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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폐 아들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첫 월급을 받은 날, 내복을 사갖고 왔더군요.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자폐는 조개껍질 안에 들어있는 것과 같아요. 스스로 열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그냥 자기 자신 속에 갇혀 사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외부의 힘과
본인의 힘을 함께 모아서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오게 되면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돼요.”
우리나라 ‘자폐아 1호’로 알려진 박윤서군을 키운 어머니 이숙형씨. 아들
이 5살 때 내려진 자폐 진단.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도 무릎을 꿇지 않고 더
욱 적극적으로 ‘교육’을 시킨 결과 마치 껍질이 벗겨지듯이 아들의 자폐적
인 특성이 하나 하나 벗겨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자폐아로는 일반대학에 들어간 첫 사례로 꼽히는 윤서군. 올 2월 대학을 졸
업하고 자폐 아동을 연구하고 치료하는 ‘밀알연구소’에 취직, 어엿한 사회
인으로 새로운 출발을 했다. 자폐아 치료교실의 교육자료와 홍보물을 제작하
고 자폐아의 식사를 지도하는 것이 윤서군의 업무.
“우리 윤서가 처음 직장을 나가고 1월달과 2월달은 파트타임으로 일하다가
3월부터 정식 업무를 보기 시작했어요. 첫 월급을 받던 날, 집에 돌아온 윤
서는 첫 월급은 모두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하며 행복해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울었던지…. 정말 우리 윤서를 이만큼 성장하게 해주신 하나님
께 감사드리고, 특히 저에게 무한한 용기를 심어주고 온갖 뒷바라지 해주신
윤서 외할아버지에게 뭐라 감사를 해야 할지….”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는 이씨. 지나온 날들이 되돌아보면
절로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매일 ‘밀
알 연구소’에 출근하여 자폐아들을 교육시키는 일을 하면서 자신의 후원자
였던 ‘순복음 인천교회’ 최성규 목사가 운영하는 성산효도대학원에 들어가
효학을 배우고 있는 윤서군. 언어 표현과 대인관계에 조금 불편을 겪고 있을
뿐 정상인들 틈에서 사회 생활을 하는 데 그다지 어려 움이 없다. 그런 점에
서 윤서군은 일단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어머니 이씨는 아들을 키우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인천에 자폐아특수교
육기관인 ‘성신 조기 교육원’을 98년 2월까지 운영했고, 현재 정상아와 자
폐아를 함께 교육시키는 ‘통합교육’을 도입하고 있는 ‘성광유치원’을 운
영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자폐아 부모 들을
대상으로 ‘부모 교육 강연’을 했는가 하면 2년 전엔 자폐 아들을 키운 체
험담을 담은 수기집 ‘꼭 다문 입술이 미소로 바뀔 때’를 펴내기도 했다.
자폐 아들을 키우면서 너무 힘이 들어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수없이 했지만
아들이 나날이 좋아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느낀 성취감과 보람은 더 컸
다. 그러나 얼마전에 이씨는 오래전에 느꼈던 절망감을 또한번 겪어야 했다
고 한다. KBS-2 ‘병원 24시’에서 자폐아에 대한 내용을 방영했는데 그걸
보면서 심한 충격을 받았다는 것.
“정말 해도 너무해요. 아마 그 프로를 본 자폐아 부모들의 낙담은 이만저만
크지 않을 거예요. 마치 자폐를 불치병처럼 보도하는 걸 보면서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몰라요. 물론 개인차는 있지만 자폐는 교육으로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습니다. 부모들의 노력으로 한단계씩 성장해 나가는 긍정적인 면은 도외시
되고, 극복이 어려운 부분만을 방영했던 점이 안타까웠어요. 사회 자립의 첫
발을 내딛는 윤서에게 격려보다는 상처를 준 부분도 무척 마음이 아픕니다”
윤서군이 대학을 졸업해서 사회에 발을 내디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머니
이씨의 헌신적인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매일 아침 출근을 하는 아
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솟구친다는 이씨. 출근하는 아
들을 배웅하고 돌아서면서 자연스럽게 이씨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
감사합니다!”이다.
1년 6개월 터울로 동생이 태어난 후 비로소 발견된 ‘이상한 징후들’
처녀시절, 이씨의 꿈은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매로 남편을 만
나 1년만에 결혼을 하게 되어 디자이너의 꿈을 접고 평범한 주부가 되었다.
“결혼하고 바로 윤서를 가졌어요. 임신 4개월쯤 되었을 때 집에 도둑이 들
어 크게 놀란 것 외에 는 다른 임산부들과 똑같은 10개월을 보냈어요. 윤서
는 태어날 당시에 외형상으로 또래 아이들과 전혀 틀린 것이 없었고 발달 단
계도 같았어요. 말이 늦고 산만하며 자기 멋대로 하려는 경향은 있었으나 개
구쟁이라고 여기는 정도로 지나쳤죠.”
이씨가 처음으로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윤서군과 1년 6개월 차이
로 둘째아들이 태어난 후라고 한다. 둘째 아들을 낳을 때 난산이어서 한달
동안 친정집에 가 있었다는 것. 한달 동안 산후조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
데, 한달만에 보는 윤서군은 엄마를 기억조차 못하는 표정이었다고. 그러나
그때 이씨는 ‘아이들은 저 정도만 엄마랑 떨어져 있어도 기억조차 못하는구
나’ 하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그때부터 윤서의 산만함과 분별력이 없는 행동 때문에 잠시도 눈을 뗄 수
가 없었어요. 갓난아 기를 뉘어놓을 경우에 보통 아이들 같으면 피해 가잖아
요. 우리 윤서는 동생의 배나 머리도 밟고 지나가는 거예요. 마치 자기 눈앞
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전진하는 사람처럼 말예요.”
이상하다는 생각에 점점 더 확신이 들기 시작한 것은 둘째 아들이 6개월이
되면서부터라는 이씨. 생후 6개월밖에 안된 동생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윤서
군의 발달이 늦었다는 것. 그래서 이씨는 윤서를 데리고 일반 소아과에 가서
진찰을 받아봤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정상. 주변 식구들에게 윤서군의 문
제를 의논해 봐도 남자아이라 극성맞은 것이라고 할 뿐 아무도 이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윤서가 4살이 지나면서 행동이 더 커지고 도저히 제 힘으로는 감당이 안될
정도로 심각해졌어요. 다시 종합병원 소아과에 데리고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역시 정상이고 건강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내심 안심은 됐지만 그렇다고
윤서의 행동에 변화가 생긴 것은 전혀 없었어요.”
윤서군이 다섯 살이 되던 해 이씨는 자신과 나이가 비슷해 말이 잘 통하는
시누이에게 아들 문제를 솔직히 털어놓았고 당시 신문에서 ‘언어 교정합니
다’라는 광고를 보고 시누이와 함께 그 기관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곳에서 이씨가 들은 얘기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윤서의 IQ가
50 정도밖에 안되고 지금 상태로는 교육이 불가능해서 평생을 정상인과 다르
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얘기를 들은 것.
이상해서 찾아간 병원, 두 번이나 정상이란 진단 받아
“기가 막힐 노릇이었어요. 남편하고 상의해서 다시 한 번 진료를 받아보기
로 했어요. 이번에는 완전한 종합검진이었고 저도 함께 받았어요. 그런데 의
외의 결과가 나온 거예요. 윤서는 정상이고 오히려 제가 비정상으로 나왔어
요.나한테 문제가 있기 때문에 계속적인 약물치료가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정말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져들었다는 이
씨. 그러나 그즈음 윤서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하루종일
쉬지 않고 제멋대로 산만하게 뛰어다니며 불러도 못 들은 척 반응이 없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을 뿐더러 안아도 뻗대거나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고 손을
잡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또 또래 아이들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이 혼자만 있으려 하며, 장난감 차 바퀴를 밀치고 놀거나 달력 넘기는 일
에 몰두하고, 물장난을 좋아해서 수돗가에서 몇시간씩 물을 틀고 서 있었다
고 한다.
이뿐 아니다. 한편 갑자기 울고, 갑자기 자지러지듯 웃으며, 화가 날 때마다
세면 대고 아무 데나 머리를 박기가 일쑤였다는 것. 혼자서 용변 처리도 안
되고 편식도 무척 심해 다진 고기와 우유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온종일 정신없이 움직이는 데도 불구하고 피곤하지 않은지 하루에 4∼5시간
정도밖에는 잠을 자지 않더라고. 행여 윤서군이 잠든 것을 확인하지 않고 자
는 날이면 온 동네 현관 벨을 다 누르고 돌아다니는 바람에 자다말고 동네
사람들이 다 나오는 소동이 벌어지곤 했다는 것이다.
이씨의 하루는 아들과의 전쟁이었다. 하루종일 아들 뒤를 쫓아다니느라 살림
은커녕 수면도 턱없이 부족했다. 잠시라도 시야를 벗어나면 예측할 수 없는
사고를 연발하기 때문에 가사일을 할 때면 자신의 몸과 아들의 몸을 끈으로
묶어 행동반경을 제한할 정도였다는 것. 집안은 항상 윤서군이 어지럽혀 놓
아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는 엉망의 상태였고 그런 윤서군을 돌보느라 이씨
는 늘 초죽음 상태로 하루 하루를 견뎌야 했다고 한다.
이씨는 물론 다른 가족들도 말이 아니었다. 견디다 못해 다시 병원을 찾아가
겪고 있는 일들을 상세하게 말했다는 이씨. 하소연을 듣고 딱하게 여긴 그
병원 의사가 당시 미국에서 소아 정신과를 전공하고 귀국한 박사 한분이 이
화여대 대학병원에 있다며 소개장을 써주었다는 것. 이씨는 아들을 데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화대학 병원을 갔다. 아니나 다를까 병명이 밝혀졌다 자
폐!
“그때 전 자폐가 뭔지도 몰랐어요. 그래도 우리 윤서의 병명이 밝혀진 것만
으로도 너무나 감격해서 펑펑 울었어요. 이제 병명이 나왔으니 치료만 하면
되겠구나, 하는 희망이 보였거든요.”
자폐라는 병명을 알고도 너무 좋아하는 어머니 이씨에게 그 박사는 ‘외부의
힘’이 중요하다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교육 치료’임을 거듭 강조했
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씨의 윤서군에 대한 ‘ 치열한 교육’이 시작되었다.
“윤서가 교육을 받을 때는 초창기여서 교육기관을 선택할 기회도 없었을 뿐
더러 자폐에 대해서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어요. 당시 늘어가는 자폐 아동
들을 위해 윤서를 포함한 아이 8명의 교육이 이화여대 부설기관인 특수아동
교실에서 시작되었어요. 거기를 다니다가 얼마 후 중대 부설 기관의 특수 아
동교실에서 서울대학 병원의 의사들과 팀을 이뤄 정상아동들과 통합교육을
실시한다고 해서 그곳으로 옮겼어요.”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었던 17년 세월
자는 시간 외에 혼자 있지 않게 하고,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 하도록 도와야
했다는 이씨. 어디를 가더라도 꼭 데리고 다니고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가르
쳐야 했다고. 교육기관을 오가며 차 안에서 4∼5시간씩 소비하는 시간을 이
용해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차들, 특징 있는 건물, 광고문, 노래 등을 쉬지
않고 가르쳤다고 한다. 또 아들의 손을 잡고 시장을 오가며 직접 많은 사물
들을 보여 주었는데 눈깜짝할 사이에 손가락으로 두부를 찔러대는 바람에 어
쩔 수 없이 두부를 한판씩 사야 한 적도 많았다.
늘 혼자이고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는 아들을 위해 이씨는 친구가
운영하는 미술학원에 데리고 가보기도 하고 소풍에 따라가기도 했다고. ‘말
만 하게 되면 고생이 끝나겠지’ 하고 기대하며 어떻게 해서든 말이 나오도
록 쉬지 않고 반복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아 교육을 시작한 지 6개월만에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외
국어를 배우듯이 명사를 가르친 후에 동사를 가르쳐 결합하고 접속사를 사용
하는 것까지 가르쳐야 했다는 이씨. 자기가 물을 먹고 싶을 때도 “윤서야
물을 먹을까?”하는 이상한 문장을 구사하더라고.
“알고 있는 언어의 형태가 조금만 바뀌면 이해하지 못했고, 똑같은 개념을
다른 상황에서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죠.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데서 저는 엄청나게 지치더군요.”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는 이씨. 그녀가 지치기
시작할 무렵 남편의 사업도 힘께 기울어 경제적인 어려움도 닥쳤다. 너무 힘
들고 고통스러워 ‘윤서랑 함께 죽어야겠 다’는 결심을 하기까지 했다는 이
씨. 죽음 직전 이씨는 기적처럼 하느님을 만났고 하느님은 이씨의 생각을 긍
정적으로 바꿔 놓았다. 먼 훗날 아들이 좋아져 ‘이렇게 살았다’라고 간증
했으면 좋겠 다는 청사진을 품었다고 한다.
특수 교육과정을 마치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이 일반 아동들 속에서 적응
하는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는 이씨. 입학식날 맨 뒤에 세워 붙들
고 있었으나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는 동시에 눈 깜짝할 사이에 구령대
로 올라가 마이크를 뺏아서 장난을 치는 바람에 웃음 바다가 됐다는 것. 그
순간 ‘누가 저런 아이를 학교에 보냈어. 당장 내쫓아 버리지 않고…’ 하시
던 어떤 할머니의 무서운 음성을 듣는 것부터 시작된 아들의 학교 생활은 창
피함 같은 건 바닷물에 던져버리고 아예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는 도저히 계
속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씨는 사회성 발달이 전혀 안된 아들을 위해 어려서부터 친구들을 계속 집
으로 놀러오게 했고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놀이를 끊임없이 계획했다.
학교 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해 아들의 짝꿍을 딸처럼 아끼며 늘 집에 데리고
와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며 윤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그런 엄마의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윤서군은 친구들을 피해
늘 혼자 있으려 하고 좀처럼 반응이 없었다.
“자폐에 관한 한 절대로 포기하지도, 기적을 바라지도 말라”
중학교에 진학하여 정상아도 힘들다는 사춘기를 겪은 일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는 이씨. 성적이 점차 떨어져 하위에 머물자 학교 생활에
흥미를 잃어가며 난폭해지더라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주변 친구들의 이해
와 도움은 훨씬 많아졌으나 대학입시가 수학능력으로 바뀌자 논리적인 사고
가 어려워 아들의 학습지도는 결정적인 한계에 부딪혔다고 한다.
이씨는 매일밤 새벽 2시까지 목이 쉴 정도로, 어떤 때는 목에서 피가 넘어올
만큼 반복해서 지도했다. 고2 후반이 되자 이씨 역시 체력에 한계가 왔는지
저녁 식사 후의 식곤증을 이겨낼 수가 없어 저녁을 굶으면서까지 아들이 잠
드는 새벽 2시까지 매달렸다는 것. 그 피나는 노력의 결실이 대학합격이라는
열매로 맺어졌다.
성공회 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한 윤서군의 대학생활. 대학생활이 시작되면서
어떻게 적응할지 무척 염려했으나 1학년 1학기에는 과수석을 차지하여 장학
금을 받아 가족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대학에 다닐 때 교회에서 청년들과 함
께 필리핀 선교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 윤서군. 자폐증을 지니고 있는 윤서군
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이씨
의 ‘남다른 교육법’ 때문이었다. 윤서군은 지금까지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에서 정상아와 ‘통합교육’을 받아왔다.
이원장은 85년부터 98년 2월까지 인천에서 ‘성신 조기교실’을 운영하며 자
신의 경험을 밑바탕으로 놀이치료, 언어치료, 생활교육 등을 통해 자폐아들
을 교육시켰다. 또 조기교실을 졸업하고 나면 받아주는 유치원이 없다는 것
을 안타까워하다가 이씨는 지난 88년에 직접 정상아들과 함께 자폐아들을 가
르치는 통합유치원인 ‘성광 유치원’을 열었다. 정상아 부모들의 반대에 의
해 한때 유치원 운영이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는 이씨. 부모들의 시각이 바
뀌어 이제는 가족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사회 전체가 건강해진다고 덧붙인
다.
현재 성광 유치원에는 자폐아동 7명이 통합교육을 받고 있다. 이씨가 구상하
고 있는 ‘통합학교’는 일본의 한 사립학교가 모델이라고 한다. 유치원에서
부터 고등전수학교까지 있다는 일본 통합학교 원장의 교육법이 이씨의 생각
과 일치했기 때문에 자신의 유치원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는 것.
“신변처리 및 집단을 의식할 수 있는 생활교육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산만
한 행동을 줄이고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 우선 생활체육이 밑바탕이 되어야
해요.”
그 다음으로 언어능력 개발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고 다음 단계로 사회성 발
달을 위한 교육을 행한다는 이씨.
“자폐의 원인은 세계적으로도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아요. 원인을 모르니까
딱 맞는 치료법도 없는 실정입니다. 모든 것을 개별적으로 지도해야 하기 때
문에 경제적인 부담이 많이 따르고 가족 모두의 이해와 도움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해요. 경제적인 문제, 가족들의 협조, 한가지만 어긋 나도 제대
로 치료의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점은 사회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이라는 이씨. 그
러나 자폐에 관한 한 절대로 포기하지도, 기적을 바라지도 말라고 당부한다.
“믿음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과연 살았을지 모르겠어요.
정말 하나님께 감사해요.
그리고 자폐아를 둔 부모들께도 얘기하고 싶어요.
교사와 부모가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자폐는 얼마든지 극복해 나갈 수 있어요.”
- Queen/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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