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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가 귀양살이를 했던 노도의 초옥. 초옥 주위는 온통 동백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어 앞이 안 보일 지경이다. 노도는 동백섬으로도 불린다.
애끊는 사모곡까지…김만중을 추억하는 작은 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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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도 남해에 안치하라." 임금의 한마디는 비단 두른 듯 아름다운 남해를 한갓 정치적 유형지로 낙인 찍었다. 하지만 대쪽 기개와 주옥같은 문장을 품은 유배객들은 정쟁의 상처를 딛고 남해에서 국문학의 신기원을 열었다. 한글소설 '사씨남정기'와 한글문학의 우수성을 이론화한 평론집 '서포만필'을 쓴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1637~1692), 남해 사람들의 푸근한 인심과 애환을 한글로 기록한 '남해문견록'의 저자 후송(後松) 류의양(柳義養·1718~미상), 남해 특산물 유자에서 선비정신의 전범을 읽어낸 절창 '영유시(詠柚詩)' 20수를 남긴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1629~1711) 등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남해에서 인간을 재발견했고, 남해는 이들로 인해 유배문학의 고장으로 거듭났다. 이들의 자취를 더듬어 가는 남해 유배문학 기행은 엄혹한 시련을 삶의 미학으로 승화한 지혜를 좇아가는 인생여행이다.
■세 번 유배…애타는 사모곡
남해 용문사 앞에서 바라본 노도 전경. 서포는 살아 생전 용문사의 고승들과 교유하며 유배생활의 외로움을 달랬다. |
1689년 3월, 53세의 서포는 경남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벽련포구 나루터에 섰다. 지척에 삿갓처럼 떠 있는 노도가 보였다. 당시 임금 숙종이 명한 서포의 위리안치(유배인 집 둘레에 가시나무 울타리를 치고 가두는 일) 적소였다. 서인이었던 서포는 같은 당 영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 등과 함께 장희빈이 낳은 왕자를 원자로 정해 후계자로 만들려는 숙종과 남인에 맞서 간언하다 화를 당한 것이다.
서포의 마음은 온통 먹구름이었다. 자신의 당파가 남인과의 정쟁에서 패해 사사(사약을 받고 죽음)와 유배의 고통을 치른 것도 가슴 시리지만, 어머니에게 자신이 세 번이나 귀양가는 모습을 보여 근심을 끼치게 된 죄의식 때문이었다. 1665년 37세 때 강원도 금성(현 고성)으로 유배 간데 이어 51세 되던 1687년 평안도 선천으로 유배 갔다 돌아온 지 4달 남짓 만에 또 기약 없는 먼 길을 떠나게 되었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양아리 벽련포구. 이곳 여객선 선착장에서 노도행 여객선이 출발한다. |
남편 김익겸(1614~1637)이 병자호란(1636년) 때 피란 갔던 강화도가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붙여 자결한 뒤 온갖 고생을 하며 형과 자신을 뒷바라지해 입신양명케 한 어머니였다. 게다가 당쟁의 화는 서포에게만 미친 게 아니었다. 1년 전 형이 이미 사사된 데다 사위인 소재(疎齋) 이이명(李命·1658~1722)은 경상도 영해로, 조카 세 명은 제주도와 거제도, 진도로 각각 유배를 가는 등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상태였으니 어머니를 두고 남해로 떠나는 서포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슬픔을 삼켜서 뱃속에 맺히니/떠나는 자식이 어머님과 헤어지는 마음일세/정으로야 울어서는 안 되는 줄 아노니/웃고자 하지만 어디서 웃음이 나오리오'. '서쪽 변방에서 해를 넘겨 유배를 살았더니/남쪽 황량한 땅에 머리 희끗한 죄수가 되었네/다 식은 마음이라 거울 보기도 질렸고/피눈물을 흘리며 멍하니 뗏목에 올랐네'. 서포는 그 심정을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
■초옥, 동백나무로 위리안치
초옥 옆 옹달샘. 서포가 직접 팠다. |
서포가 4년간 머물렀던 노도는 적막이 빚은 섬이었다. 0.41㎢의 작은 섬에는 젊은이가 모두 외지로 나가 주민이라곤 60대 이상의 노인 19명뿐이었다. 지난달 18일 오전 찾은 섬에선 매미소리와 파도소리만 들렸다. 마을에서 500m가량 떨어진 외딴곳에 자리한 서포의 허묘에는 돌멩이와 썩은 나뭇가지, 말라 퇴색한 솔잎들이 동그랗게 쌓여 이곳이 한때 묘지였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허묘 앞 표지석엔 '돌아가신 후 숙종 18년(1692년) 4월부터 동년 9월까지 묻혔던 곳'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맴맴맴 매…'. 매미들만 적소에서 홀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던 서포를 위해 호곡하고 있었다.
허묘에서 200m가량 아래에는 서포가 살았던 단칸 초옥이 복원돼 있었다. 초옥 주위에는 동백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서포 생존 시에는 환경이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가시나무 대신 '동백나무 위리안치'였다. 해안과 100m 남짓한 거리인데도 방안이나 마루에 앉으면 동백나무에 가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동백꽃이 붉게 핀 봄날이면 서포가 어머니를 생각하며 피눈물을 흘렸을 것 같았다. 초옥 왼쪽 20m쯤 떨어진 곳에 서포가 직접 팠다는 옹달샘이 있었지만 고인 물이 썩었는지 물빛이 흐렸다.
서포는 남해로 유배 오던 해 12월,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던 어머니를 결국 여읜다. 어머니의 부음을 전해 들은 서포는 적소 마루에서 대성통곡하다 마당으로 몸을 던져 혼절했다고 한다. '만중이 전생에 죄악을 쌓아 태어나 부친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난리 때에 낳아서 기르신 은혜가 보통 사람보다 백 배나 더하였다. 분수 밖의 영화로운 벼슬은 어버이를 기쁘게 한 것이 아니요, 미치고 어리석어 화기의 함정을 밟아 대부인에게 종신토록 근심을 끼쳤으니 불효한 죄는 위로 하늘에 통하였는데도 목을 찌르고 배를 그어 귀신에게 사죄하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구차하게 살기를 구하니, 오호! 슬프도다'. 서포는 어머니 행장에서 당쟁에 휘말려 유배 가는 바람에 임종조차 못한 불효를 절절히 자책했다.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립다는 말 쓰려니/글자도 되기 전에 눈물 이미 흥건하네/몇 번이나 붓 적셨다가 도로 던졌는가/문집에서 남해시는 응당 빠지고 없으리'. 서포에게 남해 유배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깊은 상처였다. '푸르고 아득하게 세 섬이 바다 구름 끝에 있으니/방장과 봉래, 영주가 가까이 잇닿아 있구나/숙부와 조카 형제가 두루 나누어 차지하고 있으니/사람들이 보고는 신선 같다 할 만도 하겠네'. 온 집안사람이 유배로 뿔뿔이 흩어진 처지를 한탄하는 시에선 진한 허탈감이 묻어난다.
■"우리 시문은 앵무새 말"
서포만필. |
서포는 어머니를 여읜 뒤 2년 4개월 남짓한 여생을 솔잎 피죽으로 연명하며 오로지 저술에만 매진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한 책이 문학·사학·철학을 아우른 비평서 '서포만필'과 한글소설 '사씨남정기'다. 여기에다 선천 유배 시절 쓴 '구운몽'까지 더한 게 서포의 3대 명저로, 국문학사에 길이 빛날 금자탑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은 자기 말을 버려두고 다른 나라의 말을 배워서 표현하므로, 설령 아주 비슷하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민간의 나무하는 아이나 물 긷는 아낙네들이 소리 내어 서로 주고받는 노래가 비록 비루하다 할지라도, 그 참과 거짓을 논한다면, 정녕 학사 대부들의 이른바 시부와는 두고 논할 수 없다'.
서포는 '서포만필'에서 국문학의 자주성을 역설했다. 이 같은 주장은 성리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당시 사상계의 경향을 고려할 때 매우 이례적이다. 특히 주자의 경전 해석에서 조금이라도 달리 풀이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심지어 사문난적이라며 사림에서 매장해 버렸던 송시열과 같은 서인인 것을 생각하면 서포는 사상적 주체성이 아주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자 중용장구의 서문에 '인심이 도심으로부터 명령을 들으면'이라고 했는데, 이 말 한 마디가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 앞에서 '마음의 허령(본체)과 지각(쓰임)은 하나일 뿐이다'라고 했으니, 도심과 인심이 어찌 두 가지 마음이겠는가? 이를 임금에 비유하면, 도심은 마치 임금이 조정에 나가 정사를 보거나 강론하는 때와 같고, 인심은 잔치하는 동안이거나 한가롭게 놀며 즐기는 때와 같으니, 실제로는 한 사람의 몸이다. 만약 인심이 도심으로부터 명령을 듣는다면, 이것은 잔치를 하는 임금이 조정 보는 임금에게 명령을 듣게 하려는 것과 다름없다'. 서포는 실제 이같이 주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저술에만 매달리는 서포의 모습은 당시 노도 주민들에게 엉뚱하게 받아들여졌다. 9대째 노도에 살고 있는 김광열(66) 씨는 "주민들이 서포 선생을 '노자묵고할배'로 불렀던 것으로 전해진다"고 말했다. 숱은 고난에 몸이 피폐해져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하고 책을 쓰며 인생을 정리하고 있었던 서포를 주민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서포는 1692년 3월 사촌 형에게 '몸의 여러 증상으로 보아 진실로 계속 지탱할 도리가 없고, 함께 쫓겨난 사람들도 세상을 떠나 거의 없으니 인생은 참으로 한 꿈이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지 한 달 후 운명했다.
노도의 서포 적소가 알려지면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늘고 있다. 남해군도 거액을 들여 노도에서 '문학의 섬' 조성 사업을 벌이고 있다. 서포가 자신을 오해했던 주민들의 자손들에게 320여 년의 세월을 넘어 이런 선물을 안기며 이해를 구하는 게 아닐까?
# 장인의 유배지에서 김만중을 기린 사위
소재집에 실린 '매부'. |
서포가 운명한 뒤 사위인 소재 이이명은 영해에서 남해로 적소를 옮겼다. 소재는 서포의 적소에 있던 매화나무 두 그루를 자신의 적소 앞에 이식했다. 그리고 장인의 미덕을 기려 '매부(梅賦)'란 제목의 시를 짓는다.
'옥에 티로 남쪽에 귀양가니/매화가 미리 알았네/뿌리 내리고 꽃을 피워/외로움을 달랬구나/얼음 같은 마음과 눈 같은 살결/서로 비추어 밝히셨네/거칠고 외진 만리 땅에/두 아름다움이 만났구나/사월에 해질 무렵/산새가 날아드네/빈 뜰에는 긴 대나무/거친 울타리에 기댔구나/슬퍼서 빛을 잃어/우수수 떨어지네/아, 깨끗한 마음이여/너도 의리에 따르구나/영화와 고락에도 한결같은 절개여/텅 비어서 부끄러움 없구나/굴원이 이소를 읊었지만/공에는 이르지 못했구나'.
소재는 서포와 매화의 미덕을 동일시하고 서포의 절개를 초나라 충신 굴원에 앞세웠다. 김성철 전 남해유배문학관장은 "여러 문헌을 보건대 소재의 적소는 남해읍성 동쪽, 현 남해대학교 기숙사 주변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소재는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몰락하자 풀려나 호조참의, 대사간, 이조판서, 좌의정 등 승승장구하며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그러다 경종이 연잉군(영조)의 대리청정을 파기하면서 이에 침묵했던 소재는 다시 남해로 유배된다. 이어 1722년 목호룡의 경종 시해 고변 사건으로 서울로 압송되던 중 노량진에서 사사된다. 소재를 따랐던 남해의 선비들은 소재의 위패를 모셔와 적소 인근에 '봉천사'란 사당을 지었다. 이 사당은 지금은 철거되어 사라졌고, 소재의 묘정비만 남해유배문학관으로 이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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