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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豊友會 원문보기 글쓴이: 시보네/54
[소백산 자락길]<하>2자락길·11자락길 십승지중 제1승지 품어…걸음걸음 전설 따라 시간여행 | ||||||||
소백산 자락길은 열두 자락이다. 400리 길에는 자락마다 우리나라를 이끈 성현이나 이름 없는 촌부나 아낙의 흔적이 있다. 이 길은 2009년 문화관광부의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출범해 2011년 '한국 관광의 별'로 선정됐다. 한국 관광의 명소로 모두가 자랑해야 할 대한민국의 길이기도 하다. 한강과 남한강을 잇는 끈이요. 사람들의 통로였다. 마을과 마을을 이어준 길이기도 하다. 제2자락길과 제11자락길을 걸었다.
◆약속의 땅, 기회의 터 2자락길 삼가야영장→금계저수지(삼가호)→금선정→정감록촌(임실)→풍기소방서→풍기온천→소백산역을 잇는 15.6㎞ 구간이 2자락길로 소백산 자락길 중 유일하게 기차역이 통과하는 길이다.
조선시대 정감록의 십승지 중 제1승지를 지나는 이 길은 '오감만족' 여행지로 손색이 없다. 자연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세상의 온갖 시름을 잊게 만드는 2자락의 매력은 풍부한 먹을거리, 볼거리, 체험거리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인삼 재배지로 유명한 풍기에서 인삼을 가미한 맛깔스러운 음식과 인삼캐기 체험, 사과따기 체험 등을 할 수 있고, 전국에서 으뜸가는 유황온천(풍기온천)까지 덤으로 체험할 수 있다.
삼가리는 달밭골과 정안동계곡, 그리고 금계리로 갈라지는 세 갈래 길이다. 2자락은 삼가리에서 금선정으로 이어진다. 주차장에서 길을 따라 굽이굽이 돌아 마을을 지나면 오른쪽 산 위로 금계(금닭)바위가 보인다. 옛날 이 바위 가운데 많은 금이 있었고, 닭의 눈에 보석이 밝혀 있었는데,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나그네가 그 보석을 빼러 올랐다가 갑자기 천둥이 치고 벼락이 내려 바위가 두 쪽이 났단다. 이후 바위의 형태가 닭처럼 보이지 않게 됐다는 전설이다.
예전엔 삼가분교가 있었지만, 농촌의 인구 감소로 1996년 폐교되었다. 달밭골, 당골, 정안동, 삼가리 학생들이 책보를 둘러메고 옹기종기 모여서 꿈을 키우며 다니던 그 길도 이젠 아스팔트로 덮여 있다. 바로 앞에 제법 큰 규모의 저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금계저수지(삼가호)다.
저수지를 뒤로하고 계속 길을 걷다 보면 고갯마루를 경계로 현대 문명이 만들어낸 변화된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옛날 이차돈이 공부를 했다는 곳엔 새로운 절이 지어졌고, 금선정 주변엔 예술인들의 거처와 펜션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이제는 도피처였던 십승지가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에 매료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탈바꿈했다.
발걸음을 재촉하다 보면 물가에 병풍처럼 드리운 바위 위에 선녀처럼 앉아 있는 정자가 나타난다. 바로 금선정(錦仙亭)이다. 금선정은 교통편이 발달하지 않았던 20여 년 전만 해도 희방계곡과 함께 영주 최고의 명승지였다. 길게 이어진 노송 아래로 저마다 모양을 뽐내는 기암괴석과 그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물줄기는 풍기군수를 지낸 퇴계 선생조차 반하게 했다.
퇴계 선생은 '신선 될 재주 없어 삼신산을 못 찾고 구름 경치 찾아 시냇물을 마셔 보네. 얼씨구 풍류 찾아 떠도는 손아 여기 자주 찾아 와서 세상 시름 씻어 보세'라고 노래했다. 원래 이곳은 퇴계 선생의 제자인 금계 황준량(黃俊良)이 즐겨 거닐던 곳이라 한다.
금선계곡을 벗어나면 넓은 들이다. 비탈진 땅은 과수원이고 편한 땅은 인삼밭이다. 승지마을이다. 십승지란 천지개벽이 일어날 때 재앙을 피하기에 좋은 마을을 일컫는 이름이다. 전국에 10개 마을이 있다. 십승지 비결서에는 마을마다 해석이 다르다.
하지만 어느 책이든 그 첫 번째로 풍기 금계촌을 꼽는다. 그래서 예로부터 비결을 좇는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그 핵심 자리를 놓고는 설왕설래하지만, 돌과 바람이 없어야 하고, 큰길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이 조건에 만족한 곳이 바로 금계동으로 불리는 임실(任實)이다. 또 금계라는 지명은 '닭이 알을 품고 있다'는 금계포란(金鷄抱卵)형에서 비롯됐고, 임실이란 지명도 임신(妊娠)과 뜻이 통하기 때문에 가장 유력한 승지로 꼽힌다.
또 이 마을은 인삼 시배지로 유명하다. 조선 중종 때 주세붕은 인삼 재배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 이곳을 지목하고, 채취한 산삼종자로 인삼을 처음 재배한 곳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풍기 읍내 골목마다 인조견 공장이 있었다. 골목을 다니며 철커덕하는 기계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 소리는 바로 이곳 마을의 맥박이었다. 그 맥박이 뛰게 된 것은 1930년대 초 평북 출신 사람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서 시작됐다.
풍기IC에서 풍기읍으로 들어서기 전에 인견직판장과 상가가 밀집해 있다. 갖가지 의류와 이불 등 각종 생활용품으로 개발된 인견 제품들이 많다. 여름에도 서늘한 감촉이 느껴지는 건강 옷감이다.
방천길을 따라 걷다 보면 유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는 희방사의 연기설화 속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축조된 것 같다. 화강석재를 길게 잇대어 걸쳐놓은 이 다리의 잔해가 아쉬운 대로 아직도 다리 구실을 하고 있었다. 유다리에서 남원천으로 나가 방천을 따라 오르다 보면, 좌우로 병풍처럼 펼쳐진 소백산맥의 위용이 늠름하다.
멀리 산허리를 파 놓은 듯이 잘록한 곳이 죽령이다. 죽령을 향해 둑길을 따라 2㎞쯤 가다 보면 찰방의 표지석이 나온다. 여기서 풍기온천을 이용하려면 오른쪽으로 400m쯤 가면 된다. 자락길의 피로를 말끔히 씻을 수 있는 곳이다.
온천 앞마을이 창락마을이다. 옛 순흥도호부의 관역인 창락면의 중심지로, 영남 11개 찰방역의 하나인 창락역이 있던 곳이다. 이 마을 큰길 옆에는 찰방들의 기념비로 짐작되는 여러 개의 비석들이 늘어서 있다. 해방 후에 모두 없어지고, 현종 8년(1667)에 건립한 찰방 안모 씨의 선정비 하나만 남아 있다.
◆걷고 또 걸어도 부처님의 그늘, 11자락 부석사→소백산예술촌→숲실→사그레이→양지마→남절→원통→단산저수지→좌석리를 잇는 13.8㎞ 구간이 11자락길이다. 11자락은 부석사에서 시작한다. 부석사 주차장에서 부석사로 오르는 길은 녹음이 짙은 녹색길이다. 가을빛과 함께 붉은길로 변하기도 한다. 가을이면 이 길은 붉은색을 띤 영주사과 향기로 가득해진다.
하나, 둘, 셋…. 부석사에 오를 때마다 숫자를 센다. 하지만 이내 그 숫자를 까먹고 만다. 계단과 계단 사이로 미련하게 살아온 날들도 끼어들고, 축대의 바위틈으로 천년을 지키며 머금었던 옛 사람의 향기가 다시 흘러나와 마음을 흔들어놓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석사를 찾아온 사람은 계단을 오르며 갈팡질팡하다가, 안양루를 지나며 속세를 잊고, 무량수전 안에서 불국정토로 들어가게 된다.
아미타불을 외며 무량수전을 돈다. 돌다 보면 선묘낭자도 만나고, 낭자가 용이 돼 세 번이나 들어 올렸다는 부석(浮石)도 볼 수 있다. 의상을 사모한 선묘낭자의 끝없는 사랑 이야기가 봉황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들린다. 당나라에서부터 따라온 선묘낭자는 아직 부석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무량수전 안 아미타불 밑에서 석등 아래까지 둥지를 틀고 석룡이 돼 부석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석등 앞에서 안양루 기둥 사이로 소백산을 본다. 산줄기들이 길게 누워 저마다 자태를 뽐내면서 손짓을 한다. 저 산자락에 초암사도 있고, 성혈사도 있다.
어쩌면 의상대사가 저 산자락을 돌아 이 자리로 들어섰을 것 같다. 소백산 너머로 내뿜는 붉은 기운 속으로 이곳을 찾아 산자락을 넘나들던 대사의 옷자락이 보이는 듯하다.
부석사는 석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꽃과 어우러진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아름답다. 가을이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것도 장관이다. 이 모든 것이 부처님 세상이기 때문이리라. 부석사 주차장에서 부석면 소재지로 200m쯤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자락길이 이어진다. 눈앞은 온통 사과밭이다. 여길 지날 때마다 이 사과 또한 부석사의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이곳 사과가 다른 곳 것보다 맛이 달고 깨끗한 까닭이 부처님의 은혜라고 믿고 있다.
영주 사과 생산량이 전국에서 최고라는 이야기가 실감 난다. 눈이 닿는 곳 모두 사과밭이다. 사과밭 사이로 몇 굽이를 돌다가 고갯마루에 올라 다시 돌아본다. 아직도 봉황산이 보인다. 멀리 보아도 포근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미로에 빠진 것처럼 사과밭 사이를 한참 헤매다 보면 멀리 고갯길이 나타난다.
사그레이 마을(부석면 소천5리)이다. 이곳을 지나면 양지마-남절-원통 등 작은 마을들이 실핏줄처럼 올망졸망 이어진다. 주민들은 한밤중에도 이 고갯길을 걸어 마실로 갔다. 옛길이기에 이곳에서 만나는 산촌 마을은 정겹다. 예전엔 그렇게 다니던 지름길이었지만, 차량을 주로 이용하는 요즘엔 더 멀어진 길인 셈이다. 단산면에 중학교가 없던 시절 학생들의 등굣길이었다.
이 길을 찾는 데는 이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된 당시 학생들이 큰 도움이 됐다. 그들에게 물어물어 길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양지마에서 남절로 넘어가는 고개엔 무덤이 참 많다. 마치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길이 된 듯한 느낌이다.
원통에서 좌석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단산저수지를 옆에 두고 자개봉을 돌아간다. 지금은 단산지가 만들어져 댐이 됐지만 예전엔 단산천을 따라 흘러, 국망봉에서 발원한 죽계천과 피끝마을에서 만나 서천으로 흘렀다. 지금도 단산지의 물은 역사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고 서천으로 유유히 흐른다. 단산지는 여름에는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겨울에는 빙어를 잉태한다.
단산천 주변 마을에는 하늘을 감동시킨 효자 이야기가 있다. 약 500여 년 전 동원2리 등영에 살던 안동 권씨는 병석에 누워 있던 부친이 "복숭아가 먹고 싶다"고 하자 백방으로 복숭아를 찾아 나섰으나 겨울철에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게 되자 개울가에 앉아 대성통곡을 하던 중 큰 복숭아가 떠내려 왔고, 이것으로 부친을 봉양하고 씨를 말려 표주박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지름이 약 8㎝나 되며 아직까지 그 후손들이 가보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 도매 또는 천도매라 한다.
권 효자의 집 상류가 지금 단산지가 된 부근인데, 단산지 옆의 큰 산이 한밤중 자시에 열린다는 자개봉이고, 자개봉 뒷마을이 도화동이어서, 이 어디쯤 무릉도원이 있지나 않을까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매일신문 영주 마경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