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꼭 한번 복자께서 걸어가신 압송길을 따라 걷고 싶었다. 명례성지에서 대구 관덕정 순교기념관(오리정)까지이다. 총거리는 95km가 조금 넘는다. 하루 23km를 부지런히 걸어야만 3박 4일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우리 순례팀은 되도록이면 순교자께서 걸었던 옛길을 걸으려고 했다. 옛길은 대부분 포장이 되고 큰 도로가 덮어쓴 곳이 많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위험한 구간은 안전한 둑방길이나 농로를 택해서 걸었다.
1866년 병인년 2월 말 즈음 서울의 베르뇌 주교와 9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가 체포되었다. 3월 초일에는 남종삼 요한 성인이 체포되고 그의 부인 이소사 필로메나와 3명의 자녀가 창녕 땅 어도리로 유배되면서 병인박해가 전국적으로 가속화되었다. 당시 영남 남부지역에도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의정부에서는 지방의 각 병영에 천주교 신자를 색출하라는 공문을 하달하였다.
당시 대구의 감영과 진주의 경상우병영, 통영의 통제영에서는 천주교 신자를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고 천주교 신자를 잡아오는 병사에게는 일계급 승진이라는 특진의 기회도 주어졌다. 경남지역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박해 사건은 1863년, 철종 14년 12월 진해(현 진동) 현감의 박해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이듬해 갑자년에는 대구 진영 포졸들이 내려와 진전면 예곡리 신자 전영운, 김을종 등을 포박하고 교리서와 기도서를 빼앗고 박해를 하였다.
마산교구 최초의 순교자는 밀양 백산의 ‘오 야고보’ 순교자이다. 1866년 병인년 3월 15일 밀양 명례리의 이웃 마을 백산리에 살았던 ‘오 야고보’ 순교자께서 대구 오리정에서 순교하시고 이틀 뒤 복자 ‘신석복 마르코’ 순교자를 잡아가기 위해 대구의 포졸들이 명례에 들이닥쳤다.
복자 신석복 마르코 순교자는 그때 마침 창원 마포로 장사를 나가고 집에 없었다. 가산을 탈취한 포졸들은 강 건너 ‘가산 나루터’ 길목에서 잠복하고 있었다. 해 질 무렵이었다. 4~5명의 행인이 ‘가산 나루터’로 들어오고 포졸들이 ‘당신이 신가(家)요?’ 하고 물으니 ‘내가 신가(家)요.’ 하고 대답한다. 즉시 포승줄로 묶고 술뫼 나루터로 올라갔다. 당시 술뫼 나루터로 끌고 올라간 이유는 아마도 여러 사람이 탈만한 큰 배가 필요했거나 떠들썩한 명례리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함이었는지 모른다.
복자 신석복 마르코 순교자의 증손녀 신남순 마리아(1926년생)는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복자께서는 장사를 하였는데 장사를 나갈 때 항상 3명의 짐꾼을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짐꾼들 중 2명은 신자였고 다른 1명은 비신자였다. 대구 진영의 포졸들이 복자의 짐 보따리를 뒤지자 기도서와 교리서 등이 나와 즉시 수감하여 2명의 짐꾼 신자와 함께 대구로 압송하였다고 한다. 「병인년 순교자 증언록」에 김해 딘실 김 베드로, 김가와 함께 같은 날 신석복 마르코 복자는 순교하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추측하건데 김 베드로와 김가는 복자님의 증손녀가 증언한 짐꾼 2명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복자께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묵묵히 걸어가신 이 길을 순교자의 후손인 우리도 순교자의 영성을 생각하며 걸어보자고 몇몇 교우들이 뜻을 모았다. 도보순례를 하겠다고 신청한 사람은 모두 11명이었다. 3박 4일의 압송길을 걸으며 각자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달랐겠지만 그 길 위에는 순교자의 향기와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함께 숨 쉬고, 곳곳에 숨어있는 천사들이 있음을 알게 된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복자 신석복 마르코 순교자의 압송길 도보순례에 있었던 그 이야기를 4편에 나누어 담아보고자 한다.
[2026년 5월 24일(가해) 성령 강림 대축일 가톨릭마산 8면, 최종록 대건 안드레아 외 10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