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호 목사
이스라엘은 지금 포로생활 중입니다. 그들은 세계의 중심지인 바벨론의 한 복판에 와있습니다. 그곳 건물의 웅장함과 하늘을 치솟은 신전의 규모는 그들의 눈을 의심케 했습니다. 그 벽의 두께만 해도 10미터 이상이니 그 규모가 엄청납니다. 거기에 비하면 자신들이 그렇게 자랑하던 예루살렘 성전은 조그만 헛간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그들은 에루살렘을 시온이라고 하며 ‘세계의 중심이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들이 얼마나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 했던가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들 중에는 “야훼는 왜소하다, 그는 바벨론 신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며 배교하는 사람이 늘었고 이방 신들을 따라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은 시온-예루살렘에나 계시지 지금 여기는 계시지 않다’며,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하여 버림받았다. 우리는 지금 그 죄값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고 합니다. 이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땅 끝에서 불러 내셨다”고 하며 용기를 북돋웁니다.
내가 너를 선택하였고 버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니 떨지 말아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사 41,10)
이 하나님의 말씀이 올 한해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새해를 맞이하며 몇 가지를 여러분에게 부탁 드리겠습니다.
1. 여러분에게 분노를 일으켰던 모든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감정들은 많은 부분 용서하지 못하는데서 옵니다. 용서는 남을 위하여 하는 것으로 아는데 사실 용서하지 못하는 감정으로 망가지고 이지러지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분노의 감정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망쳐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 안에 분노가 가득 찼을 때, 하나님이 보입니까? 이웃이 느껴집니까? 내 마음 안에 부글부글 끓는 기운이 가득 찼을 때,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섬기고 그들을 위하고...."
이런 선한 것들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런 분노의 감정들이 있으면 예배, 선교, 봉사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물론 여러분에게 분노를 일으키는 요인은 분명히 있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아주 비인간적이고 모욕적인 상황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참아 넘긴다는 것이 오히려 비겁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분노를 가지고 어떤 결정을 내리면 지극히 잘못되기 쉽습니다. 그것은 남산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분풀이하는 식이 됩니다. 또 다른 억압을 만들고 또 다른 폭력을 발생시키는 악순환을 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기를 향해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환호하는 군중들을 위해 기도 하셨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배신의 극치입니다.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고, 그들의 빵을 해결해 주시고, 그들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자들과 싸워가며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그들을 위해서 억울한 십자가를 지시는데 막상 군중들은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외칩니다. 얼마나 분노가 치미는 상황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니다. 이 위대한 용서에 힘입어 오늘 우리들의 삶이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피해 가시려고 도망 치셨거나 자기에게 못박으라고 외쳐대는 군중을 향하여 맞받아 분노를 터뜨리셨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느 정치범들이 졌던 평범한 형틀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2. 감사하는 한해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와 불평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불평하는 사람에게는 자꾸 불평할 거리가 쌓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감사할 거리가 쌓입니다.
백정례 집사님의 아드님이 학생운동을 하다가 수배 생활을 했습니다. 5년간 집에도 못 들어오고 도망 다니다가 드디어 잡혀서 구속되었습니다. 백집사님과 제가 함께 구치소로 면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백집사님이 넘어셔서 팔이 부러져 깁스를 했습니다. 게다가 남편은 만성 해소로 병원에 덜컹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업친데 덥친 상황입니다. 제가 “집사님,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했더니 “목사님 위로는 뭔 놈의 위로요! 얼마나 감사하요?” 하시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 “뭐가 그리 감사합니까?”했더니 그 대답이 정말 말이 되더라구요.
“아들이 수배 당해 살았는지 죽었는지, 먹었는지 굶었는지도 모른 채, 얼마나 속을 썩였는데 국가에서 붙잡아 놓고 잘 먹여 주니 안심이고, 다리가 부러졌으면 면회도 못오고 안타까와할 텐데 다행이도 팔이 부러져서 마음대로 다닐 수 있게 해주시니 감사하고, 영감이 집에 있으면, 뒤치닥거리 하느라 양쪽으로 바빴을 텐데 병원에 편하게 입원시켜 주시니 한시름 덜게 되어 감사하기만 하요.”
뜻 밖에 대답에 당황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사물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가 문제이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결국 그는 웅덩이에 갇히게 되고 애굽에 팔려갑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집에 종이 된데다가 성 추행범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요셉의 생애에는 계속되는 실패와 절망, 형제들의 배신과 낮선 땅에서의 누명과 억울함의 연속이었습니다. 만약 그 분노를 요셉이 신앙으로 극복하지 못했다면 애굽의 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셉이 마침내 그 형님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기근이 들어 식량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 넘기기는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 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서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창 45, 5-8)
씨티오브 조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대사의 한부분입니다. 일을 해결하는 세가지 방식이 있는데 첫째는 도피요, 둘째는 방관이요, 셋째는 극복의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그것을 도피하는 것은 가장 이기적인 해결방식입니다. 방관하고 그냥 눈감고 지나가는 것은 비겁함입니다. 셋째의 방식은 아주 신앙적인 방법의 해결인데 그것은 극복하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3월에 큰 데모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유신체제의 절정기여서 전교생이 다 나와 데모를 하고 두 달간 휴교를 했습니다. 학교에는 군인들이 들어오고 학교를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제 후배, 동료들이 구속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저는 공포감을 느끼기도 했고, 한 때 우리나라가 참 싫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필이면 왜 이렇게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은 나라에 저를 태어나게 하셔서 제 가슴이 견디지 못하게 하십니까?”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가 정의감이 넘치는 제게 무척 심각한 문제였고 오랜 동안 저의 기도 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제게 문득 깨달음이 왔습니다. 이 문제 많은 땅에 많은 문제 거리를 보여주시는 것이야말로 바로 내가 해야 할일을 보여주시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런 고민이 없었다면 저는 지금 제가 성장할 때 가졌던 신앙처럼 아주 보수적인 목회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극복이라는 것은 그 모순을 피하지 않고 그것을 뚫고 크게 보아 그 모순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풀이하듯 당장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랜 시간과 준비가 필요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3. 어떤 일이 있어도 희망을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데스타 못가에 38년 된 환자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의 전 생애에 가까운 시간일지 모릅니다. 한 1,2년 앓았다면 투병해 볼만도 하겠으나 38년을 앓았으니 이젠 도저히 가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38년 동안 단 하루도 건강해 보지 못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주위 사람도 고생이고, 남도 고생이니 차라리 조용히 눈을 감으라고 권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람은 38년간 낫고자 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저 같았으면 “예수님, 제가 안해 본 방법이 없습니다. 제가 38년간 앓아온 몸입니다. 차라리 하실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이제 조용히 제 삶을 끝내게 해주십시오.”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병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 못에다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38년을 앓아 온 환자이지만 아직 낫고자 하는 소망을 버려본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까지도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내가 먼저 내려가 꼭 낫고야 말겠다는 의지에 가득차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상황이 닥쳐도 도망가거나 희망을 버리지 맙시다. 실패했다고 끝장이 아닙니다. 꿈을 버리는 순간이 끝입니다. 이스라엘이 절망의 상황 포로 생활 가운데도 소망을 가지고 있는 한 그들에게 해결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늘 본문에서 노래합니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
내가 광야에는 백향목과 아카시아와
화석류와 돌올리브 나무를 심고
사막에는 잣나무와 소나무와 회양목을
함께 심겠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주께서 이일을 몸소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것을 창조 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축복의 말씀이 올 한해 여러분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