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섬 마을, 바다, 갈매기, 아기와 엄마, 굴 따기 등의 이미지가 애련의 감정을 일으키는
이 노래는 지금도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초등학교 시절의 동요다.
이 노래에 학원 강사나 의사나 보험설계사 아니면 가사도우미 같이 요즘 엄마들 상은 상상 없다.
섬에서 태어나 섬이 좋아서인지, 배운 것 없고 다른 선택이 없어서인지
노래에 나오는 여인은 어떤 남자와 결혼하여 이 섬에서 아이를 낳았고,
남편이 생존하는지 사별했는지, 집안 살림을 책임져야 할 입장인지 시간 때우기인지 아무 정보가 없지만
아기에게 젖을 먹여 재운 엄마는 굴 바구니를 챙겨 굴을 따러 바닷가로 간다.
요즘 같으면 잠든 아이를 혼자 두고 엄마가 외출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기에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아이가 깨어나면 어쩌나 하는 우려감마저 든다.
도구를 챙겨 들고 파도소리 갈매기 소리 은은한 저 고적한 해변을 지나 갯바위에 이른 수많은 날들.
도시 여성이 복잡한 도시 구조와 도시형 주택과 문명의 이기 속에서 굳어진 생활이듯,
섬마을 여성은 소박한 어촌과 푸른 하늘과 바다와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 속에서 굳어진 생활이다.
도시 여성이 고도의 지적인 권역에서 문화 혜택을 누려왔다면,
섬마을 여성은 비교적 지식과 문화의 영향권에선 벗어나 있었다 하더라도
어촌의 단순 소박한 환경 속에서 나름대로 마음 편한 삶의 방식을 이어왔다.
도시 여성이 인위적인 환경 다양한 문화 치열한 생활 구조 속에서 감성이 작용한다면
섬마을 여성은 자연적인 환경과 단조로운 생활 구조 속에서 감성이 작용해 왔다.
그것이 그녀의 일상이었고 그것이 그녀의 인생이었다.
이제 찰랑찰랑 바다물결이 바위섬을 때리는 적요함이 굴 따는 여인의 옷깃 속으로 파고들 때
도시 여성은 경험하기 힘든 바닷가 여인의 특별한 모정이 발동하는 것이다.
하던 일을 멈추고 도구를 챙겨 뻑뻑한 허리를 펴고는 해변을 지나 집으로 달려오는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인가?
하지만 모든 세상이 그런 것은 아니다.
부모의 마음이야 같겠지만 요즘 여성들의 심정은 섬에서 굴 따는 엄마의 심정과는 다르다.
출근 때 어린이 집에 아이를 맡기고 퇴근 때 데리고 오는 요즘 엄마들.
또 유치원 입학 경쟁을 하고 방과 후 태권도 학원, 영어 학원, 음악학원 등 여러 학원을 전전하는 요즘 아이들.
전자와 후자의 현실은 판이하지 않은가. 그런데......
섬마을의 엄마와 아기, 도시의 엄마와 아이들, 어떤 시대 어떤 공간에 있더라도 인간은 동일하다.
무엇이? 육지나 섬이나 인간은 모두 섬이다.
섬의 엄마도 도시의 엄마도, 어부도 장관도 모두 인간이요 인간은 모두 동일한 병을 앓는다.
바위에서 굴 따는 작업에도 도시의 빌딩에서 대형 크레인 작업에도 모두 인간의 병이 숨어있다.
그게 무엇인가? 인간의 치명적인 병은 암이 아니요 폐병이 아니요 신장병이 아니요 위장병이 아니다.
인간의 치명적인 병은 단절이다. 공허다. 외로움이다.
도시로 둔갑한 인간은 돌아서 앉으면 섬이 되어야 한다. 인간은 인간을 추적하는 이 정체를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대륙과 분리된 섬은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 실태의 상징이니까.
그렇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까지 섬이든 도시든 인간의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대륙과 섬은 만나 하나가 되고, 거기엔 섬집 아이도 도시 아이도 없는 것이다.
모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일 뿐.
2015. 10. 4
이 호 혁
첫댓글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