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권 한말 전기의병 / 제6장 일본군과의 항전 1. 일제의 전선가설기대의 설치와 군용전신선 가설 2. 일본군수비대와 임시헌병대의 설치 3. 의병의 일본군과의 항전 1. 일제의 전선가설기대의 설치와 군용전신선 가설 1894년 6월 3일 조선정부는 청국에 동학농민군을 진압할 군사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정작 대병력의 출병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일본이었다. 국내의 ‘행정정리’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중의원에서 내각탄핵안이 가결되어 곤경에 처해 있던 이등박문伊藤博文 내각은 6월 2일 조선이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기로 했다는 전보를 받고 중의원을 해산하고 동시에 조선 출병을 결정하였다. 일본의 출병 결정은 조선이 청국에게 파병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기 하루 전이었으니 이등박문 내각이 국내의 정치 문제를 대외 문제로 진화시키고자 한 흔적이 역력하다. 일본은 6월 5일 전쟁수행을 위한 대본영을 설치하였으며, 내각의 지시를 받은 조선공사 대조大鳥는 육전대 병력을 이끌고 9일 인천에 상륙하여 다음 날 서울로 침입하였다. 이어서 보병 제11연대를 선발대로 하는 혼성여단이 12일 인천에 상륙하였다. 註1) 혼성여단 내에는 전쟁수행에 필요한 병참부와 야전병원까지 포함시켰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조선을 둘러싸고 지배권을 장악하려는 청일전쟁은 일본의 정략적인 기도에 의해서 촉 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광도廣島에 사령부를 둔 제5사단을 조선에 파견하면서 그 산하에 전선가설기대電線架設技隊를 설치하고 조선의 허가도 없이 경부간 군용전선을 가설하였다.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명령의 전달과 상황보고 등을 위한 전신선의 확보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관건이 될 정도로 중요한 것이 사실이다. 당시에 조선에는 서울·인천간의 경인선과 서울·의주간의 서로전선, 서울·부산간의 남로전선, 서울·원산간의 북로전선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이 전쟁 수행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부선이 불통되는 일이 잦았다. 일본에서는 그동안 경부선보다는 서울에서 청국 북부를 지나 상해까지의 청국 전신선을 경유한 해저전신을 주로 이용해왔다. 註2) 그러나 청국과 전쟁까지를 계획하고 있는 일본으로서는 기존의 청국 라인을 이용할 형편이 못되었으며 이에 따라 독자적인 군용전신선을 가설하고자 한 것이다. 일본은 6월 26일 ‘전선가설기대’를 편성하였다. 이 전선가설기대는 2개대로 편성되었다. 제1기대는 본부대와 2개 지대로, 제2기대는 본부대와 1개 지대로 편성되었다. 본부에는 각기 사령관 아래에 부관과 군리軍吏 그리고 재료주관 장교가 한 명씩 편성되었다. 제1기대 사령관은 길견정吉見精 소좌, 제2기대 사령관은 마장정웅馬場正雄 소좌가 맡았다. 註3) 다음은 각 기대의 계급별 편제표이다. 註4) 〈표 1〉전선가설기대
주: 1) 輜重輸卒은 용역자로 충당함 2) 공장운반부, 인부에는 취체로써 편성표 인원 외에 50人長과 100人長을 두고 본 표 중에 △표를 붙여 구별하였음.
〈표 1〉을 보면, 전선가설기대의 총인원이 제1지대에 345명, 제2지대에 449명으로 모두 794명임을 알 수 있다. 그중에 군인이 장교 9명을 포함하여 마졸과 수졸輸卒까지 307명이며, 군인 외에는 기수 19명을 비롯하여 공부工夫 150명, 공장운반부 215명, 인부 103명 등 487명에 달함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이와 같은 군용전신선 가설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포함한 조선내정개혁안을 조선정부에 요구하였다. 그들이 급무로 여기고 있는 이 요구는 조선정부에 의해 거절당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공사관 서기생 삼촌준衫村濬이 “한정韓廷으로부터 이의를 제기 받았으나 우리는 이미 결심이 있었기 때문에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註5)라고 말하고 있듯이, 조선정부의 허가도 없이 전신대를 데려와 작업을 강행하였다. 註6) 이들 중 제1기대는 7월 3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사령관 길견 소좌의 인솔 하에 입항한 이들은 위의 편제표의 인원보다 22명이 많은 367명으로 확인된다. 이들은 말 5마리를 싣고 왔다. 제2기대는 이보다 하루 늦은 7월 4일 사령관 마장 소좌가 444명을 인솔하고 부산에 입항하였다. 註7) 이들은 7월 5일 정오를 기하여 제1기대는 청주에서 서울까지, 제2기대는 청주에서 부산까지를 작업 담당지로 정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예정보다 1주일 정도 늦은 8월 14일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전구간을 개통시켰다. 註8) 일본은 군용전신선의 가설을 완료하고 나서 길견吉見소좌가 인솔하는 제1기대는 부산병참감에 소속시켰으나, 제2기대는 9월 7일 중로전선가설대로 개칭하였다가 10월 3일 다시 임시남부병참전신부로 개칭하여 전선의 보호와 수선의 임무를 맡겼다. 1894년 10월 현재 임시남부병 참전신부의 편제를 보면 다음과 같다. 註9) 〈표 2〉 임시남부병참전신부 편제(1894년 10월 현재)
이와 같이 전신부는 최고지휘관인 제리提理에 좌관佐官급 장교를 두고, 부관으로 위관位官급 장교 2명을 두었다. 그외에 10명 정도의 병사를 두었으며 나머지는 기수와 배달부가 48명씩, 공부工夫가 140명으로 주로 전신 업무의 인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註 1] 박종근,『日淸戰爭と朝鮮』, 靑木書店, 1982, 15쪽. ☞ [註 2] 참모본부 편,『明治二十七八年日淸戰史』1, 東京印刷株式會社, 1965 ; 姜孝淑, 「日淸戰爭と第二次東學農民戰爭」, 千葉大學大學院 社會文化硏究科 修士論文, 2000, 9쪽. ☞ [註 3]『명치27년 7월 陸軍省 二十七八 년 戰役日記(秘)』日本防衛廳 防衛硏究所 圖書室, M27-1)의 「朝제306호 電線架設技隊職員表等 進報(明治27년 7월 2일)」에 의하면, 1894년 7월 2일 제5사단장이 육군대신 大山巖에게 보고한 技隊의 간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註 4]『명치27년 7월 陸軍省 二十七八년 戰役日記(秘)』日本防衛廳 防衛硏究所 圖書室, M27-1)의 「朝제306호 電線架設技隊 職員表等 進報」. ☞ [註 5] 衫村濬,『在韓苦心錄』 18~19쪽 ; 구양근 ,『갑오농민전쟁원인론』 아세아문화사, 1993, 420쪽. ☞ [註 6] 김상기,『한말의병연구』 250쪽. ☞ [註 7]『日淸韓交涉事件ノ際ニ於ケル軍用電線架設關係雜件』의 「軍用電信線架設ノ件」(日本外交史料館 소장, 청구번호; 5-1-9-1). ☞ [註 8]『매일신문』1894년 8월 21일자 참조 ; 구양근,『갑오농민전쟁원인론』 419~420쪽. ☞ [註 9]『陸軍省日淸戰役 M27-4』 「朝密제588호, 臨時南部兵站電信部編制의 件(大本營, 明治27년 10월 19일)」. ☞ 2. 일본군수비대와 임시헌병대의 설치 1. 일본군수비대 설치 1895년 4월 하관조약이 성립되어 청일전쟁도 끝났으며, 동학농민군도 해체되었다. 따라서 일본군은 조선에 주둔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부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제5사단 후비보병 제18대대와 제19대대, 후비보병 제10연대 제1대대, 제3사단 후비보병 제6연대제2중대 결 등을 계속 주둔시켰으며, 제19대대와 10연대 제1대대를 남부병참감부로 편제하여 병참선로와 전신선 보호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일본은 남부병참감부에 편성되지 않은 제5사단 후비보병 제18대대1,521명와 제3사단 후비보병 제6연대를 중심으로 조선수비대를 편성하였다. 조선수비대는 서울과 부산 그리고 인천지역에 편제하였는데, 경성수비대는 제5사단 후비보병 제18대대, 부산수비대는 제5사단 후비보병 제10연대 제4중대, 원산수비대는 제3사단 후비보병 제6연대 제2중대로 편성하였다. 註10) 이중에 경성수비대인 후비보병 제18대대대대장:馬屋原소좌가 중심이 되어 을미사변을 자행하였다. 일본군수비대 병력인 후비대는 1896년 2월중에 귀국할 예정이었다. 註11) 조선정부에서도 아관파천 후에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일본은 조선 정부의 철병 요구를 거부하고 러시아와 교섭하여 서울에 2중대, 부산과 원산에 각 1개중대의 수비병을 두고 전선 수비를 위한 헌병 200명을 주둔시키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註12) 이에 따라 5월 초에 후비병을 귀국시키고 그 대신에 청국의 위해위에 주둔하고 있던 상비병을 조선으로 이동시켰다. 이때 조선정부에서 요구한 대로 경성수비대대대장:新山良知 소좌에는 보병 제1연대 제1대대본부와 2개중대, 부산수비대중대장:堀毛助 대위에는 보병 제1연대 제1중대, 원산수비대중대장:肉戶民輔 대위에는 보병제1연대 제3중대를 배치하였다. 註13) 이와 같이 후비병의 교대를 마친 후인 5월 14일 소촌小村과 러시아공사 베베르 사이에 러일각서를 교환했는데, 이 각서에서 위 사실이 명시되어 서울에 2개대, 원산과 부산에 각 1개대를 주둔케 하되 1대의 인원은 200명을 넘지 않도록 한다는 규정이 삽입되었다. 註14) 한편 일본은 1896년 1월 남부병참감부의 주력이었던 후비보병 제19대대를 귀국시키고 나머지 부대인 제5사단 후비보병 제10연대 제1대대 병력으로 ‘전신수비대’를 조직하여 부산에서 대구까지의 전신선 보호를 맡겼다. 이 전신수비대는 1896년 1월 하순부터 경기도의 이천·여주일대, 충청도의 제천·충주일대, 경상도의 안동일대와 진주일대의 의병의 탄압에 주력하였다. 1896년 3월 현재 전신수비대의 배치 현황을 보면 〈표 3〉>과 같다. 註15) 〈표 3〉전신수비대 배치표(1896년 3월)
〈표 3〉에서 볼 수 있듯이, 부산에 대대본부와 제3중대, 대구에 제1중대, 용산·인천 간에는 제2중대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구포·삼랑진·밀양·청도에는 19명부터 40명까지 배치하였다. 그러나 이 전신수비대는 1896년 5월 중국의 성경성盛京省현; 요녕성에 있는 일본군 보병과 조선 내의 후비병의 교대가 있게 되면서 축소되었다. 일본은 비록 전신수비대의 인원을 축소했지만 여전히 전선의 수비에 임하게 했다. 즉 부산수비대에는 구포와 삼랑진·밀양·청도전신수비대에 각각 분대장 1명과 병졸 6명씩을, 대구전신수비대에 소대장 1명과 하사를 포함한 병사 19명을 배치하였다. 註16) 경성수비대에서는 대구 이북 에서 경기도까지 수비대를 배치하였다. 註17) 위 지역은 충주·가흥·이천 지역으로 주로 제천의병과 이천의병의 활동 지역이었다. 1896년 5월은 특히 제천의병의 활동이 막바지에 들어섰을 때인데, 그 지역에는 이미 전신부가 편성되어 헌병을 중심으로 전신선을 수비하고 있었으나 여기에 수비대에서 별도의 전신대를 파견하여 의병을 진압하도록 한 것이다. 일본은 이 전신수비대의 주둔지를 7월에 들어서 변경하였으며, 인원도 확대 편성하였다. 註18) 이에 따라 수비대의 인원이 84명에서 130명으로 증원되었으며 새로 증파된 헌병을 각 지역에 2명씩 배치하여 전신선의 수비를 강화하였다. 임시전신부는 처음에는 주로 전신선 수선의 업무를 맡았으나 의병의 활동이 치열해 지면서 전신선의 보호는 물론 의병과 전투를 수행하였다. 2. 임시헌병대 설치 일본은 1895년 4월의 하관조약 체결 이후 일본군의 일부 부대를 철수하면서 동시에 그 공백을 헌병대로 보충하려 하였다. 일본은 이에 따라 1896년 1월 25일 임시헌병대 편성복무규칙을 정하였다. 2월 1일에는 헌병대장 고하요삼랑古賀要三郞 대위를 비롯하여 군역부軍役夫 40명 등 모두 181명을 임명하고 말 52두와 권총실탄 1,800발, 촌전村田총 실탄 3,500발, 포병안砲兵鞍 49조 등을 지급하였다. 일본헌병대는 2월 13일 우품항宇品을 출발하여 15일 부산항에 도착하여 곧바로 대구로 올라갔다. 註19) 임시헌병대는 대구에 본부를 설치하고 제1구대장 소위 중조선지조中條仙之助를 대구, 제2구대장 소위 목좌목장진木佐木長鎭을 가흥, 제3구대장 타월성삼打越省三을 낙동에 배치하였다. 각 구대의 관할하에 2~3개소의 분견소를 설치하였으며, 구대와 분견소에서 순찰병을 좌우로 내보내 매일 전신선의 이상 여부를 조사하고 전신선의 절단을 시도하는 의병과의 전투를 수행하였다. 아관파천 이후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확대되고 일본의 세력은 삼국간섭으로 위축되었다. 1896년 5월 서울에서 체결된 러일각서에 의하여 전신선 보호를 위하여 일본 헌병을 두되, 대구와 가흥에 50명씩, 부산과 서울 사이에 있는 10개소의 전신대에 10인 이하를 배치하여 헌병의 총수는 200인을 초과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의병활동의 진압을 위해 기준을 초과하는 인원을 증파하였다. 7월 13일 임시헌병대의 편성을 개정하였다. 註20) 개정된 임시헌병대의 편제표에 의하면, 헌병의 총수는 군역부軍役夫를 포함하여 304명임을 알 수 있다. 이를 처음의 편제와 비교해 볼 때, 위관 급은 4명으로 같으나, 하사 이하 병사가 133명에서 223명으로 90명이 증원되었으며, 군속 역시 44명에서 77명으로 크게 증원되었음을 볼 수 있다. 새 편제에 의해 증원된 헌병은 8월 25일 우품항을 출발하여 8월 27일 부산항에 상륙하였다. 9월 2일에는 구대區隊조직을 지대支隊조직 으로 개편하였다. 이에 따라 본부(대구) 외에 경성·안흥리·가흥·문경·낙동·대구·밀양·부산 등 8개 지대를 조직하였다. 註21) 〈표 4〉임시헌병대 지대별 주둔지(1896년 9월 현재)
또한 지대와 지대 사이에는 엄현奄峴·장호원長湖院·수곡장水曲場9월 5일 坪村으로 이전·태봉台封·장천長川·청도淸道·물금점勿禁店 등 7개소에 중간 숙사를 설치하여 지대 상호간의 거리를 단축시켰으며, 순찰 헌병의 회합장소와 숙소로 이용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군은 안흥리·가흥·대구와 같은 전신수비대의 주둔지에 중간 숙사까지 설치하여 의병에 철저하게 대비하였음을 볼 수 있다. [註 10]『명치29년 밀대일기』일본방위연구소, M29-1), 835쪽, 參命 제351호. ☞ [註 11]『명치9년 밀대일기』 835쪽, 參命 제351·352호. ☞ [註 12]『명치29년 밀대일기』 629쪽, 軍密 제41호. ☞ [註 13]『명치29년 밀대일기』 798쪽, 陸軍省送達 送甲제815호, 「朝鮮國派遣 守備隊長의 件(1896. 5. 2)」. ☞ [註 14] 고려대출판부, 「4263호, 露日覺書 및 露日議定書의 主旨와 同寫本送呈의 件」,『구한국외교문서(일안 3)』 542쪽. ☞ [註 15]『명치 27,28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223쪽, 1896년 3월 18일조 ; 김상기, 「전기의병의 일본군에 대한 항전」,『한국근현대사연구』20, 한국근현대사학회, 2002, 21쪽. ☞ [註 16]『명치29년 陸軍省副官 情報』(3)(청구기호; 陸軍省 日淸戰役 雜, M29-13), 「1896년 5월 19일 釜山守備隊長 陸軍步兵大尉 堀毛助, 陸軍大臣 大山巖 殿」. ☞ [註 17]『명치29년 육군성부관 정보』(3), 「1896년 5월 15일 재경성 보병제1연대 제1대대장 新山良知이 육군대신 大山巖에게 보낸 보고서」. 1896년 4월 22일 종전의 松坡鎭과 昆池岩 수비대를 蟹川店과 大山嶺으로 이전하였다. ☞ [註 18]『명치29년 육군성부관 정보』(3), 「1896년 7월 1일자 재경성보병제1연대 제1대대장 新山良知가 육군대신 大山巖에게 보낸 보고서」 ; 김상기, 「전기의병의 일본군에 대한 항전」,『한국근현대사연구』20, 24쪽. ☞ [註 19] 松田利彦,『조선헌병대역사』1, 不二出版, 2000, 59쪽. ☞ [註 20]『명치29년 밀대일기』(일본방위연구소, M29-2), 252쪽, 密受제112호, 「朝鮮國派遣憲兵 增員의 件」, 陸軍省送達 送乙제2854호, 7월 13일) ; 김상기, 「전기의병의 일본군에 대한 항전」,『한국근현대사연구』20, 29쪽. ☞ [註 21] 송전이언,『조선헌병대역사』1, 64쪽(1896년 9월 2일 현재) ; 김상기, 「전기의병의 일본군에 대한 항전」,『한국근현대사연구』20, 30쪽. ☞ 3. 의병의 일본군과의 항전 1. 의병의 일본군용전신선 절단 갑오변란을 전후하여 조선 민중의 항일의식은 거세어져 갔으며 민중봉기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이 서울에 주둔한 상태인 6월 8일 밤에 종로에 “임금이 욕을 당함에 신하가 죽음이 이치이며, 지금 국왕이 천고에 없는 수치와 욕을 받고 있으니 인인仁人 의사義士는 마땅히 분기하여 자주의 대의를 밝혀야 한다.”는 방이 나붙었음은 그 시초라 하겠다. 조선민중의 이러한 항일의식은 일제가 강제로 요구하는 내정개혁안 중에서 군용전선 부설요구권에 대한 반대항쟁으로 집중되어 나타났다. 일제가 내건 27개조의 내정개혁안 중에서 그들이 특히 강요했던 조항이 한반도 요지에의 전선을 개설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외무대신 육오종광陸奧宗光은 1894년 5월 24일양 6월 27일 총 7개항의 「내치개혁안」을 일본 각의에 제출하였는데 이 전선에 관한 조항이 제7항에 포함되어 있다. 육오는 이 내치개혁안을 다음 날 조선공사 대조규개에게 기밀 제26호로 발송하였는데 그중 제7조항은 다음과 같다. 제7교통의 항에 있어서는 원산 인천 부산 기타 요지에서 전신선을 신조 또는 개조함. 註22) 기밀문서를 접수한 대조는 조선정부에 총 27개조에 달하는 내정개혁안을 제출하여 그 개혁을 실시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 내정개혁안을 대조는 다시 10일 내에 실시할 것, 6개월 내 실시할 것, 2년 내에 실시할 것 등으로 세분했다. 전신선 가설조항은 10일 재결행할 항목에 포함되어 있으나 실은 그중에서도 우선 실시해야 할 급무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항목의 말미에 ‘단 말항 철도 전신의 두 공사는 10일 내에 기공할 결의를 위해 준비되는 대로 공사를 실시하는 것으로 함’ 註23)이라 하여 10일까지 기다리지 않고 곧 결행할 것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대조는 자신이 요구한 개혁안 중에서 바로 이 조항을 ‘실익’이라 표현했다. 註24) 육오종광 일본외무대신 역시 대조규개 조선공사에게 보낸 훈령에서 ‘서울-부산간의 철도 전선, 목포개항 등과 같은 실리를 점하는데 진력하라’ 註25)고 지시하였다. 여기에서 그들의 전선 가설에 대한 집요하고 절실한 태도를 살필 수 있다. 이와 같이 급무로 생각했던 사항이 조선정부에 의해 거절됨에 일제는 그들의 전신대, 중앙전화국교환국·지측량부 등으로부터 기사와 인부 700~800명을 데려와 위 작업을 강행하였다. 註26) 결국 1894년 6월 6일양 7월 8일경인간 군용전신선 가설공사를 착공하여 6월 10일 개통시켰으며, 경부간 군용전신선 착공식을 6월 17일 실시하여 서울과 부산에서 각기 공사를 시작하였다. 註27) 길전吉田 공병소좌를 대장으로 하는 전신대는 5월 30일 이미 부산에 도착하였다. 註28) 대조는 이와 같이 경부간 전선을 착공하면서 조선정부에 대하여는 “귀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임을 알지만 부득불 대역을 하겠으니 양해하시오.” 註29)라 하여 조선의 뜻은 조금도 생각지 않고 단지 통지만 하는 불법적인 침략행위를 저질렀다. 이로 보아 일본의 내정개혁안 요구는 처음부터 조선정부의 허가사항이 아닌 계획된 침략행위의 일환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일제의 침략행위에 조선정부와 민중은 군용전선절단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894년 7월 8일자『동경조일신문』에서 「전선을 자르다」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요즘 경성과 마포간 가설한 전선을 밤중에 절단하는 자 있다. 어떤 자인가 탐색 중에 있으나 아직 분명치 않다 한다. 註30) 또한 같은 신문 7월 18일자에서 경성특파원 산본충보山本忠輔가 7월 9일 보낸 「계림풍운록」에 의하면 요즘 육군이 경성 용산 양화진간에 군용전선을 가설함에 한병韓兵 수십 명이 이 선을 절단하다. 위병衛兵이 이를 체포하여 힐책하다. 그후 방해를 피하기 위하여 전선을 산간에 옮기다. 그후 한병은 두려워 가까이 하는 자가 없다 한다. 註31) 라 보도되어 있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 이는 일본이 경인간 군용전선을 강제로 가설함에 조선인이 이를 반대하여 절단하였음과 심지어는 조선군인이 집단적으로 이 전선절단운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무례한 범법행위에 조선정부에서 반발한 결과로 보여진다. 조선정부는 일본에 의한 불법적인 경부간 전선가설공사에 직접적인 항의표시를 하기도 하였다. 공문을 발하여 조선인이 일본정부에 고용되어 부산 서울간의 전선가설공사에 종사함을 금하게 한 것이다. 註32) 조선민중 역시 이 절단운동을 전개하였으며 6월 13일양 7월 15일 김덕원金德元·최병옥崔炳玉·유차직劉差直 등이 용산 부근에서 군용전선을 절단하던 중 일본위병에 체포되어 일본영사관에 송치된 사건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註33) 이 전선절단투쟁은 가설공사가 진행 중일 때부터 일어났다. 이들이 과연 누구인지 또는 그 후에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확인이 안 되지만 이들이 전선을 절단한 사실은 분명하며, 또한『동경조일신문』의 기사에서 “또다시 전선을 자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들보다 앞서 전선절단투쟁을 한 이들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러한 조선민중의 저항에 일본은 1894년 6월 21(음력)일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조선 정부를 장악한 후에 이 전선절단행위에 대하여는 극형으로 처리하였음을 볼 수 있다. 청일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8월 18일경 대구 근방에서 전선을 절단하다가 체포된 3명에게는 총살을 하게끔 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註34) 일본공사 대조규개는 1894년 9월초 조선의 외무대신 김윤식에게도 외교공문을 보내어 “비도에 의해 경부간 전선이 매번 절단됨”과 “서울 충청도 경상도 연로 각 지방관으로 하여금 군용전선절단자를 엄징케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註35) 이 전선절단은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1895년 3월 9일경 고양에서 남쪽으로 10리 되는 곳의 군용전선이 2키로 정도가 절단되었으며, 3월 18일에는 서울의 모화현에서도 절단행위가 있었다. 註36) 모화현에서는 3월 31일에 또 다시 전선이 절단되었다. 이에 일본공사 정상형井上馨은 외무대신 김윤식金允植에게 혐의자에 대한 합동 조사를 요구하였다. 결국 인근에 사는 정창식鄭昌植과 안수학安壽學이 체포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혐의를 부인하면서 염색업과 연초업을 하는 자신들의 망형亡兄이 이전에 고군雇軍한테 구한 전선줄을 일본군이 와서 철거해 갔다고 공술하고 있다. 註37) 사실 여부는 확인을 요하지만, 그들의 직업으로 보아 절단된 전선이 빨래줄이나 담배건조줄 등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선절단이 반드시 항일의 수단만은 아니었음을 알게도 해준다. 그런데 4월초에 개성·장단간에서는 전봇대 2본을 쓰러뜨리고 그중 하나는 불태운 일이 발생하였다. 전봇대를 불태운 일은 심상치 않은 사건이었다. 일본수비대에 체포된 ‘범인犯人’은 지방관에 인계되었다. 註38) 며칠 후 서울근처에서 또 다시 전선이 절단되는 일이 일어나자 일본공사는 외무대신에게 공문을 보내 전선이 절단되면 해당 지역의 지방관을 엄징할 것으로 요구하고 있다. 註39) 이와 같이 절단된 전선이 빨랫줄이나 담배 건조줄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전봇대를 쓰러뜨리고 이를 불태우는 행위 등에서 보듯이 반일적인 성격을 띄기도 하였다. 어쨌든 이 전선절단 행위는 일본군에게는 타격을 입혔음이 사실이다. 정보가 전쟁의 수행과정에서 승패를 가늠하는 잣대가 됨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본이 부산에서 서울, 그리고 서울에서 의주까지의 전선의 보호를 위하여 전력을 기울인 것은 당연하였다. 따라서 의병측으로서는 일본의 아킬레스건과 같은 전선을 절단하여 일본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제천의병의 후군장이었던 신지수申芝秀의 활동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박정수가 기록한『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에서 후군장 신지수가 다시 전선을 끊어서 실어다 바쳤다. 왜적을 격노시켜 험지險地에서 적을 섬멸하려는 생각이었다. 註40) 라고 신지수의 활동을 전해주고 있다. 이에 의하면 신지수는 여러 차례 전선을 절단하였으며, 그 목적은 왜적을 격노시켜 적을 섬멸하려는 데에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왜적을 격노시켜 험지에서 적을 섬멸하려는 생각이었다.”는 것은 신지수를 비롯한 의병들은 전선을 절단하여 일본군을 분노케 하여 정찰 나온 일본군을 험지에서 기습 공격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이러한 기습공격으로 의병은 많은 전과를 올린 바 있다. 전기의병기 의병의 전선절단 행위는 수시로 있었으며, 전주를 쓰러뜨리고 불태우는 행위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여기에 그중 드러난 몇 가지 사례만을 들고자 한다. 전선절단 행위는 여주지역에서 자주 일어났다. 1896년 2월 경기도 여주·이천 부근에서 의병이 봉기하면서 전선을 절단하고 전신주마저 쓰러뜨리고 있는 것이다. 註41) 여주지역에서 의병이 격렬하자 가흥수비대에서는 강기岡崎 군조가 인솔하는 일본수비대가 여주의 500여 명의 의병과 전투하였는데, 2월 7일 군조는 여주의 남쪽에서 전주 60여 본이 쓰러져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보고하였다. 또 다음 날 보고에 의하면, 파괴된 전주를 200여 본으로 예상하고 그 수리를 위하여 지방관에게 목재를 징집하였음을 알 수 있다. 註42) 이러한 여주 지방에서의 전주 파괴 행위는 일본에 큰 타격을 주었다. 가흥수비대장 삼택三宅 대위는 여주의 의병이 강렬하고 더욱이 인근의 주민들이 전부 의병에 합세하기 때문에 가흥에서 파견한 20명으로는 이를 격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조선공사에게 보고하여 인근의 이천이나 장호원·곤지암수비대의 원조를 요청하고자 하였으나 전선이 불통이어 조선인을 시켜 길을 우회하여 연락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그 우편물이 도착되지 못할 수도 있으며 늦게 도착할 수도 있다고 하면서 걱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이 정황을 대본영에도 보고하고 있다. 또한 본부의 재등齋藤 참모가 직접 가흥에 머물면서 일련의 사태를 지시하였다. 사태가 심각하자 대대장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각 수비대장에게 하달하여 전선의 보호에 진력할 것을 지시하였다. 註43) 각 수비대장 명령 여주지방에서 폭도가 봉기하여 전선을 절단함에 따라 이제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충분히 전선을 보호하도록 진력할 것 결국 부산수비대에서는 여주의병의 전선 파괴로 인해 기존의 가흥수비대로는 이를 진정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2월 11일 1개 중대1소대 1분대 缺 117명을 가흥에 파견하게 되었다. 註44) 충주·제천 일대 역시 전선이 자주 절단되었다. 2월 중순 들어서 제천의병의 활동이 거세게 진행되었다. 앞서 신지수의 활동을 소개했듯이 제천의병 역시 전선을 절단하여 일본군에 타격을 주었다. 충주수비대장 전중田中 대위가 2월 18일 보고에서, 충주에 ‘폭도’가 5천명에 달하고 이들이 충주의 서쪽에서 전선을 파괴했다고 부산수비대장 이진야천리伊津野千里 소좌에게 보고하였다. 2월 17일과 18일에는 충주 부근의 약 30리 사이와 목계牧溪지역의 남쪽에 전선이 절단된 것이 발견되었다. 註45)이와 같이 의병에 의한 전선 파괴가 잦고 이로 인한 연락 두절이 지속되자 대본영의 육군참모로부터 다음과 같은 명령이 내려오기까지 하였다. 註46) 참명參命 제353호로써 귀관의 대대를 적당한 곳에 배치할 것을 명령한 정신은 주로 전선의 수비에 있기 때문이니 대대는 가급적 전신선로상에 집합하여 폭도가 혹시 방해를 가하면 단지 전수방어專守防禦에 그치고 결코 이동하여 폭도 진압에 종사할 필요가 없음. 이 일을 주의할 것. 즉 전신수비대는 본래의 설치 이념에 따라 전선의 수비에만 종사하라는 것이다. 이는 전선을 파괴하는 의병만 진압하라는 명령이니 얼마나 전선 수비를 중요시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결국 충주성전투에서 의병을 제천 쪽으로 격퇴한 후 10여 일 걸려 비로소 가흥과 안보간의 전선이 통하게 되었다. 註47) 그러나 충주일대의 전선은 그 후에도 불통되는 일이 잦았다. 5월 19일에는 장호원에서 의병이 전신선 10리 분을 절단해 갔으며, 충주의 하담부근에서는 의병이 전주 약 20본을 뽑고 전선을 절단하고 북창에 있는 도선渡船을 탈취하여 갔다. 또 5월 21일 보고에 의하면 가흥과 장호원간에 절단된 전선이 30리에 달한다고 하였다. 註48) 2월 27일에는 문경에서도 2월 27일 의병이 진남문을 점거하고 인근의 전선을 절단하여 문경·낙동간의 전선이 불통되기도 하였다. 문경수비대에서는 이곳으로 정찰병을 파견하였으나 오히려 조선인 인부 한 명이 의병에게 체포되었을 뿐이었다. 의병들은 곳곳에 격문을 붙여 일본인의 짐을 운반하는 자는 살해한다고 밝혔으나 체포된 인부의 생사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註49) 문경지역에서 의병은 4월 3일에도 전주 9본을, 4일에는 조령 제3관문 쪽의 전주를 4본이나 쓰러뜨렸다. 註50) 상주지역에서도 태봉에서 북쪽으로 10리 정도 되는 ‘태츠타리’라고 하는 마을에서 3월 29일 전주 1본이 절단되고 2본은 쓰러뜨려진 일이 보고되었다. 이번에는 의병들이 파괴한 전주 옆에 “의병이 이를 절단했다.”고 쓴 푯말을 세워 놓기까지 하였다. 註51) 한편 1896년 1월 춘천의병을 비롯한 강원도 의병의 전선절단투쟁으로 강원도 일대의 전선은 완전히 두절되었다. 원산수비대에서는 이 전신선 수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1월 28일 효구孝久 군조軍曹가 인솔한 수비병을 파견하였다. 그런데 이 수비대는 2월 4일 탄현에서 의병 400여 명의 공격을 받고 대부분이 살해되었다. 註52) 부산영사 가등증웅加藤增雄은 이 전투 상황을 원경原敬 외무차관에게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1월 하순 경성·원산간의 전신선이 불통하여 1월 28일 원산수비대장 중천 소좌는 군조 이하 7명에게 공부工夫 2명을 딸려 전신선 절단의 상황을 정찰하기 위하여 파견시켰습니다. 이 부대는 원산에서 약 20리 정도 되는 ‘로센’이라고 하는 곳에 도달하였는데, 이곳에 도착하기 전 몇 십리간의 우리 전선과 전주가 모두 파괴되어 있어 지방민에 가서 물어보니 이곳에서 3-40십리 앞쪽까지 모두 파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한 곳은 전주를 소각시킨 곳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와 행진하여 4일경에 지금의 ‘로센’이라는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다수의 폭도가 무리를 지어 행진을 저지하고 있어 끝내 나갈 수가 없어서 20리 정도를 후퇴하였습니다. 이곳에는 언제쯤 와서 집합하고 있는 것인지 폭민暴民 400명 가량이 산꼭대기에 진을 치고 우리들의 퇴로를 막고 일제히 불을 질렀기 때문에 군조는 드디어 그들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응전하였습니다만, 처음에는 허벅다리를, 다음에는 가슴을, 세 번째에는 얼굴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이것을 본 상등병은 군조가 돈을 등에 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포대를 풀어서 짊어지고자 하는 순간 총검을 맞아 쓰러졌습니다. 다른 한 병사는 적탄을 맞아 그들의 포로가 되는 것을 겁내어 자결하였습니다. 또 한 명은 허벅지를 공격받았으나 여전히 계속하여 총을 쏘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 군조의 뒤쪽에 무릎을 꿇고 숨어 있던 1명의 공부는 부상 병사의 손을 어깨에 메고 달아나고자 했으나 이때 적탄이 와서 이 공부의 머리(탄환이 머리의 우측 상부에 맞았다고 한다)에 맞았기 때문에 혼자 도망하여 원산에 돌아왔습니다. 이 공부는 지극히 건강하여 머리 가운데 탄환이 그냥 있으나 거의 20리 가량의 길을 달려서 돌아왔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치료 중이라고 하나 이 공부는 참담함을 느끼면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지난번의 정찰대 7명과 다른 공부 1명, 합계 8명은 아마도 피살되었거나 포박되었다고 합니다. 註53) 원산영사는 4월 3일자 「공公 제53호」로 이들의 명단을 보고하고 있는데, 이등군조 효구구길孝久久吉을 비롯하여 상등병 2명, 일등졸 3명과 공부 2명, 그리고 조선인 1명 등 모두 9명이다. 註54) 이 전공을 세운 의병이 어느 부대인지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단지 같은 자료에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2월 3일 조장 1명과 15명의 병사를 파견하고 또 다시 7일 오후에 곡谷 소위에게 병사 30명을 인솔시켜 철령 방면으로 가게 했다는 원산 영사의 보고서로 보아 철령지역에서 활동한 유진규兪鎭奎부대로 보인다. 註55) 2월 28일 원산 영사의 보고에 의하면, 유진규부대는 3-4천명에 달했다 한다. 註56) 한편 원산수비대장 중천中川 중좌는 2월 11일 원산 남쪽에 30리간의 전선이 파괴되었음을 대본영에 보고하면서 서울까지 연락이 두절되었다면서 원산에서 부산까지 임시연락선의 운행을 요청하고 있다. 註57) 2. 의병의 일본군수비대 공격 의병은 일본의 군용전선을 절단하여 그들의 정보망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끈질긴 의병의 이 투쟁에 일본은 서울과 부산 및 원산 등지에 수비대를 설치함은 물론, 지방의 요지에 전신수비대를 설치하여 의병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의병은 전선을 절단하여 연락망을 두절시키면서 동시에 전신수비대를 공격하여 일본 세력을 조선에서 격퇴하고자 하였다. 동시에 의병은 험한 곳에 매복해 있다가 이동하는 수비대를 공격하고 수비대간의 우편물을 배달하는 배달부와 호송병, 그리고 정찰병을 공격하여 전과를 세우기도 하였다. 의병이 일본의 수비대 본부를 공격하는 것은 무기의 열세 때문에 힘겨운 작전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안보와 가흥수비대를 비롯하여 장호원·문경·태봉·구포 등의 수비대를 여러 차례 공격하였다. 제천의병은 2월 17일 충주성을 점령하고 안보安保와 가흥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수비대의 격퇴를 주요 목표로 삼아 작전을 펼쳤다. 의병은 우선적으로 안보수비대를 점령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의병의 움직임에 안보 일대에는 의병이 안보를 공격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안보 지역의 주민들은 모두 피난을 떠났다. 일본군들은 인부를 고용할 수 없었으며 쌀을 비롯한 물품을 매입할 수도 없게 되었다. 註58) 과연 의병은 2월 23일 새벽에 충주성을 나와 아침 6시에 안보에서 20리 정도 떨어진 수회장현재 충주시 살미면 수회리까지 진격하고 9시부터 안보수비대를 공격하였다. 의병은 이날 전투에 약 500명이 참전했으며 일본군 군인 1명과 인부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당시 안보수비대는 흑전黑田군조 이하 제10연대 제2중대의 1개 분대 병력과 인부를 포함하여 22명 정도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수비대의 흑전 군조는 이 인원으로 수비하기 곤란하다고 하면서 부산수비대에 원병과 탄환을 지급으로 요청하였다. 의병은 오후 1시경까지 치열하게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충주로 돌아갔다. 註59) 일본수비대에서는 이 전투에서 의병이 22명이 전사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註60) 2월 26일에는 제천의병 400여 명이 다시 안보수비대를 공격하고자 “수회장水回場”에 집결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았다. 안보수비대에서는 의병의 공격 소식을 듣고 2월 25일 2개 분대의 지원군이 도착하여 의병의 공격에 대비했던 것이다. 하촌河村과 광전廣田군조는 25명의 병사를 2개조로 나누어 수회장에 집결해 있는 의병을 공격하였다. 흑전 군조는 이 전투에서 의병 5명이 즉사했다고 보고하고 있는데 그 중에 제천의병의 중군장 이춘영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註61) 또 흑전은 “수회는 적의 소굴로써 전투 중에 불태워졌다.” 註62)라고 보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수회장이 의병의 본거지라고 생각한 일본군은 이곳을 불태운 것으로 보인다. 유인석은 다수의 희생자를 남기고 3월 5일 충주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후퇴하여 제천에 대장소를 차렸다. 그러나 3월 17일 흑전 군조가 의병이 사방에서 안보를 습격하려고 한다며 원군을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안보수비대는 의병의 주요 목표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註63) 의병은 5월 19일 또 다시 가흥수비대를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은 일본군에게 2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나, 5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후퇴하였다고 보고되고 있다. 註64) 장호원 부근에서도 의병의 활동이 치열하였다. 이곳 의병 역시 장호원수비대가 공격의 주목표였다. 2월 23일 장호원수비대가 습격당한다는 급보가 가흥수비대에 전달되었으며, 이에 가흥수비대에서는 수비대장 삼택三宅 대위가 제2, 3중대 중에서 45명을 직접 인솔하고 23일 밤에 출발하여 24일 아침 5시에 장호원에 도착하여 오후 2시 반에 장호원에서 20리 떨어진 청안리 남쪽에 의병과 대치하였다. 4시 반경에 의병은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다음 날인 25일 오후 2시 반까지 총격전은 계속되었다. 삼택대위는 이 전투에서 의병 수십 명이 전사했음에 비해 일본군은 2명만이 부상당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註65) 장호원에서는 5월 20일에도 일본군과의 큰 전투가 있었다. 이 전투에서 의병은 24명이 전사했음에 비해 일본군을 1명 사살하는데 그쳤다. 註66) 안동의병을 비롯한 경상도 북부지역의 의병들은 태봉수비대를 공격하였다. 태봉은 문경에서 상주로 연결되는 요지로 일본군수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수비대원은 즐교櫛橋 군조의 지휘하에 제10연대 제2중대의 1분대 16명과 인부 10명, 통변 1명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월 27일 즐교 군조의 다음과 같은 다급한 보고가 올라갔다. 예천의 적 5천이 용궁을 점령하고, 보은의 적 600명이 함창현에 진입하여 장차 태봉을 습격하려 한다. 註67) 위 보고는 태봉을 공격하기 위한 안동의병의 집결상황에 대한 보고인데, 여기에서 ‘예천의 적’은 안동·예천의병을, ‘보은의 적’은 서상렬의병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3월 29일 태봉을 공격하기로 계획을 수립하고 안동·예천의병은 용궁을 지나 포내와 덕통역 일대에서 유진하였으며, 서상렬의병은 함창에서 유진했던 것이다. 註68) 일제의 의병정탐 문서 이 소식을 접한 낙동수비대에서는 제3중대장 정나랑町奈良이 2개 분대를 인솔하고 오전 4시에 출동하였다. 즐교 군조는 다음날 아침 6시에 다시 의병이 태봉의 앞산에 대포를 설치하며 공격하였다고 보고하였다. 註69) 그후 안동의병은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4월 14일에는 예천의병 2천여 명이 무장하고 태봉수비대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에 놀란 즐교 군조는 또 원병을 요청하고 있다. 註70) 안동과 예천의 의병은 태봉 공격이 실패된 뒤에는 낙동수비대의 습격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낙동수비대의 장야庄野 소위의 보고에 의하면, 300명 정도의 의병들은 상주에 집결하여 미곡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안동관찰사로 부임해오던 이남규도 이들 의병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고 보고되고 있다. 註71) 한편 진주의병은 구포수비대를 공격하고 또 부산의 일본거류지를 공격하고자 김해까지 진입하였다. 진주의병은 3월 29일 새벽 2시에 김해 관아를 급습하였다. 관사를 파괴하고 아전들을 체포하여 김해의 서남쪽 10리 되는 부교에 주둔하였다. 註72) 의병의 김해 2차 공격은 4월 11일에 있었다. 재부산일등영사 가등증웅이 외무차관 원경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의병은 일본군 4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의병은 사망 4명에 부상자가 20명이었다고 되어 있다. 註73) 정찰병 역시 의병의 주요한 공격 대상이 되었다. 소수의 정찰병은 아무리 정예의 무기를 소지하였더라도 의병에 적발되면 수적으로 당해 낼 수 없어 체포되거나 죽임을 면치 못했다. 여주지역에서 7명이 살해된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3월 9일 국지菊池 군조가 인솔하는 상등병 2명과 병졸 4명, 공부工夫 1명, 간병인 1명 등이 여주지역에 정찰 나갔다가 귀환하지 않았는데 이들 중 병졸 1명과 인부 1명만이 부상을 입고 치료 중이며 나머지는 모두 살해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註74) 또한 2월 14일에는 문경수비대 소속 측량수 2명과 한인 고용인 1명이 출장 중에 제천의 수산에서 의병한테 체포되었는데, 한인 고용인만이 도망해 왔다. 문경수비대장 장강長岡 군조는 일본인 측량수들이 살해당한 것으로 판단하면서도 문경수비대의 병력으로 의병을 공격할 수도 없고 전선이 불통되어 원군을 요청하지도 못하는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註75) 2월 15일에는 곤지암수비대에서 출발한 ‘각부脚夫’가 광현에서 의병의 습격을 받아 우편물을 탈취당하고 각부는 간신히 도망한 일이 일어났다. 곤지암수비대 역시 의병을 공격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천에서 지원 나온 수비대 병력과 함께 의병을 물리치고 있다. 註76) 4월 4일에는 문경을 출발한 우편군부郵便軍夫 2명이 조령의 제3관문 숲에서 의병 100여 명으로부터 총격을 받고 도망가는 도중 안보수비대의 도움으로 안보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註77) 5월 1일에는 하담河潭 남쪽에서 화물을 호송하는 일본군을 의병이 급습하였다. 가흥수비대의 하사 이하 10명이 전신선의 감시와 화물의 호송을 위하여 하담 남쪽을 지나고 있을 때 200여 명의 의병으로 급습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가흥수비대장 삼택 대위가 총 소리를 듣고 헌병 10명과 보병 14명을 인솔하고 왔으며, 충주수비대에서도 지원병을 보내어 옴에 따라 의병은 이들과 1시간 반 이상을 격전하다가 강릉쪽으로 이동하였다. 註78) 화물 호송대에 대한 의병의 기습 작전은 5월 17일에도 장호원과 이천 사이에서 있었다. 약 500명의 의병대는 17일 오전 7시에 화물호송병 8명을 급습하여 화물을 탈취하였다. 그러나 총소리를 듣고 장호원수비대 본다本多 소위가 인솔하는 하사 이하 15명이 합세하여 이남포장호원에서 이천 쪽으로 약 10리에서 전투하게 되었는데, 의병은 무기의 열세로 인하여 탈취한 화물을 버리고 죽산 방향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註79) 3월 29일에는 안동의병의 태봉수비대에 대한 공격이 있었다. 이 전투에서 의병은 수비병 약간 명을 사살하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의병 2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은 안동시가지를 의병의 소굴이라고 하여 방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註80) 4월 14일에는 음성陰城지역에서 의병과 일본군과의 큰 전투가 있었다. 충주성전투에도 참전했던 장호원수비대장 전중 대위는 음성 의병이 안보수비대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본다 소위 등 52명을 거느리고 14일 오후 9시 가흥을 출발하여 15일 오전 5시 의병의 본거지인 음성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의병이 경계를 늦춘 사이에 기습적으로 의병의 본거지를 공격하여 의병 46명을 살해하고 5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때 음성의 의병은 약 7백여 명에 달했으며, 의병장 송보서宋寶徐는 이 전투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4월 18일 장호원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이때 일본군이 의병한테 탈취한 것이 소 7마리, 말 1마리, 당나귀 6마리, 화승통火繩筒 241정, 화약 약 70관, 원탄圓彈 13상자, 쌀과 잡곡이 120석에 달했다 한다. 註81) 한편 일본군은 관군과 함께 의병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2월 24일 이천수비대의 일본군 20명이 ‘한병’ 140명과 합세하여 여주를 공격했다. 의병들은 장호원 쪽으로 후퇴하여 장호원수비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여주의병은 이 전투에서도 이기지 못하고 원주 쪽으로 후퇴하였다. 註82) 이와 같이 의병의 일본군과의 항전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의병의 일본군과의 항전은 군용전선을 절단하는 소규모 형태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방어에도 불구하고 의병의 항전은 전선만이 아닌 전주를 뽑고 이를 소각하는 과격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의병의 전선절단투쟁은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일본수비대는 의병의 공격을 받았으나 전선이 절단되어 지원군을 요청할 수 없게 되었으며, 결국 인편으로 연락사항을 배달시키게 되었다. 그러자 의병은 기다렸다는 듯이 연락병이나 정찰병을 험지에서 매복·공격하여 큰 전과를 수립하였다. 원산 부근에서 효구孝久 군조의 정찰병 1개 분대 9명과 여주에서 국지 군조 인솔의 정찰병 7명을 사살한 것은 의병의 대표적인 전과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일본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무수한 의병이 희생되었음도 사실이다. 일제는 전국의 요지에 수비대를 설치하고 수시로 정찰병을 파견하여 의병의 동태를 파악하였으며 의병을 공격하거나 아니면 의병으로부터 기습을 받을 때는 신속히 수비대간에 서로 지원해주고 군함을 동원한 합동작전으로 의병을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전기의병이 일본군과의 항전 중에 전사한 인원수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단지 이 글에서 이용한 자료에 나타난 것만을 살펴보면, 우선 1896년 2월 23일 수회장전투에서 22명이 전사하였다. 그리고 2월 26일 제2차 수회장전투에서 이춘영 등 5명을 비롯하여 같은 날 장호원에서 수십 명이 전사하였으며, 3월 5일의 충주성전투에서 30여 명또는 58명, 3월 19일 선평仙坪전투에서 30여 명, 3월 29일 태봉전투에서 20여 명, 4월 11일 김해전투에서 4명, 4월 15일 음성전투에서 47명, 5월 19일 가흥수비대 공격시 5명, 5월 20일 장호원전투에서 24명, 9월 9일 함흥전투에서 20여 명이 전사하였다. 이외에도 제천의병의 남산전투과 이천의병의 남한산성전투에서 안승우를 비롯한 다수의 의병이 전사하였으니 여기에 열거한 전사자 수만도 대략 300여 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 숫자는 이외의 지역에서 항전의 내용들을 밝히면 더 늘어날 것이다. 또 일본군이 아닌 관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까지를 헤아린다면 그 숫자는 크게 불어난다. 일본 자료에서도 4월 18일의 진주성전투에서 30여 명, 註83) 6월 22일의 경주성전투에서 30명이 관군과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註84) 이외에도 김하락의 영덕전투와 춘천의병의 전투 등 관군과의 항전은 많다. 의병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이유는 우선 무기의 열세에서 찾을 수 있다. 화승총으로 무장한 의병은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하더라도 스나이더소총이나 촌전村田소총과 같은 연발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전투에서 이겨내지 못하였다. 의병은 정보전에서도 일본군에게 패했다. 일본수비대에서는 정찰병을 각지에 파견하여 의병의 동태를 파악하였고 대본영에서는 기밀비를 별도로 책정하여 보냈다. 수비대에서는 이 기밀비로 ‘한인간첩’을 의병진영에 파견하여 의병의 조직과 군수, 이동 상황 등을 샅샅이 파악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의병을 기습·공격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의병은 전투경험도 없는 농민군이었으며, 게다가 전근대적인 방법으로 부대의 이동과 전투 여부를 정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의병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비록 그러하더라도 의병은 생사를 초월하여 민족보전의 이념으로 무장하고 치열하게 정규 일본군의 최신 무기에 맞섰다. 의병은 일본군의 아킬레스건과 같은 전선을 절단하고, 매복과 기습·작전을 감행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또한 제천의병과 강릉의병처럼 국경선을 넘어 청국으로 들어가 재기를 준비하기도 하였다. [註 22]『일본외교문서』 기밀 제26호, 1894년 6월 28일. ☞ [註 23]『일본외교문서』 기밀 제121호, 「內政改革案綱目」, 1894년 7월 9일. ☞ [註 24]『일본외교문서』 기밀 제130호, 「鐵道電線ノ建架及新聞港ノ要求困難ノ件」, 1894년 7월 18일. ☞ [註 25] 일본외무성 정무국 편,『日淸韓交涉事件記事』別紙 제10호, 1894년 10월(일본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소장). ☞ [註 26]『동경조일신문』1894년 7월 18일 「鷄林風雲錄」·「電信架設」. ☞ [註 27]『일본외교문서』 기밀 제136호, 1894년 7월 25일에 의하면, 일본공사는 京釜間전선 가설공사를 7월 19일에 기공한 것으로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동경조일신문』1894년 7월 22일 「京釜間線架設」과 7월 24일 「京釜間電信の再起工」에 의하면, 7월 21일 기공예정이었으나 연기하여 7월 22일 오전 12시 40분에 기공식을 거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註 28]『동경조일신문』1894년 7월 20일 「釜山近狀」. ☞ [註 29]『일본외교문서』 기밀 제 136호, 1894년 7월 25일. ☞ [註 30]『동경조일신문』1894년 7월 8일 「電線を斷つ」. ☞ [註 31]『동경조일신문』1894년 7월 18일 「鷄林風雲錄」·「電信架設」. ☞ [註 32]『동경조일신문』1894년 7월 24일 「京釜間電線工事の斷續」. ☞ [註 33]『동경조일신문』1894년 7월 25일 「又又電線を切る」. ☞ [註 34]『동경조일신문』1894년 8월 28일 「電信截斷者の銃殺」. ☞ [註 35] 고려대출판부, 「제3505호, 慕華峴等地의 電線斷?者嚴懲要求」,『구한국외교문서(일안 3)』 1967. ☞ [註 36] 고려대출판부, 「제3505호, 모화현등지의 전선단절자엄징요구」,『구한국외교문서(일안 3)』. ☞ [註 37] 고려대출판부, 「제3519, 3520, 3551호」,『구한국외교문서(일안 3)』참조. ☞ [註 38] 고려대출판부, 「제3525호, 開城長湍間電柱倒?犯의 拿捕通告와 嚴懲要求」,『구한국외교문서(일안 3)』 224쪽. ☞ [註 39] 고려대출판부, 「제3542호, 電線斷?事件의 再發通告와 前准辦法의 嚴遵要請」,『구한국외교문서(일안 3)』 232쪽. ☞ [註 4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 438쪽. ☞ [註 41] 국사편찬위원회, 「동학당에 관한 건(2), 1896년 2월 7일」,『주한일본공사관기록』. ☞ [註 42]『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第1大隊)(日本 防衛硏究所, 文庫 千代田史料 77), 1185~1186쪽, 1896년 2월 8~9일자. ☞ [註 43]『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187~1188쪽, 1896년 2월 10일자. ☞ [註 44]『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189쪽, 1896년 2월 11일자 ;『戰史編纂準備書類』58)(방위연구소, 日淸 M27~69), 「朝鮮報』58, 1896년 2월 11일자. ☞ [註 45]『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198쪽, 1896년 2월 20일자. ☞ [註 46]『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195~1196쪽, 1896년 2월 18일자. ☞ [註 47]『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215쪽, 1896년 3월 8일자. ☞ [註 48]『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250쪽, 1896년 5월 20~21일자. ☞ [註 49]『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206~1207쪽, 1896년 2월 28일자. ☞ [註 50]『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234쪽, 1896년 4월 5일자. ☞ [註 51]『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230쪽, 1896년 3월 29자. ☞ [註 52] 김상기 편역,『한말의병자료』Ⅱ, 73쪽. ☞ [註 53] 김상기 편역, 「公제33호, 元山附近暴徒 情況」,『한말의병자료』Ⅰ, 66쪽. ☞ [註 54] 김상기 편역, 「公제53호」,『한말의병자료』2, 122~123쪽. ☞ [註 55] 김상기 편역, 「기밀 제3호」,『한말의병자료』2, 73쪽. ☞ [註 56] 김상기 편역, 「공 제16호」,『한말의병자료』2, 83~84쪽, ☞ [註 57]『戰史編纂準備書類』(58)(방위연구소, 日淸M27-69), 1896년 2월 12일자. ☞ [註 58]『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198쪽, 1896년 2월 21일자. ☞ [註 59]『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201~1202쪽, 1896년 2월 23일자 ; 김상기,『한말의병연구』 198쪽. ☞ [註 60] 국사편찬위원회, 「충주부근의 적정보고(3)」,『주한일본공사관기록』8, 1993, 252쪽. ☞ [註 61] 李正奎의『從義錄』에 의하면 이날 전투에서 중군장 이춘영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김상기,『한말의병연구』 198쪽). ☞ [註 62]『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204~1205쪽, 1896년 2월 26~27일자. ☞ [註 63]『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224쪽, 1896년 3월 20일자. ☞ [註 64] 국사편찬위원회, 「폭도에 관한 상황보고의 건」,『주한일본공사관기록』8, 279~280쪽. ☞ [註 65]『명치27, 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207쪽, 1896년 2월 28일자. 장호원전투에 대하여『주한일본공사관기록』7의 「광주 및 여주 부근의 폭도에 관한 통보」에 의하면, 이때 일본군은 제18대대 제1중대 병력을 중심으로 한 90명이 의병 600여 명 이상과 전투하여 의병 9명을 사살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352~353쪽). ☞ [註 66]『陸軍省副官 情報』陸軍省 日淸戰役 雜 M29-13), 「電報 乙제27호, 1896년 5월 24일 新山소좌 보고」. ☞ [註 67]『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229쪽, 1896년 3월 27일자. ☞ [註 68] 김상기, 「1895~1896년 안동의병의 사상적 연원과 항일투쟁」,『사학지』31, 1998, 324쪽. ☞ [註 69]『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권15, 1229~31쪽, 1896년 3월 29일자. ☞ [註 70]『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권15, 1238쪽, 1896년 4월 14일자. ☞ [註 71]『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권15, 1243쪽, 1896년 4월 24일자. ☞ [註 72] 김상기 편역,『한말의병자료』Ⅰ, 107쪽. ☞ [註 73]『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237쪽, 1896년 4월 13일자 ; 김상기 편역,『한말의병자료』Ⅰ, 108~110쪽. ☞ [註 74]『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190쪽, 1896년 2월 12일자. ☞ [註 75]『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193쪽, 1896년 2월 7일자. ☞ [註 76]『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192쪽, 1896년 2월 15일자. ☞ [註 77]『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234쪽, 1896년 4월 5일자 ; 김상기 편역,『한말의병자료』Ⅰ, 106쪽. ☞ [註 78]『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244쪽, 1896년 5월 1일자. ☞ [註 79]『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248쪽, 1896년 5월 17자. ☞ [註 80] 김상기, 「1895~1896년 안동의병의 사상적 연원과 항일투쟁」,『사학지』31, 326~329쪽. ☞ [註 81]『명치27,8년역 제5사단진중일지』15, 1240~41쪽, 1896년 4월 17~18일자. ☞ [註 82] 김상기 편역, 「여주부근 폭도의 정황 보고」,『한말의병자료』Ⅱ, 73쪽. ☞ [註 83] 김상기 편역,『한말의병자료』Ⅰ, 112쪽. ☞ [註 84] 김상기 편역,『한말의병자료』Ⅰ, 125쪽. ☞ |
출처: 민족, 한검수 원문보기 글쓴이: 어느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