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의 두 사건
"경찰 보고에 의하면 이 날(60년 6월 25일)밤 11시 상하 회색양복을 입고 복면을 한 24세 전후의 괴한 2명(그 중 1명이 45구경 권총휴대)이 정동지 씨, 김홍조 씨 집에 침입, 그들이 발사한 총탄에 정씨의 첩 박남이 씨가 허벅다리에 관통상을 입었고 김씨의 처 박부연(민의원 김영삼 씨의 친 어머니) 씨는 하복부에 관통상을 입고 26일 오전 8시 15분 거제 장승포 소재 '세브란스'병원에서 사망했다."
위 내용은 <부산일보>에서 보도한, 박부연 씨와 정씨의 첩 박남이 씨 살인 사건의 개요이다. 이 사건은 4.19혁명 이후 최대의 사건으로 알려졌었다. 당시 수사본부는 단순 강도살인 사건으로 치부했다. 그래서 얼마 되지 않아 범인이 잡히고 수사를 마무리 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수사는 제자리 걸음이었고 단서 하나도 잡지 못했다.
당시의 신문은 수사대원들에게 "오리무중", '살인강도도 이젠 옛 이야기 되고' 등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사건 발생일로 3개월 7개월 넘어가면서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 사건은 61년 5.16군사정권 탄생으로 일반민중들에게 소리소문 없이 지하로 묻혔다. 또한 거제지역에서도 어느 누구든 입에 담지 않으려고 한다. 특히 그 당시의 범인들이 누구인지, 또 사건이 어떻게 발생되었는지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단순히 범인들은 남파 간첩으로, 김영삼의 대공발언과 대남 전략의 방해 때문에 저질러진 사건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거제도에서 한국전쟁이후 최대의 사건으로 알려진 박부연여사의 살해사건을 재조명해 보자.
1960년 자유당정권의 부정부패가 날로 심하던 무렵, 김영삼는 장택상의 도움으로 정치에 입문을 하여, 54년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자유당정권의 소속의원으로 유명세를 누리고 있었다. 한편 거제도는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기 전이였다. 또한 4.19혁명후 발생한 사건으로 역사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 정부는 거제도의 해방공간에서 활동한 좌익세력(지역변혁운동가)들은 모두 제거되었다고 자신만만했다. 그런데 1960년 5월 25일 오후10시 30분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 정동지씨의 집에 두명의 괴한이 침입했다. 잠자던 정씨의 첩 박남이씨를 구둣발로 깨워 주인 정시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이통에 잠을 깬 정씨의 본 처 하양순씨 및 식모 장일근양이 '주인은 집에 없다'고 대답하자 방안으로 들어선 과한들은 팔목시계, 일제 라디오 한대를 들고 도망쳤다.
이때 박여인이 소리치자 도망치던 괴한 1명이 권총 두발을 발사, 두발 모두 박여인의 허벅다리에 맞았다. 괴한들은 정씨집서 약 2키로 떨어진 김홍조씨 집으로 내달렸다.
"영감님(김홍조)께서 마산에서 돌아오는 날이였는데, 아마 피곤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그 놈들이 침입했다."라고 김대규(능포동 거주, 현 거제시의원)씨는 회상했다. 그들은 개머리판 없는 권총을 소지했었다. 그 생가에 침입한 두명 중에, 범인 이정섭은 김씨의 어장에서 일한 경력이있었다.
김홍조는 이정섭과 친밀한 관계였다. 이정섭은 김홍조씨의 어장막에서 일했던 고용노동자였고 안면이 익은 지라 자연스럽게 그 집으로 침입할 수 있었다. 김홍조는 "청년들이 집으로 들어와서는 무조건 돈을 달라고 윽박질렀다. 한 청년은 어장막에서 일한 이정섭이였다. 그 놈과 한 놈이 있었는데, 이정섭은 권총을 들이대며 무조건 돈을 달라고 했다"고 그 당시 상황을 말했다. 이정섭은 안방에 있는 박부연씨를 불러내어 돈을 요구했지만 주지 않았다. 그녀는 "아는 사람이 이럴 수 있느냐"고 반색했다.
그러다 정섭은 당황한 나머지 박부연에게 권총을 들이대며 돈을 빼앗으려 하다가 오발로 박부연씨가 사망했고 김홍조씨는 무사했다. 두명의 청년은 인근 야산으로 도망쳤다.
수사본부의 허점
이 사건은 25일 밤 10시 30분에 발생했는데 장승포경찰서에 신고된 것은 익일 새벽 2시 20분이고 충무서에 수배되기는 새벽 4시 40분, 경찰국에서 도내 각서에 수배한 시각이 아침 9시경이야 되어서였다. 사건발생이후 도내 각 경찰서에 모여든 1백여 명의 형사들은 수사본부로 마련된 장목지서에 모여 본부 강력주임과 당 지서장의 지휘로 현장검증을 마쳤다. 이 사건에 동원된 형사들은 충무, 도내 각 경찰서에 5명씩, 시내 각 지서에 5명 씩 등 1백 여명이었다. 그들은 민완형사로 자부하던 사람들로 강력담당형사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사건발생 3개월이 되어도 범인의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그 당시 형사들은 잡지 못하는 이유로 "형사들이 전혀 정보를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수사주임은 용의자가 어느 지방에 있는 것을 알고 상사에게 정보를 제공하면 여비도 주지 않고 속히 잡아 오도록 명령하기 때문에 "아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편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수사비 부족과 의욕상실등으로 수사는 진척을 보지 못했다. 한번은 용의자를 검거하여 고문이나 여러가지 방법으로 취조를 했지만 알리바이가 맞지 않아 석방되는 일도 많았다.
이런 식의 취조행위는 거제 연초면 죽토마을에서 다반사로 일어났다. 주민들은 공포에 질린 범인이 속히 잡히길 원했다. 특히 연초면지역으로 몰린 이유는 해방이후 좌익활동이 강했기 때문이였다.
이러게 수사에 진척이 없자 언론은 "못잡는 것이 아니라 잡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일반 시민들도 수사본부쪽으로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위 사건 뿐만아니라 여러가지 강도 살인 사건으로 뒤범벅이 되어 수사의 혼선만 가져 왔다. 당시 강도살인 사건 이후로 강도사건 등이 306건으로 증가하여 수사인력도 모자라 수사진척은 엄두도 못내었다고 관계자들이 말했다.
수사본부는 살인범을 잡기 위해 거제도 전역에 형사를 투입하여 수사를 펼쳐지만 성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해를 넘겨 61년도로 넘어 갔다. 정국은 갈수록 혼미하였고 민주당 정권도 국민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선거를 앞둔 시국이라 반혁명적 인사들의 재판은 더욱 제자리 걸음을 헀다.
순경살해의 범인
사건 발생 1년만에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61년 9월 15일 오후 2시, 거제군 연초면 죽토리에서 거제경찰서 순경 진종수(陳鍾秀,37)씨가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이러했다. 진순경이 주민의 제보를 듣고 윤원(윤병윤의 누이)씨의 집을 찾아 갔다. 한 주민이 "수상한 사람이 있으니 와 보라"고 해어 진순경이 순찰겸 나섰다. 그리고 윤원씨 집에 숨어 있던 윤병윤을 검거했다. 그러나 경찰서로 연행도중 이정섭(25, 아양리)이가 나타나 칼빈총을 난사하여 진순경이 사망했다.
이렇게 이정섭과 윤병윤은 야산으로 도망쳤다. 이에 사건을 들은 경찰이 출동하여 그들을 쫓았다. 윤병윤은 경찰이 발사한 총탄을 허벅지에 맞아 검거되었고 이정섭은 도망쳤다.
이 사건으로 경남경찰정보국은 간첩으로 오도했고 남파간첩이 파견되어 순경을 살해했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당시 박정희군사정권이 들어 섰고 계엄하에서 벌어진 사건이라 당연히 조작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에 수사는 급진전되어 60년 9월 25일 김영삼씨의 모친사건과 정동치씨의 첩 박남이씨 사건외, 58년 5월 죽토리 천주교회당 권총 강도사건, 59년 2월 7일 죽토리 강길석씨 집 권총강도사건, 동년 9월 25일 일운면 고현리 군수관사 권총 강도사건, 60년 2월 1일 장승포읍 덕포리 강상구씨 집 권총 강도사건 등 미제로 남아 있던 사건이 그들의 소행으로 기울어졌다. 수사본부는 이정섭을 검거하기 위해 군병력까지 동원하여 거제 전 야산을 수사하기 시작했다. 수사본부는 이정섭과 윤병윤의 소행에 수사촛점을 두고 검거에 나섰다. 언론과 국민의 질타를 받던 수사본부는 활기를 띄었다.
이정섭은 진순경사건이후 47일만인 61년 10월 31일 거제군 동부면 학동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결국 이정섭은 47일 동안 야산생활을 하다가 배고픔과 정신력 약화로 학동마을 주민들에게 붙잡혔다. 이리하여 사건은 종말로 치달았다.
그러나 수사본부는 단순살인 강도사건이 아닌 간첩사건이라고 결론지었다. 과연 그들이 범인인가? 61년 9월에 발생한 진종수순경 사건만을 보고, 그들이 간첩이라고 단정짓는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수사본부는 윤병윤(尹炳允)의 경력을 의심하면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리고 윤병윤과 이정섭(李正燮)을 제외한 연초면 죽토리 마을 주민을 검거했다. 그들의 죄목은 간첩죄였다. 당시 검거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당시 나이)
윤종화(29, 남), 윤종렬(24, 남), 윤치규(29, 남), 윤종철(27, 남), 윤병권(31, 남), 이대섭(27, 남), 윤석운(25, 남), 윤원이(56, 여), 윤개금(51, 남. 윤병윤의 부친), 조창호(22, 남), 윤종기(25, 남), 조중호(26, 남)이하 12명이다. 그들은 윤병윤과 이정섭의 친인척이거나 이정섭의 국민학교 동창이나 친구도 끼여 있었다. 이들은 당시 간첩으로 오인되어 구속, 고등군사재판을 받게 되었다.
당시 군사재판의 판결은 그들이 5.16사건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껴 일본으로 도망하기 위해 밀항선을 타려고 준비하다가 경찰에 포착되어 검거했다고 결론지었다.
1961년 12월 29일 경남계엄사무소에서 열린 고등군법회의에서 윤병윤, 이정섭은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사형을, 그외 윤종화(사망, 징역 15년), 윤치규(거제거주, 징역 10년), 윤종철(사망, 징역 7년), 윤병권(사망, 지역 7년), 윤종렬(부산거주 , 징역 5년), 윤석운(부산거주, 징역 1년), 이대섭(거제거주, 징역 6개월), 윤원이(사망, 선고유예), 윤개금(사망, 선고유예), 조창호(거제거주, 무죄), 윤종기(부산거주, 무죄), 조중호(부산거주, 무죄) 등이 각각 선고를 받았다.
김영삼씨는 대학 2년학년때 서울 명동공관에서 있은 정부수립 웅변대회에 참가, 2등으로 외무부장관상을 수상하면서, 당시 외무부장관이던 장택상의 눈에 들어 정치에 입문하기 시작했다. 장택상는 친일파로 해방후 우익의 거두로 좌익인사를 탄압하는데 선봉장이였다. 그의 반공주의사상때문에, 정치수강생인 김영삼씨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54년 민의원선거에서 자유당출신으로 당선되었다.
윤병윤과 이정섭
주동자로 주목된 윤병윤과 이정섭이란 인물부터 추적해 보자. 범인 이정섭은 어떤 인물인가? 또 당시 주동자로 주목된 윤병윤이란 어떤 인물인가?
범인 이정섭은 거제 아양리 출신이다. 그의 부친은 이동해로 일제때 부터 민족해방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924년 이운청년회와 27년 거제신흥청년회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하였고 28년 조선공산청년회 거제도 야체이카(세포) 회원이였다. 해방후 연초면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가 남로당 연초면 책임을 맡은 인물이였다. 한국전쟁 당시 서북청년단에 의해 학살되었다.
그의 아들 이정섭은 거제도인민위원회 연초면 세포로 활동했었고 남로당 연초면 조직책을 맡았다. 그는 김홍조씨가 경영하는 어장에서 일한 노동자였다. 박부연이 전혀 모르는 인물은 아니였다. 또한 김 전대통령의 생가는 손바닥 보듯 잘 아는 사람이였다. 특히 야산으로 도망쳐 47일동안 생존할 수 있은 이유는 빨치산출신으로 활동한 경력때문이였다.
윤병윤은 연초면 죽토리 출신으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제때 연초청년회 활동을 시작으로 야학 강사로 활동한 민족해방운동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거제지역의 청년운동은 25년 이후 사회주의운동으로 변모하면서 반일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조선공산청년회 연초면책으로 활약하다가 일경의 눈을 피해 지하로 잠적했다. 그리고 해방후 거제도인민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연초면 핵심적 조직책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45년 9월에 연초면 지서를 접수하면서 친일, 부역자 명단을 발견하면서 한 부역자를 살인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 주동자는 윤병윤씨였다.
이러한 사건으로 45년 12월에 통영으로 피신하여 혁명구조회를 결성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45년 통영청년동맹으로 투옥되어 징역 6개월을 살았다. 46년 2월엔 통영반일운동회 기획을 맡았다. 47년 남로당에 가입하고 48년 인민공화당 경남 조직책을 맡는다. 그러나 48년 인민공화당 사건으로 51년 5월에 10년형을 선고받아 투옥되어 옥살이를 했다. 그 이후 그는 병환으로 출옥했다. 이정섭과 윤병연과는 선후배사이자 이전부터 연초면에서 남로당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었다.
윤병윤은 출옥후, 고향 거제도로 내려와 인민공화당재건을 계획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확인되지 않는다. 윤병윤는 경남지역에서 주요시찰인물로 보호관찰대상자였다. 그러나 그는 이정섭과 윤병연 등 청년을 규합하여 조직하고 '이승만정권을 타도하고 인민정권수립' 등을 계획했다라고 경남 정보국이 발표했다.
그러면 윤병윤은 거제인공당을 재건하려고 시도했는가? 당시 함께 검거된 옥치규(거제거주)씨는 "사실무근이다. 그 사건은 정보과 형사들이 조작한 것이다"고 잘라 말했다. 그럼 이 사건은 박정희군사재건위가 만든 조작극일 수도 있는 것인가?
위 두 사람의 경력을 보아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그러니 당시 군사재건위가 모르던 주요 인물이고 해결되지 않는 미제사건를 잠재우는데 좋은 먹이감이라는 것인가?
당시 범인으로 잡힌 윤병윤은 범행을 부인했고 이정섭은 고문에 못이겨 거짓자백했다 한다. 윤병윤과 함께 검거된 옥치규씨는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 사건은 조작되었다. 나는 그 사건과는 무관하게 잡혀 옥살이를 했다. 그때 군인들의 고문은 심했다. 아직도 그 고문의 휴유증때문에 살아가기가 힘들다. 예전보다는 나아진 셈이지만..."라고 말문을 닫았다. 그러니 윤병윤외 13명은 아무런 죄없이 구속당해 고문과 회유를 통해 범행을 자백한 것이다. 당시 민완형사로 활동한 이아무개씨는 "당시 사건은 오리무중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범인 이정섭과 윤병윤 두 사람이 입을 열지 않아 곤혹을 치루었다"며 당시 심정을 털어 놓았다.
60년 9월 범인 이정섭, 윤병윤이 체포되면서 조직원으로 잡힌 옥치규외 11명은 심한 고문을 받아야 했다. 이는 윤병윤이 해방후 좌익활동에 깊이 관여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유죄선고하는데 발판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61년 5.16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총살되었다. "윤병윤과 이정섭 그리고 6명의 목숨은 박정희독재정권때 살해되었다"고 김원홍씨는 말한다. 윤병윤과 이정섭의 사형집행후 어떠한 소문도 들리지 않고 있다. 당시엔 고정간첩이라고 해야 국민의 관심을 끌 수 있었고, 당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좌익세력이나 보호관찰대상자들을 재구속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지역에서 살았던 인물이고 예전부터 잘 알던 터라 극비에 부쳐졌다.
관련기사 YS 모친 살해 사건 간첩단 조작의혹 제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