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대학생이더니 이제 직장 초년생이 된 조카가 물었습니다.
예전에 복음과 율법에 대해서도 질문해서 제가 답한 적이 있습니다.
https://cafe.daum.net/AromaMethodist/N3U8/132
이번에는 조카가 새 신자들인 친구들과 십일조에 대해서 이야기했나 봅니다.
아무래도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이것이 현실적인 문제로 여겨지겠지요.
그래서인지 조카가 질문을 한 것인가 봅니다.
여기에 답변을 보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저의 답이 다 옳으니 따르라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신앙은 자신의 결단입니다.
성도들과 나눕니다.
(조금 정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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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이야기
무엇보다도 신약시대에 사는 성도에게 십일조는 강제가 아닌 ‘권면’이라는 점이야.
여기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할 것 같아.
구약성서는 십일조의 기원을 아주 고대 아브라함 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말하고 있어.
사실 자기 소유의 십 분의 일을 드린다는 것은, 구약성서뿐 아니라 동서양 고대의 역사기록에 종종 발견되고 있어
우리는 성서 얘기하자.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기고, 자신을 축복하는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자신의 탈취물에 대한 십일조를 드림이 성서의 기록에 처음 나오는 장면이야.
후에 율법이 정해지고 십일조는 하나의 의무가 되었어.
그런데 농경 사회에서는 현대의 우리처럼 매달 드리는 것은 불가능했겠지.
그래서 추수절기(봄, 가을)에 몰아서 했을 거야.
아래 쓰겠지만 3년에 한 번 했다고도 하네.
신명기에는 십일조가 의무가 된 이야기가 나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와 살게 되면 12지파 중에 11지파는 땅을 받는데 레위 지파는 받지 못하게 될 거라는 거지.
레위 지파는 성막(나중에는 성전에서) 등에서 일하는 이들이었어.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을 전담하는 자들이었지.
땅이 백성들의 삶의 원천인데 그것을 받지 못하면 굶어야 되지.
이들의 생계를 위해 무언가 만들어 주어야 했어.
그래서 십일조 규례가 정해졌는데 11지파는 각자 십일조를 내어서 레위인들을 돌보게 했지.
근데 이렇게 되면 오늘날 흔히 오해하듯이 주의 일 하는 사람들이 십일조를 다 차지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
그렇지 않아. 성서는 명백하게 십일조를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 과부 같이 연약한 이들, 곧 소외계층과 나누라고 하셨어(아래 신 14:27-29).
(새번역) “그러나 성 안에서 당신들과 함께 사는 레위 사람은,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사람들이니, 그들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당신들은 매 삼 년 끝에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모아서 성 안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당신들이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당신들이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돌봄’의 의미가 여기 들어가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는 하나님을 향한 드림이라는 것.
구제하려고 헌금을 걷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고, 그 드린 것을 소외된 이웃과 나눈다는 것!
그러나 이 일이 항상 잘 되었던 것은 아니었어.
무엇보다도 눈속임으로 드린 경우가 많았어.
흠이 있는 제물(빵, 가축)들을 드린 거야(말라기 1장).
가장 좋은 것이 아니라 쓸모없는 것, 다시 말해서 버려도 되는 가축, 더러운 빵(상한 빵)을 드리기도 했던 거지.
이는 자기의 의(공로)를 내세우면서, 치워버릴 물건을 제물이란 이름으로 바쳐서 체면도 살리고, 주의 일을 했다는 자랑도 겸하는 것이야.
그런데 이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큰 죄가 되는 거야.
말라기 선지자는 십일조를 도둑질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어.
인간이 자기 욕심을 위해서는 만사를 제치고 써대고 먹어대지만 하나님의 일에는 무관심하거나 무가치하게 여기는 심성을 경계하려고 한 거지(말라기 3장).
여기에 신학적 의미를 더 붙이면, 내가 무엇을 드렸다 하고 자랑함으로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자신이 받는 일을 하는 것이고.
이게 도둑질이 되는 거야.
사람들의 이러한 심성은 신약성서에서 주님과 사도들께도 통렬하게 책망받았어.
예수께서는 경건한 유대인들이 십일조하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어.
(새번역)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마태복음 23:23).”
외형의 의무를 행하고 스스로 높이는 자들에게, 아니다! 정의와 자비, 신의와 같은 귀한 덕목이 중요하다, 이것이 없이는 봉헌이 아무 소용없다 라고 하신 것이야.
주님으로부터 책망받은 자들은 사실 기록된 율법 조항보다 더 세심하게 십일조를 했어.
드리라는 조항이 없는 박하와 회향 같은 향료의 십 분의 일을 드림으로 자신들의 경건을 내세운 것이지.
그러나 이것이 문제였어. 드러내놓고 자신의 경건을 자랑함으로 결국 자랑과 자부심의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이지.
바벨탑의 결국은 혼돈과 무너짐이야.
예수께서는 십일조를 하지 말라가 아니라 저 아름다운 심성이 같이 하여야만 하심을 가르치신 거야.
이후 초대교회에서는 십일조를 해왔고 그것은 면면히 이어져서 오늘날까지 왔어.
그러나 중세 때에 백성들은 영주들에게 바치는 십일조와 각종 공물, 교회에 바치는 십일조 등으로 너무 힘들었지.
그래서 십일조 무용론이 나오기도 했고.
신앙행위로서 십일조는 선교사들을 통해서 자연스레 우리나라에까지 전달되었어.
정작 오늘날 서구교회에서 십일조를 하느냐?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어.
앞에서 말했듯이 이는 강제가 아니라 ‘권면’이야.
하는 사람도 있고 안 하는 사람도 있어.
독일처럼 국가에서 신앙인이라 등록한 이들에게서 종교세를 받는 나라도 있고.
무엇보다도 십일조와 봉헌을 행하는 것은 하나의 ‘고백’이야.
저는 물질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물질이 있어야 삽니다만, 이것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함으로 그는 물질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지.
특별히 작은 교회는 재정이 자주 휘청거리기에 두 세 사람의 십일조라도 대단한 도움이 돼.
그러나 봉헌에 대한 설교는 가능하지만 저주까지 예를 들면서 억지로 내게 하면 안 돼.
바울 사도가 그랬잖아.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린도후서 9:7)”
구원은 무엇을 드렸기에 받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그대로 주께서 나를 받아주셨다는 은총에서 나온 것이지.
앞의 얘기 정리하면, 십일조는 권면, 감사, 돌봄, 고백, 은혜, 맡김의 여러 덕목들이 들어가 있는 성도의 아름다운 신앙행위야.
교회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야.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위해 자신을 드리셨던 것처럼.
십일조와 봉헌들도 같은 의미로 봤으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