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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인숙 수녀 |
김수환 추기경과 손인숙 수녀의 인연은 각별하다. 특별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관심'의 연장선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1980년대까지 가까이 두었던 사람은 정일우 신부와 손인숙 수녀 등이었다. 추기경에게 항상 '피켓 든 여인'이란 별칭으로 불려졌던 손인숙 수녀를 파주 예수마음배움터 성심수녀회 수련원에서 만났다.
손인숙 수녀(71세)는 성심수녀회 소속으로, 강원도 고한에서는 탄광촌에서 사북사태를 맞이하고, 80년대에는 상계동 판자촌에서, 80년대 말부터는 인천-부천지역에서 노동사목에 종사해 왔다. 그후 수녀원 참사를 거쳐 관구장으로 재임하다가 로마에서 총원 참사로 일하다가 귀국해 현재는 예수마음배움터에서 피정을 지도하며 노익장을 보이고 있다.
손 수녀가 '피켓 든 여인'으로 불린 데는 사연이 있다. 70년대 초반 유신헌법이 통과되고 분위기가 살벌할 즈음에 명동성당에서 청년들이 주도한 미사와 시위가 있었다. 아무도 나서지 못하던 시대에 마산수출자유지역 문제로 김지하가 청년들을 고무시켰는데, 이날 앞장서 피켓을 들기로 한 신학생들이 참석하지 않아서 대신 엉겁결에 피켓을 들게 된 손 수녀는 미사 후 신세계 백화점 근방까지 행진을 했다. 그때 손 수녀는 성심수녀회 특유의 사복 차림이었지만, 용케 경찰은 사진 속에 있는 수녀를 발견하고 김수환 추기경에게 "이 수녀가 누구인지?"라며 물었다고 한다. 결국 사진 속의 피켓 든 수녀가 손인숙 수녀임이 밝혀져, 그 후론 김수환 추기경이 손인숙 수녀와 마주칠 때마다 손을 들어 보이며 '피켓 든 여인'이라 불렀다 한다. 이게 인연이 되어 손인숙 수녀는 중요한 고비마다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당시 손인숙 수녀는 학생신분이었다.
"수녀가 빨갱이냐?"
손인숙 수녀가 필리핀에서 종신서원을 하고 돌아왔을 때 김수환 추기경은 서울 노원구 상계동으로 들어가라고 권했다. 마침 김수환 추기경의 조카뻘 되는 이가 상계동에서 어렵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추기경의 제안이었다. 그러나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가 성심수녀회에 고한으로 와줄 것을 추천하는 바람에, 결국 고한 탄광지역으로 가서 광부들의 아내들을 위한 부녀자 교육을 맡기로 했다. 그곳에서 3년여 활동하는 동안에 나중에 광주항쟁으로 이어진 사북사태가 터졌다. 사북사태로 구속된 24명의 노동자들을 위해 임광규 변호사가 선입되었으나, 가족들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그때 손인숙 수녀는 당시 수배자였던 황인오 씨의 도움으로 가족들의 명단을 받아서 집집이 돌아다니며 가족동의서를 받았다.
그때 동의서를 받으러 가면, 주민들은 "수녀가 빨갱이냐?"고 수군거렸다. 사북사태로 계엄령이 내려지면서, 구속된 광부들은 일반재판에서 군사재판으로 넘겨졌는데, 당시 지학순 주교가 원주 군사령관을 소개해 줘서, 손인숙 수녀는 사령관에게 찾아가 "지금 그들이 형을 살면 사택에서 쫒겨나고 쌀 배급도 못 받는다"고 하소연했다. 결국 교회에 우호적이었던 군사령관의 배려로 광부의 가족들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1980년대에 김수환 추기경이 아시아 주교회의를 앞두고 현장체험 프로그램을 하면서 탄광촌을 방문한 것도 그 영향이 있었으리라 예상된다.
손인숙 수녀는 그후 1981년부터 1988년까지 상계동으로 소임지를 옮겼는데, 김수환 추기경은 미리 상계동 본당신부에게 말해서, "특별히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상계동에 와야 한다"며 손인숙 수녀를 추천했던 모양이다. 결국 손인숙 수녀는 본당 수녀로 있으면서 본당 일 보다는 주로 지역사회 문제에 참여했다.
이 당시 유명한 이야기가 견진성사 사건이었다. 손인숙 수녀는 견진을 앞둔 신자들에게 전날부터 피정을 시키고 미사에 참석하도록 했는데, 200여 명이나 되는 견진성사 대상자들이 너무 좋은 분위기에서 견진예식에 참여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날 견진성사를 주러 상계동에 왔던 김수환 추기경은 저녁밥까지 수녀원에서 먹고 가면서, 그후 모든 본당에 지시를 내려 견진성사 전에 피정을 하도록 했다.
손인숙 수녀가 관구장을 할 때(1993년-1999년)는 성심수녀회에서 운영하던 성심여대와 가톨릭대학 통합 문제가 한창 진행될 때였다. 이 참에 손 수녀는 김수환 추기경과 강우일 주교를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김수환 추기경은 매번 손인숙 수녀의 역성을 들어주곤 했다. 당시는 가톨릭교회의 수녀회에서 양로원 등 사회복지시설을 인수받는 게 유행이었던 시절이었다. 이때 손인숙 수녀는 추기경 앞에서 수녀회가 시립 양로원 등의 위탁운영을 받으면서, 정부지원금 뿐 아니라 신자들이 성금을 모아주는 바람에 시설이 고급화되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시립양로원 등은 본래 무연고 무의탁 노인들이 오면 시설에 공무원 밖에 없기 때문에 노인들이 자기집처럼 지내는데, 수녀들이 운영하면서 수녀가 시설의 주인이 되고 노인들은 손님으로 전락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급화된 시설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무슨 빽이 있어서 들어왔냐?" 묻기도 하고, 정작 노숙인처럼 지내던 노인들이 시설에 어렵사리 들어가도 적응을 못하고 나오게 된다는 거였다. 이 소리를 듣고 강우일 주교가 "그런 노인들도 좋은 시설에서 대우받을 권리가 있다"라고 반론을 펴자, 김수환 추기경은 "손 수녀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역성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 생각이 깊고 비판적이지만 말년에 들어서 박력이 없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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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인숙 수녀 |
손인숙 수녀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김수환 추기경은 매우 화가 나 있었다고 한다. 정치적 성향이야 어찌되었든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이회창 씨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손인숙 수녀는 로마에서 참사로 일하다가 잠시 귀국해서 추기경을 방문했는데, 손 수녀도 보자마자 추기경이 "손 수녀도 한국에 있었으면 노무현 찍었겠지? 요즘 젊은 수녀들은 죄다 정치를 한단 말야."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손인숙 수녀는 "이회창 씨가 더 훌륭한 신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당을 보고 찍는다"고 답했다. 이어 "한나라당은 친일파랑 연결되고, 반공을 빌미로 30년간 권력을 독점해 왔다. 김대중 대통령 5년만으로 안 된다. 노무현 같은 이가 당선되어서 한번 더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도 김수환 추기경은 더이상 암말 안 했다고 한다. 생각은 달라도 아예 틀린 말이 아니면 수긍했던 것이다.
손인숙 수녀는 김수환 추기경이 "생각이 깊고 비판적이지만 말년에 들어서 박력이 없어지고 타협하는 식이 아니었나 싶다"고 말했다. 이것은 나이가 주는 어쩔 수 없는 '내 사람 챙기기'일 수 있겠다.
종교적 세심증.. 양심성찰 많이 해
한편 김수환 추기경은 '정치적이면서 영성적'이었다는 게 손인숙 수녀의 생각이다.
손인숙 수녀가 2007년에 잠시 한국에 들렀을 때, 마침 김수환 추기경이 성심수녀회의 예수마음배움터에서 4박 5일 피정을 하고 계셨다. 그곳에서는 피정 끝자락에 항상 성찰적인 시를 쓰도록 하는데, 다른 피정 참가자들의 글을 읽어보시며, "나도 저렇게 기도하고 싶은데..안 된다"며 탄식했다고 한다. 손인숙 수녀는 김수환 추기경이 "신앙적으로는 '세심증'을 갖고 계신 것 같았다. 스스로 늘 잘못 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김수환 추기경이 피정에 적극 관심을 보인 것은 1978년 이후였다. 당시 일본의 영선신학자였던 예수회의 에반젤리스타 신부가 한국에서 성심수녀회 종신서원자를 대상으로 30일 피정을 해주었는데, 에반젤리스타 신부가 김수환 추기경에게도 '피정을 좀 하라'고 제안했다. 그 참에 추기경은 30일 피정을 했는데, 얼마나 감동했는지 당시 서울교구에 있던 강우일, 최창무 주교에게도 일본에 가서 30일 피정을 하고 오도록 주선했다. 그후 신학교에서 사제서품을 받기 전에 30일 피정을 하는 관행이 생겨났다.(요즘은 부제품을 받기 전에 30일 피정을 한다.)
김수환 추기경은 영성적인 면에 관심이 많아서 항상 배우려고 했다. '예수마음기도'를 배우려고 8일 피정에도 참석했다. 손인숙 수녀에 따르면, 김수환 추기경은 늘 "죽는 것에 대해 겁이 난다. 내가 잘 살았는지 두렵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지나친 세심증 때문인지 서울대교구장을 사임하고 나자 바로 일본 성심수녀회 수녀원에 가서 피정을 하고 돌아왔다.
필요하면 언제든 현장으로 달려오던 추기경
한편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이 '사제가 아니었다면 사회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은 일본 상지대학에 다니다가 일본군에 징집되어 갔는데, 상지대 다닐 때 주변 사람들 중에 사회주의자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가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것도 의미가 깊으며, 유학에서 돌아와 1964년에 <가톨릭시보사> 사장을 맡게 된 것도 김수환 추기경의 사회적 관심을 추측하게 만든다.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은 현실정치에도 밝아서 학도병으로 끌려갔을 때도 전쟁이 끝나고 일본군 신분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기지를 발휘해 미군장교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으며, 1970년대 유신체제 아래서도 박정희 대통령과 담판(또는 흥정)을 잘해서 성격이 괄괄한 지학순 주교 문제 등도 해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한편 김수환 추기경의 개방적 성격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투신하던 이들에게도 큰 힘이 되었다. 상계동 철거민 문제가 터졌을 때, 정일우 신부는 늘 손인숙 수녀에게 "추기경한테 전화 좀 해봐"하고 채근했고, 전화를 드리면, 추기경은 언제든 즉시 상계동으로 달려왔다.
1986년,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도시환경 정비를 명목으로 상계동 재개발이 시작되자, 추기경의 역할은 더 커졌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성탄절이면 항상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방문해 미사를 해주곤 했는데, 그 즈음 성탄절에 추기경이 성탄미사를 상계동철거촌에서 한다는 전갈이 왔다. 손인수 수녀 등은 천막을 치고 제대를 세워놓았는데, 건설업자들과 용역들이 들이닥쳐 천막이며 제단, 제구들을 다 부수어 제대 자리에 구덩이를 파놓았다.
당황한 나머지 추기경에게 전화로, 천막도 다 부서지고 장소도 엉망이라 당일 미사 봉헌이 어렵겠다고 전하자, 추기경은 "그래도 내가 가겠다"며 손수 미사도구를 챙겨오셔서 구덩이 옆에 돗자리를 펴고 한데서 미사를 봉헌했다. 그 참에 달려온 기자들은 구덩이를 보고 건설업자들이 저지른 만행을 한눈에 담아냈다. 전화위복인 셈이다.
마지막 집이 헐리고 난뒤에는, 성목요일에 추기경이 상계동 주민들을 명동성당 발씻김예식에 초대해 직접 그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격려했다. 다음날부터 철거민들은 명동성당 아래에 천막 2동을 치고 1년 동안 노숙을 하며 생활했다. 그 와중에 1987년 6·10민중항쟁이 터져서, 경찰 진압작전에 쫓겨 명동성당으로 밀려들어온 시위대를 지원했던 이들은 주교관 아래 천막을 치고 살던 70여명의 상계동 철거민들과 수도자들이었다. 이들이 밥과 라면을 시위대에 제공했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것은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나서 주었기 때문이다.
김수환 추기경, 그후...
그런데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고나서 한국교회가 정부와 밀착되기 시작했다고, 손인숙 수녀는 말한다. 손인숙 수녀가 듣기로, 노태우 정권 당시 청와대 비서진의 1/3이 가톨릭신자로 채워졌으며, 군 장성들에게 천주교에 입교하도록 종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강남지역 성당에서는 보좌신부가 부임하면 즉시 승용차를 선물해주고, 미사시간에 신부들이 강론하면서 사회적인 발언을 하면 그 자리에서 주보를 쫙쫙 찢고 나가는 바람에 교회에서 사회적 발언하는 게 위축되었다고 한다. 또한 가톨릭교회에 복지시설을 대폭 위탁경영하도록 배려해주고, 학생들이 과외하도록 개방하여 돈벌이하느라 시간이 없는 대학생들이 데모하지 않게 되었다고 손인숙 수녀는 안타깝게 전한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 이후로 이미 주교회의에서도 김수환 추기경이 한마디 하면, 꼭 말을 막는 주교들이 있었다고 하면서,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넘어가는 시점에 김수환 추기경도 사회적 발언을 자제하고 어려움에 부닥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추측했다.
결국 사회적이면서도 영성적이었고, 개인적으로는 '신앙인으로서 사제로서 잘 살고 싶어했던' 김수환 추기경이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 몸을 도사리지 않고 가난한 이들의 손을 먼저 잡아주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손인숙 수녀도 지적하듯이 "추기경 곁에 누가 있는지"가 나이가 들수록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정일우 신부와 손인숙 수녀를 만나던 추기경의 시대와, 그들과 만남을 어렵게 하며 주교관 문턱을 높게 만든 사람들이 추기경을 둘러싼 시대가 얼핏 가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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