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취리히의 목사가 되어 목숨을 내놓고 복음전파할 때,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당시 상황을 여러번 인용하기도 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그 나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인간적인 가르침에 너무 전심했었다. 철학과 신학 때문에 성경 읽기를 거의 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그의 말씀에서 직접 배워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몰두하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님께 빛을 구했다.
그러자 성경이 알아지면서내 내 안이 거짓말처럼 밝아졌다. 나는 성경을 알기 위해 관계서적을 읽지도 않았다.”
위텐백의 강한 몇 마디는 츠빙글리로 하여금 타락하고 또 잘못되어가고 있는 로마 가톨릭에 대해 비판의 안목을 갖게 했고 훗날 서슴없이 비판의 칼날을 가져다대는 종교개혁자가 되게 했다.
“수도원에 틀어박혀 고깔이나 쓰고 있는 사람들만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 반대로 그들이야말로 가장 그의 가르침을 늦게 듣거나 못들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것을 붙잡고 늘어져서 거기에서 위로를 찾으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황이나 바보같은 황제들은 독일 사제들 대부분을 속세의 군주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은 손에 칼을 들고서 성경을 대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베드로전서 2장의 말씀 ‘왕같은 제사장’을 인용한다.“
이 말은 츠빙글리가 13살 때 도미니크회의 한 수도승에게 했던 말과 일맥상통한다.
한편 당시 알프스 산 너머 독일에서는 가톨릭 신부였던 루터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는 복음을 깨닫고 종교개혁을 위해 일어섰으며 그 물결은 벌써 보수적인 유럽의 분위기에 금을 내어 있었다.
르네상스의 영향 하에서 교육을 받은 츠빙글리는 처음에 기독교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래서 그의 종교적인 경향은 대체로 루터보다 이지적이고 과격하였다. 신비적이거나 미신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모두 반대하였다. 죄의식이나 사유의 대한 영적 체험이 부족했기에 자연히 그의 생활은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등 비난받지 않을 수 없는 면이 노출되기도 하였다.
용별제도의 폐단 |
목사로 첫 부임했던 지역인 글라루스에 있을 때 츠빙글리는 이미 스위스 인문주의자 그룹에서도 비중이 큰 일원이 되었다. 에라스무스와도 개인적인 친분을 갖게 되는데, 츠빙글리가 종군 목사 신분으로 이탈리아 용병으로 가 있으면서 서신을 왕래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몇차례에 걸진 출정으로 그는 용병제도의 비도덕성이며 폐단을 깨닫고 용병제도를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의 최초의 저술인 「황소의 우화」는 용병제도의 위험성을 경고한 작품이다.
이로 인해 스위스나 스위스와 조약을 맺고 있던 프랑스는 그를 미워하여 글라루스에서의 목회를 방해했다. 츠빙글리는 복음을 전파하는 데 방해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막을 것이며 목숨이라도 아끼지 않겠다고 결심한 뒤였기에 정부로부터 오는 그런 핍박이 그를 위축시키지 못했다.
그는 10년 동안 시무로 오던 글라루스를 떠나 1516년 11월에 인문주의의 보루요 순례의 중심지인 아인지델른으로 가서 사제직을 계속했다. 그는 여기서도 용병제도의 악폐에 대한 공격의 고삐를 여전히 늦추지 않았다. 성경에 비추어 교황 권위의 부당성과 면죄부 판매를 적극 반대하는 운동을 폈다.
헬라어와 문학에 박식했던 그는 헬라 고전을 공부하고자 자기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중 시의회의 고위 의원 자제인 콘라트그레벨이라는 젊은이도 끼어 있었다.
훗날 이 그레벨과 손잡고 재세례주의 선각자가 된 팰릭스 만츠는 먼저 와 공부하고 있었다. 당시의 젊은 인문주의자들은 학문을 사랑하고 에라스무스를 존경했다. 이러한 점을 이용해 그는 그들에게 헬라어 신약성경을 소개하며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에 대해서 도마질을 했다. 그레벨은 츠빙글리의 강의에 열심이었고 또 실지로 열성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공부를 시작한 지 3년이 되자 그레벨의 신념은 츠빙글리의 신념을 능가했다. 이때부터 두 사람 사이엔 보이지 않는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몇 가지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같이 뜻을 모아 길을 걸을 만한 이유가 하등에 없었다. 나중에는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짜놓은 규범과 허례를 뒤엎어서 한다는 등의 가장 근본적인 공통점마저도 방법상,시간상 의견이 맞지 않아 돌아서고 말았다.
재세례주의자와의 결별 |
츠빙글리는 아직 가르침에 있어서 종교개혁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인문주의자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이들과 부딪힐 당시 그는 로마 교회 자체를 공격할 의도가 없었다. 그는 에라스무스와 같이 교육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교회가 발전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가 용병제도를 반대한 것도 실은 평화주의적인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츠빙글리가 유아세례의 부당성을 시의회에 호소한 급진적인 개혁자들인 재세례주의자 그레벨과 만츠와 회복할 수 없는 상황에 돌입하게 된 때는 1525년 1월 회의에서였다. 그들은 그가 시의회 결정에 굴복했다고 생각하며 등을 돌렸다.
이런 와중에서 츠빙글리는 앞에서 언급했던 한 여인과 사랑을 하여 그녀로 하여금 아이를 수태하게 했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목사로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대인 취리히로 가는 길이 막힐 뻔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결점이 취리히의 수도사회가 그를 향해 영원히 문을 닫게 하진 못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사회는 물론 성직자들도 도덕적으로 너무 타락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츠빙글리는 여섯 명의 첩과 아이들을 거느린 다른 경합자를 제치고 취리히의 그레이뮌스터 교회 목사가 되었다.
그는 이곳 교회에서 설교자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루터보다 더 성경을 중시하며 성경을 바탕으로 하여 성경에 위배되는 의식이나 행위를 철저히 금지했다. 츠빙글리는 성경이 명하지 않은 것은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고회의 모든 형상과 십자가를 떼어버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는 마치 우상파괴자와도 같았다. 심지어 그는 교회 내의 오르간마저 치워버렸다. 가장 격심하게 차이게 생기는 것은 성만찬에 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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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
이러한 영향은 취리히는 물론, 그밖의 도시에까지 번져 가톨릭교를 고수하는 주(州)의 반발이 커서 독일의 루터파와 제휴할 필요성을 츠빙글리는 느꼈다. 즉 가톨릭 세력에 대한 공동전선을 펴고 복음주위세력 내부의 분열을 막기 위해 루터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유명한 마르부르크 회담이 1529년에 독일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 회의의 목적은 통합의 시발점을 찾는 것이었고, 의제는 주님의 만찬에 대한 심각한 의견 차이를 어떻게 해결하고 또 어떻게 통합을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의견은 모아지지 않았다.
루터는 “이것은 내 몸이니” 라는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츠빙글리는 달리 해석했다. 즉 주님이 하신 말씀은 성만찬 때 육으로서가 아니라 영적으로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상징적은 의미로서 성만찬은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리하여 츠빙글리는 초기 서적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던 루터와의 통합은 고사하고 스위스와 독일의 종교개혁 운동간의 차이점만 부각시키고 또 영구화시키는 역할을 한 셈이 되고 말았다.
마르부르크 회의가 결렬되자 그는 극심한 정치적,종교적 고립을 당하기 시작했다. 가톨릭을 견지하는 지역에서는 그를 향해 이를 갈았다. 그래서 그는 한 순간도 가톨릭 측의 움직임에 소홀할 수가 없어 긴장상태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가톨릭 측이 선제공경을 해올 것이라는 두려운 생각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스스로 먼저 경제봉쇄령을 내렸다. 그러자 가톨릭 측은 이를 더욱 괘씸하게 여겨 즉각 도전을 해왔다. 1531년 10월 카펠은 순식간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츠빙글리도 칼과 투구를 휴대하고 자기 군사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갔다. 성경근본주의자이자 개혁자였던 츠빙글리는 거기서 그의 아들 게롤트와 함께 전사함으로써 길지 않는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전쟁의 이슬로 사라지기 12년 전에 츠빙글리는 이미 죽음을 경험했고 또 부활을 맛보았기에 복음을 수호하는 일 앞에서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여 물러설 무엇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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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을 이기다 |
12년전, 그러니까 그가 35세가 되던 1519년 8월이었다. 그가 목회활동을 하고 있던 취리히에 걸렸다 하면 십중팔구 죽는 역병(흑사병)이 돌았다. 그는 힘든 일로 몸이 약해져 있었지만 희생자들을 돌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는 가운데 그도 전염병에 걸리고 말았다. 애곡소리는 집집마다, 도시마다에서 끊이지 않았다. 그는 죽음이 목까지 찬 것을 느꼈다. 그는 죽음의 신에 의해 들까불려졌다. 그러나 그의 임무가 끝나지 않았기에 하나님은 그를 회복시키셨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종교의 핍박으로 동생 안드레아스를 잃었다. 동생의 죽음과 기사회생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보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고 또 말씀의 완전한 추종자가 되게 하였다 역병은 종교개혁의 확신을 더 갖게 해준 계기가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때 츠빙글리는 그 유명한 ‘역병찬송’이라는 시를 썼다.
흔히 보는 인간적인 약점을 참작한다 하더라도 츠빙글리는 하나님 말씀의 확실한 능력을 믿고 또 설파한, 기독교 인물사에 뚜렷이 남아 길이 존경받을 만한 믿음의 선배임에 틀림없다. 그의 생애에 남긴 열렬한 하나님에로의 열정은 존 칼빈이나 메노 시몬스 그리고 존 녹스 등에 본이 되었다. |
잠깐 거두어 |
4세기가 흐른 지금에도 한 점 흠없이 빛나고 있는 그의 명설교는 예수의 피를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에게 시공을 초월하여 분명히 감동적이다. 그는 주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생생하며 강한 힘이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서 힘차게 외쳤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가 없고 소멸되거나 반대가 있을 수도 없다. 그 말씀은 전능하고 완전하기 때문에 언제나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능력에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사람들의 뜻대로 행한다면 사람이 그보다 더 강하다는 말이겠고 그렇다면 그가 사람들과 의논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복음 속에 모든 것이 있지 않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은 대개가 복음의 가르침을 들은 일도 없고, 그 말씀에 익숙하지도 않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몇 구절을 들추어 앞뒤 관계를 따져보지도 않고 자기들 좋은 대로 갖고 노는 것이다. 마치 꽃을 뿌리에서 뜯어내 놓고 다시 정원에 심으려고 하는 거나 다름이 없다. 그렇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꽃은 뿌리와 함께 심어야 하는 것이며 그렇게 해야만 땅에 박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는 팔을 벌리시고 부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그는 길이요 진리여 빛이시다. 그의 말씀 속에 살면 결코 방황하는 일이 없다.
영혼을 위한 명확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확신을 주셔야만 풍족함을 얻고 힘을 얻을 것이며 다시는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어중이 떠중이 같은 속세의 성직자들이 또는 신부나 사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 속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는가?
사람들은 오류에 빠지기 쉬운 인간을 신뢰하고 있지만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은사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자기네도 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런 비난을 막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이다.
믿는 사람의 수가 믿지 않는 자의 수보다 휠씬 적다. 그렇다고 그들이 틀린 것은 아니다 진리는 꼭 대다수의 편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하는 나를 사람들은 핍박하나 나는 결코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말씀은 라인 강처럼 확실하게 자기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사람들이 잠깐 가두어둘 수는 있지만 결코 흐름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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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랜만에 올라온 구원 간증,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츠빙글리의 명설교가 지금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명확하게 들리기를 바랍니다. - "... 그는 길이요 진리여 빛이시다. 그의 말씀 속에 살면 결코 방황하는 일이 없다. 영혼을 위한 명확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라..."
마지막 이야기가 참 인상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육체에 하나님의 피를 담아 오셔서 쏟아놓으신 피가 그 흐름을 멈출수 없는것 처럼 인생을 향하여 죄인을 향하여 흐를수 밖에 없는 그 분의 마음....강이 한 방향으로 흐르듯이 그 분의 말씀도 피에 담겨서 그렇게....흐르나보다....
지나간 위인들이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많은 분들이 저희들처럼 예수님의 피의 진정한 의미를 알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생생하며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서 힘차게 외친 츠빙글리의 모습을 본받고 싶습니다...
저도 츠빙글리의 간증을 기쁘게 읽었읍니다. "머리들라 문들아 영광의 왕 들어오신다. 영광의 왕 뉘시뇨 영광의 왕 뉘시뇨 만군의 주"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시 1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