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하르방/ 김공천(1987년 작고)
왕방울 눈 세월에 비켜
세상 흐름 지켜보며
아픔은 걷어모아
두 주먹에 쥐고 섰나
모시는 님은 풍화한 듯
아니 잠시 출타한 듯
벙거지 밑 드리운 귀
오만 소리 다 듣겠다
주먹코는 속속들이
거리 숨결 헤아리나
다문 입 절로 버을어
익살 술술 새어날라
- 시조집 『한라의 바람노래』(198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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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共鳴)/ 권영오
선릉역 5번 출구에
다리 없는 남자가 앉아 있다
저도 제가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못 본 척
지나치는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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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의 도시계획/ 조한일
서점도 구도심과 신도시로 나뉜다
즐겨 찾는 코너는 신축 증축 개발붐 일고
먼지가 쌓인 외곽은 폐허 혹은 철거 중
학군 좋은 명당엔 수능교재 도배된다
교통 좋은 입지엔 베스트셀러 자리 잡고
직장인 전망 밝히는 처세술 코넌 만원 중
자격증 교재 책장엔 중장년들의 분양 신청
인적드문 시집 코넌 바리케이드 놓였나
한가한 그 동선 따라 번화가로 이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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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성 가는 길/ 강상돈
추억의 발자취가 골목에 묻혀 있다
향기 어린 낙엽에 가슴이 떨리며
봉성리 가는 길에서 옛이야기 듣는다
하얗게 핀 국화는 아버지 얼굴 같고
손길의 온기처럼 따스한 기억이
겨울밤 화롯가에서 뜨겁게 타오르네
마른 잎 흩날리는 이 길도 변했건만
바람에 실려 오는 아버지의 목소리
눈시울 적시는 날엔 돌담길을 걷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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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올레로 올래/ 김대봉
골목 긴 돌담길 돌아 우리 집 올레로 올래?
대문 없고 문패도 없는 마구간 같은 마당귀에
가둬둘 망아지 없어 정낭 다 걷어 낸 집
대문 대신 문패 대신 정낭 세 개 걸쳤다가
연 삼 년 해 안 걸러 하나, 하나씩 걷어 낸 집
다 늙은 부부만 사는 올레 긴 집 올레로 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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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속으로/ 김영란
진도에 오거든
하루씩 이별을 하자
익어가는 홍주 향처럼
붉게 피는 슬픔처럼
차라리 이번 생에선
기쁘게 돌아서자
저무는 뒷모습은
황홀한 약속 같아
기약 없는 인사는
그래, 우리 생략하자
눈시울 붉어질 때면
오물락 숨어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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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자 씨/ 김영순
연꽃씨는 물이 있어도 싹이 트지 않는다
어디 한 구석이라도 부서져야 숨을 쉰다
나, 잠시 아파야겠다
당신이 다녀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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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김윤숙
이월 숲이 수상하다 오소소 소름 돋듯 발목아래 훤히 돋아
눈을 뜨는 불씨들 어느새 정처가 되어 떼로 피는 복수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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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발/ 김정숙
산수국은
올해도
빗속에
꽃을 피웠다
왜
그런 거냐고
물어볼
필요 없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너도나도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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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의 눈물/ 임태진
바람도 외면하는
한여름 쪽방에서
땀 뻘뻘 흘리면서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온몸이 부서지도록
날개를 돌리는 일
아무리 둘러봐도
희망은 보이지 않아
온종일 TV만 보며
초점 잃은 그 두 눈
영원히 감아버린 날
몇 날 며칠 혼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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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없는 길 위에서/ 장영춘
가끔 사는 일 또한 헷갈릴 때 있다
사랑도 미움도 흔들리던 내 발자국도
어쩌면 걸어온 길이 착시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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