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욥7:11~21
11.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12.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13.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14.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15.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16.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17.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18.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19.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20.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21.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
<설교>
욥과 엘리바스의 대화를 보면 엘리바스는 신앙이 있고 욥은 신앙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엘리바스의 하나님에 대한 말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처럼 들리는데 욥은 자신이 겪는 괴로움이 무겁다고 하면서 자기 인생에 대해 탄식만 하다가 결국 불평을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엘리바스는 하나님에 대해 불평하지도 않고 원망도 없습니다. 욥처럼 생일을 저주하지도 않고 죽어서 나지 않은 것을 두고 탄식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욥과 엘리바스라는 이름을 지우고 누구의 말인지 모른 상태에서 그들의 대화를 본다면 누구라도 엘리바스는 신앙이 있고 욥은 신앙이 없는 자로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신앙 인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불평의 말을 하고 안하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평 했으니까 믿음이 없는 것이고 불평 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니까 믿음이 있다’는 기준의 판단은 신앙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어려움이 있어도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것을 마치 수학 공식처럼 외우고 ‘불평하지 말아야지’‘기도해야지’라는 생각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불평과 원망의 말을 억누르고 감추는 일도 허다하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의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는 욥의 말을 대하면 ‘욥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게 되지만 오히려 욥의 경우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불평과 원망을 유발시키신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성경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다른 점입니다.
사람은 심적, 육신적으로 불편해지고 힘들어 지면 불평과 원망을 토해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비록 엘리바스가 욥과 같은 불평과 원망의 말을 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다만 그 본성을 토해내게 하는 원인이 없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를 정당하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의 신앙을 인정하기까지 하셨으니까 고난이 있다 해도 참고 인내하면서 끝까지 불평과 원망을 하지 않는 욥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신앙의 세계를 모르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고난과 어려움과 사건에서도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에서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누구에게서도 배울 것이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신앙에서 실패한 모습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설사 누군가가 참고 인내하는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할지라도 그러한 모습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본받고 무엇을 실천하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누군가를 본받아 그대로 행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의 행위로 공식화 된 것을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욥을 고통으로 밀어 넣으심으로써 그의 본성에 자리하는 불평과 원망을 끌어내시고 그것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욥을 본받아라는 것이 아니라 욥에게서 인간의 본성, 즉 우리 자신의 실패의 모습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따라서 욥의 불평과 원망을 보면서 ‘하나님 저 또한 불평과 원망으로 살아가는 실패자입니다’라는 고백이 있게 되는 것이 욥을 세워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취지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욥의 불평과 원망에서 ‘욥의 신앙이 왜 이런가?’라는 의문을 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던 우리가 실제로는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도 않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자로 살아왔음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2절의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라는 내용을 보면 욥의 불평과 원망은 점차 노골적으로 변해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다 괴물은 악한 존재를 말하고 바다는 악한 존재인 바다 괴물이 존재하는 세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고통으로 밀어 넣은 것을 마치 바다 괴물이 바다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지키고 막으시는 것처럼 자신을 막고 계신 것으로 간주한 것 같습니다.
13,14절의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라는 내용도 다르지 않습니다. 고통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욥을 놀라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욥이 생각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고통만 있을 뿐 은혜와 사랑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고통에 있게 하는 것이 욥이 생각하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욥은 16절에서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라는 말까지 하게 됩니다.
자신을 놓아 달라는 것은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까 그냥 죽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마음의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날은 헛것이라는 말을 통해서 아예 인생 자체를 의미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17,18절을 보면 욥은 또 하나의 특이한 말을 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마음을 두시고 권징하시고 단련하시는 것을 언급하면서 가치 없는 헛된 일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뭔데 그렇게 까지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 8:4절에 보면“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라고 말하고, 144:3,4절에서도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시편에서 말하는 것은 사람은 헛된 존재일 뿐인데 하나님이 존귀하게 하시고 생각하시고 돌보시는 것에 대한 찬송인 반면에 욥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돌보신다는 것 자체도 거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좋은 일이 없고 오히려 고통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는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말을 하는 욥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 살았던 욥에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겪어야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고통이 주어지자 그동안 하나님을 신앙했던 인생 자체를 헛된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도 의미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지금의 형편과 상관없이 욥에게서 터져 나오는 인간의 본성적 모습이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 뜻을 이뤄주는 하나님으로 함께 하실 것을 기대했을 뿐입니다.
다시 말에서 나를 고통에 밀어 넣으시고 내가 원하는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은 원하지도 않고 함께 하시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 우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욥을 놓지 않고 계시는 것처럼 우리를 놓지 않으신다는 것이 놀라운 은혜로 다가올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마음이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것을 느낄 때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흔적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에서 배우게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세상에는 소망 둘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유일한 소망이 됨을 배우게 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유가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는 자로 살게 하는 것에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불평의 말을 안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욥이 온 몸의 종기로 인해서 고통을 겪었지만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이처럼 실패한 욥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심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 있게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