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수용하는 방식
손 경 찬
세상일은 방정식과 같다. 미지수가 하나 이상인 등식에서 미지수의 값에 따라 참 또는 거짓이 되는 것이 방정식이고, 항상 참인 것은 항등식이다.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서 미래를 예상해 볼 수 있는 여러 일이 참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며칠째 머리에서 맴돌다가 가슴으로 내려왔다. 한마디로 ‘아프다’라는 말이 입속에 낮게 깔린다.
사물을 끝까지 파고들어야 이치를 깨닫고, 어떤 일이든 올바른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며 남이 보지 않을 때 삼가며, 아무리 일이 바빠도 가정의 테두리는 깨지 않으며 나라와 세상을 편안하게 하자는 격물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가치관을 가진 공자는 내 삶의 그림자 같은 멘토다.
공자의 말씀 중에 특히 내 마음을 끌었던 것은 ‘욕망에 사로잡힌 백성을 교화하기 위한 수단이 예악禮樂이다’라는 부분이다. 마음이 하나 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몸짓과 흥얼거림이다. 사람들이 만든 동작과 음악인 셈이다. 나는 예악을 한마디로 예술의 씨앗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기본 심성의 발현이다. 치솟는 감성을 절제하고 조절하여 중화에 이르는 것이 예악에 기반한 예술이다. 그래서 어느 장르든 예술은 욕망보다 희망이나 소망에 가깝다.
이런 사상을 가진 공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전 세계적이다. 춘추시대 말 노나라의 사상가이자 교육자로 산동성 곡부에서 태어나 삶과 통치에 대해서는 어질 인으로 대표되는 사람이다. 수천 명의 제자와 나눈 문답집인 <논어(論語)>는 국경을 넘어선 도서가 되었다. 곡부에는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삼공이 있다. 공자의 묘인 공묘, 직계 자손이 살았던 집인 공부, 10만이 넘는 일족의 묘소로 단일 가문 세계 최대규모인 공림이다.
이 어마어마한 곳에서 매년 9월 26일부터 10월 10일까지 공자가 태어난 음력 8월 27일을 기념하여 산둥성 인민정부 주최, 세계 각국 인사들을 초청하여 ‘국제 공자 문화제’가 펼쳐진다. 내가 초청된 것은 나를 지칭하는 여러 가지 명패를 모두 떼고, 평소 공자를 존경하고 좋아했던 마음의 텔레파시가 통했으리라 믿는다.
4박 5일간 함께 한 일행들과 나누었던 추억은 내 인생의 소중한 재산으로 남겨두고 지금부터 공자 문화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공자탄신 기념행사와 유네스코 공자 교육상 시상식, 전통 퍼레이드, 공자께 올리는 제사, 가무, 서예전, 예술작품 전시, 학술 세미나, 유적지 탐방 등 눈으로 본 모든 것과 마음으로 느낀 전부를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중국이 참으로 자랑스러워하는 역사 문화 행사라는 한마디로 갈음한다. 그중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한 가지는 ‘문묘일무文廟佾舞’이다.
문묘일무는 노래와 춤이다. 이는 스승을 받들어 섬기는 제사인 문묘석전과 함께 이루어지는데 주제는 ‘공경’이다. 예의 몸짓에 리듬이 만들어낸 춤이다. 앞으로 나가고 뒤로 물러나고, 몸을 구부리고 펴고, 우러러보고, 손을 합하고 벌리는데 음과 양의 모습으로 최대의 공손과 존경과 겸손을 표한다. 이 모습은 흡사 스승과 제자가 마음을 교환하는 것처럼 보인다. 수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당시의 공자와 제자들을 엿보는 기분이 들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시간도 공간도 초월하는 사랑과 존경의 마음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보았다.
부럽다. 나라를 일으킬 젊은 인재와 그들에게 좋은 정신을 물려준 조상이 있다는 것이. 이런 문화가 대대로 이어질 것을 상상하니 나는 아프다. 왠지 모르게 축제 내내 나는 아프다는 감정이 자꾸만 올라왔다. 세계적으로 교육과 문화, 철학 영역에서 공이 큰 사람에게는 ‘공자상’이 내려지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세계인의 시선도 아프다. 공자의 사상을 알리는 플렛폼이 된 문화제에서 나는 우리나라를 생각했다.
우리나라에도 공자학당을 비롯하여 여러 교육 분야에서 공자를 모셔온다. 이뿐이 아니다. 각 지자제에서는 상호발전의 기회라며 우호 교류 협약을 통해 경제, 문화, 역사까지도 파고들어 서로 초청을 주고받는다. 글로벌이라는 이름 아래 미래를 예상하여 미지수를 대입해 보는 것이다. 좋은 값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로 공자를 모셔오는 취지는 좋다. 나도 공자의 순수한 사상은 누구보다 좋아한다. 어떤 불순함이 섞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경주향교에서는 유림을 비롯한 2백 명 이상의 사람이 모여 매년 공자의 제사를 지낸다.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전통 유교 의식이다. 향교에서는 학생을 모아 공자의 사상을 전한다. 인의예지, 누가 보아도 좋은 일이다. 공자의 인을 일찌감치 배운 아이들은 인에 대하여 하나로 낙인찍지 않는다. 인은 어질지만, 때때로 정직함이고, 성실함이고, 자유분방함이기도 하다. 인이라는 하나에 대하여 공자는 제자의 성향에 따라 인을 다르게 가르쳤다. 이것이 공자의 사상이다.
모대학에서는 차축제 기간에 국제관을 만들어 중국 팔찌 만들기와 중국 전통 경극 가면체험과 같은 중국 전통 문화를 소개하고 공자아카데미 홍보도 했다. 세계가 하나의 ‘촌’이라는 개념인 지금, 어느 나라 문화든 접하고 알아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자주 보았던 우리나라의 하회탈보다 중국 경극 가면이 더 새로워 보이는 것도 괜찮다. 그러나 근본을 잃어버리지는 않아야 한다.
모고등학교에서는 ‘공자학당’을 개원했다. 중국어 특성화 고등학교로서 잘한 일이다. 중국어 교육 역랑에 대하여 중국교육부 산하 교육기구인 국가한반國家漢辦이 직접 심사를 거쳐서 평가하고 선정했다고 한다. 협력하여 잘 이루어낸 일이지만, 어쩐지 마음이 쓰이는 부분도 있다. 방정식에서 미지수가 답일 수도 있으나 오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우리의 막사발에 대한 억울함과, 한복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밥그릇이 있다. 막사발이다. 막사발에 고봉으로 얹힌 밥을 먹는 것이 소원이었던 일제강점기, 우리의 도공들은 이유도 모르고 일본으로 붙들려갔다. 일본인이 만들라는 막사발을 만들고 밥을 얻어먹었다. 먹을 것이 없는 우리나라보다 나았을지 모른다. 배가 불렀으니까. 그렇게 만들어낸 수많은 막사발, 그 밥그릇은 일본의 각색하에 일본 국보 ‘이도다완’이 되었다. 눈 뜨고 앉아서 뻔히 알고도 도둑맞은 우리의 기술이자 정신이다.
한 번 당했으면 두 번은 당하지 않아야 바보 소리 안 듣는다. 그런데 우린 또 뺏길지도 모를 위기에 놓인 것이 있다. 바로 한복이다. 일본에는 기모노가 있고 중국에는 치파오가 있고 우리나라에는 한복이 있다. 기증 사실이다. 그럼에도 중국은 한복에 눈독을 들인다. 우리는 침략의 역사가 한 번도 없는 민족이다. 그래서 남의 것을 뺏을 줄 모르는 고운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대한민국 사람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이렇게 고운 정신을 빼앗길까봐 걱정이 되는 것이다. 다시는 눈 뜨고 앉아서 어쩌면 입고 앉아서 벗기게 될지도 모를 우리 전통의상 한복을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 한 구석에 늘 자리잡고 있다.
세상을 바라볼 때, 좋은 게 좋다는 긍정의 의식도 필요하다. 그러나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부정이 아니라 최고 수준의 긍정이다. 근본을 지키고 서로의 것을 지켜주고 인정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욕심은 가지되 탐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막사발과 한복이 욕심나겠지만, 탐욕으로 이어지지 않아야 국가간에도 정심인 것이다. 물질적인 것도 이러한데 사상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동서양 막론하고 어떤 사상이든 수용하여 배우는 것은 좋으나 우리의 근본을 해치거나 우리 것을 등한시하면서 다른 나라 것을 좋아라 받아들이는 문화와 예술, 정치 경제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아팠던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