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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의 천사에게(12)
말씀: 계 3:14-22. 2024년 3월 17일 일요일 오전 11시.
이제 일곱 교회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입니다. 이전 교회들은 지역 이름을 따라 그 지역에 있는 교회였지만 이 교회는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가 아니고 “라오디게아에 있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교회”도 아니고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라고 합니다. 모든 지역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사람들에게 있고 교회의 주체, 권리가 사람들에게 있는 교회입니다.
이는 오늘날 현대 교회의 모습입니다.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 부루기아의 수도이며 골로새에서 서쪽으로 16마일, 에베소에서 100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습니다. 그리스의 알렉산더가 죽고 그의 수하에 있던 장군 ‘셀루시데’가 이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셀루시데 왕가의 안티오쿠스 2세가 자기 부인 ‘LAODICE’의 이름을 따서 부른 도시가 ‘라오디게아’입니다.
라오디게아는 상업적으로 부유한 도시였고 특히 히에라볼리(Hieropolis)에서 흘러내리는 온천물로 유명합니다. 이 온천은 질병 치료에 탁월하다는 소문으로 많은 병자들이 모여 들었고 특히 이곳은 귀와 눈을 치료하는 ‘콜로니온’이란 특효약으로 의료관광 도시로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히에라볼리에서 솟아난 뜨거운 온천은 라오디게아에 흘러 올 즈음에는 그 온도가 뜨겁지도 차지도 않는 미지근한 물이 되었습니다. 이곳 교회의 특징이 “뜨겁지도 차지도 않다”고 책망하신 데는 이런 지리적배경도 있습니다. 교회사에 적용할 때 라오디게아 교회는 1881년부터 지금 이 시대를 포함하여 주님이 오실 때까지를 말합니다.
14절입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 [아멘]이요,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이요, [하나님]의 창조를 시작한 자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계3:14) 앞서 언급된 여섯 교회와의 차이가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라오디게아’란 뜻이 ‘사람들의 권리’(시민의 권리)란 뜻입니다.
지금은 인권, 인본주의로 대표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사람들의 교회, 하나님의 권리, 주권이 아닌 사람들의 권리입니다. 우리는 온통 ‘권리’란 말을 듣고 살고 있습니다. 인권, 여권, 시민권, 노동자의 권리, 교권, 학생 권, 장애자의 권리는 물론이고 “범죄자에게도 인권은 있다.”, “피의자의 인권” 등 인권을 강조합니다. 이 시대는 인권이란 말이 다른 모든 가치를 압도합니다. 이런 사상, 시대정신이 교회 내에도 들어와 마치 그것이 성경적인 진리요 교리인 것처럼 퍼져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에는 ‘인권’(human rights)이 ‘주권’(Lordship)을 능가하는 교회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쓰도록 하셨습니다. “아멘이요,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이요, 하나님의 창조를 시작한 자가 이것들을 말하노라.”(14). 주님은 이 교회에 자신을 “아멘이요”라고 계시하십니다. 아멘의 사전적인 뜻은 “진실로, 참으로, 그렇게 될어지다.”란 뜻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마지막에 “아멘”이라고 합니다.
기도한 내용이 “verily, truly 그대로 그렇게 될지어다.”란 말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매우 자주 사용하신 표현입니다. '진실로'(verily) 또는 '진실로, 진실로'(Verily, verily)란 말이 바로 아멘이란 뜻입니다. 아멘은 단언할 때 씁니다. “진실로”라고 시작하신 주님의 말씀은 다른 말씀들보다 훨씬 더 강도가 강하며, 단정적입니다.
아멘은 동의할 때 씁니다. 성경을 읽을 때, 기도할 때, 찬송할 때, 설교를 들을 때 여러분이 “아멘”하는 것은 그 말씀에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설교시간 내내 단 한마디도 아멘! 하지 않는 사람은 “당신 설교에 전혀 동의할 수 없소!”란 무언의 표시이며, 항의입니다. 반면에 뜻도 없이 진리의 말씀도 아닌데 아무 때나 “아멘!”을 연발하며 구호처럼 외치는 것은 망령된 행실입니다.
또 아멘은 청원할 때 씁니다. 기도를 다하고 마칠 때 우리는 “아멘” 함으로써 저도 하나님께 이렇게 되도록 청원합니다. 라는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아멘”이십니다. 주님은 모든 말씀을 단순하고도 확실하게 단정적으로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이나 가르침 가운데, “내 생각에는...”, “아마도”, “잘은 모르겠지만”, “확실치는 않지만”, “...일지도 모른다.”는 표현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혹시, 만약에, 아마...”와 같은 표현대신에 주님이 즐겨 하신 말씀은 “진실로...진실로”입니다. ....기록되었으되, 성경이 말하기를,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입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분 안에서 예가 되고 그분 안에서 아멘이 되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느니라.](고후1:20).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멘”이시란 정확한 예가 이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고, 그것을 기쁨이요, 즐거움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점에서 주님은 분명히 아멘이십니다. 주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눅22:42, 히10:7,9).
우리가 “아멘”이라고 할 때 주의 이름, 칭호를 부르는 것입니다. 아멘은 맹세의 확증입니다. 주님께서 언약을 체결하실 때“온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27장)고 요구하셨고 백성들은 “아멘”으로 응답함으로 주님과의 언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들을 때 아멘, 아멘하면 그 자체로 주님과의 언약이 체결됩니다.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이요.”(14). 예수님은 신실한 증인이십니다(계1:5). 신실한 증인은 자신에게 해(손해, 피해, 오해 따위)가 오거나 어떤 일이 닥쳐도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신실한 증인은 자신의 증언에 책임을 집니다. 신실한 증인은 죽기까지 자신의 증언을 지킵니다. 거짓 증인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거짓말을 하지만 신실한 증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성경의 진리와 하늘의 일들을 보고 들은 그대로 증언한 신실한 증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성경 기록과 행하신 일로 자신을 증언하신 증인이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너희에게 땅의 것들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하늘의 것들을 말하면 어떻게 너희가 믿겠느냐?](요3:11-12).
주님은,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본 것을 증언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증언을 믿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입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 그것을 증언하시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도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인 자는 [하나님]께서 진실하시다는 것에 자기 도장을 찍었느니라.](요3:32-33).
세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을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들이 관찰하고 연구한 것들, 공부하고 깨달은 것들, 전통으로 물려받은 것들을 더욱 높이고 붙들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과학자들, 철학자들, 높은 학위를 가진 전문가들이 하는 증언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들이 아닙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거나 지어낸 것을 말하거나 자신의 생각이나 추측이나 가설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14절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시작한 자가 이것들을 말하노라.](14).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of God(KJV).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십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예수님에 의해,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습니다(계4:11). 이 구절을 오해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란 처음에(in the beginning) 창조하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란 선포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시며, 참 하나님이십니다(요1:1-3). 스스로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셨는데, 육신이 되신 하나님, 사람이 되신 하나님, 종의 형체를 입으신 하나님을 일컬어 “창조물의 처음 나신 분”(골1:15, 약1:18)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신(begotten) 분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분이십니다(요1:14, 딤전3:16).
[이는 그분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그것들이 왕좌들이든 통치들이든 권력들이든 권능들이든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고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느니라.](골1:16). by him, for him.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란 모든 창조물이 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하늘 위나 아래, 땅 위나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십니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고 자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그분께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데려가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대장을 고난들을 통해 완전하게 하심이 그분께 합당하도다.](히2:10).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예수님에 의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 이유, 존재 목적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나를 만드셨습니까?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부모를 위해, 자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루어야 할 꿈이 있고 일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존재 목적을 확실하게 해 두십시오. [오 [주]여, 주께서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니 이는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그것들이 주를 기쁘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기 때문이니이다, 하더라.](계4:11).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란 말씀이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신 분”이란 성경적 의미입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의 존재 의미와 목적을 보십시오. 저와 여러분들은 주를 기쁘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있습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히11:6).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빌4:18).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들은 -구별하여 드리는 헌물(빌4:18), 부모에게 순종(골3:20),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누어 주는 것(히13:16). 들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시작이신 분”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기 1:1에서 선포된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모든 만물을 지으신 참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나는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3:15).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는 한 마디 어떤 칭찬도 없이 곧 바로 책망하십니다. 이 교회의 행위는 주님께 좋은 평판을 받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인내의 섬김 등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15). 이 교회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교도라 할 수도 없습니다. 신자들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고 불신자들이라고 하기에는 또 뭔가 이상한 그런 사람들의 교회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려도 자연스럽습니다. 서로 불편함이 없습니다. 일요일에 교회 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게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교회는 너무나 세상적이고, 너무나 세속적인 교회이면서 또 약간은 기독교적인 형식과 틀을 갖추고 있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봅시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는 동성애 문제를 다룰 때 그것을 죄나 불법으로 정죄하지도 않고 찬성하거나 지지하지도 않습니다. 애매모호한 입장입니다. 모든 사안에 대해서 다 이런 입장입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는 성경을 펴지만 언제나 사람들의 권리, 사람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믿는 것인지 안 믿는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란 말씀은 오늘날 교회 성도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15). 여러분들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양자택일을 요구하십니다. 사람들은 적당히, 중간적인 입장을 좋아합니다. 중용의 도(道)를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내가 이날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를 대적하는 증거로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또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었나니 그러므로 너와 네 씨가 살기 위해 생명을 택하라.](신30:19).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 중에 한 가지를 택하라고 하십니다. 양자택일(兩者擇一)입니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중의 한 가지를 택해야 합니다. 둘 다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바알(맘몬)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법과 불법, 의와 불의, 선과 악, 영과 육, 그리스도와 벨리알 중 한 가지를 택해야 합니다. 육신적인 성도들은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모든 면에서 불신자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다가도 어떤 경우에는 헌신된 성도들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너희를 위해 이 날 택하라.”고 결단을 요구했습니다.
[만일 {주}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나쁘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혹은 너희가 거하고 있는 땅을 소유했던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너희를 위해 이날 택하라. 그러나 나와 내 집에 관한 한 우리는 {주}를 섬기겠노라, 하매](수24:15). 엘리야 역시 그러합니다(왕상18:21).
여러분은 주님을 믿고 그분께 순종하는 헌신의 결단을 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극단론자, 흑백론자란 비난을 듣기 쉬운 말씀입니다. 교회는 진리에 관한 한 차든지 뜨겁든지 둘 중의 하나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으로부터 광신자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야합니다. 예수쟁이란 말을 들어야합니다. 뜨겁고 열정적으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나 누구든지 여러분들을 예수쟁이라고 인정해야합니다. 예와 아니요, 가 분명해야합니다. [오직 너희 대화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라. 무엇이든지 이것들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느니라.](마5:37).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예’라고 해야 할 것은 ‘예’라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분명히 하라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No라고 해야 할 때 머뭇거리다가 죄를 짓습니다. 술, 담배, 마약, 포르노, 음행 등에 대해 단호하게 NO라고 해야 합니다. 좀 생각해 보고 결정하겠다고 하면 그는 이미 패배자입니다. 기도해 본 후에 결정하겠다고 한다면 이미 패배자입니다. 확고한 원칙과 기준이 되는 주의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하는 사람들은 Yes, No가 분명합니다. 이것을 주님이 원하십니다.
다니엘은 바빌론 왕궁에서 제공하는 음식에 대해 No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금 신상에 절하라는 바빌론 왕의 명령에 No라고 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불신자와 결혼하는 문제에 대해 기도하고 조언을 구하고 금식한 후에 결정하겠다고 하면 웃기는 일입니다. 성경 말씀에 따라 No라고 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이것들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작정하였을 때에 내가 경솔히 하였겠느냐? 혹은 내가 계획한 것들을 육신에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고는 아니요, 아니요,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오히려 [하나님]께서 참되신 것같이 너희를 향한 우리의 말은 예 하고는 아니요 함이 아니었느니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너희 가운데서 선포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는 아니요 하신 분이 아니었으며 그분 안에는 예만 있었느니라.](고후1:17-19).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예”만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예”만 있습니다. 예하다가 아니요 할 수 없습니다. 예, 예 했다가 아니요, 아니요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이들이 처음에는 예 했다가 중간에 사정이 생기면 “아니요” 해 버립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아니요”라고 했다가 뜻을 돌이켜 “예”라고 합니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 먼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이나 땅을 두고 하거나 다른 어떤 맹세로도 맹세하지 말고 너희가, 예, 할 것은, 예, 하고 너희가,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라. 이것은 너희가 정죄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약5:12). 성경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그런즉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므로 내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리니](계3:16).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가 이같이 미지근하다고 하십니다. 이 교회는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합니다. 진리, 그리스도, 의, 거룩함 등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성경의 무오성, 절대성 등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불법이나 죄 등에 대해서는 관용적입니다. 믿음에 있어서는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한 교회의 특징입니다. 반대로 육신적인 성공이나 부, 명예, 복 등에 대해서는 갈급하고 민감합니다.
복음을 전하여 혼을 이겨 오는 일에는 무관심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악을 미워하고 불법을 증오하지도 않습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악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외치지만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성경에 따르면 사랑은 “자기 것을 추구하지 아니하며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법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기뻐하며”(고전13:5-6)입니다.
차가운 물은 혼을 시원하게 합니다(잠25:13). 차가운 바람은 몸을 깨어나게 합니다. 목마른 혼에게 냉수는(잠25:25) 생각만 해도 혼이 상쾌해집니다. 더운 여름에 논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은 차가운 물, 시원한 바람이야 말로 최상의 선물입니다. [사람이 들의 바위에서 나오는 레바논의 눈(snow)을 버리고 떠나겠느냐? 혹은 다른 곳에서 나오는, 흐르는 찬물을 버리겠느냐?](렘18:14).
[신실한 사자(使者)는 그를 보낸 자들에게 마치 수확 때의 눈의 냉기 같으니 그는 자기 주인들의 혼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25:13). 겨울이 오면 뜨거운 난로, 뜨거운 물이 필요합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거나 목욕을 하면 피로가 풀리고 몸이 개운해 집니다.
지리적으로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뜨거운 물을 얻기 위해서는 온천이 나는 히에라폴리스로 6마일 정도 올라가야 했습니다. 반대로 차가운 물을 얻으려면 골로새로 10마일 정도 내려가야 합니다. 지리적으로 라오디게아는 이처럼 히에라폴리스에서 흐르는 뜨거운 물이 식어 미지근한 물 밖에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미지근한 물은 환영받지 못합니다.
[...내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리니](16). 차지도 덥지도 않고 미지근한 상태로 있다면 주님은 그들을 토해 내겠다고 하십니다(I will spue thee out of my mouth). 여러분은 미지근한 물을 입에 담고 있다가 뱉어 낼 때가 있을 것입니다. 미지근한 물은 주로 입을 헹굴 때 사용하기 때문에 입에서 토해 냅니다. 입에 있는 음식을 삼키지 않고 밖으로 토해 내듯, 침을 뱉어 내듯이 그렇게 미지근하기 때문에 주께서 토해 내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약의 크리스천들이 죄를 지으면 구원을 잃어버린다,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목하십시오. 거짓목자, 삯꾼 목자들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성도들을 위협하며 이 구절을 교회에 사용하지만 신약교회 성도는 그리스도의 입 속에 있는 음식물이나 침이 아닙니다(고전12:27). 크리스천들은 그분의 몸의 지체요, 살과 뼈들에 속한 지체입니다(엡5:30). 우리는 주님의 입이나 입술이나 혀가 될 수 있지만 그분의 입에 있는 음식물이나 미지근한 물이나 침이 아닙니다. 크리스천들은 주님의 입에서 토해질 수가 없습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는 역사적으로는 은혜시대의 마지막 현 교회들에 비유할 수 있지만 교리적으로는 큰 환란 때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환란 성도들입니다. 지금 계시록에 나오는 교회는 모두 큰 환란 때 이 땅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들 교회에 주어진 책망, 징계는 곧 바로 구원과 직결됩니다.
에베소 교회는 회개하지 않을 때 주님은 네 등잔대를 옮기리라 말씀하셨습니다(계2:5).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회개하지 않을 때 주님이 속히 오셔서 자신의 입의 칼로 그들과 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계2:16).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회개하지 않을 때 큰 환란 속에 던져 넣으시겠다고(계2:22) 선포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는 “내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리라.”(16)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환란 성도들에게 해당됩니다. 구약, 신약, 큰 환란이란 시대와 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경 구절을 무조건 현재의 자신에게 적용함으로 오류에 빠집니다.
17절입니다. [이는 네가 이르기를, 나는 부자며 재산을 불렸으므로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면서 네 비참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계3:17). 여러분은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해야 합니다.
내가 재산을 불렸으므로 부족한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오 {주}의 성도들아, 너희는 그분을 두려워하라.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들은 부족하여 굶주릴지라도 {주}를 찾는 자들은 모든 좋은 것이 부족하지 아니하리로다.]](시34:9-10).
우리가 부족함이 없는 이유는 주를 두려워하고 주를 찾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궁핍이 임할 때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재산을 불려도 명철이 부족한 자들이 있습니다. 재산을 불려도 믿음이 부족하고 지혜가 부족하고, 지식이 부족해서 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를 두려워하고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는 좋은 것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오직 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 가운데서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빌4:19).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원함,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필요를 채우십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있는 것들은 모두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들입니다. 고난은 인내와 체험을 위해 필요합니다. 징계는 바로잡음과 회개를 위해 필요합니다. 다양한 시험은 믿음을 단련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는 “나는 부자며 재산을 불렸으므로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합니다(17). 이 말씀의 배경은 호세아서에 있습니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그럼에도 나는 부자가 되었도다. 내가 나를 위해 재물을 얻었으나 내 모든 수고의 산물 가운데서 죄가 된 불법 곧 내 안에 있는 불법을 그들이 결코 찾지 못하리라, 하였도다.](호12:8).
에브라임(북이스라엘)이 “나는 부자가 되었도다.”라고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얻은 재물에 아무런 불법이나 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상업과 무역, 농업을 통해 재물을 불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스라엘의 불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변 이교도들과 경제적 교역만 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교류를 했고 우상 숭배를 도입했습니다. 종교의 자유와 관용을 바탕으로 이방신들을 자유롭게 섬기며 타락했습니다. 그들은 불법이 충만하고 죄가 부족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럼 유다는 어떻습니까? [그 떼를 소유한 자들은 그것들을 죽이고도 스스로 죄 없다 하며 그것들을 파는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자가 되었은즉 {주}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그것들의 목자들은 그것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느니라.](슥11:5). 유다 역시 “내가 부자가 되었은즉...”하며 자랑합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의 모습이 멸망하기 직전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는 전에 있었던 일들과 역사를 통해서 오늘과 미래를 집어보며 대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것들은 우리의 배움을 위하여 기록되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성경 기록들이 주는 인내와 위로를 통해 소망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롬15:4) 했습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는 스스로 “나는 부자라. 내가 재산을 불렸으니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도다.”(17)라고 할 만큼 부유한 교회였습니다. 오늘날 대형 교회라 불리는 많은 교회들은 땅이 있고 건물이 있고, 현금이 있습니다. 학교나 출판사를 세우고 심지어 신문, 방송국도 가지고 있습니다. 해외에도 여러 지부를 세웁니다. 누가 보아도 부자요 재산을 불렸고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이들은 돈이 전부인 줄로 아는 전형적인 현대인들, 현대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돈이 있으면 다 있는 것이요,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줄로 압니다. 이들은 이익(이득)이 경건이요, 하나님이 복 주신 것인 줄로 압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사는 사람들의 사고방식, 가치관이 교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니라”(딤전6:10). “......재물을 신뢰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은 심히 어렵도다.”(막10:24). “급히 부자가 되려 하는 자는 악한 눈을 가졌으므로 가난이 자기에게 닥칠 줄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느니라.”(잠28:22). “부자가 되려고 수고하지 말고 너 자신의 지혜 사용하기를 그치라.”(잠23:4). 이것이 부자가 되었으나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주는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중에 만약 부자가 되고 싶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이 주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기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어야 합니다(마6:20).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대해 부요해야 합니다(눅12:21). 주님은 자기를 위해 보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해 부요하지 못한 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보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너희 보물이 있는 곳, 거기에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12:34). 하셨습니다. 우리의 보물은 저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행한 일을 불로 시험하실 때 금이나 보석으로 드러나면 그것들이 우리의 보상입니다(고전3:12-14).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위에 있는 것들에 너희의 애착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라.](골3:2). 이 땅에서 은이나 금이 없었던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3:6).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는 성령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주의 말씀인 성경이 있습니다.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맡기신 사역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 선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가진 것, 받은 것을 살펴보십시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대로 그런 것들을 가지고 형제들을 돕고 섬기고 세우십시오. 주고 또 주어도 항상 차고 넘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웃에게 주십시오.
다시 17절입니다. [......네 비참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17). 주님은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에게 “네가.......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라고 하십니다.
“나는 부자요......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들이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파산 상태입니다. 말씀의 빛과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는 비참합니다. 가련합니다. 영적으로는 가난합니다. 믿음도 없고 의도 없고 거룩함도 없습니다. 성령의 선물도 열매도 없습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는 눈이 멀었습니다.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신입니다. [그분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으니 이것은 그들이 자기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더라.](요12:40). 불신은 영적인 눈을 멀게 합니다. 주님은 믿지 않는 자들의 눈을 멀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믿는 만큼 보입니다. 믿음의 눈이 없으면 주를 보아도 그분이 주이신 줄 알지 못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주님과 동행하며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분이 주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언제 알았습니까? 성경을 풀어 열어 주실 때였습니다(눅24:31). 마귀는 불신자들의 마음에 영광의 주를 아는 빛을 가려 버립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고 어둠 속에서 걸으며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이라.](요일2:11). 미움입니다. 형제를 미워할 때 눈이 멀게 됩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는 불신과 미움의 두 가지 문제로 인해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해결하지 않고 아무리 설교를 듣고 성경 공부를 많이 해도 보이지 않습니다.
“벌거벗은 것...”(17).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는 주님이 주신 옷을 입고 있지 않는 상태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으로 옷 입어야 합니다. [너희 중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이 말씀에 따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요, 종교인일 뿐입니다.
오늘날 신학교를 나오고 집사나 장로나 권사 등의 직분을 맡고 목사라고 설교를 할지 몰라도 그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은 벌거벗은 자들이 많습니다. [밤이 거의 다 지나고 낮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 14,[오히려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육신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롬13:14).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성도들의 옷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빵(생명의 빵,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시오, 우리의 음료(물)이시고, 우리가 거할 거처이시며, 우리의 옷입니다(고후5:2,3). 이로써 의식주 문제는 다 해결되었습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는 부자였고 재물을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 사실을 그들이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내가 네게 권고하노니 너는 내게서 불로 정제한 금을 사서 부유한 자가 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네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말며 네 눈에 안약을 발라서 볼지니라.](계3:18). 주님의 권고입니다. 주님은 3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게서 불로 정제한 금을 사서 부유한 자가 되고.”(18).
“너는 흰옷을 사서 입어 네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말며”(18).
“네 눈에 안약을 발라서 볼지니라.”(18). 주님께서 “너는 내게서 사라.”(Buy of me)고 하십니다. 불로 정제한 금, 흰옷, 안약은 모두 주님에게서만 살 수 있습니다. 가격이 얼마입니까? 돈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오호 목마른 모든 자야, 너희는 물들로 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참으로 와서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치르지 말며 포도즙과 젖을 사라.](사55:1). 살 때 돈을 내거나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값을 치러야 합니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치러야 할 비용을 미리 계산해 봐야 합니다.
자, 그럼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가 불로 정제한 금을 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값없이 받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단련, 시련, 환난 등이 ‘불로 정제한 금’입니다.
[이것은 너희 믿음의 단련이 불로 단련해도 없어지는 금을 단련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드러나게 하려 함이니라.](벧전1:7). 불을 통과한 믿음이야 말로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을 가져다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단련하려고 오는 불같은 시련에 관하여는 마치 이상한 어떤 일이 너희에게 일어난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4:12). 주님으로부터 오는 시험, 환란, 시련은 믿음을 단련하고 우리 자신을 단련하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있는 욥이 말하기를,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분께서 아시나니 그분께서 나를 단련하신 뒤에는 내가 금같이 나오리라.”(욥23:10)고 말한 그대로입니다. [너희 믿음의 단련이 인내를 이루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약1:3). [시험을 견디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가 단련을 받은 뒤에 [주]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왕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사라고 하신 ‘불로 정제된 금’은 믿음의 시련, 단련을 말합니다.
“흰옷을 사서 입으라.”(18). 흰옷은 성도들의 의입니다. 사데 교회는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걷는 자들이 있었습니다(계3:4,5).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에는 교인들이 벌거벗은 채로 있었기 때문에 옷이 필요합니다. 현재 우리는 나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 하나님에게서 난 의(빌3:9), 율법의 행위에서 난 의가 아니라 믿음의 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 옷을 사서 입을 수 없습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의(義)는 없습니다. 값을 치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너희의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썩을 것들로 된 것이 아니요,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성령을 사려는 자가 있었으나 누구도 돈으로 성령을 살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줄로 생각하였으므로 네 돈이 너와 함께 썩어 없어질지어다.](행8:20). 했습니다.
주님은 “너는 내게서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습니다(사64:6).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됩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흰 옷입니다.
“네 눈에 안약을 발라서 볼지니라.”(18). 라오디게아는 실제로 안약 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안약”을 사서 발라 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갈증으로 죽어가던 하갈의 눈을 열어 샘을 보게 하시고(창21:19), 원수들에게 포위되어 두려움에 떨던 게하시의 눈을 열어 불 말과 불 병거를 보게 하시며(왕하6:17) 앞을 보지 못하던 소경들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사(행26:18), 지각의 눈을 열어 주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볼 수 있습니다(엡1:18). 뇌물은 눈을 어둡게 하며, 마귀의 음성에 귀 기울인 하와는 육신의 눈만 밝아지고, 주의 음성에 불순종한 삼손은 눈이 뽑혀 버렸습니다(삿16:21).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가운데 있고 어둠 가운데서 걸으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요일2:11).
발람의 눈을 열어 주의 천사를 보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의 영광을 보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주님은 마르다에게 “......내가 네게 말하기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라.”(요11:40)고 하셨습니다.
욥은 말하기를, “내가 귀로 듣는 것을 통해 주에 대하여 들었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라고 했듯이 우리의 눈에도 안약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눈을 열어 항상 예수를 바라보게 하소서(히12:2).
19절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들을 다 내가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계3:19). 주님이 누구를 책망하고 징계하는지 보십시오. “내가 사랑하는 자들”(19)입니다. 징계는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지만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징계는 저주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징계하시는 분이심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자기 아들들에게 징계를 약속하셨습니다. [너는 또한 사람이 자기 아들을 징계하듯 그렇게 {주} 네 [하나님]께서 너를 징계하심을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할지니라.](신8:5).
징계는 바로 잡기 위한 것입니다. 징계는 의의 화평의 열매를 맺기 위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아들들을 징계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만일 그가 불법을 행하면 내가 사람들의 막대기와 사람들의 아이들의 채찍으로 그를 징계하리라.](삼하7:14).
불법을 저지르는 아들을 가만히 두고 보는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주님은 징계를 약속하셨습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를 멸시하지 말고 그분께서 바로잡아 주시는 것에 싫증을 내지 말라. 주}께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바로잡아 주시되 마치 아버지가 자기가 기뻐하는 아들을 바로잡아 주는 것 같이 하시느니라.](잠3:11-12). 주의 징계를 받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시고 양육하시면서 우리의 잘못을 바로 잡으시기 위해서 징계하십니다.
[또 자식들에게 하듯 너희에게 말씀하시는 권면을 너희가 잊었도다. 이르시되, 내 아들아, 너는 [주]의 징계를 멸시하지 말고 그분께 책망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자신이 받아들이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시느니라, 하셨느니라. 너희가 징계를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 아들들을 대우하듯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가 무슨 아들이냐? 모두가 징계받는 데 참여하므로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너희는 사생아요 아들이 아니니라.](히12:5-8, 12:10-11절 참조). 여러분은 징계를 받을 때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살펴보며 회개하십시오. [......그러므로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19). 여러분이 지금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처럼 미지근한 상태라면 열심을 내고 회개하십시오.
20절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3:20). 필라델피아 교회 앞에는 열린 문을 두셨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는 문이 닫혀 있고 예수님은 교회 문 앞에 있습니다.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니...”(20)란 말씀은 주님이 손님이나 외인(外人)이 되어 버린 인본주의 교회의 전형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모여서 이런저런 행사를 열고 교제를 갖느라 열심이므로 주님이 필요치 않습니다. 주님이 문 앞에 서서 두드리지만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들 안에 주님이 없는 줄도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으로 옷 입지 않았어도 벗은 줄도 모릅니다. 이는 더 이상 주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주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 거기에 나도 그들의 한 가운데 있느니라.”(마18:20) 하셨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는 수백, 수천 명이 모여도 그들 가운데 주님이 없고 문 앞에 서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들은 이념과 사상과 공동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 모였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20).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요10:3,4). 교회 안에 주님의 어린 양들이 있다면 주님께서 “문을 열어 다오.”라고 하시는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돼지들, 개들, 뱀들, 이리들이 모인 동물원이라면 주의 음성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문을 열어 달라고 할 때 그 음성을 듣고도 문을 열지 않으면 그가 주님을 찾을 때 그는 주님을 뵐 수 없게 됩니다(아5:2,5-6).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20). 주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주님은 그에게로 들어가십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그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이 믿게 하옵소서.](요17:21) 주님은 음성을 듣고 열어 줄 때까지 문 앞에 서 계십니다.
주님은 무례히 행하지 않으십니다. 자원해서 문을 열어서 주님을 맞아들이면 그것이 바로 ‘영접한다.’는 것입니다(요1:12). 주님을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는 문 밖에 예수님을 세워둔 교회입니다. 누구든지 문을 열면 그는 주님과 함께 만찬을 먹게 됩니다. 이것은 영적 교제를 말합니다.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고전1:9). 구원 받은 성도는 주님과 교제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형제요, 친구요, 신랑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너희에게 밝히 드러냄은 너희도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니 참으로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함께하는 것이며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니라.](요일1:3). 이것이 영적 교제입니다. 이 교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빛 가운데 걸음으로 지속됩니다(요일1:6,7).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는 다른 교회들에 주신 주님께서 오신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들 속에 계시지 않고 문 앞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미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 앞에 서 계시기 때문에 재림에 관한 어떤 말씀도 필요치 않습니다.
21절입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나 역시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왕좌에 앉게 된 것같이 나와 함께 내 왕좌에 앉는 것을 내가 허락하리라.]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는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합니다. 주님이 없는 교회는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이 없는 자들은 죽은 자들입니다. 먼저 생명을 얻고 모든 것을 이겨야합니다.
22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하시니라.](계3:22). 이상 말씀은 성령께서 교회들에 주신 말씀이요,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다음 시간에 일곱 교회를 모두 정리하고 3장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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