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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득공의 『발해고』를 읽고(2013.10.8)
옮긴이의 말
『발해고』를 펴내며
양주 송산에 묻혔다는 성해응의 글을 읽고서도 아직 그의 산소를 찾아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다.
이 책의 번역에 대하여
1.조선고서간행회에서 활자로 간행한 것(1911년 간행, 1976년 경문사 영인)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보다도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1권본 『발해고』(古2824-19)가 오류가 적어서 이를 저본으로 삼았다. 1권본 『발해고』의 본문에 취향산루 장서라 하였고, 표지에는 소전장서라는 도장이 찍힌 종이 쪽지가 붙어 있으므로, 취향산루에서 소전을 거쳐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들이 누구인지는 불명이다. 혹시 소전은 조선총독부에 근무하였던 오다쇼오가 아닌지 모르겠다.
2.기존의 『발해고』필사본에는 성해응의 서문이 달려 있지 않아서,『연경재 전집』 외집에 실여 있는 것을 추가하였다.
3.한자는 원문 그대로 입력하되, 입력할 수 없는 극히 일부의 이체자는 본래의 글자로 대체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영인본과 대조하기 바란다.
4.4권본 『발해고』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영재서종』에 수록되어 있다. 이 곳에는 귀중본으로 분류된 원본이 있고, 이를 복사한 복사본이 있다.
참고로, 원본은 열람이 제한되어 있고 복사본은 상태가 좋지 않아서 읽을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따라서 원본을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든 것이 있으므로 이를 열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유득공과 『발해고』
1.생애
유득공은 우리 역사에서 북학파의 한 사람으로, 그리고 이른바 4검서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는 인물이다. 또한 한문학사에서는 4가(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그의 자는 혜풍(惠風), 혜보이고, 호는 영재, 영암,가상루,고운당, 고운거사,은휘당 등이 있다. 특히 고운당은 운동이라고도 불리던 교서관동(지금의 충무로2가 부근)에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당호이다.
부친 유춘이 16세 때에 한 살 위였던 남양 홍씨와 결혼하여 8년만인 1748년11월5일에 외아들 유득공을 낳게 된다. 이때 유득공의 증조부인 유삼익과 외조부인 홍이석이 서자였기 때문에 그는 서얼 신분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이로부터 그의 생애는 대체로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먼저, 성장기는 그가 태어나서부터 20세 전후까지를 이른다.-20세 이후 북학파 인사들과 교유. 이 당시에 그의 숙부와 더불어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등과 일문을 이루면서 서로 교유. 25세 때 기자로부터 후백제에 이르는 시기의 우리나라 한시들을 모은 『동시맹』1권을 엮고 서문을 지었다.
32세이던 1779년6월1일에 검서관(檢書官)에 임명되어, 마침내 관료로서의 활동기에 접어들게 된다. 35세 되던 늦봄에도 강화도 외규장각에 머물면서 서적들을 조사하였다.
37세(1784년)에 검서관을 그만두고 포천현감으로 나가면서 지방관 생활을 시작하였고 이 무렵 포천이 고향인 12세 아래의 성해응과 교유가 시작되었던 듯하다. 이해 윤3월에는 『발해고』를 저술하였다. 이듬해에는 양근(지금의 양평) 군수로 옮겼다가 42세 때인 1789년에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와 광흥창 주부로 있었고, 다시 이듬해 5월에는 사도시 주부로 옮겼다. 자리를 옮기자마자 청나라 건륭제의 80세 생신 축하사절의 일원으로 박제가와 함께 연경을 다녀오게 되니, 이것이 1790년 1차 연행이다. 5월27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열하와 연경을 방문하고 여러 문사들과 교유한 뒤, 10월10일 압록강을 건너왔으니, 이 여정을 글로 남긴 것이 『난양록』이다.
가평군수(1794년)-통정대부(정3품, 1796년) 오위장-풍천도호부사(1800년)그해 6월 정조 승하(정조로부터 하사 받은 책이 모두 308권)-1801년(2차 연행길-주자서 선본을 구하기 위해, 2월25일 서울을 출발하여 4월1일 연경에 들어간 뒤 32일간 머물고 5월11일에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도합 107일이 소요되었다. 이 여행에서 돌아온 뒤인 8월5일 연대재유록을 저술-)-1807년9월1일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 성해응이 은거하던 포천 향산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양주 송산(지금의 의정부시 송산동)에 묻혔으니 이 곳은 그의 부치닝 묻힌 곳이기도 하다. 그의 슬하에는 장남 본학, 차남 본예와 2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 모두 검서관을 역임하였다.
2. 역사 인식과 저술
그는 역사가라기 보다는 시인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의 역사 인식은 문학론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사실성이 뛰어나고 음향성이 탁월한 시를 지었는데, 이것은 글자의 속성과 소리에 대한 정통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물론 여기에는 청나라 고증학으로부터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는 중국과 조선 외에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언급한 것만 하여도 만주, 몽고, 회회, 안남(베트남), 남장(라오스), 면전(미얀마), 대만, 일본, 유구가 있고 서양의 홍보번(영국), 아란타(화란)도 있다. 그의 세계관이 넓어짐에 따라 중국 일변도의 관념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발해고에서 일본 사료까지 인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저술은 네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 자신의 시문들을 모은 것이거나 이와 관련된 것이다. (영재집, 동시맹)
둘째, 시문에도 속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연행과 관련된 것들이다.(병세집, 나양록, 연대재유록, 금대억어)
셋째, 신변잡사와 단상들을 연대순으로 써내려간 고운당필기와 우리나 세시풍속을 최초로 기록한 경도잡지가 있다. 특히 경도잡지는 뒤에 김매순의 열양세시기, 홍석모의 동국세시기 편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넷째, 이십일도회고시, 발해고, 사군지와 같은 역사서
3. 발해고
그가 역사가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이 책으로 인해서이다. 역사학계에서의 연구가 모두 이 책에 집중되어 왔던 데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1권으로 된 발행고와 4권으로 된 발해고가 각기 필사본 형태로 소장되어 있다. 저자의 서문은 1784년 윤3월에 지은 것으로 여기에는 이 책을 지은 경위와 목적이 잘 드러나 있다. 그가 이책을 짓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검서관으로서 규장각에 소장된 책들을 많이 읽을 수 있었던 데에 있다. 이 책은 9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가 책이름에 굳이 고자를 붙인 이유가 그의 서문에 적혀 있다. 아직은 자료 정리에 그치고 있을 뿐이지 역사서로서의 체계를 갖추기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득공의 지리 고증작업은 그 뒤에 정약용, 한진서 등이 발해 지리를 제대로 비정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이 책에는 모두 22종의 책이 인용되었다. 이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일본의 역사서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가 사학사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서문에 나타난 혁신적인 발해관 대문이다. 이미 잘 알려진 바대로 그는 여기서 고려가 발해까지 우리 역사에 넣어 남북국사를 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고 서두를 꺼낸 뒤, 발해를 세운 대씨가 고구려인이고 발해가 차지하고 있던 땅도 고구려 땅이었다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남북국시대론의 효시를 이루는 것이다.
나아가 발해 영토가 거란과 여진에게 넘어가 버렸지만, 고려가 발해사를 서술하지 않음으로써 이제는 이 땅을 도로 찾으려 하여도 근거가 없게 되었다고 한탄해 마지 않았다.
4.맺음말
그가 신분적 제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32세에 검서관으로 출발하여 20여 년간의 관직 생활을 거쳐 만년에 정3품까지 올랐던 것은 과거에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것으로서 정조의 특별한 배려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발해국(왕계도)
요동지방 전체가 발해 땅이었고, 동북의 오랑캐들까지 병합하였다. 당나라 현종 계축년(713)에 일어나 후당 장종 병술년(926)에 멸망하였다. 13대 왕에 이르렀으나, 그 후는 알 수 없다. 214년간 나라를 유지하였다.
성해응의 서문
공께서 정력을 쏟아 고증하고 연구하여 이 책을 지은 것은, 본디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성정에서 비롯된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자세히 검토하여 국가를 세워 운영해갔던 뜻을 이해하게 된다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정책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않을 터인데, 이를 알아주는 사람이 극히 적어 함부로 버려지게 되니, 실로 애석한 일이다.
박제가의 서문
내 친구 유혜풍은 박식하고 시를 잘 지으며 과거의 일도 상세히 알고 있으므로, 이미 이십일도시주를 지어 우리나라의 볼만한 것들을 자세히 밝혀 놓았다. 더 나아가 발해고 1권을 지어서 인물, 군현, 왕의 계보, 연혁을 아주 미세한 것까지 세세히 엮어서 종합해 놓았으니, 가히 기쁜 일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 고려 왕씨가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는 것이니, 왕씨가 옛 땅을 회복하지 못함으로써 계림과 낙랑의 터전이 마침내 애매모호해지고 스스로 천하와 단절되어 버렸던 것이다. -정조 9년(1785) 가을
유득공의 서문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그러나 발해사를 쓰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고려가 마침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 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크게 한탄할 일이다.
장건장(806~866)은 당나라 사람이었으면서도 오히려『발해국기』를 지었는데, 고려 사람이 어찌 홀로 발해 역사를 지을 수 없었단 말인가?
갑진년(1784년)윤3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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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시
1.왕에 관한 고찰
1. 진국공
진국공은 성이 대씨이고 이름은 걸걸증상으로 속말말갈인이었다. 속말말갈은 고구려의 신하게 되었던 자들이다. 당나라 고종 총장 원년(668)에 고구려가 멸망하자 걸걸증상은 아들 대조영과 함께 집안 식솔들을 이끌로 영주로 옮겨와 사리라 칭하였다. 사리란 것은 부락의 벼슬아치를 가리키는 거란 말이다.
2. 고왕
고왕의 이름으로 조영으로 진국공의 아들이다. 일찍이 고구려 장수가 되었는데, 아주 용맹스러웠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였다. 진국공이 사망하고 걸사비우가 패하여 죽자 대조영은 이를 피하여 도망하였다.
3. 무왕
무왕의 이름은 무예로 고왕의 아들인데, 처음에 계루군왕으로 봉해졌다. 개원7년(719)6월 정묘일에 당나라가 좌감문솔 오사겸을 임시로 홍려경의 직책에 임명한 뒤, 발해에 가서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때에 무왕을 좌효위대장군, 홀한주도독발해군왕으로 책봉하였다.
4. 문왕
문왕의 이름은 흠무로서 무왕의 아들인데, 즉위하여 대흥으로 연호를 고쳤다. 보응 원년(762)에 당나라가 조서를 내려 발해를 국으로 삼고, 왕을 발해국왕으로 올려 책봉하였으며, 검교태위를 제수하였다.
5. 폐왕
폐위된 왕의 이름은 원으로서 문왕의 일가 동생이다. 문왕의 아들 굉림이 일찍 죽어 원의가 왕이 되었으나 왕위에 있은 지 1년 만에 의심이 많고 잔인하다 하여 나랏사람들이 죽였다.
6. 성왕
성왕의 이름은 화여로서 굉림의 아들이다.
7. 강왕
강왕의 이름은 승린으로 문왕의 작은 아들인데, 즉위하여 정력으로 연호를 고쳤다.
8. 정왕
정왕의 이름은 원유로서 강왕의 아들인데, 즉위하여 영덕으로 연호를 고쳤다.
9. 희왕
희왕의 이름은 언의로서 정왕의 동생인데, 즉위하여 주작으로 연호를 고쳤다.
10. 간왕
간왕의 이름은 명충으로 희왕의 동생인데, 즉위하여 태시로 연호를 고쳤다.
11. 선왕
선왕의 이름은 인수로 간왕의 종부이고 고왕의 동생 대야발의 4세손이다. 즉위하여 연호를 건홍으로 고쳤다.
12. 왕 이진
선왕의 손자이다. 아버지 신덕이 일찍 사망하여 왕위에 올라 함화로 연호를 고쳤다.
13. 왕 건황
이진의 동생이다. 대중 12년(858)2월 계미일에 당나라가 조서를 내려 왕위를 잇도록 했다.
14. 왕 현석
건황의 아들이다. 의종 함통 연간(860~873)에 세 번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였다.
15. 왕 인선
역사기록에 계보가 나와 있지 않다. 발해는 당나라 때부터 자주 학생들을 파견하여 수도의 태학에서 고금 제도를 익히게 함으로써, 해동의 번성한 왕국이라 불리게 되었다.
16. 홍료왕
이름은 연림으로 고왕의 7대손인데, 요나라에서 벼슬하여 동경 사리군 상온이 되었다.
오사성 부유부 염부왕
2.신하에 관한 고찰
1. 대문예 대일하 마문궤 총몰아
대문예는 무왕의 동생이다. 무왕이 문예를 시켜서 흑수말갈을 공격하게 하였다.
왕은 마문궤와 총물아를 당나라로 파견하여, 편지에서 문예의 죄상을 자세히 언급하면서 그를 죽이도록 요청하였다.
2. 대야발 대굉림 대신덕
대야발은 고왕의 동생이고, 대굉림은 문왕의 세자이고, 대신덕은 선왕의 세자이다.
3. 임아상 장문휴
임아상은 무왕의 외삼촌이고 장문휴는 무왕 때의 대장이다.
4. 대상청 대정한 대청윤
정원 7년(791)정월에 문왕이 대상청을 사신으로 보내서 당나라에 조공하였다. 당나라가 그에게 위위경동정을 주었다. 그 뒤에 귀국하였다. 대정한, 대청윤은 모두 문왕 때의 왕자이다.
5. 대능신 여부구
대능신은 강왕의 조카이고, 여부구는 관직이 우후루번장.도독이었다.
6. 대예
장경 4년(824) 2월에 선왕이 대예 등 5명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고 숙위에 참여하기를 청하였다.
7. 대명준 고보영 대선성
대명준은 대이진 때의 왕자이다. 고보영은 관직이 동중서우평장사였다. 대선성도도 대이진 때의 왕자이다.
8. 고원고
고원고는 민중 지방에 있던 당나라 진사 서인을 방문하여 발행 사람들이 그가 지은 참사검, 어구수, 인생기하,의 3개 부를 금으로 써서 병풍을 만든다는 사실을 전하였다.
9. 대원겸
대인선의 조카로서 관직이 학당친위였다.
10. 고인의 덕주 사나루 고재덕
고인의는 관직이 영원장군 낭자이었고 덕주는 유장군 과의도위였고, 사나루는 별장이었으며 고재덕은 수령이었다.
11. 서요덕 이진몽 이알기몽
서요덕은 관직이 약흘주도독 충무장군이었고 이진몽은 운휘장군이었으며 이알기몽은 수령이었다.
12.모시몽
관위가 보국대장군이다. 문왕 때 75명을 이끌고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왕의 뜻에 따라 10년간 사신을 보내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13. 양승경 양태사 풍방례
양승경은 관위가 보국대장군, 양태사는 귀덕장군이었고, 풍방례는 판관이었는데, 문왕 때에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14. 고남신 고흥복 이능본 안귀보
고남신은 관직이 보국대장군 겸 장군, 현도주자사 겸 압아관 개국공이었고, 고흥복은 부사, 이능본은 판관, 안귀보는 해비였다.
15. 양방경
문왕 때에 하정사로 당나라에 조공하였다. 등원하청을 맞이하기 위해 파견된 일본 사신 고원도가 그를 따라갔다.
16. 왕신복 양희진 달능신
왕신복은 관직이 자수대부, 행정당성좌윤, 개국남이었고, 양희진은 판관이었으며, 달능신은 주홍빛 관복을 입은 품관이었다.
17. 일만복 모창록
일만복은 관위가 청수대부였고, 모창록은 부사의 직책을 띠고 있었다. 문왕 때에 325명이 배 17척을 나누어 타고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출우국에 도착하였다. 일본 천황이 국서가 전례에 어긋난다고 하여 발행에서 보낸 물건과 함께 받지 않았다.
18. 오수불
문왕 때에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능등국에 도착하자, 일본 관청에 그들이 온 이유를 물었다.
19. 사도몽 고녹사 고울림 고숙원 사도선 고규선
사도몽은 관직이 헌가대부, 사빈소령, 개국남이었고, 고녹사는 대판관, 고울림은 소판관, 고숙원은 판관이었으며, 사도선은 대녹사, 고규선은 소녹사였다.
문왕 때 187명을 이끌고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왕비의 상을 알리고 아울러 일본 천황의 즉위를 축하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도중에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겨우 46명만 살아남고, 고숙원 및 소녹사 한 명도 역시 사망하였다.
20. 장선수
관직이 헌가대부, 사빈소령이었는데, 문왕 때에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왕의 명령을 받으러 고려조신전계 등이 뱃길을 잃고 표류하다가 멀리 오랑캐의 땅에 도착하였는데, 배가 파손되어 배 두 척을 만들어 귀국시켰다고 전하였다.
21. 고반죽 고설창
고반죽은 압령이었고, 고설창은 통사였다.
22. 여정림
관직이 광간대부, 공부낭중이었다. 여정림은 당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일본 승려 영충의 편지를 일본 천황에게 바쳤고, 일본 천황은 답장를 건네주었다.
23. 대창태
관직이 위군대장군, 좌옹위도장, 상주국, 개국자였다.
24. 고남용 고다불
고남용은 두 번 일본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 나라에서는 홍려관에서 잔치를 베풀거나 조집원에서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25. 왕효렴 고경수 고영선 왕승기
왕효렴은 대사였고, 고경수는 부사, 고영선과 왕승기는 판관으로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26. 왕문구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27. 위균
관직이 철주자사였다. 요나라 천현 원년 정월에 홀한성이 격파되었는데, 7월에 위균이 칠주성을 지키자 요나라 대원수 요골이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 와서 을축일에 성이 함락되었다.
28. 대소현
관직이 사도였다. 홀한성이 격파되자 대소현은 요나라에 항복하였고, 요나라는 그를 동단국 좌차상으로 임명하였다.
29. 고모한
일명 고송이라고도 한다.
30. 대인선의 신하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들
31. 신덕
관직이 장군이었다. 고려 태조 8년(925) 9월에 병신일에 휘하의 500명과 함께 고려로 도망하였다.
32. 대화균 대균로 대원균 대복모 대심리
대화균과 대균로는 관직이 예부경이었고 대원균은 사정, 대복모는 공부경, 대심리는 좌우위장군이었다.
33. 모두간 박어
모두간은 관직이 좌수위소장이었고, 박어는 검교개국남이었다.
34. 오흥 승려 재웅
오흥은 공부경이었다. 재웅도 역시 그의 무리 60명과 함께 오흥을 따라 고려로 도망하였다.
35. 김신
고려 태조 11년(928)3월 무신일에 60호를 이끌고 고려도 도망하였다.
36. 대유범
고려 태조 11년(928) 7월 신해일에 백성들을 이끌고 고려로 도망하였다.
37. 은계종
고려 태조 11년(928) 9월 정유일에 휘하 사람들과 함께 고려로 도망하였다.
38. 홍견
고려 태조 12년(929) 6월 경신일에 배 20척에 사람과 물건을 싣고 고려로 도망하였다.
39. 대광현
대인선의 세자이다. 고려 태조 17년(934) 7월에 무리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로 도망하였다.
40. 진림
고려 태조 17년(934) 12월에 휘하 160명과 함께 고려로 도망하였다.
41. 박승
고려 태조 21년(938)에 3천여 호를 이끌고 고려로 도망하였다.
42. 최오사
후주 세종 현덕 초년에 최오사가 휘하 30명과 함께 후주로 귀순하였으니, 대체로 발해 추장일 것이다.
43. 대난하 이훈
송나라 태종 태평흥국 4년(979)에 진양을 평정하고 유주로 군대를 이동하였는데, 대난하가 소교 이훈 등 16명과 그 휘하의 300기병을 이끌고 투항하자 태종이 그를 발해도지휘사로 삼았다.
3.지리에 관한 고찰
1.『신당서』기록된 발해 지리
5경
상경 용천부
중경 현덕부
동경 용원부
남경 남해부
서경 압록부
15부
용천부
현덕부
용원부
남해부
압록부
장령부
부여부
막힐부
정리부
안변부
솔빈부
동평부
철리부
회원부
안원부
62주
용천부 3주
현덕부 6주
용원부 4주
남해부 3주
압록부 4주
장령부 2주
부여부 2주
막힐부 2주
정리부 2주
안변부 2주
솔빈부 3주
동평부 5주
철리부 6주
회원부 9주
안원부 4주
3독 주주
2.『요사』에 기록된 발해 지리
부, 주
현덕부
용원부
압록부
동평부
철주
탕주
흥주
경주
환주
계주
속주
군,현
현덕부 1군
삼로
용원부 3군
용하
회농
길리
압록부 2군
반안
비류
철리부 1군
철리
부,주 미상의 3군
안정
동산
안녕
용천1n5현
부리 장평
공진
숙신 좌모
현덕부 26현
산양
한양
백암
상암
영풍
위성 하단 창산 용진
영봉 상풍 백석 균곡 가리
성길 산산 철산
장년 금덕
계산
화산
자몽
숭산 위수 녹성 봉집
용원부 15현
용원
영안
오산
벽곡
웅산
백양
해양 접해 격천
수기 순화 미현
홍하 송성 석산
남해부 16현
천청 신양 연지 낭산 선암
초산 초령 시천 첨산 암연
옥저 취암 용산 빈해 승평
영천
압록부10현
환도 신향 기수
신록 신화 검문 안풍 발각
습양 협석
부여부11현
포다 부여 현의 작천 강사
신안 어곡 영녕 풍수 부라
영평
회원부 9현
부수 우부
산하 흑천 녹천
월희 회복 표산 유수
안원부 2현
모화 숭평
부, 주 미상의 9현
장태 풍영 웅산 영봉 녹군 녹파 운천 안이 만안
3.『청일통지』에 기록된 발해 지리
5경 15부 62주
용천부
한 삼국 진 나라 때에 읍루국 땅이었고 후위 제 주나라 때에는 물길국 땅이었다.
현덕부
지금의 길림오라성 동쪽에 있었다.
용원부
한나라 때 현도군 땅이었고, 진나라 때 평주에 속하였다.
남해부
한나라 때 현도군 땅이었고, 뒤에 낙랑도위에 속하였다.
부여부
한나라 때 부여국 땅이었고, 당나라는 이 곳에 흑수도독부를 두었으며, 발해에 편입되어 부여부가 되었다가 또다시 용천부로 되었다.
심주
한나라 때 읍루 부여 옥저 조선 등의 땅이었고, 삼국 진나라 때에는 평주 땅이었다. 후위 때에는 영주 땅이었고, 제 주나라 때에는 고구려 땅이었다. 수나라 때에 영주 땅이었고, 발해 때에 발해에 편입되어 심양으로 되어 정리부에 속하였다.
개주
한나라 대에 서개마현이었고, 삼국시대에 평주 땅이었다. 진나라 이후에 고구려 땅이 되었고, 당나라 대에 고구려 개모성이었으며, 태종이 그 땅을 빼앗아 개주를 설치하였다.
부주
한나라 때 읍루국 땅이었고, 수나라 때에 월회국 땅이었다.
삼로군
지금의 영해현이다.
홀한하
길림오라 지역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과거의 회녕성 북쪽을 지난다.
상경성
지금의 영고탑성 서남쪽에 있다.
평양
고구려왕의 도읍지, 장안성이라고도 불렀고 왕검성이라고 하였다.
곽주
당나라가 곽주를 두었고, 발해가 이를 계승하였다.
모주성
본래 발해 안원부에 속하였고, 녹주 서쪽 200리에 있었다. 녹주는 압록부를 가리키는 데 지금의 조선영토 안에 있다.
4.관청 및 관직에 관한 고찰
1.문관 직제
선조성
중대성
정당성
충부
인부
의부
작부
창부
선부
지부
예부
신부
융부
계부
수부
중정대
전중시
종속시
문적원
태상시
사빈시
대농시
사장시
사전시
주자감
항백국
2.문관 직제
좌맹분위
우맹분위
좌웅위
우웅위
좌비위
우비위
남좌위
부좌위
북우위
5.의식 및 복장에 관한 고찰
3질 이상은 자줏빛 관복을 입고
상아홀과 금어대를 휴대한다.
5질 이상은 주홍빛 관복을 입고
상아홀과 은어대를 휴대한다.
6질과 7질은 옅은 주홍빛 관복을 입고
나무홀을 휴대한다.
8질은 녹색 관복을 입고
나무홀을 휴대한다.
6.물산에 관한 고찰
태백산의 토끼
남해부의 다시마
책성부의 된장
부여부의 사슴
막힐부의 돼지
솔빈부의 말
현주의 베
옥주의 면
용주의 명주
위성의 철
노성의 벼
미타호의 붕어
환도의 오얏
악유의 배
부주의 은
7.국어에 관한 고찰
왕을 가독부, 성왕, 기하라 부르며, 왕의 명령을 교라 한다. 왕의 아버지를 노왕, 어머니를 태비, 처를 귀비라 하고, 맏아들을 부왕, 나머지 아들을 왕자라 한다. 관품은 질이라 한다.
8.국서에 관한 고찰
무왕이 일본국 성무천황에게 보내는 국서
문왕이 일본국 성무천황에게 보내는 국서
강왕이 일본국 환무천황에게 보내는 국서 1
강왕이 일본국 환무천황에게 보내는 국서 2
강왕이 일본국 환무천황에게 보내는 국서 3
강왕이 일본국 환무천황에게 보내는 국서 4
9.후예 국가에 관한 고찰
1권본 『발해고』원문
부록 1권본 『발해고』(영인)
발해고 渤海考
초판 1쇄 인쇄 2000년1월5일
초판 제1쇄 발행 2000년1월10일
옮긴이 송기호
대표이사 이승용
발행처 ㈜홍익출판사
출판등록번호 제1-568호
출판등록 1987년12월1일
주소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76-17
전화 02-333-6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