에 있는 곤신지(坤申地). 융릉이 이곳에 천장(이장)된 이듬해에 조성된 인공연못.
풍수지리상 이곳에 물이 있으면 좋다고 하여 궁궐의 연못을 모방하여 석축으로 축조하였다.
죽어서 부자는 2.18키로의 거리에 나란히 누워있다.
골초인 정조가 걸으면서 담배 한대 피는 시간의 거리에있다.
금천교.능역과 속세를 구분하는 다리로 능역의 신성함을 나타낸다..
홍살문.영혼이 출입하는 문으로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붉은 기둥의 문.
판위 또는 배위.헌관이 제례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곳으로 이곳에서 절을 사배함.
참도.참도는 신도(神道)와 어도(御道)로 구분된다.
폭3M의 돌길로 중안의 신도는 폭이 더 넓고 높이도 더 높다.우측은 어도이고.
어도는 제사를 드리는 왕이 다니는 길.
수라간.제례때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는 건물.
정자각.제사를 지내는 건물.
정청과 배위청으로 나뉘어져 있고 두건물이 丁자와 닮았다하여 정자각이라한다.
조선의 모든 능은 정자각이 능을 가리고 있으나 융능만은 정자각이 능에서 비껴서있다.
암흑속 밀폐의 공간에서 죽어 간 아버지가 죽어서라도 답답하지 않게 시야가 가리지 않도록
배려한 능의 배치다.
한여름 뙤약볕 속에 무려 8일간 물 한모금,죽 한 숫가락없이 밀폐된 뒤주 속에 같혀 있다가 죽은
사도세자의 모습은 뒤주벽을 긁다가 손톱이 다 빠져 버렸고,오줌까지 받아 마시다가 구부린채 죽어서
입관조차 힘 들었다고한다. 아비가 아들을 죽이는데 이보다 더 잔인할 수가 있을까?
그 이튿날,영조가 신하를 시켜 구술한 공식적인 내용은 이렇다.
"너는 어찌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렇게 망극한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
내 진실로 아무 일 없기를 바랐는데 9일째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으니~"
정자각을 정면에서 올라가지 않고 측면의 돌계단으로 오른다.
생명의 싹,영기화생(靈氣化生)의 문양을 새긴 돌계단.
*영기:신령스러운 기로 우주에 충만한 생명력.
.....강우방예술론 중에서
비각.
대한
장조 의황제 융릉
현경 의황후 부좌
.....고종 광무 4년 (1900년)건립
조선국
사도장현세자 현릉원
.....조선 정조13년( 1789년)건립
옛날에 영조라는 한 임금이 있었다.그왕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학문보다는 노는 것과
무예에 더 열심이었다.훗날의 사도세자는 그당시의 실세인 노론쪽의 딸인 혜경궁 홍씨와
결혼하지만 소론쪽의 스승을 만남 뒤부터는 소론편을 들기 시작한다.
이에 위험을 느낀 노론쪽 대신들이 세자의 10가지 비행에 관한 상소를 올린다.
상소를 받아들인 영조는 아들을 서인으로 폐위시키고 뒤주에 가두어 8일만에 굶어 죽게한다.
이때 사도세자는 27세,정조의 나이는 10세의 아이였다.
정순왕후/영화 역린 중에서
한편 할아버지 영조가 66살때 15살의 여자아이와 결혼(1760년)을 한다.이 여자아이가 영조의
죽은 첫째부인에 이어 두번째왕비 정순왕후(1745~1805년)가 된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를 죽음(1762년)으로 내몬 노론 벽파의 영수인 오흥부원군 한구의 딸이다.
이후 자식이 없던 정순왕후는 10살 손위의 사도세자(1735~1762년)와 사사건건 부딪친다.
사도세자 사후에는 환구에 이어 노론벽파의 영수가 된 우의정 심환지와 함께 정조(1752~1800년)의
영원한 정적이된다.심환지는 정조가 죽자마자 영의정으로 제수되어 순조의 섭정인 정순왕후와
정국을 주도한다.1805년 정순왕후가 죽을 때까지 세차례의 금압령으로 천주교탄압이 있었으며
1811년에는 홍경래의 난까지 겹친다.
조선왕실에서는 임금의 유언조작을 방지하기 위하여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여성이 임금의 임종참여를
금지했다.그러한 법도를 깨고 정순왕후는 내관을 물론 의원까지 먼발치로 내쫒고 홀로 정조의
마지막 임종을 지킨 것으로 기록된다.임금의 몸은 어느 경우에도 부검을 못하게 되어있다.
이것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정조 독살설의 내용이다.
정조가 겪었던 시대의 편린들은 오늘날 세월호참사로 한꺼번에 분출되는 국민의 노여움과
기득권층의 오만함 사이에서 고심해야하는 양식있는 지도자의 모습과 다르지않다.
세월호는 가라앉고 세월은 다시 흘러 가는데 정치는 과거의 폐답만을 온전히 반복하고있다.
역사는 되풀이 되고 우리는 지나온 역사에서 쉽게 배울 수있다.
그러나 신은 우리에게 양약과 독약이 동시에 들어 간 "망각"이라는 재능을 주셨다.
"기풍을 세우고 세상에 기운을 불어넣어 기우는 나라를 붙잡고 위기를 헤쳐나갈
책임을 누구에게 맡기겠는가.".......정조의 치세어록 중에서
지방자치를 이끌어 갈 수장들이 선출되는 오늘,
선출되는 분들이 임기동안 사심없이 대한민국호를 잘 이끌어 주시기를 바라면서~
***주)역린
용의 턱밑에 난 비늘을 건드리면 용이 크게 노한다는 전설에서 나온 말.
정조즉위 1년후인 1777년7월28일,정조의 침소까지 자객이 들어왔던 정유역변의 실화 24시간을
담은 사극영화다.정조에 얽힌 영화가 너무나 많아서 별로 기대하지 않고 갔다가 뜻밖의
소득을 올리고 왔다.
PS:정조에 관한 많은 정보와 영감을 주신 김작가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답사 팁 1)
융건릉 앞 먹거리와 구경거리.
맛있는 동까스와 허브세상.
031.224.0693 화성시 안녕동 186-97
융건릉을 등지고 좌측 대각선방향 300m 지점에 있슴.
1층은 허브세상 매장.허브향 맡으면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
2층은 내사랑동까스.
국산신선육만 사용한다는 착한식당.
동까스집이지만 베트남쌀국수까지 메뉴가 다양하고 쌀국수도 맛이 괜찮다는 입소문.
가격도 그런대로 납득할 만하다.
갓 구어낸 따끈한 빵이 제일 먼저 나온다. 크림버터와 함께 입맛을 사로 잡는다.
메인후드인 동까스가 푸짐하게 2개씩이나~
생선가스도 결코 맛이 뒤지지 않는다.
스라이스된 생선가스.
이건 동까스이고.한국식 동까스는 대체로 고기가 얇고 넓으며 밀가루튀김이 두꺼워서
대체로 아이들이 좋아하는데 이것은 일본식과 절충형이라서 어른들에게도 섭섭하지 않다.
고기에 소스를 추가하면 풍미가 더 깊다.
입맛이 까다라온 마눌의 빈접시.이쯤되면 체면 안 차리고 막 가자는 말쌈?
친절한 금자씨~후식으로 원두내린커피까지 셀프로 준비되어있다.
먹고나니 포만감으로 이렇게 퍼져 버렸다.
그냥 갈 수 없잖여~1층매장에서는 아로마핫백도 어깨에 얹어주고 향도 뿌려준다.
아이쇼핑만해도 눈치가 안 보일 정도로 편하게 대해준다.
그러나 아이를 동반하면 그냥 나오기 힘든 치밀한 디스프레이공간도 있다.
화성에서 여행사진작가 서호소나무. (끝)
첫댓글 역사성도 있어면서 입도 즐거운 좋은 곳 다녀 왔구려. 한번 가고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