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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39편 3절-6절: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3절: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다윗의 마음 속에서 왜 불이 올라왔을까? 악한 자들이 다윗을 헐뜯으니까 그들이 괘씸해서 마음 속에서 불이 올라온 것인가, 아니면 다윗 자기 자신을 향해서 올라오는 불인가?
사무엘상에 보면 어떤 여자가 어떤 여자에게 자식이 없다고 놀렸느냐? 브닌나라고 하는 여자가 한나에게 자식이 없다고 하면서 옆에서 공세를 했다. 그 때 한나 속에서 불이 안 올라오겠느냐? ‘그래, 나는 자식도 없다. 어쩔래?’ 라고 욕을 하면서 ‘너에게는 자식이 많이 있지만 바보 같은 자식도 자식이냐?’ 이런 불이 올라왔을까, 아니면 옆에서 브닌나가 쿡쿡 쥐어박을 때 자식을 못 낳는 한나 자신을 향해서 불이 일어났을까, 아니면 자식을 주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서 불이 일어났을까?
한나의 기도의 방향이 브닌나를 의식하면서 ‘하나님, 나에게 자식을 주셔서 브닌나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했을까, 아니면 ‘그 자식들을 하나님께서 다 죽여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했을까, 아니면 브닌나가 한나에게 자식이 없다고 공세를 할 때 한나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당시에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은 깡패 같은 놈들이었고, 엘리 제사장도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지 못했고, 브닌나의 자식들도 하나님께 기쁨을 돌리는 자식이 없었고, 이스라엘 전체적으로도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사람이 없었고, 한나 자신에게도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자식을 한나 자기에게 달라고 기도를 했을까?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육신의 자식을 안 주더라도 신앙의 자식은 줄 수도 있다. 사도바울이 누구를 아들이라고 했느냐? 디모데를 자기 아들이라고 한 것처럼 믿음의 자식, 신앙의 자식은 줄 수도 있고, 만들 수도 있는 거다. 그래서 한나가 자식을 달라고 한 기도가 단순히 육신의 아들을 의식하면서 ‘육신의 아들을 주시면 내가 믿음으로 키우겠습니다’ 이런 기도가 아니다.
오늘날 세상이 어떠냐? 자식을 많이 낳으면 키우기 힘드니까 딱 하나만 낳아서 훌륭하게 키우겠다는 작정을 하고 하나만 낳고서 뱃속의 아이를 다 죽여 버린다. 그러면 그 하나가 부모 자기의 생각대로 훌륭하게 되는 거냐? 어림도 없는 소리다. 자식을 하나만 낳아서 훌륭하게 잘 키우겠다는 것은 세상에서 일등자, 특등자로 키우겠다는 것인데, 그 자식이 특등자로 자랐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겠느냐, 그만큼 교만하겠느냐? 망할 자식이 되는 거다. 이는 곧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올려놓는 것과 다름이 없는 거다. 그런데 부모들이 이걸 모른다.
학생이 머리가 영리하고 공부를 잘 하면 국가에서 불러다 돈도 주고 공부를 시킨다. 이런 자식은 세상적으로 보면 모든 사람들에게 부러운 자식이 되겠지만 이게 누구 앞에 훌륭이냐? 하나님 앞에 훌륭이냐, 세상 앞에 훌륭이냐? 세상 앞이다. 그러니까 영의 눈으로 보면 세상의 제물이다. 세상 앞에 바쳐졌다. 세상은 불에 탄다. 하나님이 없이 올라간 것은 다 심판감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이니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어야 한다. 말씀으로 자기를 태워버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뺑뺑 돌리면서 이 사람을 다윗처럼 세울 수도 있고, 다니엘처럼 세울 수도 있고, 요셉처럼 세울 수도 있는 거다. 그런데 예수 잘 믿으면 세상에서 제일이 된다? 뭔가 착각을 하고 있다. 이치를 모르고 있다. 그래서 부모 된 내 입장에서는 우리 애들을 세상의 제물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제물을 만들려고 한다.
예수 믿는 집의 자식이 주일날 주일도 안 지키고 공부하러 학교에 가면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 애들은 주일에는 학교에 안 보냈다. 물론 유치원도 안 다녔고, 학원에 다니지 않았어도 공부를 곧 잘 했고, 지금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세상은 안 알아줄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믿는 자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신다. 그런데 내가 아는 목사 사모는 주일날 목사 몰래 딸을 임용고시 시험을 치러 보내서 지금 학교 선생이 되었다. 이건 신앙 믿음은 죽은 거다. 한 번 죽으면 살아나지 못한다. 그 사상이 죽은 건지, 산 거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아날 수 없는 거다.
오늘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향해서 어떤 식으로든지 격동케 하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돈 많은 사람이 와서 격동을 시키는 건지, 사회적으로 명예 영광자가 와서 격동을 시키는 건지, 말로 사람을 팍팍 쑤시는 건지? 여기에 지면 안 된다. 그런 것들이 와서 격동을 시킬 때 ‘썩고 불타질 세상은 너희들이 다 가져라. 나는 세상에서 가난하고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천국만은 너희들에게 빼앗기지 않는다’ 이렇게 나와야 한다. 이게 성도요,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백성이다. 하나님의 자식이라면 자기 아버지만큼은 안 빼앗겨야지. 안 그러냐?
4절: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3절에서 ‘나의 혀로 말하기를’이라고 한 후에 본 4절의 기도를 했다. 사람마다 자기 일생의 종말이 있는 건데, 우리 모두 자기의 종말이 있는 건데 너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 것 같으냐? 자기 개인의 종말에 대해 생각을 해 본 일이 있느냐? 아니면 ‘나는 젊으니까 앞으로 내 앞길이 어떠리라’ 하면서 천국을 펼쳐놓고 살고 있느냐?
‘내가 현재 이런 신앙정신으로 나가면 내 종말이 안 좋겠는데?’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느냐? ‘내가 이렇게 열심히 뛰면 나의 종말은 햇빛이 조금 비취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느냐? ‘주일날도 구워먹고 일하러 가는데 내가 이렇게 가다가는 필경은 하나님이 가만 안 두지?’ 이렇게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느냐?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생각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악한 자가 ‘편안하다. 편안하다’ 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식으로 나가다가는 자기가 생각지 않은 때에 자기 눈앞에 사정없이 벼락불이 떨어진다.
그 사건은 무엇이 될 런지 모른다. 무서운 거다. 두려운 거다. 병이 들어서 병원침대에서 링거를 달고, 산소통을 달고 누워있을 런지, 지팡이를 잡고 머리를 흔들고 손발을 흔들면서 다닐 런지, 치매에 걸려서 집을 나가 밤새도록 돌아다니게 될 런지, 노망이 들어서 벽에 잔뜩 똥칠을 해놓고 그것을 훑어먹고 있을 런지, 자식들을 다 불러 모아놓고 ‘예수 잘 믿고 천국에서 다 같이 만나자’ 라는 유언을 하고 눈을 감을 런지?
이를 득득 갈면서 눈을 부라리면서 원수를 못 갚고 가는 게 원통하다고 하며 악을 바락바락 쓰면서 죽을 런지, 저승사자가 자기를 잡으러 왔다고 하며 안 가려고 버티며 용을 쓸 런지, 기도하면서 밤에 잠자는 그 길로 조용히 갈 런지, 순교를 당해서 갈 런지? 오늘 밤이 나의 끝이 될 런지, 10년 후가 나의 끝이 될 런지, 20년 후가 나의 끝이 될 런지? 나의 일생이 얼마나 길 런지, 얼마나 짧을 런지? 자기의 종말에 대해 생각을 해 본 일이 있느냐?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인간은 연약한 존재인데, 이 연약함에는 육체적 연약함이 있다. 이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자기의 육체가 아무리 건강해도 그 건강을 장담하지 말아라. 건강하다고 하는 그 육체는 살짝만 쥐어박아도 고통이 온다. 젊었을 때는 좀 세게 받혀도 살에 멍이 안 들더니 나이 들어서는 약하게 받혔는데도 멍이 드는 걸 본다. 그만큼 피의 순환이 활기차지 못하고, 약하다는 거고, 세포조직이 활발하지 않다는 거다. 인간의 육체가 얼마나 연약한지 칼을 살짝만 대도 피가 나온다. 연약하다는 증거다. 그러니 인간은 하나님 말씀에 의지해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우리는 한 해, 두 해, 여러 해를 살면서 자기에게 무엇이 입혀졌는지, 살아나오면서 어떤 정신으로 살았는지를 심사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다. 지나간 과거를 생각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그러니까 자기가 과거를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소원 목적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잘못 됐으면 현재에서 빨리 바꿔야 한다.
자기가 과거에 부잣집에서 편히 살아왔고, 아직도 고생 안 하고 잘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미래적으로 바닥으로 헤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느냐? 우리교회 교인들 모두는 자기가 바닥을 헤매는 걸 염두에 두고 신앙 믿음의 실력을 쌓아라. 자기의 마음 정신을 쌓아라. 자기의 실력성장을 위해서 일부러 고생을 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그러나 일부러 고생을 하지는 않더라도 그 어떤 고생도 능히 견딜 수 있는 사람으로 자기의 속사람을 잘 가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런 사람도 만나보고, 저런 사람도 만나보면서 겪어야 한다. 아무리 신앙 믿음이 있다고 해도 겪어야 실력이 느는 거다. 겪으면서 고쳐지면서 실력자로 나오는 사람이 참 복된 사람이다. 그래서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건 환경과 대립이 있으면 안 된다. 대립이 있으면 자기 스스로를 고통을 받는 자로 만든다. 자기가 병이 들어버린다.
한 살부터 스무 살까지는 부모 애먹이고, 노느라고 시간 다 보내고, 스물한 살부터 서른 살까지는 뭘 배운다고 시간 다 보내고, 서른한 살부터 쉰 살까지는 돈 번다고 시간 다 보내고, 예순한 살부터 일흔 살까지는 노느라고 시간 다 보낸다면 이걸 생각을 해 봐라. 태어나서 죽음의 선을 넘기까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이 얼마나 입혀졌겠느냐?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이 세상을 살면서 진리노선으로 계속 나가다가 순간적으로 비진리로 나갔더라도 재빨리 진리 안으로 들어와서 계속 진리로 나가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들쑥날쑥한 것이 몇 번이냐? 그런가 하면 비진리인 줄을 모른 채 비진리의 길을 계속 가다가 어떤 이유로 해서 순간적으로 진리로 들어왔다가 세상이 좋아서 다시 또 비진리로 나가서 그 길로 인생을 마친 사람은 없을까? 그리고 진리인지 비진리인지, 넓은 길인지 좁은 길인지 알지도 못한 채 힘만 쓰고 애만 쓰다가 죽음의 고개를 넘어간 자는 없을까?
인간 자기는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니 자기를 잘 살펴서 자기의 일생을 하나님 앞에서 잘 잡아가야 한다. 나를 만드시고 예수 믿게 해서 진리 길 생명 길을 걷도록 인도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 나는 현재 어떤 자로 살고 있을까?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요 느낌의 존재이기 때문에 현재 자기가 몇 점짜리 인생으로 살고 있는지를 느껴야 한다.
5절: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자기의 손바닥 넓이가 얼마만큼 되느냐? 자기 손바닥의 넓이가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한 눈에 다 보이느냐? 자기 손바닥 넓이를 자기 눈으로 한꺼번에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손바닥도 마찬가지다. 모두 한 눈으로 본다. 그러니까 자기의 일생은 아무리 길어봤자 자기의 손으로 한 뼘에 불과한 거다.
한국에서 미국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주공간으로 나가서 보면 미국도 보이고, 한국도 보이고, 온 세계가 다 보인다. 우주공간에서 보면 지구에서 제일 큰 땅이라도 손바닥만 하게 보인다. 그리고 지구에서 제일 큰 빌딩이나 제일 큰 예배당도 우주공간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축구공만 하게 보이다가, 탁구공만 하게 보이다가, 하나의 점이 되고, 계속 더 나가서 보면 그도 저도 안 보인다. 지구 안에는 분명히 큰 건물도 있고 잘난 사람도 많은데 우주에서 보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우주공간에서 볼 때 탁구공만 하게 보이는 지구 안에 지구에 있는 집과 사람을 다 그려넣는다면 얼마만한 크기로 그려야 다 집어넣을 수 있을까? 표시를 하려고 해도 표시를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지구가 탁구공만 하게 보이는 우주공간보다 더 먼 곳에서 지구를 본다면 아예 보이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영원하고도 무한한 신령계의 시간 안에(물론 이곳은 시간이 없는 곳이지만) 지구의 나이인 6천 년을 표시한다고 하면 어떻게 표시가 될까? 아예 표시가 안 된다. 그리고 표시가 안 되는 여기에 인간의 자기 나이 6, 70년, 100년은 어떻게 표시가 되겠느냐? 바늘 끝으로 콕 찍어서 표시를 한다고 해도 너무 크게 표시가 될 거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는 없는 것과 같다. 손 한 뼘짜리 인생, 숨 한 번의 인생이다. 사람은 숨을 내 쉰 후에 들이키지를 못하면 죽는 숨 한 번의 인생인데, 인간 자기가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콧대가 센 거냐?
나의 일생을 세상목적으로 산 것을 다 빼버리고, 잠자는 시간은 안 믿었을 테니까 이것도 다 빼버리고, 노는 시간도 다 빼버리고, 세상 공부한 시간도 다 빼버리고 나면 주님 닮은 나의 실상이 몇 살짜리 정도로 자랐을까? 기형아처럼 되어있지는 않을까? 우리는 자신을 항상 생각을 해 봐야 한다. 아무리 자신을 생각을 해 봐도 내가 남보다 잘했다고 하는 것일지라도 내가 잘나서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것을 이용하고 활용하고 도움을 받은 것밖에 없다. 세상 모든 인간은 자기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도움을 받고 산 것밖에 없지 내가 잘나서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걸 알아야 한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이런 정신을 가져야 한다. 이게 겸손한 거다. 하나님을 향해서 자라갈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이거 하라. 저거 하라’ 하고 심부름을 시키면 ‘예’ 라고 할 것뿐이다. 우리는 다 주님의 종이다. 수종들 자들이다. 어떤 면으로든 수종들 자들이다. 천국백성이라면 천국백성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 교인은 교회를 위해서 살아야지. 교회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지. 이런 삶이 아니라면 안 믿는 사람이 사는 것과 똑같다.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사람마다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뭐 뿐이라? 허사뿐이라. 세상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보고 든든히 선 사람이라고 하느냐? 어떤 사람을 보고 ‘아, 저 사람은 짱짱하구나. 든든하구나’ 라고 하느냐? 평생 일을 안 해도 먹고 입고 할 만큼 쌓아놓았으면 ‘저 사람은 든든하다’ 라고 한다. 또 자식이 국가의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 ‘저 집은 든든하다’ 라고 한다.
보통 보면 사업에 성공해서 노후대책도 마련해 놓고, 자식들도 건강하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하면 그 사람을 든든하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어떤 사람을 든든히 섰다고 보느냐?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이 보는 눈을 가지고 든든하다고 본다면 그 차원은 안 믿는 사람들이 보는 눈과 똑같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은 후에 세상 것이 자기에게 풍부하게 주어졌다면 든든한 거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보통 이렇게 본다. 그런데 진리성도 다윗은 이런 저런 사람들이 든든히 섰다고 하는 그 모든 것이 진실로 허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허사’가 뭐냐? 없어질 것을 잔뜩 마련한 거다. ‘허사’란 없어질 것을 목적하며 사는 것, 없어질 것을 이뤄놓은 것을 말한다. 헛 일을 해 놓은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허사’란 헛 노력이고 헛 사는 것을 말한다. 불에 타질 것에 소원 목적을 두었거나, 불에 타질 것에 은근히 등을 기대고 누리며 살아왔다면 이것은 허사뿐이라. 네가 이런 사고방식으로 일생을 살아왔고, 이런 사고방식으로 신앙하고 왔다면 너는 진실로 헛 산 거다. 헛 인생이다. 헛 믿었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지 않았느냐? 그냥 교회만 다니는 사람이 있느냐?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기 위해서, 깨닫기 위해서 예배에 안 빠지고, 깨달은 말씀을 하나라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왔다면 옳은 교인이다. 바로 산 교인이다. 그런데 교인이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있느냐? 궁극교회 교인이기 때문에 다른 교회는 갈 수 없고 해서 궁극교회로 나오는 사람이 있느냐? 우리는 속에 든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6절: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각 사람이 그림자같이 다닌다고 한다. 그림자가 무엇이냐? 그림자는 실물이 아니라 실물의 모양을 닮은 허상이다. 실물이 어떤 색상의 옷을 입어도 그림자의 색상은 항상 같다. 그림자는 자기 그림자일지라도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냄새도 없고, 아무 정신이나 마음이나 생각이나 생명도 없다. 그림자는 불에 타지도 않는다. 그림자는 실물이 없어지면 그림자도 없어진다. 그림자는 참으로 신비롭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그림자를 만들어 놓았을까? 과학적으로 그림자는 왜 생긴다고 하느냐? 빛이 있으면 생긴다. 빛이 있는데도 아무 것도 없으면 그림자가 생기느냐? 뭔가 물체가 있어야 그림자가 생긴다. 그러면 해라고 하는 물체 뒤에 그림자가 생기느냐? 안 생긴다. 발광체에는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는 빛이 있어야 실물이 움직이는 대로 같이 움직인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어지고, 실물이 움직여도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다. 그리고 물체는 가만히 있어도 빛의 방향에 따라 그림자가 길어졌다 짧아졌다 한다. 빛의 방향에 따라 그림자가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한다. 세상만사를 신앙 믿음적으로, 이치 면으로 생각을 해 보면 깨달을 게 많다. 우리는 신앙이치 면에서 깨닫는 수밖에 없다.
그림자는 다니는 소리도 없고, 그림자가 지나간 후에 지나갔다는 아무 표식도 없다. 그리고 그림자는 하늘로는 다니지 못하고 땅으로만 다닌다. 이 그림자는 참으로 희한한 놈이다. 참으로 신비로운 놈이고 허깨비 같은 놈이다. 사람도 그림자 같은 자가 있어서 이런 사람과는 대화도 못하고, 사귀지도 못하고, 이 자가 어떤 사람인지 남들이 알 수도 없다. 우리는 이런 존재로 살면 안 된다.
‘헛된 일에 분요하며.’ ‘분요’가 뭐냐? 눈코 뜰 사이가 없이 바쁘고 소란스러운 것을 말한다. 사람들이 그림자같이 다닌다는 것은 헛된 일을 한다는 말이고, 가치 없는 일을 한다는 말이고, 생명이 없는 일을 한다는 말이고, 결국은 다 버리고 갈 것에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고,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지으신 창조의 목적이 없이 산다는 말이다. 이것이 헛된 일에 분요한 거다.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이방 세상 사람들은 얼마나 바쁜지 천하를 다 얻으려고 동서남북으로 뛰어다니는데,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잠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뛰어다닌다. 얼마나 분요한지 모른다. 그러다가 결국은 어떻게 되느냐?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자기가 영원히 평안하게 살 것처럼 밤낮으로 동서남북을 분주하게 뛰어다녀서 재물을 쌓아놓았는데 그러던 자기가 죽고 나면 그것을 누가 다 가져가겠느냐?
세상의 모든 물질은 인간 자기의 것이 아니다. 죽으면 못 가져간다. 이게 자기 것이 아니라는 증거다. 그러니까 쌓아놓지 말고 자타의 이룰구원에 부지런히 써라. 이게 자기의 노후대책이다. 자기가 벌어서 이 세상에 잔뜩 쌓아놓으면 자식이 그 쌓아놓은 것에 더 올릴 것 같으냐? 아니다. 쌓아놓은 그걸 가지고 먹고 마시는데 다 쓴다. 이렇게 되면 이 자식의 정신이 어떻게 되겠느냐? 그리고 이 자식의 자식은 어떻게 되겠느냐? 기가 막힌 인생이 되는 거다.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려고 하지 말고 예수 믿으면서 멋있게 사는 정신을 자식에게 집어넣어라. 이게 교육이다.
세상이 나에게 있고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전부 사용하여 부지런히 인인 연관관계에서 이룰구원을 잘 이루고 가라. 쌓아놓지 말아라. 세상에는 도둑이 있는 곳이고, 사단 마귀의 유혹이 있는 곳이고, 죄와 고통과 죽음이 있는 곳이다. 이런 세상을 욕심내다가 하나님의 미움을 사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연수가 다할 때까지 진리정신 사상으로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되어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난 실상이 있어야 한다.
우리 속에 사망적, 세상적, 육적으로 살고자 하는 정신이 좀벌레처럼 들어와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날 것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간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없는 마치 그림자 같은 삶이요, 자기 일생은 헛 사는 인생이 되고 만다. 그림자가 실물을 따라 움직여서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게 뭐냐? 그림자처럼 살지 말아라.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