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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0. 아티샤의 명상요결 강의 초록
*두 가지 차원의 진리에 대해: 二諦說이제설
먼저 2제-진리의 두 가지 차원을 말한다. 진실제와 세속제. 진실제는 眞諦진제, 勝義諦승의제라 한다. 절대적 차원의 진리다. 세속제는 世諦세제, 상대적 차원의 진리이다. 이것을 다시 표로 정리해보자면
진제와 세제는 자연과 인공, 무위와 유위로 대응된다.
무위, 자연=공성sunyata(=청정visuddha), 열반, 절대적 보리심, 말-없음. 침묵. 무인과
인공, 유위=언어와 문자, 명칭, 상대적 보리심, 말-있음. 연기. 인과
족첸이나 선종에 말하는 마음의 근원이라든지, 원초적 의식이란 절대적 보리심 혹은 공성, 열반을 지칭한다. 소위 正法眼藏 涅槃妙心 정법안장, 열반묘심이 그것이다. 정법은 진리를 깨달은 안목에 갖춰져 있고, 열반은 유무를 떠난 미묘한 마음(그래서 마음이랄 것도 없는)이다.
*부처님은 애초에 입을 열어 사람을 가르칠 의도가 없었다.
“이 진리는 깊고 깊어,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섬세하고, 고상하고, 단순한 사려를 넘어서는 것이다. 지혜로운 이라야 알 수 있는 것인데 과연 받아들일 만한 사람이 있을까? 세상 사람들은 집착을 즐기고 기뻐한다. 그런 그들이 집착을 떠나고, 없애고, 사라지게 하는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에 부처님께서 설법하시기를 포기하시고 열반에 들까 염려하며 초조해진 대범천왕 사함빠띠Mahabrahma Sahampati가 무릎을 꿇으며 합장하고 간청하였다. “부처님이시여, 법을 설하소서. 여래시여, 법을 설하소서. 세존께서 법을 설하시지 않으면 탐욕의 강물에 떠밀리고 분노의 불길에 휩싸인 이 세상은 파멸로 치닫고 말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세상에는 그래도 때가 덜 묻은 이들이 있습니다. 선과 진리 앞에 진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버리지 마소서. 그들마저 기회를 놓치는 것은 참으로 슬프고 애석한 일입니다.” 범천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시는 부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노래한다. “가장 현명하신 분이시여, 모든 것을 보시는 분이시여, 슬픔을 없앤 분이시여. 진리의 누각에 올라 태어남과 늙음과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굽어보소서. 영웅이시여, 승리자이시여, 일어나소서. 진리를 설파해주소서. 분명 이해하는 이가 있을 겁니다.”
부처님은 범천의 간절한 부탁과 중생에 대한 연민으로 다시 세상을 살펴본다. 세상이 연못이라면 중생은 그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과 같구나. 어떤 연꽃은 물속에 잠겨 썩어버리고, 어떤 연꽃은 수면 가까이에 잠겨있고, 어떤 것은 물 위로 솟아올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수면 가까이에 있는 연꽃봉오리에 아침 햇살이 비치면 꽃봉오리는 물 위로 솟아올라 꽃을 피운다. 수면 가까이에 있는 연꽃봉오리같이, 때가 덜 묻은 중생에게 아침 햇살 같은 가르침을 주면 그들이 물 위로 솟아올라 꽃을 피우지 않겠는가? 그러면 그 화려한 빛깔과 은은한 향기로 주변을 아름답게 하지 않겠는가? 내가 지혜와 사랑으로 연꽃을 피우는 정원사가 되는 것이 어떠한가? 아득한 과거 생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는 무얼 위해서 수행하고 도를 이루려고 하였던가? 일체중생의 완전한 행복을 위해 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을 이룰 것을 서원하지 않았던가? 부처님께서는 마침내 세상을 향해 사자처럼 늠름하게 선언한다.
“내 이제 감로의 문을 여나니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낡은 믿음을 버리고”
*진리는 말로 전달되지 않는다. 진리는 설명되는 게 아니고, 언어와 문자로 전달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선종에서 진리는 言語道斷언어도단이라 한다. 참된 상태는 말과 글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생각으로 알아내려 하지 말라. 또 開口卽錯개구즉착이라 한다. 입을 벌려 뭐라고 하려 하면 바로 틀려버린다. 말은 그것에 대한 설명이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과를 직접 베어 먹어야 그 맛을 아는 것처럼, 진리는 직접 몸으로 맛을 봐야 한다. 自證自得자증자득이다. 그래서 스승은 말로 할 수 전할 수 없는 진리를 자비심의 발로로 말을 베풀어 말-없는 곳으로 제자를 이끈다. 스승이 입을 여는 것은 순전히 자비심 때문이며, 보리심의 서원 때문이다. 그래서 스승은 침묵에 머물지 아니하고 언어 문자를 빌려서 제자를 말이 끊어진 경지로 들어가게 한다. 이런 경우에 스승이 사용하는 언어 문자를 方便방편(upaya, expedient tool)이라 한다.
*<말 있음>에서 <말 없음>으로 나아가는 걸 공성을 체득한다고 하며, 그것은 열반의 경지이고, 공성을 통찰하는 것을 지혜(반야)라 한다.
<말 없음>에서 <말 있음>으로 돌아오는 건 보리심의 서원 때문이며, 그것은 자비의 실천이다. 여기에 대승의 바라밀이 적용된다.
스승의 역할이란 <말 없음>의 경지를 먼저 체득한 후 <말 있음>에 머무는 사람들을 <말 없음>으로 인도한다. <말 있음>에서 <말 없음>으로 나가는 것이 禪이요, <말 없음>에서 <말 있음>으로 나가는 것은 敎이다.
*여기에 선종에서 전해오는 하나의 예화가 있다. 어떤 선사 밑에서 법을 구하는 제자가 있었다. 법을 구하는 열정이 넘쳐 몰래 스승의 방을 엿본다. 스승이 어떤 제자에게 귓속말로 비밀스레 전해 주는 장면을 보았다. 자기에게도 그 비밀을 말해달라고 졸랐다. 스승은 삼 년 뒤에나 전해 주겠다고 했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제자는 때가 되었으니 이제 말해달라고 했다. 스승은 제자의 귀를 잡아당기더니 귓속말로 무엇인가 말해줄 것처럼 하더니, 아무 말 없이 다만 잡았던 귀를 밀쳐낼 뿐이었다. 그리고 내뱉는 말씀이 “비밀이 온통 이렇게 드러나 있는데 무슨 비밀을 다시 찾느냐!” 여기에서 제자는 큰 충격을 받아 깨침을 얻었다.
世尊有密語, 세존유밀어 세존이 숨긴 말씀 있었나,
迦葉不覆藏; 가섭불복장 가섭은 그대로 다 알아들었나니
一夜落花雨, 일야낙화우 하루 밤비에 꽃잎은 져서
滿城流水香. 만성류수향 물에 떠 흐르는 온 성안에 향기.
-雪竇智鑑(설두지감, 1105~1192)선사의 密語(밀어)
*자연은 말이 없고 사물에는 이름표가 붙어 있지 않다.
지금 여기! 말이 끊어져 고요하고 평화롭다. 청정 본연이다. 산하대지, 초목강산에 무슨 이름표가 달려있느냐?
자연에 무슨 시비곡직이 있을 것이며, 무슨 말을 하기는 하는가? 자연은 영원한 침묵에 잠겨 다만 스스로 거대한 조화를 이룰 뿐이다. 사물에 이름을 붙여서 분별하는 놈은 누구인가? ‘나’라고? 마음이라고? 주관이라고?
그것 또한 이름이 아닌가? ‘나’라고, 마음이라고, 주관이라고 이름 붙이는 놈은 무엇인가?
자연 그 자체, 사물 자체는 말이 없다. 그들이 입을 벌리고 ‘나를 무엇이라 불러주세요’라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는 꽃이고, 나는 돌이고, 나는 나무예요.’라고 하지 않는다.
누가 그들에게 이름 붙이고, 누가 그들을 낱낱이 알아서 각각 다른 이름을 붙이는가?
‘나’, 마음, 주관이라는 것에 해당하는 ‘그것’을 할 수 없이 한 물건, 혹은 영어로 It이라 하자.
‘그것’이 만물에 이름을 붙이고 낱낱이 분별해낸다. 산이 산인 줄 모르고 물이 물인 줄 모르는데, ‘그것’이 산을 산인 줄 알고 물을 물인 줄 안다. 그 ‘아는 것’이 바로 ‘나’이며, 마음이며, 주관이라고 불린다. 인간끼리 소통하기 위하여 편의상 그렇게 부른다. 그런데 ‘그것’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지만 이름이 곧 ‘그것’은 아니다. 이름 붙이는 ‘그것’에겐 이름이 없다. ‘그것’은 안이비설신의도 아니고 색성향미촉법도 아니다. ‘그것’은 알 수 없다. 알려지지 않는다. 알려지면 벌써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깨달음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다. 깨달음을 향하긴 향하되, 욕망하지 말라. 이게 구도자의 딜레마이다.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구도자의 길이긴 하지만, 깨달음을 욕망하는 한 깨달음은 오지 않는다. 깨달음은 길의 끝에 있는, 미래에 올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발밑에 있거나 오히려 바로 지금에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이른바 ‘깨달음’이 중요한 게 아니다. 깨달음을 찾는 당신 내면의 동기를 먼저 살펴보라. 무료하고 진부해진 자기의 삶을 일거에 보상해줄 로또 한 방을 찾는 게 아닌가? 가족으로부터 소외를 당했다든지, 애정결핍에 시달린다든지, 인간관계에 상처를 받았다든지, 직장과 사회에서 낙오되었다든지, 어쨌든 상처받은 영혼이 고독한 사막으로 내몰리면서 의지할 데를 찾은 것이 깨달음이라면, 깨달음을 구할 게 아니라 치유나 상담이 필요하다. 먼저 한번 생각해보라. 당신에게 만약 100억이 주어진다면 그래도 당신은 깨달음을 구하겠는가? 당신에게 완벽한 파트너와 완벽한 가족이 있다면 그래도 당신은 깨달음을 구하겠는가? 당신이 높은 지위를 얻어 상류층의 생활을 누린다면 그래도 당신은 깨달음을 구하겠는가? 당신이 완전한 건강을 누리면서 장수한다면 그래도 깨달음을 구하겠는가? 여기에 흔쾌하게 “예쓰” 할 수 있다면 깨달음을 향한 진정성이 있다고 할 것이거니와, 그렇지 못하다면 그 사람이 깨달음을 구하는 짓은 이색 취미활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깨달음을 얻으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순전히 환상이다. 깨달음에 대한 환상을 버려라. 깨달음은 당신을 더 고상하게 만들어 줄 수도 없고, 당신에게 행복과 안정과 명성과 부를 가져오지도 않는다. 깨달음이 당신을 어떻게 해주는 게 아니라, 당신이 깨달음을 어떻게 받아드리느냐가 문제다.
*그 스승에 그 제자, 그 제자에 그 스승. 법-인연이 중요하다. 모든 인연 가운데 법-인연이 가장 중요하다. 법-인연이란 최상의 법을 만날 기회 그리고 그런 법을 설해주는 스승을 만나는 기연. 그런 스승이 머무는 장소에 함께 있는 것. 그런 스승 밑에서 함께 배우는 도반들을 만나는 것. 그리고 가르치고 배우는 환경(정치적 사회적 조건과 자연환경)이 좋은 것, 더불어 그런 기간이 안정적으로 지속되면서 오래가는 것이다.
법-인연을 쌓은 법: 보시를 잘하라. 가르침에 대한 신심과 열정을 가져야 법-인연이 생긴다. 스승을 잘 모시는 태도가 필요하다. 항상 스승에게 법문을 청해야 한다. 그리고 법을 설할 법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스승을 배신하고 불신하고 의심하는 경향이 강하면 좋은 법-인연 맺기는 불가능하다. 스승의 가르침에 금방 싫증을 내거나, 변덕이 심해 금방 스승을 바꾸는 사람은 올바른 스승 만나기 어렵다. 최근 한국 사람들은 물질주의적, 배금주의적, 상업주의적으로 변해서 각 분야의 선생님, 교사 혹은 스승을 불신하고, 의심하면서 그들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심해졌다. 그래서 존경받는 스승이 나타나기 어렵게 되었다. 지금 한국을 보라. 대통령이 스승을 찾는 게 아니고 무당이나 도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가? 이러니 세계를 통찰하는 지혜나 미래를 이끌어갈 비전이 없다. 겨우 하루 하루를 닥치는 대로 마감할 뿐이다. 그럭저럭 해온 대로 할 뿐이다. 관심은 무사안일, 자리보전, 사익 챙기기에 가 있다.
현명한 지도자는 현명한 스승을 찾아 지혜를 구하는 법이다. 맹상군(孟嘗君, ? ~ BC 279, 전국 시대의 정치가)의 삼천 식객을 보라. 맹상군은 한 가지라도 재주가 있으면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식객을 받아들여 그 수가 삼천에 이르렀다. 계명구도(鷄鳴狗盜)의 고사를 보라. 맹상군은 어떤 정치적 목적에서 호백구가 꼭 필요했다. 호백구(狐白裘)란 여우의 겨드랑이 흰 털만 모아서 만든 옷으로 한 벌에 여우가 1만 마리는 필요할 정도로 희귀한 것이었는데, 구할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중 식객 중 한 사람인 구도(狗盜, 개처럼 재빠른 도둑)가 나서서 왕의 창고에 들어가 호백구를 훔쳐 왔다. 그리고 한번은 맹상군이 함곡관을 몰래 빠져나가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문은 꽉 닫혀 있고 경비가 엄중해서 진퇴양난에 빠졌다. 식객 가운데 흉내 잘 내는 명인이 나섰다. 그리고 그가 닭 울음소리를 흉내 내자 이에 진짜 닭들도 따라서 울기 시작했고, 닭 울음소리를 따라 열린 함곡관 문을 빠져나와 마침내 탈출할 수 있었다. 덕있는 지도자에게는 천하의 인재가 몰려든다. 불교의 스승도 마찬가지다. 국민이 복이 있고, 영적인 가치를 존중하고 수행자 집단께 보시하고 외호하면 위대한 스승은 어디선가 나타나 빛을 발한다. 한 나라가 충분히 부자가 못 된 것을 염려하기보다는 영적으로 깨어있는 현자가 없는 걸 염려해야 한다.
*갸툴 림포체(Gyatrul Rinpoche)의 꾸짖음(이 책의 저자인 앨런 월리스에게):
“젊었을 때 너는 인도로 가서 이런저런 스승을 찾아다녔다. 그 후 스위스로 갔다가 인도로 다시 돌아오고, 다시 스리랑카로 갔다가 여기로 왔다. 너는 아직도 여기저기로 돌아다니고 있다. 너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네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항상 너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덧붙이는 말: 젊은 수행자는 구도의 열정으로 사로잡혀 사방팔방으로 스승을 찾게 마련이다. 어디에 어떤 스승이 있다거나, 어느 산속, 어느 계곡에 고명한 수행자가 있다는 걸 들으면 불원천리하고 찾아간다. 그리고 곧 그 스승에 실망하거나 쉽게 판단을 내리고 다시 다른 스승을 찾아서 떠난다. 히말라야 산속 동굴에 있다고 하는 스승을 천신만고 찾아가기도 한다. 어떤 불세출의 스승이 당신 같은 제자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겠는가? 설령 그런 사례가 있다 치더라도 당신에게 해당 되는 건 아니다. 그리고 당신이 얻어들은 정보는 모두 2급, 3급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 스승에 대한 정보도 복이 있어야 얻어듣는다. 자기가 아는 한계 내에서 찾은 스승이기에 자기 복만큼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법-인연이 적으면 2류, 3류 스승을 만나서, 시간과 정력만 낭비하고 소득이 없다. 스승을 찾는 편력이 심드렁해지면 본래 자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발견한다. 본래 떠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고 지금도 있는, 그리고 앞으로 있을 그 진리! 진리가 지금 여기를 떠나있다면 그건 이미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초월도 아니고 내재도 아니며, 노력이나 정진에 달린 것도 아니고, 현재를 희생하여 미래에 기대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이미 늘 있었던 것이라면 ‘있다’라는 말도 맞지 않는다. 다만 찾음을 멈추라. 구함을 그만두라. 생각을 내려놓아라. 그러면 저절로 드러나리라.
그것이 너를 떠날 수 있느냐? 잠시라도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은 추구할만한 가치가 없다. 왜 그런가? 있다가 없어지고, 없어졌다 다시 생겨나는 것이라면 그런 것은 생멸법이라, 믿을 수 없고 귀의할 것이 못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네가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도 있었고, 수행하는 내내 너와 함께 했으며 수행을 마친 뒤에도 그대로 있을 것이며, 지금 여기에 이미 벌써 너와 함께 있은 지 오래다. 그래서 그것은 불생불멸, 무시무종이며, 영원한 현재다. 그것은 무엇인가? (3분 명상)
첫댓글 마 하 반 야 바 라 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