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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
권설휘
택시가 멈춰 선 곳은 축제의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 대학로. 근 한달 여 만의 약속은 두근거리는 기대감과 함께 설래임으로 잠을 설치게 했다. 약간은 초췌해 보이는 얼굴로 혼잣말을 반복하며 (구)신시 소극장 이라고 체크 되어있는 메모지를 꺼내들었다. 메모지라고는 하지만 16절의 무선 노트는 내가 언제나 들고 다니며 어디서건 낙서를 일삼는 갈 곳 없는 기억을 모아둔 조각들이다. 적당히 그려낸 약도를 보며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린다.
기억을 더듬으며 찾아온 혜화동 거리에서 상상 속 지도와 손의 약도를 겹쳐보며, 눈으로 그 길을 더듬어 간다. 눈 앞 에는 깔끔한 건물 한 동이 들어왔고, 마침 주머니에서는 휴대폰 진동이 느껴진다. 슬라이드를 밀어내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가로운 일요일, 소중한 휴식을 방해하고 약속시간을 내 맘대로 다섯 시간이나 앞당겼음에도 싫은 내색 없이 나와 주는 그의 배려에 콧노래를 불렀다.
일단 티켓 발부 시간을 알아보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저만치 PC방이 보인다. 카드를 받아들고 금연석으로 올라간다. 담배가 싫다. 담배 연기는 모호한 몽상을 하게 해서 싫다. 희뿌연 연기 속으로 내 나약함이 보이는 거 같아서 더욱 싫다. 에어컨에서 약간 떨어진 문가의 PC를 켠다. 등 뒤에는 다정한 남녀의 뒷모습이 보인다. 낮 설지 않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기계적으로 세팅을 한다. 다시 들려오는 휴대폰의 떨림. 혜화동이니까, 만날 수 있지, 하고 많은 PC방 중에서 마주칠 수도 있지. 쓸데없는 허접 쓰레기 같은 생각을 떨친다. 한낮의 더위에 괴로워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디냐는 그의 질문에 재미있는 피시방의 이름을 가르쳐준다. 여기? 몽. 수화기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몽? 몽이 뭐야? 되묻는 그에게 이야기 한다. PC夢, PC방 이름이에요. 주변을 둘러보는지 약간의 침묵 끝에 그가 대답한다. 오케이. 찾았어.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경쾌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저만치 계단에서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가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전 날 밤, 프로젝트가 겹쳐 잠도 잘 못 잤을 텐데. 자신에게 엄격한 그는 나에게는 유난히 엄격하지 못하다. 여자에게 약한 집안 내성 탓이라나?
"응? 안색이 안 좋아요."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밤에 작업 좀 했어."
무덤덤한 얼굴로 가방에서 면도기를 꺼내든다. 일어나자마자 왔는지 까뭇까뭇한 그의 턱을 본다. 가벼운 금속성이 울리고, 그는 컴퓨터를 켠다. 나는 알아볼 수 없는 수식과 여러 가지가 적힌 노트를 한 구석으로 밀어내며 USB 메모리를 꺼내드는 그의 옆모습을 살짝 훔쳐본다. 얼마 전에 잘랐다는 머리는 왠지 안 어울린다. 본인도 어색한지 계속 툴툴거린다. 화면을 바라보는 눈, 그의 투명하고 상대방을 빨아들이는 듯한 큰 눈 참 좋았다. 자신감에 찬 눈동자. 그 위로 긴 속눈썹과 쌍꺼풀이 지지 않은 얇은 눈은 검은 눈썹을 도드라지게 했다. 일 때문에 지난밤을 꼬박 새웠다는 그의 말이 아니라도 퀭한 두 눈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손은 덤덤히 면도기를 움직이고, 또 한 손은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린다. 리눅스의 화면이 움직이고, 좋지 않다며 투덜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내 심장에 꽂힌다. 그의 도움을 받으며 멍하니 화면을 본다. 화려한 이펙트와 함께 움직이는 화면, 그래픽 조각의 향연.
점심도 먹지 못하고 뛰쳐나온 그를 위해 샌드위치를 내민다. 그는 먹는 모습마저 나를 행복하게 한다, 내가 만든 걸 누군가가 먹는다는 것은 행복하다. 먹는다는 행위 자체의 의미가 내게 행복이 된다. 맛있다는 한 마디가 내 마음을 기쁨에 차게 한다. 그래서 난 요리를 하는 걸까? 어느 정도 요기는 했지만 많이 출출한지 식당을 찾아보자는 그와 메뉴를 결정한다. 우리는 서로 참 맞는 게 없는 사이라서, 식사 메뉴 정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뭐 먹고 싶은 게 없냐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무거나 좋다고 했다. 그는 내가 달가워하지 않는 고등어 이야기를 꺼낸다. 그를 향해 살짝 눈을 흘기자 재미있다는 듯 인터넷으로 주변 식당을 찾기 시작한다. 먹을 거 없으면 고등어 먹으러 가자며 그가 콧노래를 부른다.
난 고등어가 싫다, 횟집 딸 이력이 몇 년이던가, 꽁치와 고등어, 머리만 있는 병어. 그런 것들이 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가자 저절로 몸서리가 쳐진다. 그는 카레가 먹고 싶은지 카레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가 몇 안 되게 먹는 취향이 같은 카레. 처음에는 서로 먹는 취향이 달라 고민이 많았다. 그러던 중 찾은 것이 바로 카레. 그 카레가 오늘은 내가 싫다.
결국 가까운 닭갈비집으로 향한다. 나는 닭요리를 좋아한다, 치킨, 찜닭, 닭갈비, 닭 매운 찜, 백숙. 그 중에서도 매콤한 닭갈비를 좋아한다. 그가 메뉴를 주문하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잡담을 한다. 그와는 동기이며 나에겐 역시나 오빠인 선배 이야기, 귀찮은 제약 이야기, 쉽사리 안 풀리는 나의 슬럼프, 내겐 재미없지만 그에게는 아주 즐거운 학문 이야기. 잡담은 꼬리를 물고 미래의 가족관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전공을 선택하지 못하고, 전공서적을 읽지 못하면 버리겠노라 말하는 그의 얼굴은 나에게 웃는 얼굴과 다를 것이 없다. 약간 허탈한 웃음을 보이며 당신의 아버지도 그러셨을까? 하며 이야기하자 그가 당연하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불판 위의 닭갈비 한 점을 입으로 가져간다. 무덤덤한 그의 얼굴에서 나는 순간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인간이라면, 진화해야지."
가끔 느껴지는 그와의 이질감, 나의 감수성으론 감당이 안 되는 그의 현실감. 심각한 내 표정이 꽤나 웃긴지 그가 얼굴을 풀며 웃는다.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며, 식사는 즐겁게 하는 거다. 그가 빈 잔에 물을 따라 준다. 나보다 한 발 먼저 일어선 그는 카운터에서 계산을 한다. 사인을 하는 그를 본다.
입가심으로 놓인 박하사탕을 집어드려는 그의 손을 내가 밀어낸다. 그리고 가방에서 작은 통을 꺼내 그에게 준다. 늘 가지고 다니는 비타민 사탕 하나를 꺼내 그의 입에 넣어준다. 자신은 박하사탕이 좋다며 볼 맨 소리를 하지만 이내 맛있다며 하나 더 꺼내 먹는다.
그와 잡담을 하며 길을 걷는다. 예의 소극장 앞이다, 그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시간은 참 빠르게 간다. 예매한 티켓을 확인하고, 1층의 커피전문점에 자리를 잡는다. 웃으며 메뉴판을 내미는 그에게 내가 눈을 반쯤 감으며 심술궂게 받아친다.
예쁜 유니폼을 입은 아가씨가 우리 테이블 옆으로 온다. 그를 향해 얼굴을 찡그리며 골을 내본다. 피식 웃는 그의 모습이 아침 햇살처럼 눈부시다. 쿡쿡 웃는 그의 옆으로 조명을 받은 불빛이 부드럽게 부서져 내린다.
그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이야기 한다. 내가 수능을 봤거든? 근대 언어가 몇 점 나왔는지 아나? 하며 묻는 그에게 나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와 관련된 기억을 뒤적여 본다. 아니, 이야기 안 했던 부분이야. 그는 웃으며 대답한다. 120점 만점에 97점이었다는 그에게 양호한 편은 아니었다며 핀잔을 주자 실눈을 뜨며 나의 수리영역 점수를 되묻는다. 100점 만점에 30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학 선생님과 면담 한 적 있냐는 그의 질문에 고개만 끄덕거린다. 자기는 국어 선생님과 면담을 했었다는 그가 웃는다.
자기는 왜 시험 보는 게 싫었는지 아냐며 그가 나에게 묻는다. 고개를 가로젓자 그는 웃으며 이야기를 한다. 시험 보고 나면 저녁때, 아버지가 갑자기 밥을 먹다말고, 택규, 성적표 좀 가져와봐라. 하시는 거잖아? 라며 말하는 그에게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저녁 먹다 말고? 하며 되묻자 그는 대답한다. 먹다 말고, 그러면 이제 숨이 탁 막히는 거지, 알잖아, 나 도덕이랑 국어는 민망한 성적인거. 하며 그 때를 회상하는 그의 얼굴에 장난기가 배어난다. 그쪽이 비도덕적인 인물이니까 그러지. 하며 나도 장난을 건다. 초등학교까진 그래도 버틸 만 했다며 말을 이어가는 그의 입술을 바라본다. 왜? 그가 고쳐 앉으며 대답한다. 원, 이게 밥인지 돌인지 모르더라니까? 라며 너스레를 떠는 그에게 아버지 때문이냐며 되묻는다. 좀 먹고 있다 보면, 택규, 성적표. 후우, 끔찍하더라니까? 도덕이랑 국어만 보면 아버지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거야. 하며 킥킥 웃는 그에게 난 수학, 과학만 보면 어머니 아버지가 답답해하더란 이야기를 했다.
앞에 주문한 커피가 나온다. 차가운 커피 속의 얼음이 달그락거린다. 그렇게 잡담으로 시간을 때우며 커피 한 잔을 다 비울 때 즈음, 입장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지하의 소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으로 와 보는 소극장,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정면의 무대를 바라본다. 그와 나의 앞에서 동화가 시작된다. 지극히 현실적인 그와 환상을 꿈꾸는 나의 앞에서, 배우들의 몸짓과 목소리로 동화책은 펼쳐지고 그 속에선 꿈이 피어오른다. 희곡 속 대사들이 생명을 가지고 일어선다. 2차원의 케릭터들은 호흡을 하고, 소극장 안의 모든 이들은 그 속에서 함께 호흡한다. 지금 육신이 있는 이곳은 매몰찬 현실이지만 호흡하는 그 공기는 꿈이요, 바라보는 그곳은 동화속이다. 그는 연극 속의 한스가 되고, 나는 연극 속의 마리가 된다. 그도, 나도 이 극장 모두들 잘 알고 있는 사실은 연극도 지금 당장은 가슴을 적셔주는 마법이지만, 커튼콜이 끝나고 우리가 소극장을 나서는 순간 사라질 환상이라는 것. 두 시간여의 런타임이 끝나고, 아름다운 무대에 감동한 이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떠난다.
무대 위의 두 배우는 전쟁 때문에 소리를 잃은 젊은 청년 음악가 한스요,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앞 못 보는 무희 마리이자, 로미오와 쥴리엣이고, 동화 속의 젊은 청년과 아름이 공주이다. 그 일은 어디까지나 환상의 무대에서이다. 주변이 텅 비고,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선다. 주르륵, 한 줄기 눈물이 내 뺨을 타고 흐른다.
그가 내게 손을 내민다. 내 손보다 조금 더 큰 손, 따듯한 그의 손. 나는 그 손을 쥐고 일어선다. 나에 대한 그의 첫 소감, 그것은 환자였단다. 본디 몸이 좋지 않은 내 모습을 보면서 제일 먼저 한 생각은 언제 부러질지 모르는 나무였다고 한다. 실없는 소리라며 피식 웃어넘겼지만, 속으로는 참으로 씁쓸했다. 아파하지 않아, 괴로워하지 않아, 울고 비명 지르고 싶어도 목안으로 삼켜온 과거는 그렇게 독이 되어 퍼져간 것이지.
"내가 안 보는 너에 대해선 난 몰라, 네가 말하지 않으니까."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그가 말을 한다. 아이스크림, 달콤하고 차가운 입술에 닿자 사르르 녹아버리는 아이스크림. 강해져야지, 언제까지 도망만 칠건데? 그를 따라 걷는 내 걸음이 조금씩 느려진다. 언제까지 자신이 쳐 둔 선 밖으로 나갈 자신도 없이 숨기만 할 건지 묻는 목소리는 건조하다. 넌 할 수 있을 거라는 다그침. 껍질을 깨고 나가길 바라는 마음을 모를 리 없다.
나도 한 입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똑똑 하이힐의 굽이 아스팔트에 부딪힌다. 모든 것이 이질적이다. 내가 먹고 있는 아이스크림, 내가 걷고 있는 혜화동 거리, 내가 신은 까만 하이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앞을 응시하는 그의 두 눈, 거리의 네온사인조차 빨려들어 갈 듯 한 눈.
결국 사람이란 혼자라고, 곧 자신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것을 걱정하며 내게 말하는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언젠가 나를 위해 들려준 그의 플루트 연주처럼 아련히 부스러지는 그의 목소리, 이건 팔분음표, 이건 사분음표, 어두운 거리는 오선지가 되고 나의 유약함을 꼬집어 내는 그의 목소리는 악보를 가득 채워 슬픈 소네트가 된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그는 꾀나 동안으로 스물일곱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스스로가 자기는 악질이라고 악을 써도 그 웃는 모습은 참 귀엽다. 난 늘 그를 부를 때 그의 이름과 약식의 별칭을 섞어 부른다. 본인도 은근히 맘에 드는지, 이름보다 별칭으로 부르는 것을 더 즐긴다. 다른 사람에겐 절대 그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게 하는 그를 보면 기분이 좋다.
앞장 서 올라가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간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된다. 신데렐라도 아마 12시 까지 돌아와야 했다지?
무슨 놈의 PC방이 지상 3층이냐며 다리가 후들거린다고 이야기하는 그에게 엄살을 벌써부터 부리냐고 핀잔을 주자 너도 내 나이가 되어 보란다. 같은 연구실 선배는 자기보다 4년 위의 사람인데 그 사람은 계단 내려 갈 때도 다리가 떨린다며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은 2층 이상 지으면 안 된다며 나에게 열변을 토한다. 그런 그에게 나는 4년이 지나도 20대이지만 당신은 30대라며 장난을 건다. 4년 뒤에 너는 어떨지 지켜보겠다는 그의 목소리 한 가득 그의 다정함이 살갑게 다가온다.
서로 얼굴을 보며 킥킥거린다. 웃으며 그가 고개를 젓는다. 어느덧 아홉시, PC방을 나와 한 결 열기가 사그라진 대학로의 거리를 걷는다. 헤어짐의 아쉬움은 만남의 기대로 바뀌고, 만남의 행복은 헤어짐의 서글픔을 낳는다.
오늘따라 높은 하이힐에 내가 피곤할까봐, 그가 손을 들어 택시를 잡는다, 첫 번째 택시기사는 당산역 쪽은 가지 않는다고 떠나버린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불친절기사로 신고를 할까? 하며 그는 다음 택시를 잡는다. 왜 그러냐는 질문에 자신의 시간을 빼앗은 것이 그 기사의 죄란다. 그러면 나는 뭐 큰 죄인이 아니냐며 말을 받아치자 사람에 따라 다 다른 가치를 두는 건 당연한 것이라며 손을 내민다. 두 번째 택시가 우리 앞에 멈춰 선다. 인상이 좋아 보이는 택시 기사가 고개를 끄덕인다.그가 문을 열어준다. 내가 타고, 그가 뒤 이어 탄다. 옆 집 아저씨마냥, 푸근한 인상의 택시 기사가 우리를 향해 더 놀다가지 않고 벌써 가느냐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대답한다. 이 아가씨는 집이 멀어서 안 된다고, 룸미러를 통해 보이는 택시 기사의 눈가에 잔주름이 잡힌다. 쉴 세 없이 종알대는 나와 그를 보며 택시 기사가 웃는다.
"젊음이란 좋은 거죠, 서로가 넘어야 할선을 넘지 않는 다면요."
차창 밖으로 한강의 야경이 부스러진다. 일순간의 정적이 말을 꺼낸 택시 기사를 무안하게 한 듯 하다. 멋쩍은지 고개를 돌리고 쑥스러운 듯 한 그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나를 보곤 택시 기사가 황급히 말을 돌린다. 그러자 그는 한 술 더 떠 우리가 어떤 사이로 보이냐 묻는다, 연인이 아니냔 택시 기사의 말에 그는 내 손을 들어 반지를 보여주며 사실은 부부라며 농담을 건낸다. 누구 맘대로 부부냐며 내가 심술을 부리자 그럼 아닌가? 되려 내 얼굴을 빨갛게 만든다. 그 때, 라디오에서 정신병원에 관련된 취재가 흘러나왔다. 사설 정신병원의 실태. 전화 한 통이면 아무런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하는 인권유린의 실태가 나름 비장미까지 있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온다.
기억 속으로 꽁꽁 감춰둔 검은 것이 스멀거리며 비어져 나온다. 절대로 날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달팽이의 끈적거림과도 같던 그것은 이내 우악스런 손길이 되어 나를 잡아끈다. 놓치지 않아, 약간의 틈을 놓치지 않고 기억은 가시밧줄이 되어 나를 죄어오기 시작한다.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나, 도망치고만 싶었던 나,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나.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던 자해의 흔적이 다시 피부를 뚫고 나오는 것 같다. 내가 나를 버린 그 순간의 기억들이 다시금 나를 끌어안는다. 우악스런 손길에 비명을 지르던 나의 유리신경들, 팔에 감겨있는 하얀 붕대를 물들이던 붉은 꽃송이처럼 검은 곰팡이가 피어난다. 회색의 악몽 속에서도 붉은 자국만은 선명하게 나의 팔을 타고 회색의 칼날을 타고 떨어진다. 내게만 보이던 작은 소년의 모습, 쉴 세 없이 흐르던 눈물까지, 연극 속의 마리와 한스의 뺨을 타고 붉은 눈물이 흐른다.
허허, 법으로 어떻게 통제가 안 되나? 무거운 목소리로 택시 기사가 말문을 연다. 티를 내지 않으려 했는데, 새파랗게 질린 내 얼굴이 창문에 반사된다. 따듯한 손이 나의 손을 꼬옥 쥐기 전 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린 건지 나는 모른다. 따듯한 그 손의 주인을 찬찬히 더듬어 간다, 그가 웃으며 내 손을 잡아준다. 너는 혼자 스트레스를 만들어, 아프면 아프다고 말 해야지, 난 눈치가 좋은 편이 아니잖아? 그가 말한다. 손이 너무 차다며 몸이 안 좋은데 너무 무리한 거 아니냐며 걱정하는 그의 안색이 어둡다. 손님. 창문 좀 열어 드릴까요? 라며 택시 기사가 우리를 향해 묻는다.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고개를 젓는다. 벌써 택시는 당산역 앞에 멈춰 선다.
두 분이 너무 재미있고 잘 어울려요. 만 이천 원 나왔는데, 그냥 만원만 줘요. 라며 택시기사가 푸근한 인심을 쓴다.
후덥지근한 밤공기를 가르며 사람들은 분주히 걸음을 옮긴다, 버스가 오길 기다리는 이 짧은 시간이 마치 우리만을 위해 정지 된 듯 하다. 조심해서 가, 도착하면 연락하는 거 잊지 말고. 정 피곤하면 그냥 자도 되지만. 하며 끝까지 나를 배려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설마, 그럴 리 있겠냐며 도착한 버스에 올라탄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고이고이 다루다가도 아닌 건 아니라며 엄격한 그의 모습이 나의 시야에 오버랩 된다. 아마도 그는 집에 도착해도 내가 잘 들어갔는지 확인 할 때 까지 잠들지 못하리라.
버스의 불편한 좌석 깊숙이 몸을 묻고 창가를 바라본다. 그가 웃으며 서 있다, 신호등의 깜박거림과 함께 엔진의 소음이 귀를 때린다. 나직이 움직이는 그를 본다, 그가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래, 내 앞으로는 아득하게 먼 여정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