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정(居然亭)의 묵향(墨香)>/구연식
길손을 잘 만나면 하루가 즐겁고, 이웃을 잘 만나면 사는데 행복하며 자연경관이 좋으면 평생이 행복하다. 그래서 평생 삶의 조건은 수려한 자연환경이 으뜸인가 보다. 경남 함양의 서하면 봉전리 화림동계곡(花林洞磎谷)에는 홍진(紅塵)을 멀리한 은둔의 거연정(居然亭)이 있다. 60리 계곡에는 10 장생(十長生)들이 사시사철 즐비하게 있어, 이곳 사람들은 5감으로 느끼는 심신이 언제나 넉넉하여 타고난 천수(天壽)를 누리는가 보다.
거연정(居然亭)에 가기 위해 화림교를 더듬거리며 물 위를 지나고 있다. 때마침 정오쯤이어서 태양은 그림자를 신발 뒤꿈치에 몰아넣고 있다. 피오르드(fjord) 계곡처럼 V자형 바위 골짜기에는 널찍하고 깊은 물속에는 기다란 검은 물체가 승천하려는 용처럼 꿈틀거린다. 소스라쳐 다시 보니 물가 소나무 그늘이 길게 늘어져 착시 현상의 공포감이었다. 안심이라도 시키듯 은어들은 하얀 비늘을 싱크로나이즈드스위밍 선수처럼 물 위에 솟구치더니 웃으며 그대로 잠수한다. 물가 가제들은 무엇이 수줍은지 물 갈퀴질을 하다가 뒷걸음치며 긴 수염을 접고 숨더니 망둥이처럼 튀어나온 눈을 물 밖으로 살포시 내민다. 한낮에 물속 친구들의 적막을 깬 것 같아 미안했다.
1640년(인조 18년) 경 병자호란의 국치(國恥)를 한탄하여 고려말 충신이며 정선 정 씨(旌善全氏) 동지중추부사 전시서(全時敍)가 낙향하여 서산서원을 짓고 현 위치에 억새로 지은 초정(草亭) 거연정 있었다. 그간 중수해 오다가 오늘에 이르렀다. 이곳은 좌 함양 우 안동으로 불릴 정도로 사림(士林)의 숨결이 깃든 서원의 고장답게 화림동 계곡은 선비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동천(洞天)이다. 옛날 과거 보러 떠나던 유생들이 60령을 넘기 전 지나야 했던 길목이다. 연암 박지원 등은 거연정을 중심으로 바위와 담수(潭水) 그리고 소나무가 조화를 이룬 광경을 보고 감탄의 글을 남겼다고 한다.
인간이 편해지자고 자연을 해치지 않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선비들 실천 사상이 거연정의 주춧돌에도 숨어있다. 주추는 반석의 요철 부분이 미끄러짐을 고정해 주도록 기둥 밑을 요철에 알맞게 도려내어 시공한 ‘덤벙 주초(柱礎)와 그랭이 질’ 공법으로 기둥을 세워 반석은 한 첨도 도려내지 않고 반석 속에 기둥이 깊숙이 들어가 있고 반석은 기둥을 에워싸고 있는 듯하여 풍랑과 지진에도 끄떡없단다.
햇빛마저 졸고 있는 모두 다 잠든 한낮 고즈넉한 계곡에는 고무래로 밀어 만든 마당바위에는 명경지수가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다. 천적이 없는 시간대인지 버들치 열목어 그리고 어름치 등이 천연의 어로(魚路)를 향해 등지느러미를 곤두세우고 안간힘을 향해 꼬리를 치면서 올라가거나 수면이 낮은 곳에서는 옆으로 누어서 행여 적이 나타날까 봐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용을 쓰며 오르고 있어, 생물의 삶에는 본능적 욕구 외에 자신이 최선을 다 할 때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거연정에 앉아 사방을 본다. 한겨울 난방을 염려하여 북쪽에 바람막이 벽 하나를 판재로 구성한 판방 1칸을 해놓았을 뿐 처마 끝에 들문 하나 없이 사방이 확 트였다. 여기서 병자호란의 한을 억누르고 암반에 먹을 갈아 갈대꽃에 적셔서 글을 썼던 선비들의 음풍영월(吟風詠月) 모습이 바스락거리며 일어서서 다가온다.
초창기에는 다리가 없어 갈대나 나무로 만든 작은 뗏목으로 오고 갔을 것 같다. 그래서 뗏목을 묶어 메어놓으면 아무도 건널 수 없는 해자(垓字)가 되어 속세를 멀리하고픈 심정에 동정이 간다. 그런데 나는 화림교로 쉽게 건너와 70여 년의 해묵은 심신의 찌꺼기를 순간 바람에 날려 보내고, 냇물에 흘려보내고 있어 거연정 건립 정신에 누가 될까 봐 속마음을 들킨 심정이다.
조금 멀리 나온 여독(旅毒) 탓인지 꾸뻑하는 순간에 별의별 명상들이 뇌리를 스쳐 간다. 수수만년 밤마다 홀로 계곡을 지켜왔다던 달님이 부엉이 몸을 빌어서 흐느껴 울면서 하소연하고 있다. 밤마다 화림동 숲에서 울어대는 부엉이 소리는 달님의 흐느낌이었고, 노송 아래 수북이 쌓인 부엉이 똥은 달님의 눈물이라면서 아직도 화림동 계곡을 파헤치는 망치 소리에 달님을 멍들게 하여 옛날보다 얼굴에 검은 점이 많아졌단다. 그리고 화림동 숲 속 친구들이 하나둘씩 이사를 가고 있으니 쇠망치질 자제를 호소하고 있다.
그 옛날 사대부들은 우국충정(憂國衷情)의 표현은 먹물을 갈아 백지에 상소문을 올리거나, 방(榜)을 써서 우매한 백성들의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함양의 선비들이 이곳에서 얼마나 먹을 갈았는지 송진 태운 그을음으로 만든 먹물 냄새가 거연정 구석구석에서 피어올라 군신유의(君臣有義)와 목민심서(牧民心書) 묵향이 그치지 않고 피어오른다.
거연정에서 일어나 다음 장소로 가려고 댓돌 아래 신발을 신으려니 아까부터 구부정한 모습을 하고 있더니 나오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바라본다. 몇 백 년도 넘었을 노송(老松)이 용 비늘의 갑옷을 입었는데 옆구리에는 선혈의 흔적이 있다. 눈을 들어 보니 왜놈들이 태평양 전쟁 때 군수물자 수탈의 목적으로 소나무를 도끼로 찍어 송진을 탈취한 상처였다. 주리를 틀어도 모자랄 판에 병자호란 때문에 소홀했던 늙은 소나무의 한인가 해서 일부러 가까이 내려가서 상처를 어루만지고 위로하며 뒷걸음으로 나왔다.
거연정에서 실컷 머물고 아래 있는 군자정 동호정 그리고 농월정을 돌아보니 산간지역이라서 인지, 비가 오려고 하는지 사방이 어두컴컴해서 시계가 없으면 초저녁처럼 느껴져 귀가를 재촉한다. 드디어 빗낱을 떨더니 동쪽하늘에는 무지개가 솟았다. 무지개는 인간과 신의 언약식이라던데 달님과 노송한테 약속을 꼭 지켜야겠다. 오늘의 모든 일정을 계획하고 안내해 주신 정선 전 씨(旌善全氏)) 18대손 전일환 교수님께 감사 말씀 드립니다. ********** 동천(洞天): 깊은 산골짜기에 둘러싸인 신선이 살만한 경치 좋은 곳 피오르드: 빙하설에 의해 형성된 U자 모양으로 움푹 파인 계곡입니다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음악과 함께 물속에서 펼쳐지는 발레나 체조와 같은 종목 덤벙주초(柱礎): 둥글넓적한 자연 그대로의 돌을 다듬지 않고 건물의 기둥 밑에 놓은 주춧돌 그렝이질: 주춧돌의 표면과 나무 기둥이 꼭 맞도록, 기둥의 단면을 깎아내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