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령(首領)은 조선 시대 주(州)·부(府)·군(郡)·현(縣)의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의 총칭이다. 여기에는 부윤(府尹, 종2품)·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정3품)·목사(牧使, 정3품)· 도호부사(都護府使, 종3품)·군수(郡守, 종4품)·현령(縣令, 종5품), 현감(縣監, 종6품) 등이다. 그 품계는 종2품에서 종6품까지에 걸쳐 있다. 주·부·군·현의 읍격(邑格)과 수령의 품계는 호구(戶口)·전결(田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가 있다. 행정상으로는 모두 관찰사(감사)의 관할 밑에 있었다. 부윤 5人, 목사 21人, 대도호부사 5人, 도호부사 76人, 군수 70人, 현령 26人, 현감 133人 등 336人이다. 재임 왕에 따라 약간 따르며 일부 관직에서는 겸직 사례가 있어 실제 약간 적은 인원이 될 수 있다.
군사지역에는 육군의 경우 兵馬節度使(종2품), 兵馬僉節制使(종3품), 兵馬同節制使(종4품), 兵馬節制都尉(종6품) 관직이 있었다. 병마절도사의 경우 관찰사가 겸직하는 사례가 있었다. 독진(獨鎭)의 병마첨절제사는 정3품 上 人을 제수하였고, 일부 都護府使가 겸직했다. 병마동절제사는 郡守가 병마절제도위는 縣令, 縣監이 겸직했다.
수군에는 三道水軍統制使(종2품), 水軍節度使(정3품), 水軍僉節制使(종3품), 水軍萬戶(종4품) 관직이 있었다.
<자료 수집 참고 문헌>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국보 제151호) :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1,893권 888책으로 간행했다. 필사본·인본, 정족산본, 태백산본 등이 일괄적으로 1973년 12월 31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1997년에는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국보 제303호) : 조선시대에 왕명(王命)의 출납(出納)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매일매일 취급한 문서(文書)와 사건을 기록한 일기로 1999년 4월 9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승정원에서 편찬한 일기로 필사본이며 3,243책이다. 일기의 작성은 승정원의 주서(注書)와 가주서(假注書)의 소임이다. 한 달에 한 권 작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사건이 많을 경우에는 2권 이상으로도 작성하였으며, 반드시 그 다음 달 안으로 완성하여 보존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 국조방목(國朝榜目) : 조선 태조 초기부터 1877년(고종14)까지의 문·무과 급제자를 기록한 책이다.
☞ 사마방목(司馬榜目) : 조선시대 일년동안 실시된 생원시·진사시의 합격자 명부다.
※ 행장 확인 참여 선조
21세 덕원부사공(重俊)·곡성현감공 (大成)·청양현감공(天佑)· 호조판서공(德和)· 충청수군절도사공(大器)· 광양현감공(大澤), 25세 의주부윤공 (漢良), 22세 웅천현감공(廷烈)· 병조참판공(廷喆), 23세 문화현령공 (山寶)·남포현감공(廷寶)· 상원군수공(東峑), 24세 삼수군수공 (天會)·해남현감공(天相), 25세 보성군수공(赫萬), 26세 적양첨사공 (原徵)·존재공(伯珪), 27세 사헌부감찰공(致亮), 28세 도승지공 (定相), 31세 남학훈도공(榮祖)· 호조참의공(昌祖)·고원군수공(弘祖), 32세 자산부사공(光翼)·만암공 (光肇)·고령첨절제사공(光軫), 33세 양지현감공(尹喆)·전의현감공(魯喆)·사헌부장령공(文喆)·진보현감공 (迪喆)·흡곡현령공(煥喆), 34세 병조정랑공(鍾善)·오위장공(鍾敏)· 사헌공(鍾崑)·사헌부지평공(鍾謙), 35세 홍문관수찬공(道源)· 사간원정언공(翼源), 31세 단성현감공(啓采) 등 37人 선조이다.
※ 선조 행장 확인시 자문기관
곡성군청, 청양군청(문화원), 울주문화원·울산임란숭모회, 해남군청, 충남도청, 보령시청, 완도문화원, 광양시청, 창원시진해구청(문화원), 함평군청(문화원), 사천시청 (문화원)·곤양향교, 거제시청 (문화원), 진도문화원, 남해군청, 무안군청(문화원),제주특별자치도청, 서귀포시청(문화원), 창원시 마산합포구청(문화원), 보성문화원 서천군청(문화원), 연천군청, 안성시청, 용인시청(문화원), 세종특별자치시, 청송군청, 산청군청(문화원·단성향교) 등 26개 지역 관서 및 일부 문화원, 향교, 지역 향토사학자 등이다.
휼륭하신 위문중 조상님의 옛발취와 역사공부를 하고 갑니다.
대단합니다.
백강위원님의 연구가 매우 흥미롭고 더구나 젊은 기백이 넘쳐 위문의 귀감입니다.
이제 문중내에서만 연구되던 문사(門史)가 밖으로 확대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마치 르네상스시대의 화려한 부활과 비교된다고나 할까요! 국가에서 기록한 기록물과 문사를 비교검토하여 일원화를 이루는 엄청난 고증작업입니다. 앞으로 많은 기대가 됩니다.
오늘 게재하신 글은 1) 충렬공은 6대 왕을 모셨다. 2) 조선조 임란전에도 위문에서는 출사하여 벼슬을 하는 선대가 많았다.는 것이 핵심이네요. 이는 기존 알고있던 사실과 조금 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1), 2)를 주장하게 된 선조들의 깊은 뜻이 있을 것 같은데요. 1)은 두 왕은 즉위하자마자 바로 죽었거나 2)는 위문에서 시대를 바라보는 큰 흐름이 출사를 포기하고 은둔하던 시기로 규정하지 않았나 보입니다. 그래서 온산 위의환 님께서도 방촌학에서 당시의 학문을 사림학, 은둔학이라 칭했습니다. 위문의 지성체계를 1,300 여년으로 볼 때 표현과정에서 나온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