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암스테르담에서 만난 자유와 관용의 화신
자유와 관용이 우리의 화두라면 암스테르담 출신의 철학자 스피노자란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내 친구 테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지성 질 들뢰즈는 스피노자(1632-1677)를 가리켜 “철학자들의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때로는 사회제도 때문에, 때로는 내적 억압과 공포로 인해 인간은 예속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진다. 바로 그런 인간을 곤경에서 구원할 힘을 가진 것이 스피노자의 철학이라는 뜻이다.
스피노자는 17세기 초반 암스테르담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무난하게 평생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그의 삶에는 굴곡이 많았다. 그는 진정으로 내적 자유를 추구했기 때문에 줄곧 수난을 겪었다.
처음에는 유대인공동체로부터 파문을 당했다(1656년). 유대의 신을 부정했다는 이유였다. 1660년, 그는 신변의 위협을 피하려고 도망치듯 고향 암스테르담을 떠났다. 그래도 이 도시에 남아 있던 몇몇 친구와 자유주의자들의 우정이 그를 지켜주었다. 그들의 격려와 후원에 힘입어, 그는 철학적 탐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몸은 비록 암스테르담을 떠났으나, 그의 정신은 이 도시의 지적, 철학적 활동의 중심에 있었다.
저서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네덜란드를 ‘자유의 나라’라고 불렀다. “암스테르담은 엄청난 번영을 이루었고, 전 세계가 감탄할 만큼 자유롭다. 번영을 구가하는 이 도시에서는 모든 인종과 종파의 사람들이 완전한 조화 속에서 살고 있다.”(<신학정치론>) 과연 스피노자의 말처럼 당대의 어느 도시보다도 이곳은 사상적 자유와 종교적 관용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지나친 과장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 시절의 네덜란드는, “국가의 목적은 자유이다”라는 스피노자의 언명과는 거리가 먼 나라였다.
스피노자에 대한 종교적 파문이 증명하는 바였다. 또, <신학정치론>을 금서로 지목해 탄압한 사실만 보아도 명백한 일이었다.
숱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는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는 그를 교수로 초빙하기로 했다(1673년). 상처투성이의 스피노자에게 엄청난 명예와 경제적 혜택이 동시에 주어질 수도 있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하이델베르크행을 거부했다.
1673년 3월 30일, 스피노자는 하이델베르크대학의 제안을 거부하는 편지를 썼다. 이유는 크게 보아 두 가지였다. 첫째, 그는 당시 독일의 공교육을 불신하였다. 둘째, 그는 자유를 지향하는 철학자였던 만큼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결코 멈출 수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적인 지위나 안정된 수입이 아니었다. 그가 진심으로 바란 것은 학문적 자유였다. 오직 그런 절대적 자유가 보장되어야만 내적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스피노자는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 보낸 자신의 편지를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마감하였다.
“저를 움직이는 것은, 좀 더 나은 지위에 대한 열망이 아닙니다. 평안에 대한 사랑이 저를 움직이는 힘입니다. 저는 공적 교육 활동과 거리를 둠으로써, 약간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의 예속이 당연시되던 시대였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감히 교회의 권위에 저항했다. 그는 합리성을 추구함으로써 삶을 긍정하고 자유를 꿈꾸었다.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비난과 증오가 쏟아졌다.
그의 삶은 끊임없는 위협 속에 놓였다. 온 힘을 쏟은 저서 <에티카>는 생전에 출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자유를 향한 지적 탐험을 포기하지 않았다.
현실 권력은 누군가를 위협하고 지나치게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다. 알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대부분은 군소리 없이 권력의 지시를 따르기 마련이지만, 스피노자와 같은 이들도 없지 않다. 지금의 이 나라에서도 물론 그와 같을 것이다. 여러분도 저도 과연 또 한 사람의 스피노자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