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43:32-34
그들이 요셉에게
본문에서 모세는 요셉이 자기 형제들로 더불어 식사를 같이 한 사실을 기록합니다.
1. 본문 32절은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하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하고 배식하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하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입니다.
모세는 애굽사람들이 히브리 사람들과 같은 상에서 먹는 것을 계율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지독하게 꺼려하고 싫어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이 그런 것을 금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그들은 그런 생활에 젖어 살아 왔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곳을 읽어보면 자기 나라에 대한 그들의 자만심과 자부심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합니다. 그들이 히브리 사람을 그렇게 싫어한 것은 온 세상에서 자기들만이 신(神)께서 받아 주실 만큼 정결하고 거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이 자기를 경배하는 사람들에게 이방인에게서 옮아오는 모든 더러운 것을 멀리하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들은 자신을 정결하고 순결하고 바르게 보존하려는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신에 젖어 있는 사람이 이러한 특권을 주장하는 것은 헛된 것이고 순수하지 못한 것이 자기들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미신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 받는 영향 중에 하나는 소위 사악하다는 이유로 모든 사람을 경멸하는 허망한 자부심입니다. 그렇다면 애굽 사람들이 요셉과 따로 앉는 것이 요셉이 부정하다고 생각해서 인가? 입니다.
만일 이런 해석을 맞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엉터리없는 신앙을 높이 올리다 못해 자기들의 지도자에게 치욕적인 짐을 지운 것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이 자기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따로 앉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초청된 손님들이긴 해도 그들이 꺼리는 사람들과 그가 같이 앉으면 그들이 거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특별한 지시를 요셉이 내렸을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요셉은 자기 권위를 손상시키지도 않고 자기 형제들과 애굽인들이 섞이지 않게 앉도록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매우 꺼려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 때문에 왕은 요셉을 자기 왕국 최고 직권자로 임명하고 공포하는 자리에서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기까지 한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당시에 하나님의 교회가 이교도들에게 대단히 멸시 당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별로 놀랄만한 일이 못됩니다.
현대에도 비슷한 경우를 당해야 하는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보존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반면에 사람들로부터가 아니라 악으로부터 이방인이 된 우리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선택된 자녀들을 성별 하시어서 그들이 동료 인간들 중에 살면서도 악을 분간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 번 시험에 빠져들더라도 경건한 성례 전에 참석함으로써 그들은 다시 치유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두 가지 점을 여기에서 강조하고 가야하겠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우리 믿음의 순수성에 대해서 확고한 이해와 신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너무 지나치거나 열매 없는 결백성은 우리 주님께 대한 믿음에서 제거해 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불경건한 사람을 지나치게 혐오하거나 그들과 함께 먹지도 말라는 지나친 계 율이 아니라 그들과 똑같은 멍에를 매지 않도록, 또 우리가 그들에게 복종하게 되는 그런 관계를 피하라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앞서도 우리가 언급한 바를 더욱 확실하게 해줍니다. 즉 어떤 사람들이 잘못 상상하고 있듯이 '히브리'라는 이름은 강을 건너왔다는 데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조상 헤벨(Heber) 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또는 소수의 적은 집안, 곧 멀리 떨어져 있으나 애굽에서 넉넉히 지내며 그래서 결국 애굽 대중들과는 구별되는 그런 집안이라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2. 본문 33-34절은 "(33) 그들이 요셉의 앞에 앉되 그 장유의 차서 대로 앉히운 바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34) 요셉이 자기 식물로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오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입니다.
야곱의 아들들 중에 네 명은 종이었던 여자의 몸에서 난 아들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이가 많았습니다. 오히려 주인이었던 여자의 몸에서 난 아들들이 그들보다 어렸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의 법에 의하면 신분을 초월하여 나이 순서대로 항시 불리움을 받고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대접에 사실상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성경에 '여자 종의 몸에서 난 자는 자유로운 여인의 몸에서 난 자와 같은 상속자가 될 수 없다' 고 기록된 바가 있는데 어찌 그렇게 대접할 수 있겠는가 하고 질문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사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후사로 삼지 않았습니다. 에서도 장자의 명분을 빼앗긴 것이 사실입니다.
야곱은 아들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굉장히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가장 합리적이고 좋은 방법으로 나이 순서대로 그들의 분깃을 정하는 방법을 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모세의 의도는 베냐민이 나이는 형제 중 가장 어렸지만 영광은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가장 어렸기 때문에 요셉도 그 자리에서 많은 사랑의 표시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의 의도는 아무도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애의 감정이 그가 하려고 마음 먹은 굳굳한 자세에 비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는 폭발하는 감정을 주체 못하고 독방에 뛰어 들어가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43장을 마감하면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초대되어 대접받고 누린 식사가 평상시 그들에게서 볼 수 없는 굉장히 호화롭고 후하며 즐거운 만찬이 되었던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솨카르)라는 말은 '즐거웠다'라는 뜻이 있는 말로서 그들이 평상시에는 포도주를 항상 마시지 않았으나 그 날만은 관대하게 베풀어진 풍족하고 호화로운 식사를 야곱의 아들들에게 대접한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대하고 자유롭다고 하는 것은 방종스런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정꾼들이 자기들의 잘못에 대해 이 믿음의 조상들을 핑계대서는 안됩니다.
한편으로 자유스럽고 관대하고 즐거웠지만 한편으로는 점잖고 예의 바르고 정중한 그런 식사였습니다. 사실 이 말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잘못하면 9장21절에서와 비슷한 경우에 그 말의 좋지 못한 면만을 우리가 취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이야기에서 모세가 우리에게 교훈하려고 하는 것은 명확합니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음식물은 우리 몸에 영양 공급을 위한 최소한 검소한 것이면 충분할 것이며 음식물 남용을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이 장면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적당하고 알맞은 사용이란 최소한의 것만을 취하는 것보다는 좀 더 넓고 깊은 뜻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괴변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음식물은 영양분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맛과 향취, 향기 등 우리가 즐겨야 하는 다른 면도 있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즐거움과 기쁨을 위해서도 아주 세세한 부분에서까지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그분의 그러한 자비로우심은 시편 104편 15절에 보는 바와 같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의 선물을 낭비하거나 허비하지 않아야 할 것을 우리에게 엄숙하게 요구하고 계신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우리 육체의 즐거움을 따라 사는 것이 얼마나 걷잡을 수 없이 방종으로 치달리게 되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대개 풍족한 데에 처하여 살게 되면 사람들은 지나치게 방종스럽게 되며 반대로 빈궁에 거하게 되면 얼마나 보기 싫게 참을성 없는 모습으로 변하게 되는가? 를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접하게 될 때 우리는 바울의 태도를 다시 한번 생각하고 모범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풍족하게 될 때 극히 조심해서 화려나 사치로 치닫게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반대로 가난에 처해서도 모든 것을 가진 자와 같이 가난을 대해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너무 영리해서 필요 없는 것에도 갖가지 그럴 듯한 명색이 붙여질 것이다. 그러므로 최소한의 필요한 것 말고는 우리가 사용해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일러준 바대로 부지런히 따르는 방법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3장 14절에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음식물이란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의 손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경건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받은 음식물을 어느 정도 사용하는 것이 가장 하나님의 뜻에 맞게 쓰는 것인가를 항상 깨어 있는 마음으로 가늠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