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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현대문화읽기] 영화 ‘벤허’
폭력은 폭력을 … 복수는 복수를 …
“The Race is not over!”(아직 경주는 끝나지 않았어) 사두마차가 끄는 전차경주에서 참혹하게 패배한 멧살라(스티븐 보인드)는 벤-허(찰톤 헤스톤)가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며 다리를 절단하지 말아달라고 의사에게 부탁한다. 마침내 벤-허는 피투성이가 된 멧살라를 찾아왔고 자신과 가족을 파멸에 빠트렸던 친구이자 적의 죽음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 때 멧살라가 벤-허의 어머니와 누이가 실은 문둥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 말을 듣자마자 벤-허는 절규했고 그의 옷깃을 움켜쥐며 멧살라가 죽기 직전에 남긴 말이 바로 “The Race is not over!”였다.
<벤 허>(Ben-Hur, 윌리엄 와일러 감독, 극영화/역사물, 미국, 1959년, 210분)는 복수와 용서를 주제로 하는 영화다. ‘허’ 가(家)의 아들(벤)인 유다는 오직 복수를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멧살라를 향한 그의 증오심은 겔리선(船)에서 노를 저어야 했던 잔인한 시절을 견뎌내게 했고, 아리우스 장군(잭 호킨스)의 목숨을 지켜냈고, 고향에 돌아와 다시금 가문을 일으켜 멧살라와 대적하게 한다. 그에게는 복수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돈과 명예나 사랑하는 여인과 누리는 행복한 삶도 복수 앞에서는 모두 무력했다. 그런데 원수가 죽는 현장에서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복수가 실패했다는 참혹한 현실을 깨달았으니…….
<벤 허>는 남북전쟁영웅이었던 루 월리스 장군이 1880년에 쓴 베스트셀러 소설이다. 그러나 소설의 주제를 보다 빛나게 만든 데는 단연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공이 크다. 그는 소설에서 가장 마음을 울리는 부분을 강조했다. 벤-허는 노예선으로 끌려가던 중 우연히 나자렛 마을을 지나게 된다. 그 때 예수님에게 얻어 마신 물 한잔이 그에게 힘을 주었고 그 만남은 십자가의 길에서 한 번 더 이루어진다. 상황이 바뀌어 이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고 벤-허는 자유의 몸으로 물을 건넨다. 그 때 예수님은 뒷모습만 나오지만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는 벤-허의 표정이 클로즈 업 된다. 벤-허의 표정을 통해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보라는 고급스런 연출이다. 그 후로 많은 영화들에서 예수님을 닮았다고 여겨지는 배우들이 등장해 잘생긴 풍모를 뽐냈지만 벤-허의 눈길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그 예수님이 벤-허에게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 알려주신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복수는 언제나 복수를 불러올 뿐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안 그러면 이 세상은 복수가 난무하는 참혹한 땅이 될 것이다. 용서만이 그 일을 가능하게 해 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8-39) 이천년 전 예수님의 말씀을 <벤 허>에서 다시 들을 수 있었다. 복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를 파멸시키고야 말 악마적인 경주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신앙으로 현대 문화 읽기] 연극 ‘갈매기’
현실이라는 무대, 절망이라는 장막
원작 안톤 체홉
그간 ‘갈매기’ 하면 두 번 생각 할 것 없이 ‘부산 갈매기’ 라고 당당하게 외쳤는데 어느새 저 유명한 체홉의 「갈매기」가 내 인생에 끼여들었다. 그것도 연극사에 길이 남을 작가의 4대 희곡 - 「바아냐 아저씨」, 「갈매기」, 「벚꽃 동산」, 「세자매」 - 중에 하나라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여배우인 ‘아르까지나’와 그녀의 애인이자 유명 작가인 ‘뜨리고린’이 오빠 ‘쏘린’의 집으로 내려오고, ‘아르까지나’의 아들 ‘뜨레쁠레프’가 자신의 연인인 ‘니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새로운 형식의 연극을 올리는 것으로 작품은 시작된다. 망쳐버린 연극 상연 이후 자신의 연인 ‘니나’의 마음이 떠났다고 생각한 ‘뜨레쁠레프’는 자신이 쏘아 죽인 갈매기를 ‘니나’의 발치에 던지고는 자신도 곧 이 갈매기처럼 죽을 것이라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암시하고는 권총 자살을 시도하나 실패한다. 한편 낚시를 하다 돌아온 작가 ‘뜨리고린’과 마주친 ‘니나’는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누다 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딱 봐도 인간 군상이란 말이 떠오르듯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관계가 한편의 연극 안에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꼬여있다. 그 누구 하나 자신의 삶에 만족한 사람이 없어 보인다. 극 중 갈등의 구조는 채워지지 않는 사랑에 대한 목마름으로 나타나고 이는 때로는 변형된 모습, 곧 더 높은 삶으로의 갈망, 몰이해에 대한 원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때문인지 서로의 이야기는 흩어지고 함께 있어도 서로에게 상처만을 줄 뿐이다.
누구는 부산 갈매기를 노래하며 ‘너는 나를 벌써 잊었나’를 외치고 누구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노래했단다. 소유하려고만 들고, 이해 받으려만 들고, 이용하려고만 하면 그 사랑은 진짜 눈물의 씨앗이렸다. 소유하지 않아도, 이해 받지 못해도, 이용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그 사랑 위에 동동 떠 있을 수는 없는 것인지. 아니, 사랑보다 근본적인 것이 있다. 성공하지 않아도, 잘나지 못해도, 많이 갖지 않아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살아야 할 인생이 있다. 성공해야만 인생인가. 잘나야만 인생인가. 많이 가져야만 인생인가. 다만 끝간데 모르는 만족을 탐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의 원죄이리라.
‘뜨레쁠레프’에게는 ‘니나’가 있었다. ‘뜨리고린’에게는 ‘아르까지나’가 있었고, ‘마샤’에게는 ‘메드베젠코’가 있었다. ‘뜨레쁠레프’에게는 ‘꿈’이 있었고, ‘니나’에게는 ‘희망’이 있었으며 뜨리고린에게는 ‘작품’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현실이라는 무대 위에서 절망이라는 장막에 싸여 자신의 주머니에 채워진 것을 보지 못하고 빈 주머니만을 채우려 든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가진 것 중 유일한 것인 하나 뿐인 생명을 스스로 빼앗아 버리고 가차없이 껍데기만 남겨둔 채 박제해 버린다.
더 이상 삶을 소비하지 말자. 없는 것을 바라보고 채우기에는 이미 가진 것이 너무 많다. 단순히 물질적인 소유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나를 사랑하는 어떤 존재가 명백히 살아 숨쉬고 있다. 최소한 저 푸르디 푸른 하늘이 있는 한, 나를 잊고 살아가는 부산 갈매기가 있을지언정, 한 점 부끄럼 없이 사는 그 날까지 숨쉬고 또 숨쉬어야지 않겠는가.
[신앙으로 현대 문화 읽기] 영화 ‘어바웃 슈미트’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리니
보험회사에서 40년 가까이 근무한 워렌 슈미트(잭 니콜슨)는 오늘 은퇴를 한다. 직장 동료들의 따뜻한 송별파티에서 후임자의 찬사와 평생 친구인 레이의 축사가 있었고 딸 지니(홉 데이비스)가 축하의 전화도 걸어왔다. 이 때 아내 헬렌까지 나서 든든한 내조자로 워렌의 곁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하니 누구라도 바랄만한 멋진 은퇴 장면이었다. 하지만 어디 인생이라는 게 이렇게 멋지기만 하던가?
관객들은 이쯤에서 슬며시 워렌의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꼬일지 지켜보는 기대감이 생기고, 아니나 다를까 그는 불행의 바닥으로 직진하고 만다. 안일하게 은퇴한 자가 치러야만 하는 잔인한 대가였다. 사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이 만든 영화치고 여태까지 지루하다거나 무의미한 영화는 없었다. 그는 작품 하나를 만들어도 가슴에 와 닿는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능숙하게 풀어나가는 데 있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는 감독이다. <어바웃 슈미트>(코미디, 미국, 2002년, 125분) 역시 그의 기량이 유감없이 표현된 작품임에 틀림없다.
페인 감독의 연출 성향을 보면 종종 로드무비라는 코드를 섞어 넣어 영화의 완급을 조절한다. 워렌 역시 거대한 캠핑카를 끌고 고향에도 가고, 졸업한 대학도 방문하고, 서부개척 역사가 담긴 마을도 들른다. 만일 이런 식의 여유를 부리지 않는다면 <어바웃 슈미트>는 그저 메시지에 충실한 계몽적인 영화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워렌이 길에서 찾아낸 것은 멋진 풍광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기에 하는 말이다.
긴 여행을 감행한 후 워렌은 무엇을 찾아냈을까? 그의 마지막 독백은 여행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외로움과 후회와 실패에서 오는 절망뿐이었다. 가냘픈 희망을 좇아 길에 나서보았지만 귀향(歸鄕) 후 그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었는데, 5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수메르인(人)들의 위대한 서사시 「길가메시」의 주제가 다시 한 번 반복되는 순간이었다.
그처럼 인생이란 허무에 불과하다. 이 메시지가 너무나 가슴을 울리기에 사실 그 장면에서 영화가 끝났다 한들 작품의 질은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워렌의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한 눈물을 못 보지 않았는가!
엔두구! 부르기도 낯선 여섯 살 난 탄자니아의 꼬마. 그는 부모가 전쟁 통에 죽은 고아 소년이며 영양실조로 시력을 잃어가는 중이다. 더 이상의 불행은 없음직한 웨렌에게 엔두구의 편지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엔두구의 그림 편지다.
러시아에 “하느님은 한쪽 문을 닫으시면 다른 쪽 창문을 열어주신다”라는 속담이 있다. 지면으로는 차마 알려줄 수 없지만, 이 지혜를 직접 확인하고 싶은 분이 있으면 꼭 <어바웃 슈미트>를 보시길 바란다. 절대 실망치 않을 것이다.
[신앙으로 현대 문화 읽기] 연극 ‘천 개의 눈’
평생의 거짓말 … 수치 질투의 이야기
2013. 9. 4 ~ 22 남산 예술 센터 / 정영훈 작, 박해성 연출
늦은 밤 주택가 도로를 달리다가 횡단보도 신호에 걸렸다. 좌우를 살펴보았지만 그 늦은 시간에 횡단보도를 건널만한 사람은 보이질 않는다. 더욱이 경광등을 밝히고 있는 경찰차도 없다. 순간 고민에 빠진다. 신호를 무시하고 가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파란 불이 다시 빨간 불로 바뀔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미루어 짐작컨대, 저 물음의 답은 두 개로 나뉜다. 융통성을 발휘해 좌우를 살핀 후 조심스럽게 횡단보도를 지난다는 것과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고 안전하게 통과한다 일 것이다. 그럼 질문을 한번 바꿔보자. 자, 길가에 쓰러져 있는 한 사내가 있다. 다시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자로’ 왕의 침전 환관인 ‘미사’는 환관된 자의 본능으로 닥쳐올 격량에 대해 몸을 떨며 입을 여는 것으로 연극은 시작된다. 변방의 호족과 백성들에 의해 축출될 위기에 몰린 자로 왕은 곁에 남은 유일한 신하인 환관 미사에게 자신이 마지막을 어떻게 맺어야 할지를 묻자 그는 자로에게 ‘타로의 미궁’으로 피신할 것을 간한다. 이로부터 그간 사람들에게 알려진 내용과는 다른 자로의 과거와 타로의 미궁에 얽힌 이야기가 시작된다.
가만히 들여다 보니, 자로 왕은 미궁의 주인인 타로로 다시 분하여 연기한다. 누구도 이 이야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일까.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말이 있다. ‘신 앞에 선 단독자’.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 (病)」 에서 ‘신 앞에 선 단독자’로 살아 갈 것을 말한 바 있다. 이와 맞닿아 있는 단어를 공자의 말에서도 찾을 수 있으니, 사서삼경 (四書三經) 중의 하나인 대학(大學)에서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이 행동하라’는 뜻의 ‘신독’(愼讀)을 말한 바 있다.
그간 어디서도 접할 수 없었던 수려한 문장으로 이어지는 이 연극은 분명 수치와 질투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로 왕은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평생 거짓을 숨기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숨겼음에도 숨겨지지 않고 평생을 따라다니는 수치심을 자신의 등에 업고 살아야만 했다. 감추고 싶었으나 스스로에게만은 더더욱 드러날 수 밖에 없는 부끄러움.
숨겨도 드러나는 것이라면 숨기지 말자. 하느님을 마주하고 살자. 하느님 앞에 서서 살자. 물론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러니 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일이 아니겠는가. 때로는 어지러운 말들을 뒤로한 채 몸으로 뛰어 들어보는 것도 꽤 괜찮은 방법이다. 거울을 들여다 보듯 내 마음을 하느님 앞에 고스란히 드러내보자. 생각보다 쉬운 것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윤리적이고 주체적이지 못한 이유를 계속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찾으며 변명하려 한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에게 ‘신 앞에 선 단독자’로 살아갈 것을 요구했다. 신이 나의 모든 행동과 말을 보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나 외에 다른 것에 책임을 돌릴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기분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결단하고 노력하며 살라는 뜻이다.
[신앙으로 현대 문화 읽기] 영화 ‘모뉴먼츠 맨: 세기의 작전’
인류 역사 지켜낸 사상 최대 전술
벨기에의 유서 깊은 도시 겐트의 제단화! 이는 플랑드르 회화의 거장인 후베르트 반 아이크(Hubert van Eyck, 1370~1426)가 성 바프(바오로) 성당에 세운 작품으로 제단의 전면을 장식하고 있다. 높이 3m 50cm 너비 4m 61cm의 거대한 제단화는 평소엔 접어두었다가 미사 때 펼쳐놓는다. 그림의 세세한 설명은 제쳐 두고 매주 미사에서 그 장엄한 그림을 바라보았을 법한 신자들의 느낌에 다가서보자.
주일날 아침 성당에 들어서 성수로 성호를 긋고 조배를 한 뒤에 거대한 고딕 성당의 주랑 복도를 지나 앞으로 나간 후 안쪽 방향으로 틀어 장의자에 앉아 제단을 바라본다. 그 때 옥좌에 앉은 성부와 마리아, 색 원근법으로 그려진 어린양 예수의 모습이 우선 눈에 들어오고 좌우에 등신(等身)으로 서 있는 아담과 이브가 보인다. 마음을 메우듯이 성스러운 인물들의 패널이 가득 들어서 있는 제단. 그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으며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드디어 “기도합시다.”
매주 성 바프 성당을 찾는 교인들에게 겐트의 제단화는 자기 장소에 변함없이 굳건하게 서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히틀러가 이 성스런 작품을 자신의 전용 미술관으로 옮기려 하니 누군가 나서서 이런 몰지각한 폭력을 막아야 되지 않겠는가!
2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질서를 바꾼 대 사건이었다. 독일이 유럽 대부분을 정복하면서 독재자 히틀러의 광기가 하늘을 찔렀고, 퇴각 직전에 그는 유럽 전역에 소장된 예술품들을 독일로 빼돌리려 했다. 연합군 특수 부대인 ‘모뉴먼츠 맨’은 그런 배경에서 만들어진 특수부대였다. <모뉴먼츠 맨: 세기의 작전>(The Monuments Men, 조지 클루니 감독, 극영화, 미국/독일, 2014년, 118분)은 부대가 처음 만들어지고 유럽의 예술품들을 히틀러의 손에서 구해내는 활약상을 그린 영화다. 로버트 M. 에드셀의 기념비적인 소설인 「모뉴먼츠 맨」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 <모뉴먼츠 맨: 세기의 작전>의 특징 몇 가지를 꼽아보겠다. 우선 실화를 바탕으로 하기에 마치 연대기를 쓰듯 이야기 전개에 매우 충실하다. 그리고 모뉴먼츠 맨들의 다양한 개성을 살리기 위해 역량 있는 배우들을 대거 등장시킨 점도 염두에 둘 수 있다. 감독과 주연을 맡은 조지 클루니를 비롯해서 맷 데이먼, 존 굿맨, 케이트 블랑쳇, 쟝 뒤자르뎅, 빌 머레이 등등, 이름만 들어도 맘이 설레는 명배우들을 출연시켜 영화에 무게감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특징은 어떤 과정으로 예술품들을 히틀러의 손에서 구해냈는지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 중 유일하게 이탈리아에서 외부에 있는 브뤼헤의 성모자상, 렘브란트의 자화상, 르노아르의 소녀상 등등. 영화에서 그 작품들 하나하나에 숨은 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모뉴멘츠 맨들 전부가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작전이 인류의 역사를 지켜내고 하느님께 경외심을 표하는 길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전쟁이 끝난 후 루즈벨트 대통령이 부대의 장이었던 프랭크(조지 클루니)에게 물어본다. “당신들의 수고는 잘 알겠지만 세월이 지나면 사람들이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겠습니까?” 세월이 30년이나 지나 프랭크는 손자와 함께 브뤼헤의 성모자상 앞에 다시 섰고 성모자상의 역사를 손자에게 들려준다. 그 때 루즈벨트의 질문이 다시금 그의 귀에 들리고 프랭크는 자신 있게 대답한다.
“네.”
[신앙으로 현대문화읽기] 영화 ‘도희야’
폭력의 속성에 대한 고발
우리는 종종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상황으로 일이 번져나가는 경우에 놓이곤 한다. 그렇게 상황이 번져나가면 처음에 일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희미해지고 단지 어려운 뒤처리만 남아 골치를 썩기 마련이다. 원인은 사라지고 결과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귀찮아 보이는 일에는 아예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게 상책이다. 하지만 어디 세상만사가 맘대로 돌아가던가? <도희야>(정주리 감독, 극영화, 한국, 2013년, 120분)에서 영남(배두나)의 경우도 꼭 그렇다.
경찰대학까지 나와 안전한 출셋길이 보장되어있던 영남은 바닷가 시골 마을 파출소장으로 좌천된다. 좌천 이유가 워낙 민감한 것이기에 그저 한 1년간 시골에서 배를 깔고 납작 엎드려 있어야 할 팔자였다. 그런데 부임 첫날 도희(김새론)를 만나면서 그만 일이 묘하게 꼬이고 만다. 도희에게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폭력의 냄새가 진하게 풍겨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도희에게서 나는 냄새를 맡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체 했다는 편이 옳을지 모르겠다.
마을의 실제적인 힘은 용하(송새벽)가 틀어쥐고 있어 누구도, 심지어 경찰관들도 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라 여긴다. 도희는 바로 용하와 재혼했다가 도망친 여인의 딸이다. 용하와 도희는 부녀 관계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도희를 돕겠다고 나선 영남의 선택은 처음부터 위험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정주리 감독은 <도희야>에서 폭력이 갖는 속성을 제대로 고발한다. 폭력의 끝에 가면 지배욕과 탐욕이 서 있고 이를 만족시키느라 무자비한 행동들이 아무런 반성 없이 동반된다. 그리고 폭력의 반대편 끝에는 잔인하게 당해야만 하는 약자가 서 있다. 김새론은 그 역할을 잘 소화해냈다. 감정 변화의 폭이라든가 사태를 파악하고 무엇인가 일을 꾸미는 표정이라든가 자기를 버리지 말아 달라며 애원하는 눈빛까지,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도희야>는 우리나라의 어두운 문제들을 제법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가정 폭력, 외국인 불법체류자의 인권, 동성애 그리고 무사 안일한 공권력의 실상까지. 그러다 보니 뒤로 갈수록 이야기가 산만해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도희의 활약으로 마지막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비록 칸 영화제에 비경쟁 부분에 출품되었지만 ‘주목할 만한 시선의 영화’로 선정되었고 프랑스 극장에서 상영한다는 소식까지 들리니 나름 성과를 거둔 셈이다. 아마 심사위원들이 영화의 색다른 결론에서 폭력에 항거하는 메시지를 읽어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재상에게 요구되었던 원칙은,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두려워하면 그에게서 폭력의 냄새를 맡아보라는 것이다. 이 원칙은 대단히 중요한데 약한 사람에겐 스스로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음을 알아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집트 재상이었던 요셉은 하느님의 사람답게 자비를 베푼 인물로 유명하다.
마을을 떠나는 영남의 차 안에서 도희는 실로 오랜만에 안심하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비오는 날 차 창문을 뿌옇게 장식하는 그녀의 입김은 마치 오랜 방황 끝에 돌아와 따뜻한 엄마의 품에 안긴 듯, 평온하게 내쉬는 안도의 입김이다. 마음이 푸근해지는 장면이었다.
[신앙으로 현대 문화 읽기] 영화 ‘스타로부터 스무 발자국’
아! 모순 가득한 우리네 인생
올해(2014년)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상은 <스타로부터 스무 발자국>(Twenty Feet from Stardom, 모건 네빌 감독, 다큐멘터리, 미국, 2013년, 91분)에 돌아갔다. 영화의 주인공은 여성 백업 가수들이다. 이들은 소속사 없이 일을 하느라 개인적인 요청에 따라 코러스를 구성한다. 그러니 어찌 개성이 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스티비 원더, 티나 터너, 브루스 스프링스틴, 스팅, 마이클 잭슨, 레이 찰스, 엘튼 존, 믹 재거 등등 실력 있는 가수들이 단골로 찾는 가수들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증명된다.
영화에 많은 백업 가수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 다섯 여가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달린 러브, 메리 클레이턴, 리사 피셔, 타타 베가, 주디스 힐이다. 한결같이 대단한 가창력과 뛰어난 곡 해석력을 가졌지만 그들이 처한 현실은 처량할 뿐이다. 자신의 처지를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독립 앨범을 내 보아도 이런저런 조건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제작사를 잘못 만나거나 얼토당토않은 스캔들에 발목이 잡히기 때문이다. 한동안 방황 끝에 깨닫는 현실은 언제나 같다. 그들의 자리는 ‘스타로부터 스무 발자국 뒤’라는 사실이다. 그중에서 달린 러브의 신세는 더욱 한심해 아예 청소부로 전업까지 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때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곡 A christma gift for you와 함께 진공청소기를 돌린다.
인생의 바닥까지 떨어진 느낌! 다섯 여가수의 독백에서 공통으로 들려오는 소리다. 영화에서는 여가수들의 탁 트인 노래들을 수시로 들려준다. 정말 잘 부르는 가수들이다. 아니 별다른 배경음악 없이 그저 이들의 백업 보이스만 들려주어도 영화의 음악 효과가 충분히 살아날 정도다. 하지만 감독이 우리에게 보여주려 하는 바는 그들의 노래 실력이 아니라 ‘모순 가득한 우리네 인생’이라 해야 옳다.
일단 백업 가수의 길에 접어들면 자기 음악을 할 수 없다. 오로지 스무 발자국 앞에서 조명을 받는 솔로 가수의 소리가 살아날 수 있도록 뒷받침만 잘해 주어야 한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처럼 인간적인 면을 갖춘 가수가 가끔씩 백업 가수를 앞으로 불러내 듀엣을 할 기회를 주지만 그야말로 가끔이다. 실력과는 무관한 출세, 잠시 머물렀다 곧 돌아가는 차가운 시선, 운이 따르지 않으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인생. 그 차가운 현실의 정 중앙에 백업 가수들이 서 있는 셈이다.
아카데미에서 이 영화에 상을 준 이유는 자명하다. 꾸밈없는 진솔한 삶을 이들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감독은 그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고 많은 인터뷰와 기록 화면들을 제시했다. 워낙 출중한 음악영화였고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들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해 지루한 줄 모르고 영화를 봤다. 처음부터 끝까지 화면에서 눈과 귀를 떼지 못했다고 하는 게 아마 바른 표현일 것이다.
보석 같은 영화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나와 같은 관객이 얼마나 있을까? <스타로부터 스무 발자국>이 독립 극장에서 벗어나는 날이 과연 올까? 하느님은 이들의 눈물을 언제쯤 닦아 주실까? 온갖 의문을 간직한 채 백업 가수들의 합창이 오늘도 이어진다. 노래 제목은 소울 곡인 Lean on me(나에게 기대세요) 였다.
[신앙으로 현대 문화 읽기] 영화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
기억으로 다가서려는 사랑
지난 10월 2~11일에 열린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았다. 심사대상인 ‘뉴 커런츠’ 분야에는 12편의 영화들이 출품되었는데, 한결같이 아시아권에서 주목받는 신예 감독들의 작품들이었다. 심사위원으로는 필자를 포함해 인도의 아쇼크 레인, 대만의 첸 류수, 독일의 데니스 베터, 그리고 심사위원장으로 헝가리의 게오르기 카르바티가 참여했다. 영화제 기간 중 일주일을 다섯 사람이 인절미처럼 붙어 다니며 영화를 보았고 여러 차례 토론을 거쳐 최우수작으로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What’s time in your world?, 사피 야즈다니안 감독, 극영화, 이란, 2014년, 101분)를 선택했다.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성격의 ‘사랑’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20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어떻게 변했을까? 파리에서 오랜만에 돌아온 골리(레일라 하타미)에게 고향은 낯선 곳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죽었고 옛집은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칠이 벗겨졌으며 역에 내려 집으로 가는 방향마저 헷갈릴 지경이다. 그런데 묘한 일이 생긴다. 액자 가게를 운영하는 파르하드(알리 모사파)가 어디선가 나타나 한사코 자신이 골리의 초등학교 동창생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그녀의 기억 속에 파르하드는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다. 두 사람의 엇갈린 기억은 영화 내내 도저히 합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기조는 사랑 이야기지만 감독은 ‘기억’에 대해서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인간은 모름지기 장소와 시간과 사람에 대한 기억의 단편들을 갖고 있지만 그 단편들을 합쳐 하나의 완성된 기억을 만들기는 결코 쉽지 않다. 파르하드는 골디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녀의 삶에 깊숙이 개입해 있었다. 그는 다정다감한 성품의 소유자라 골디 어머니의 말년을 지켰고 그 과정에서 골디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던 까닭이다. 사랑이란 그렇게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은 찾기 어렵지만 우리나라에서도 한 때 할머니가 잘 보아두었던 동네 소년을 나중에 손녀사위로 맞는 일이 허다했다. 할머니의 눈이 그만큼 매섭고 정확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놓고 보니 이란도 우리나라의 풍습과 비슷한 면이 있다.
20년간 고향을 떠나있으면서 골디의 기억은 곳곳에서 허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세월과 함께 변한 고향에서 기억의 단편을 그럴 듯하게 완성해내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감독은 왜 골디가 파리에 갔다가 돌아왔는지 일체 설명하지 않는다. 또한 그녀가 앞으로 고향에 계속 머무를지에 대해서도 속 시원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그저 시간과 장소를 부지런히 바꿔가며 그녀의 기억을 일깨울 뿐이다. 생략의 묘미를 잘 아는, 신인답지 않은 세련미가 돋보이는 영화였다.
파르하드는 각고의 노력으로 골디의 기억에 다가서려 하지만 매사에 미숙한 탓에 그녀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골디를 향한 그의 사랑이 시들려 한다. 한 때 찬란했던 사랑이 그 빛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관객에게 애틋함만 안겨주더니 감독은 결국 우리를 평온한 길로 이끌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랑도 있습니다.” 감독이 하는 말을 다섯 명 심사위원 모두 정확히 들을 수 있었다.
영화제 기간 내내 우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부산의 율리아나에게 감사를 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