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 마르소 주연의 영화 <라붐La Boum>(1980)에서 흘러나왔던 ‘Reality’를 듣는 순간, 그 아름다운 선율에 마음을 뺏긴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 영화 주제가를 들으려고 너도 나도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보았던 기억이 있다. 이 영화는 프랑스에서 1980년에 개봉했으나 당시 국내에서는 개봉하지 않았다. 국내 정식 개봉은 무려 33년이 지난 2013년.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다. 그러니 당시 <라붐>을 본 것은 모두 비디오를 통해서였다. 비디오 타이틀을 따로 홍보하지 않았으니, 라디오에서 이 영화 주제곡을 듣고 영화를 보게 된 경우도 많았다.
영화를 보다 보면 정말 이 노래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장면들이 있다. <라붐>에서 ‘Reality’가 나오는 장면이 꼭 그렇다. 광고에서도 여러 번 패러디된 장면이지만, 영화 속에서 마티외(알렉상드르 스테를링)가 빅(소피 마르소)에게 씌워주는 헤드폰을 통해 이 노래가 울려 퍼진다. 단언컨대, 그 장면에서 그 노래보다 더 잘 어울리는 노래는 없다. 그 노래를 듣는 소피 마르소의 표정은 얼마나 청순한지. 뮤직비디오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노래와 영화, 배우가 서로 녹아들어간 명장면임에 틀림없다.
이 노래를 부른 리처드 샌더슨Richard Sanderson은 영국 출신의 가수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드러머 아버지와 아코디온 연주자인 프랑스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클래식 교육을 받고 자랐다. 17세 때 록 밴드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밴드 활동을 시작한 그는 실력을 갈고 닦은 뒤 미국으로 건너가 버클리 음대에 입학했다. 졸업 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보그 레코드Vogue Record 산하 트라이던트 스튜디오Trident Recording Studio에 취직했다. 유명한 프로그레시브 밴드인 맨프레드 맨의 싱글 ‘My name’s Jack’을 녹음하면서 이 곡의 히트와 함께 그의 이름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리처드 샌더슨은 이후 Richard Roly라는 이름으로 첫 싱글 ‘Un vent de folie’를 발표한 뒤, 1979년 마침내 데뷔 음반 <No Stickers Please>를 세상에 내놓았다. (참고로 이 녹음실을 애용한 숱한 아티스트 중에는 데이빗 보위도 있었다.)
데뷔 음반 발표 후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다. 스튜디오에서 작곡가인 블라디미르 코스마Vladimir Cosma를 만났는데, 영화 ‘라붐’의 주제가를 불러줄 것을 요청받은 것. ‘Reality’와 ‘Murky turkey’ ‘Go on Forever’가 OST에 수록됐다. 영화의 성공과 함께 주제가인 ‘Reality’는 15개국에서 싱글 차트 정상에 올랐고 유럽과 아시아를 포함한 세계 전역에서 800만 장이 넘는 음반 판매를 기록했다. 영화는 속편으로 이어져 1982년 <라붐2>가 개봉했는데, 주제곡으로 쓰인 쿡 다 북스Cook Da Books의 ‘Your eyes’ 역시 커다란 인기를 모았다. 리처드 샌더슨은 앞서 1981년 발표한 두 번째 음반 <I’m in love>에서 ‘She’s a lady’를 히트시키며 ‘Reality’의 인기를 이어갔다.
한편 <라붐> 영화 제작 당시 겨우 15살이었던 소피 마르소는 <라붐> 개봉 이후 단숨에 스타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때 소피 마르소는 너무 예뻤다. 당시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지금 대한민국의 50대 아재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던 건 물론이다. 이렇게 소피 마르소를 영접한 아재들이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수십만, 아니 100만 명은 넘으리라. 그녀는 이후 피비 케이츠, 브룩 실즈와 함께 1980년대 3대 하이틴 미녀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소피 마르소는 <라붐> 속편에도 주연으로 출연했다. 보통 어린 나이에 스타가 된 배우들이 어른이 된 뒤에는 방황하는 경우가 많은데, 소피 마르소는 그렇지 않았다. 예술영화에서부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까지 섭렵하고, 직접 소설을 써서 출간하기도 했다. 2002년에는 감독으로도 데뷔해 몬트리올 영화제 감독상까지 수상했다. 무엇보다 멋진 모습은 아직까지도 연기 활동을 이어나가는 현역 배우라는 점. 그 시절 책받침 스타들이 대부분 은퇴한 지금, 소피 마르소는 연기 생활 40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게다가 아직도 너무나도 아름답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문득 첫사랑을 추억하고 싶다면 ‘Reality’가 딱이라는 얘기. 우리에게도 분명히 첫사랑이 있었다. 잘 지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