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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5월 공세
1. 개 요
1951년 4~5월에 접어들어 국군 과유엔군은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저지하기 위하여 모든 전력을 경주하고 있을 대 후방에서는 이 보다 앞서 발생한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사건의 진상 조사, 처리문제로 정국의 갈등이 심화되던 중, 5월 7일 신성모 국방장관이 해임되고 그 후임에 이기붕 장관이 임명되어 군의 기강확립과 전력증강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의 4월 공세가 1주일만에 중단되자, 미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중장은 '51. 4. 30일을 기해 골든-노네임선을 요새화하는 동시에 적정파악을 위해 정찰기지 확보작전을 통해 적정 파악을 하도록 위력수색을 강화하였다. 결국 그들의 공격중단은 일시적 어려움 때문이며 곧 서울점려을 위한 대규모 공격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미 제8군의 중앙부를 보강하는 부대배치를 실시한다.
서울 외곾을 방어 중이던 미 제1군단은 문산 축선에 국군 제1사단, 의정부 축선에 미 제1기병사단과 미 제25사단을 배치하고 영국군 제29여단을 예비로 하였다.
북한강 게곡 통로를 방어중인 미 제9군단은 덕소-예봉산-용문산-금학산을 연하는 선에 서에서 동으로 영 제28여단-미 제24사단-국군 제2사단-국군 제6사단-미 제7사단을차례로 배치하고 제187공정연대 전투단을 예비로 확보하였다.
미 제10군단은 춘천-홍천 축선에 미 제1해병사단과 국군 제2사단, 소양강 남쪽에 국군 제5사단과 제7사단을 배치하였다.
동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은 한석산-가리봉 선에 국군 제9사단과 제3사단, 국군 제1군단은 설악산-대포리 선에 수도사단과 제11사다을 배치하였다.
새로운 부대배치가 완료된 후 실시된 위력수색과 정찰기지 확보작전으로 5월 9일에는 김포반도-봉일천-의정부-춘천을 확보한데 이어 동부전선에서도 인제와 속초까지 탈환함으로서 상황이 호전되자 미 제8군사령관은 38도선을 향한반격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그러나 정보분석결과 적이 대규모 공격개시 징후가 발견되어 공격작전을 멈추고 진지강화에 주력하며 적의 상황파악에 노력했으나 기상악화로 적의 대규모 부대 이동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또한 적이 공격하더라도 서부나 중서부지역으로 집중할 것으로 판단했다.
반면 공산군은 "서울 점령"이라는 정치적 목적보다는 중동부 전선에서 국군을 격멸한 후에 미군을 섬멸한다는 전략에 따라 주공을 중동부로 전환하고, 중공군 3개 병단 중에 제19병단은 서부에서 유엔군을 견제하고, 제9병단과 제13병단을 중동부 전선으로 돌리고, 북한군 2, 3, 5군단을 투입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51. 5. 16일에 공세를 단행한 공산군은 현리에서 국군 제3군단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 일부 부대가 하진부리가지 진출하였으나 그들이 계획했던 아군의 3중 포위에 실패하고 6월 초에는 공세종말에 다다라 북으로 퇴각하게 된다. 이후 유엔군의 재반격을로 전선은 전전상태로 회복되고 , 양측은 휴전협상에 돌입한 상태에서 지리한 진지전만을 계속하게 되었다.
2. 피아의 상황과 전투 편성
가. 공산군측 상황과 전투 편성
중공군은 제5차 1단계인 4월 공세를 통해 38도선 돌파에 성공하고 서울에 근접하여 전장 주도권을 회복하였으나, 유엔군 섬멸이라는 최초의 계획은 달성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래서 조 .중 연합군 사령관 팽덕회는 국군에 대한 집중 공격으로 미군을 고립, 분산시킨 후에 미군을 섬멸할 수 있는 유리한 전기를 마련한다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그동안의 5차에 걸친 대규모 공세에서 병력이 우세하더라도 화력과 장비가 열세하면 승리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서울 점령"이라는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목표보다는 "중. 동부 산악지역에서 국군 사단ㅇ들을 격멸한 후 고립된 미군을 섬멸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다는 목표로 선회하였다.
공산군은 이를 위해 중서부 전선에 대한 양공작전으로 유엔군이 동부로 이동하는 것을 견제하고 중동부 전선에 대한 차단 작전을 병행함으로써 미 제10군단의 동측 연결을 저지하는 방책을 채택하였다.
이들의 5월 공세 계획은 우선 현리지역의 국군 4개 사단(제3,5,7,9사단)을 양익 포위로 섬멸한다는 기본 방침에 따라 제9병단이 주공으로 좌익(양구-인제)에서 상남리-속사리, 한계-풍암리로 우회하고, 인민군 제2, 5군단이 우익(인제-한계령)으로 현리 동쪽과 속사리 방향으로 기동하여 다중 양익 포위망을 형성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서부의 제19병단과 북한군 제1군단이 자신들이 주공인양 위장하고 기만작전을 펼치며, 예비인 제3군단은 제2군단을 후속하여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이 현리지역으로 증원하지 못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또 춘천 동쪽의 중공 제3병단은 주공의 일부로써 미 제10군단을 고착 견제하여 현리지역으로 증원을 차단하도록하고 이 계획에 의거 5월 초에 북한군 제1군단이 서울 서쪽에서, 중공군 제19병단으로 서울 동쪽에서 위장 도하 작전을 , 그리고 예비인 제39군을 춘천-홍천 축선에 공격을 가하여 공격방향을 기만하였다. 이를 위해 5월 9일부터 은밀히 동쪽으로 기동하여 공격준비를 완료하였다.
중공군 5월 공세 작전계획 상황도
북 제2군단
사방거리 대성마을 해안 서화 진부령
제9병단 사령부
당거리 원당리
북 제3군단 북 제5군단
화천 제3병단 사령부 용대리
원통 설악산 국 제11사 수도사
중공 제20군 국 제3사
중공 제27군 국 제9사 한계령 양양
중공 제15군 중공 제12군 인제
춘천 국 제7사 신남리 서림리
중공 제60군 국 제5사 현리
자은리
미 제2사
철정리 광원리
창촌리
홍천 풍암리 계방산
미 제7사단 미 제1해병사
양덕원리 창동리 속사리 하진부리
(1) 중공군 제9병단(제20, 27, 12군)은 포병 제25, 26, 11, 28연대를 배속받아 주공을 담당한다.
제12군은 국군 제5사단을 섬멸하고 북 제2군단과 협격하여 퇴로를 차단한다
제27군은 침교-이현 지역의 요지를 점령한 후 국 제7사단을 , 일부는 국 제5사단을 섬멸한다
제20군은 북 제5군단과 협동으로 국 제9사와 제3사를 섬멸하고 일부는 국 제7사를 섬멸한다.
(2) 북한군 제5군단은 군량전, 귀둔리, 오작동에서 국군 제3사단 측면을 돌파한 후 일부 부대가 진동리-왕성곡으로 진격하여 중공군 제20군과 협격으로 현리의 국군을 섬멸한다.
(3) 북한군 제2군단은 마산리와 그 서쪽의 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 전투지경선으로 돌파한 후 1개 사단이 속사리로 진출하여 중공군 제12군과 협격으로 하진부리 국군을 포위 섬멸한다.
(4) 북한군 제3군단은 제2군단을 후속하여 한계령-대암산-유리봉-서림리를 점령하여 현리의 국군이 동으로 도주하는 것을 차단하고 동쪽의 부대가 서쪽으로 증원하는 것을 차단한다
(5) 조공인 중공군 제3병단은 포병 제29, 30연대 각 1개 대대와 대전차포병 제402연대를 배속받아 서부전선의 미군과 동부전선의 국군 부대를 분할하고, 동부 전선의 작전을 보장한다
제15군은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2사단의 연결을 차단한다. 군 주력을 두 방향으로 나누어 한쪽은 평촌리-사오랑치를 연하는 대거리로, 한 쪽은 물노리-갈곡에서 삼년동을 향해 진격하여 미 제2사단을 분할한 후 섬멸한다.
제60군은 추곡리-대룡산 지역에서 미 제10군단을 견제하면서 미 제1해병사단의 공격을 유인하여 동쪽으로 증원을 차단한다.
제39군은 소양강 남쪽의 수구동-내평리-대동리를 연하는 일선 진지를 견고하게 방아하고 중공군 공격부대들의 진출을 보장한 후 제3병단의 예비대가 된다.
(6) 중공군 제19병단과 북한군 제1군단은 고양-가평 간에 위치한 수락산과 마석우리, 청평천 등에 각각 2~3개의 목표물을 선정하고 섬멸하며 서부전선의 미군을 견제하면서 동부전선의 승리를 위한 유리한 조건을 조성한다. 이때 제19병단 주력은 청평천 서북에서 한강을 도하 전과 확대를 준비한다.
제63군은 가평 서북방에서 국군 제6사단의 2~4개 대대를 섬멸하고 청평천-사기막에서 도강하여 영평리-원주 방면으로 전과 확대를 한다.
제64군은 포천 동북방 기산 일대에 집결해 마석우리 일대로 병력을 집중하여 미 제24사단 예하의 2~4개 대대를 격멸하고 도하하여 양평으로 진격한다.
제65군은 포천에 집결하여 1개 사단은 정면의 국군과 유엔군을 견제하고 주력은 내각리로 진출해 국군과 유엔군을 섬멸하며 양수리 일대에서 한강을 건너 주력은 수원으로, 다른 1개 사단은 인천으로 진격한다.
북한군 제1군단은 동진하여 중공군 제65군과 연결하고 국군 제1사단 1~3개 대대를 섬멸하고 서울을 진격하여 점령하고 경비를 담당한다.
나. 아군측 상황과 전투 편성
미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중장은 '51. 5월 이전 공산군의 배치상황을 근거로 공산군의 차기 공세는 서부 도는 중부 축선에 주력이 집중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동부 전선은 도로망이 협소하고 산악지형으로 보급문제가 크기 때문에 중ㄱ오군은 수도 서울 공략에 가용역량을 집중할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방어에 유리한 동부 전선은 국군을 배치하더라도 북한군을 충분히 방어 하리라 판단하여 미 제7사단과 미 제187공정연대 전투단을 5월 1일 부로 미 제10군단 지역에서 미 제9군단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그 공간에는 국군 제7사단을, 국군 제7사단 자리에는 국군 제5사단을 배치하였다.
또한 미 제1해병사단의 작전통제권을 미 제10군단장에게 주고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의 전투지경선을 우측으로 이동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화천지역에서의 차량통해이 급증하고 소양강상에 교랴을 가설하며 대규모 병력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포착되었다. 여기에 생포된 포로들이 중공군 주력이 미 제10군단 정면을 공격할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이런 정황으로 중공군 주력이 중동부 전선에 집중되고 잇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미 제8군은 작전계획이나 전선을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만약에 중공군이 방어준비가 미흡한 중동부 지역에 집중된다고 사전에 알려지면 전선에서 대량 이탈사고가 날 수도 있다는 판단에 기존방침을 준수하고 대신 미 제1군단의 예비인 미 제3사단을 제8군 예비로 운용토록 하는 최소한의 조치만 하였다.
전투편성은 서부전선에는 미 제1군단이 미 제1기병사단, 미 제25사단(필리핀 제103ㅐ3ㅐ, 터어키여단), 영 제29여단(벨지움 대대, 독립 군군 제5해병대대), 국군 제1사단이 골든선에, 미 제9군단은 미 제7사단, 미 제24사단, 영 제28여단, 미 제187공정연대 전투단, 국군 제2사단, 국군 제6사단이 노네임선 전방 가평-춘천선에, 미 제10군단은 미 제2사단(프랑스 대대, 네덜란드 대대), 미 제1해병사단(국군 제1해병연대), 국군 제5사단, 국군 제7사단으로 춘천 동쪽 대룡산-소양강 남쪽 남전리 선에 배치되었다.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내륙 산악지역의 방어를 담당한 국군 제3군다은 국군 제3사단과 제9사단으로 남전리-용대리 간을 방어하고 동해안 지역을 담당한 국군 제1군단은 수도사단과 국군 제11사단으로 용대리-설악산을 방어하였다.
육군본부 예비병력은 공비 토벌작전 주인 제8사단과 태백산전투사령부가 있었고 미 제8군 예비는 미 제3사단과 캐나다 제25여단이 있었다.
3. 전투 경과
가. 중. 동부 전선의 전운
1951. 4. 22일부터 29일까지 지속된 중공군 4월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한 미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중장은 '51. 4. 30일을 기해 노네임선을 요새화하는 동시에 적정 파악을 위해 위력수색을 지시한다.
이에 따라 위려수색을 하면서 5월 9일 경에 김포반도-의정부-춘천-인제-속초를 연하는 선까지 탈환하였ㅎ다. 이후 미 제8군은 본격적인 반격계획을 수립했으나 공산군의 공격징후가 포착되어 공산군의 공격에 대비하게 된다.
한편 동부전선의 국군 및 유엔군은 반격계획에 딸 5월 7일 인제-간성을 잇는 미조리선으로 진격했으며 이 기간에 공산군의 공세 징후가 포착되었다. 이에다라 진격을 멈추고 방어작전으로 5월 13일 기하여 소양강과 설악산을 연하는 선에 새로운 방어선을 마련하고 방어작전으로 전환했다.
나. 중공군의 중부전선 집중 돌파
(1) 국군 제7사단 지역(음양리)
인제
군축령
소양강
군축교 제9-28연대
관대리
남전교 내린천
하수내리 음양리
제7-5연대 남전리 검우석
삼팔교
구만리
제7-8연대
부평리
도수암
상수내리
현리
신풍리 소치리
제5사 정자리 용포
갑둔리
어론리 *888 검부리 대암산
비득재
자은리 *1076 *우각산 가마봉 오마치
*873 상남리
광암리 *675
침교
도관리 외야리 고사리재
방내리
내촌강
'51.5. 16일 16:30분에 중공군의 공격준비 사격이 시작되었다. 국군 제7사단은 다수의 병력과 시설이 피해를 입고 통신선이 절단되어 지휘통제 능력을 상실했다. 2시간만인 20시경 방어선이 돌파되었지만 이 사실을 인접 부대나 제3군단에 알리지 못했다.
심지어 미 제10군단조차도 이 사실을 아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국군 제7사단은 소양강과 가리산 등 천연적인 잇점을 살려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지만 중공군이 돌파를 강행하자 그들이 접근하기도 전에 진지를 이탈하였다.
중공군 제20군은 구만리 일대에서 소양강을 도하하여 공격을 개시하여 2개 사단이 제8연대 지역으로 집중 돌파를 감행함으로서 쉽게 무너지고 24시경 부평리 일대를 장악했다.
중공군은 예하 제60사단에게 종심 기동하여 오마치 고개를 차단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이 임무를 부여받은 제178연대 제2대대는 빠른 속도로 기동했고 그 첨병중대가 오마치 고개 일대에 도달했다. 그 예하 제58사단 제173연대가 남전리 일대로 소양강을 도하하여 5월 18일 -1:00시경 오마치 고개와 용포일대를 완전히 장악했다.
한편 미 제8군은 5월 17일 22시부로 동부지역 군군사단들에게 와코선(778-한계-장평-1009)로 연결되는 새로운 방어선으로 철수를 명령했지만 이미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각자 도생의 철수를 거듭해야 했다.
구만리 일대의 국7-5연대는 5월 16일 16시 30분에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중공군 제27군 예하 제81사단과 제79사단이 23시경 구만리 창막동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여 국7-5연대는 지휘통제가 마비되어 소부대 단위로 철수를 하게 된다.
한편 국7-8연대는 중공군 제27군 제81사단과 제20군 제60사단이 신풍리는 물론 도수암까지 진격하여 제대로 축차방어 한번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특히 제81사단 첨병 연대인 제242연대가 방내리까지 진출하여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의 유일한 보급로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중공군이 18일 24시경에 갑둔리, 소치리, 김부리 일대까지 점령하여 국7-8연대는 현리로 퇴각하는 상황에서 중공군은 상남ㄴ리 일대에서 국 제7사단과 제3군단에 대한 포위 섬멸작전을 벌이게 된다.
국군 제7사단장은 5월 17일 사단 예비인 제3연대를 가마봉-대암산을 연하는선에 점령토록 하여 퇴각하는 부대를 엄호토록 하였으나 준비된 진지도 없었고 적이 먼저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등의 상황에서 가마봉, 대암산 등에서 일부만 점령하다 적의 압력에 굴복하여 상남리 지역으로 후퇴하게 된다. 철수과정에 퇴로를확보하기 위해 1개 대대로 오마치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사단은 제3, 제5연대 일부로 저지진지를 형성하려 했으나 5월 18일 02시경 풍암리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이 시각, 미 제10군단의 상황은 우측의 제5사단과 제7사단이 돌파되어 요충지인 오마치 고개 일대가 중공군이 점령한 가운데 좌측의 미 제2사단마저 방어선의 일부가 돌파당해 돌파구가 확장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군 제7사단은 풍암리 일대로 철수하여 18일 14시 50분경 방어선을 편성하였고 뒤이어 중공군이 율전리 일대로 진출하여 횡성과 속사리 양 방향으로 진출하려 공격을 하였으나 미 제3사단의 화력지원을 받아 적을 격퇴한다. 이후 사단은 제3, 5연대가 미 제2사단에 배속되고 유동 일대에서 제8연대를 중심으로 전투력 복원을 실시하여 끝까지 전선을 이탈하지 않고 중공군과 격전을 한다.
(2) 국군 제5사단의 상황(어론리)
제7-8연대
부평리
도수암
상수내리
국5-27연 현리
신풍리 소치리
*매봉 제5사 정자리 용포
국5-36연 갑둔리
어론리 *888 검부리 대암산
미 제2사
*714국5-36-2대대
*933 비득재
* 가리산 자은리 *1076 *우각산 가마봉 오마치
*873 상남리
*833 국5사 국7사
광암리 *675
침교
도관리 외야리 고사리재
방내리
한계 내촌강
*643 (미 제2-23연) *683(국5-36연)
외삼포리 *533 *4762 장평리 *559 국5-35연 *379
군업리 *587 *796(미 제2-9연대)
국군 제5사단은 5월 7일부로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이래 미주리선으로 진출하여 홍천-인제를 연결하는 도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사단은 매봉-상수내리를 연하는 선에서 제35연대를 좌, 제27연대를 우에 배치하고 제36연대를 예비로 논리 북방 매봉-상수내리를 연하는 선에 진지를 점령했다. 사단의 좌측방에는 미 제2사단 제브라 특수임무부대가 있고 우측에는 국군 제7-8연대가 인접해 있었다.
국군 제5사단을 공격한 부대는 중공군 제9병단 예하 제12, 27군이었다. 제12군의 목표는 국군 제5사를 돌파하여 우회 종심기동으로 속사리를 차단하여 국군을 포위섬멸하기 위한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였다.
중공군은 5월 16일 17시 30분에 내평리 일대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우측 국7-8연대가 돌파되면서 국5-27연대도 포위를 고려하여 22:00시경 철수를 개시하엿다. 자정이 지나 좌측 제35연대도 괘석리로 철수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이 이미 우각산 등 주요고지를 선점하여 광암리로 향해야 했다.
17일 낮 동안에 제36연대의 언ㅁ호하에 부대를 재정비하고 미 제2사단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노네임선후방 장남리에 제36연대, 광암리에 제27연대, 외야리에 제35연대를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그러나 적이 야간에 기습공격하여 지휘통제가 마비되어 중공군의 포위망을뚫고 내촌강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결국 미제10군단의 전선 조정으로 미 제2-23연대가 국5-27연대 전방인 643고지군에, 미 제2-9연대가 국5-36, 35연대 후방에 재치되었다.
여기서 국 제5사단 장병들은 미 제9연대의 화력지원을 받으며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3)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춘천 북산면 내포리, 내평리는 어디에?
(나) 광암리에서 발굴된 군번 0167621은 어느 용사입니까?
(다) 국군 제5, 7사단은 전투를 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피리소리에 놀라 도망친 것일까?
(지역 주민의 제보 내용을 기초로)
(라) 과학화 전투훈련장에 남겨진 용사님의 병복을 빕니다.
다. 국군 제3군단의 붕괴
(1) 국군 제9사단의 상황
국군 제9사단은 제3군단의 좌전방 사단으로 제28연대와 30연대를 전방, 제29연대를 예비로 방어편성 했다. 제3군단은 2개 사단으로 전방 방어선을 편성했다. 제9사단은 16일 20시경 좌측의 국군 제7-5연대의 측방 유입으로 상세한 전장 상황을 알게 되었다.
5월 16일, 제9사단 정면에는 적의 공격이 없었다. 그러나 자정이 지나면서 전방 부대들이 돌파되어 고립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제9사단장은 군단에 철수를 건의 했으나 제3군단장은 미 제10군단장에게 전황을 물었으나 아무 이상이 없다는 답변을 듣고 철수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9사단장은 퇴로가 차단당하기 전에 야포와 차량을 먼저 철수키로 하고 이동시켰다. 그러나 이미 오마치가 차단되어 다시 용포로 돌아왔다.
결국 사단은 17일 새벽 4시경 철수를 명하였고 용포 일대로 철수를 하게 된다. 그러나 낮 12시경 서쪽 능선에서 중공군의 요란사격을 가해왔고 집결된 부대들은 포위됨에 놀라서 사방으로 분산하게 된다. 당시에 이미 적 1개연대가 오마치 넘어 암달동을 점령하고 북한군 제6사단 제1연대가 귀둔리에서 현리로 이동하고 있었다. 당시 현리는 국군 제3사단 및 제3군단 직할부대, 제7사단 제5연대, 수도사단 제1연대 제1대대 일부 병력이 혼재되어 있었다.
(2) 국군 제3사단의 상황
국군 제3사단은 제3군단의 우측 사단으로 덛적리, 한석산, 가리봉을 연하는 선에 진지를 편성했다. 제18연대를 가리산 1226고지에 일대에, 제22연대를 가리봉 1519고지 서쪽 능선 일대에 배치했다. 또 제23연대를 예비로 전방 연대의 후방에대대별로 거점을 점령토록 하였다. 가리봉의 동쪽 능선부터는 국군 제1군단 수도사단이 배치되었다.
사단은 생포한 포로 등 여러정황으로 적이 가리산으로 공격할 것으로 판단하고 여기에 대비히고 있었다. 사단의 정면을 공격한 적은 북한군 제5군단 예하 제6, 32, 12사단으로 5월 15일부터 가리봉 방향으로 공격하여 17일 04시경 이 일대를 돌파했다.
제3사단은 제9사단으로부터 제7사단이 철수 중이며 오마치고개가 피탈당했다는 연략을 받고 군단이 포위 된 것으로 판단하고 17일 08시경 철수를 명령했다. 13시경 현리에 도달했으나 이미 북한군 제6사단 제1연대가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3) 국군 제3군단의 퇴로 차단
서화리 간성
와촌 *안산
원통
소양강
한계령
국3-18연 *가리산 수도-1연
*1226 국3-22연
인제
*958 국9-30연 회전동 양양
*한석산
*점봉산
내린천 *매봉
*596 검우석
국9-28연
현리
도채동
*매봉산
*대암산 용포
검전리 오마치 *방태산
현리 일대에서 만난 제3사단장과 제9사단장은 각각 1개 연대씩 차출하여 오마치 고개를공격하기로 했다. 이때 군단장은 5월 17일 14시경 현리에 도착하여 작전회의를 열고 공격명령을 하달한 후 15시 30분경 하진부리의 군단 전술지휘소로 복귀하였다.
제9사 제30연대와 제3사 제18연대가 공격명령에 가담하였으나 부대들이 오마치 공격을 하기도 전에 적의 기습에 무력화되어 방태산으로 퇴각하면서 비극이 서막이 시작되었다.
5월 18일 03시경부터 부대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방태골을 지나 방태산을 넘어 광원리 일대로 퇴각하게 되었다.
중공군은 굶주린 이리떼처럼 국군 제3군단을 추격하여 광원리까지 따라 붙어와 부대들은 다시 창촌으로 퇴각하게된다. 주요 길목마다 이미 중공군 첨병 부대들이 지키고 있어 국군의 철수는 지휘체계가 무너진 상태로 소부대 또는 각자 도생의 방법으로 준령을 너어야 하는 고난의 행군으로 무기도 버리고 군복도 벗어 던지고 민간복 차림으로 사단장도 걷고 걸어야 하는 상황이 계속 되었다.
창촌에 이르고 있을때에 이곳도 중공군이 지키고 있었고 정예연대라는국군 제3-18연대도 이곳에서 계방천을 도하하다가 기습을 받아 흩어져 다시 광원리에서 모이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을 보고받은 미 제8군사령관은 이 지역에서 반격을 개시하지 말고 중공군의 공격이 멈출 때까지 기다리라 지시했다. 그리고 미 제3사단과 미 제187공정연대 전투단에 출동준비 명령을 하달하였다.
한편 중공군 첨병 부대들은 광원리, 하진부리까지 일부 부대가 들어와 국군 제3군단을 압박하여, 결국 제3군단 주력은 을수재를 넘어 하진부리로 철수해야 했고 여기서 다시 횡계리로 이동해야 했다.
그러나 부대가 하진부리에 도달할 때에 미 제8군사령관은 하진부리일대에서 더 이상 퇴각하지 말고 적을 저지하도록 하였으나 군단은 5월 21일 퇴각을 하여 제3사단은 송계리로, 제9사단은 대화로, 군단사령부는 영월로 퇴각하여 흩어졌다.
결국 이 상황으로 국군 제3군단은 해체되고 국군 제9사단과 제3사단은 국군 제1군단과 미 제10군단에 다시 배속되게 된다. 당시에 양 사단의 병력 수준은 제3사단이 34.2% 수준의 3,621명, 제9사단이 40.0%수준의 4,5872명이었다.
(3-1) 유해 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용포에 남겨진 일병 김권순 유해의 만남
(유복녀 김여사와 그 남편 안중사의 한)
(나) 잠뱅이 걸치고 방태산을 넘는 제9사단장 최석 준장과 학도병
(다) 전사에 기록하지않고 있는 국군 제3군단의 현리진입과 미 제8군의 전략은?
(유재흥 장군의 기막힌 역사)
(라) 현리 가옥 빨래줄에 매달린 많은 두개골은 누구입니까?
(너도 그랬으니 나도 그렇게 한다)
(마) 사실 학도병이 왔는데 총도 없이 논바닥에 앉아서 죽어갔다.
(바) 유해가 묻혀 있다 돼지막사 사건의 전말
(사) 논에 묻혀진 유해의 최후도 안타까웠다. 발굴되어 어느 곳에 집중 매장처리 되어버렸다.
(4) 미 제2사단의 양쪽 견부 확보
국군 6개 사단이 미주리선으로 진격하는 동안 미 제2사단은 대룡산, 가리산, 매봉을 연하는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이때 좌로부터 제9연대, 제38연대, 제23연대를 배치했다. 미 제2사단은 중앙의 제38연대에 네덜란드 대대를, 우측의 제23연대에 국군 제5사단 제36엱대 제3대대와 프랑스 대대를 각각 배속했다.
우측의 미 제23연대는 제2대대와 배속받은 공수 1개 중대, 미 제72전차대대 예하 1개 소대로 "제브라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우측방을 방어했다. 미 제23연대의 주력은 사단의 예비로써 와촌 일대에 집ㅈ결시켰다. 국군 제5-36연대 제3대대와 아이반호(국군 1개 중대 규모로 편성된 지휘소 방호부대) 부대를 전초부대로 운용했다.
가리산 국5-36-3대대 미2사 국5사
미 2-23연
제브라
미2-38연 특수임무부대
미2-9연 네덜란드
프랑스
한계
미 해병1사 미 제2사 걸운리
대룡산 홍천
미 제2사단의 정면을 공격한 중공군은 제12군 예하 제31, 34, 35사단이었다. 이들은 5월 15일 밤에 소양강을 도하한 후 5월 16일 17시 30분에 사단의 우측과 정면에서 돌파를 시도 했다. 그런데 이들이 이곳으로 공격한 것은 이곳에 미 제2-23연대에 배속된 국5-36-3대대를 사전 정찰을 통해 확인하고 이곳이 국군 제5사단의 책임지역으로 오판했다.
중공군이 미군의 정면을 돌파하면서 미군의 상항과 지형에 관한 정보가 부족하여 2시간 가량 지체하기도 하면서 5월 17일 아침 국군 제5사단을 돌파하고 인제-홍천 도로를 따라 계속 진격하여 5월 18일에는 국군 후방의 주요 목을 차단하고 하진부리선까지 진출하게 된다.
미 제2사단은 퇴로가 차단되자 배속된 프랑스 대대를 평천 일대로 투입하였고 이에 다라 미 제23연대가 한계 일대로 퇴각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제23연대는 탱크 2대와 100여 대의 차량을 버리고 도보로 퇴각하기도 해쑈고 5월 18일 17시부로 한계를 좌우로 연하는 선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한편 미 제2사단의 좌익 미 제38연대의 가리산지역으로 중공군 제35사단 제103연대의 돌격부대가 치고 들어와 17일 03시경 피탈되고 계속하여 평천 계곡으로 치고 내려 오던 중에 프랑스 대대가 새벽부터 20시까지 이를 저지하였다.
미 제2-38연대장은 가라산에 군단 일제사격을 요청하여 중공군에 최대한의 피해를 강요한 후 가리산 지역을 철수하였다. 한편 우측의 벙커고지(778고지)일대는 미 제38-3대대가 점령한 상태에서 중공군의 기습으로 5월 17일 야간에 일시적 피탈 되었으나 백병전을 방불케하는 격전에서 최종 미군이 승리하여 진지를 사수하였다.
5월 18일 아침 , 미 제8군은 778고지를 기점으로 한계-와코선이 연계된 수정된 노네임선을 설정허고 12시를 기해 병력배치를 완료하라 명령하였다. 이로써 좌로부터 미 제1해병사단-미 제2사- 국군 제5사- 국군 제7사단이 배치된 새로운 방어선이 완성되었다.
저녁부터 이 778고지로 중공군이 총공세를 가해왔다. 이 고지가 좌측 견부로써 돌파하지 않으면 우회기동으로 국군과 유엔군을 포위 섬멸하려는 공산군측의 작전 기도가 실패하게 된다. 반대로 미군은 이곳을 사수함으로써 동측부대들의 철수를 엄호하고 좌측의 미 제1해병사단의 방어를 용이하게 하는 잇점이 있었다.
그러나 미 제8군은 고지가 너무 전방에 나가있어 계속적인 방어에는어려움이 있다고 보고 미 제2-38-3-K중대를 철수시키게 되는데 고수방어를 하고 있던 중대는 진내 사격을 요청하여 이 고지 위에 약 1만여 발의 포탄이 작렬하여 표고가 2m(?) 주저앉으며 중공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 철수하게 되었으며 일시적으로 미 제1해병에서 진지를 인수하여 철수를 엄호하였다. 이후에 해병도 철수하여 이 일대는 중공군이 점령하였으나 중공군의 총공세는 결정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렇게 미군이 수정된 노네임선으로 철수하자 중공군은 20일 03시경부터 총공세를 가해왔고 미군은 19일에 176대, 20일에 21대의 폭격기를 투입하여 중공군은 막대한 인적 피해를 입으면서 21일 전투지속 능력 상실의 뚜렷한징후를 보였다.
이에 바로 미 제10군단은 제187공정연대 전투단에 공격 명령을 부여하여 반격작전으로 전환하게 된다.
(4-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사오랑치 고개 일대의 발굴 유해는 민간인이지, 아니면 어느 국적인지?
(나) 발굴하지 말라는 벙커고지 유해를 발굴한 발굴단의 의미는 무얼까?
(제천 세무대학에 와 있는 미국 교수의 헌신적인 유해발굴 노력)
(다) 미 제2사단 K중대의 전투 미담(일본측 한국전쟁사 8권 240~)
(라) 가리산-매봉구간의 개인호 형태와 지역 주민의 제보
어론리-인제간 도로상에서 불타는 차량들과 이것을 가져가려는 중공군의 숨바꼭질
(5) 국군 제1군단의 우측견부 고수
1951. 5. 16일 17시 30분, 중공군 제12군이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의 협조점이자 유엔군을 동서로 양단할 수 있는 요충지인 속사리를 포위하기 위해 공격을 개사하자 북한군 제5군단도 국군 제1군단 수도사단의 전방의 원통 일대에 공격을 개시했다.
간성
용대리 미시령
*827 속초
노동 저항령
원통 백담사 *882 마등령 설악동
제11-20연
*안산 *대승령 *972
원통 우화리 *1456
수도-기갑연 설악산
한계령 약수리
수도-1연
가리봉
수도사단 제1연대는 적의 공격에 일부 거점을 탈취당하기도 했으나 한계령에서 적의 진출을 저지하였다. 수도사단 기밥연대는 내설악에서 국군 제11사단은 외설악과 동해안을 연하는 선에서 북한군 제5군단의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다.
국군 제1군단장은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의 상황을 보고 받고 예하 부대들은 주저항선인 한계령-대청봉을 연하는 선에서 철수시켜 가라피-장승리-양양을 연하는 선에 새로운 방어선을 선정했다. 군단은 18일 12시 육군본부로 부터 와코선(미군의 수정된 노네임선상)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수령했다.
국군 제1군단장은 이에 대관령을 확보하는 것이 승패를 좌우할 것이라 판단하고 예비인 제11삳ㄴ 제20연대를 차량으로 횡계리로 이동시키고 수도사단 제1연대를 대관령으로 보냈다.
국군 제11-20연대와 수도사단 제1연대는 한계령 일대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벌이며 5월 18일 유천리, 대관령을 연하는 선에 종심깊은 방어선을 형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5월 21일 짙은 안개를 틈타 중공군이 침투했다. 양 연대는 축차적인 방어를 하며 21일 야간에 대관령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5-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한계령에서 내 부대원이 다 죽었소~!" (윤흥정 장군의 눈물, 당시 수도사 기갑연대 대대장)
(나) 중공군이 왔다는 곳이 이곳 유천리-대관령 선상에는 없다.
(지역주민이 본적이 없다고 한다) (운두령선까지 온 것이 아닌지) (북한군과 혼성 4개 연대가 공격했다고 전사 기록)
*중공군의 항미원조사(중국군의 한국 전쟁사) 2권 518~521페이지에 보면 5월 19~20일, 미 제3사단이 동진하여 풍암리, 하진부리에 도착하여 전역 돌파구를 봉쇄하였다고 쓰여 있다. 더이상 부대 식량이 떨어지고 현지에서도 보충할 여건이 못되며 이미 한국군은 궤멸되어 후방으로 물러난 상황에서 미군이 작전지역에 투입됨으로써 자국군의 피로도가 상승하고 전투력 복원이 어려우니 후방으로 철수하여 휴식과 정비를 한 후에 다시 기회를 봐야한다는 건의문이 일선 지휘관들이 팽덕회에게 팽은 다시 모택동에게 보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부 부대가 운두령 일대에서 포위되어 격멸되고 유엔군은 반격을 시작하게 되었다.
(6) 유엔군의 반격여건 조성(돌파구 차단 작전)
(가) 국군 제3군단의 철수 작전
군단은 5월 17일 야간에 현리에서 중공군의 추격을 받으며 험준한 방태산(1436)을 넘어 철수하는 동안 다수의 공용화기와 무전기를 버리고 고지 정상으로 국 제3-18연대의 엄호를 받으며 철수하였다.
이 당시에 현리-용포 도로 상에는 미 전폭기들이 군단이 파기하지 못하고 유기한 차량과 포차들을 끌고 북으로 북상하는 적들에게 소이탄과 기ㅏ총소사로 파괴 도는 소각하였다.
당시 군단은 상부의 명에 따라 와코선(1009-창촌리-오대산을 연하는 선)을 점령하기 위해 일부는 방태산-구룡덕봉-광원리-창촌으로, 주력은 내린천을 따라 방태산-남전동-광원리-창촌을 목표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일부가 이곳에 먼저 도착하여 광원리에서 창촌에서 적의 기습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계방산(1577)과 오대산 사이에 있는 을수재를 넘어 하진부리로 철수하게 된다. 하지만 2일간의 굶주림과 피로로 다수의 병력이 체력 한계점에 도달해 철수를 포기하고 포로가 되었다. 결국 이 상황으로 국군 제3군단은 해체되고 국군 제9사단과 제3사단은 국군 제1군단과 미 제10군단에 다시 배속되게 된다. 당시에 양 사단의 병력 수준은 제3사단이 34.2% 수준의 3,621명, 제9사단이 40.0%수준의 4,5872명이었다.
군단이 재편성을 서두르고 있을 때에 북한군과 중공군으로 혼성 편성된 4개 연대규모의 적이군단의 저지선을 돌파한 다음 하진부리-강릉 도로를 차단하려는 듯 공격을 계속하였다. 이때 제3사단은 유천리 북쪽에 3개 연대를 종으로 배치하고 제9사단도 제30연대와 제28연대를 속사리 부근에 배치하여 적의 진출을 저지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제3사단은 정선으로, 제9사단은 대화 쪽으로 다시 철수하여 속사리-하진부리선이 붕괴 되었다.
(나) 미 제3사단의 돌파구 차단
계방산 1577
운두령
흥정산 1277 *1325 *1324 회령봉 *보래령 *`1272 *1795
*953 미 제7연
속사리
창동리 *645 *924
미 제65연 *1003
장평 삼거리 *1095 *백적산1141
미 제65연 장평리 미 제7연
국군 제3군단의 현리 철수작전으로 유엔군의 중동부 전선은 벙커고지-풍암리-속사리-철갑령을 연하는선에서 대돌파구가 형성되었다. 제8군사령관은 돌파구 확장을 저지하기 위하여 18일 자정에 예비로 서울에 대기 중인 미 제3사단 제7연대와 경안리에 집결 중인 제65연대를 긴급히 제10군단의 우전방으로 이동시키도록 하였다.
19일 아침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미 제3사단의 정찰대가 속사리-하진부리 일대를 정찰한 결과 적정이 미흡하자 제15연대를 풍암리 북쪽에 추진 배치하여 국군 제7사단과 협조, 횡성-풍암리 축선에서 적을 저지하였다, 이날 미 제2사단 제23연대도 한계리에소 중공 제118사단의 공격을 , 프랑스 대대는 중공 제31사단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19일을 전후하여 중공군의 공격기세는 현격히 둔화되고 미 제3사단은 제7, 65연대가 백적산과 장평리에 진출하면서 적이 운두령에 집중 배치된 것을 확인하여, 21일 사단은 2개 연대 병진으로 공격을 하여 순조롭게 진출하는 도중에 속사리-하진부리를 방어하고 있던 우측 국군 제3군단이 적의 기습에 돌파되면서 철수하는 바람에 일시적 위험에 봉착하기도 했다.
사단은 다시 22일 공격을 재개하여 우세한 화력으로 18:00시경 운두령을 탈환하여 적의 진출이 저지 되고 공세이전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다) 대관령 확보 전투
오대산 1563 제26연대
*1560 *동대산 1343 *노인봉 1338
진고개 *황병산 1407 매봉 1173
을수재 월정사 제1-2대대 *1150
*1359 *1167 건봉 1157
제20-3대대 백일평
*967 *장군암 1140
제20-2대대 싸리재 대관령
국 제3사 제1-1대대
유천리 *투구봉 *941
909 칼산 횡계리 제1-3대대 *능경봉
국 제9사 제20-1대대 1123
하진부리 *988
국군 제1군단은 중공군의 5웕 공세를 맞아 설악산-속초선에서 분전하였으나 육군의 명으로 19일 제3군단과 전선을 조정하기 위해 오대산-두노봉-남애리를 연하는 와코선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군단은 군단의 전투지경선을 따라 진출하는 적을 저지하기 위해 국군 제11사단 제20연대를 군단 좌측방 후방의 유천리-횡계리에 배치하였다. 그런데 21일 제3군단의 속사리-하진부리선을 돌파한 중공군 일부가 대관령과 강릉을 목표로 경강국도로 진출하여 재20연대와 격돌하게 된다.
따라서 강릉의 비행장과 군수품 등의 집적장소로써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군단은 대관령 확보가 필수라 결론짓고 수도사단은 대관령을 확보하고 제11사단은 정면의 적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강릉에서 정비중이던 수도사단 제1연대는 적정도 알지 못한 채 긴급히 대관령으로 이동했다. 22일 새벽에 벌어진 전투에서 제11-20연대(제1연대 2대대 증강)백일평-대기리 선에서 저항했으나 1개 연대 규모의 적이 방어선을 돌파하여 대관령으로 진출한다. 그러나 곧바로 아군의 공격에 물러나면서 2개 대대규모의 증원을 받아 이번에는 능항봉으로 우회 공격을 하였으나 다시 격퇴되었다.
적은 다시 2개 대대규모로 횡계치를 공격했으나 아군의 협동작전과 동해안의 함포지원에 분산철수하게 되었다. 이에 아군은 23일부터 바로 재반격을 개시하게 된다.
(라)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1) 백일평 일대는 험준한 준령지역으로 실제 전투 흔적이 적었다.
2) 전투력이 저하된 공산군 혼성부대(?)
3) 을수재에 일어난 비참한, 그러나 너무나 처절하게 포로가 된 사연
(참전용사 증언)
(7) 용문산 승전보
공산군은 5월 16일 공격을 개시한 주공부대들이 중동부 전선의 주저항선을 돌파하자 중서부 지역의 유엔군을 고착, 견제하여 중동부 전선으로 유입을 차단하고 그들 주공 부대의 진출을 지원할 목적으로 17일 조공부대를 북한강 계곡으로 투입하여 중서부 전선에서도 혈전이 시작 되었다.
이 기도의 일환으로 중공군 제19병단 예하 제63군의 3개 사단이 북한강과 홍천강의 합류 부근을 방어 중인 미 제9군단의 중앙사단인 국군 제6사단을 공격해 왔다.
당시 제6사단은 사창리에서 중공군 4월 공세로 물러난 후 전선 조정에 다라 노네임선의 용문산(1157) 일대를 점령하고 방어에 주력하였다.
중공군의 5월 공세가 임박하여 제6사단장은 주저항선이 북한강에서 12~17km 떨어져 있어 방어에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제2연대를 홍천강 남쪽에 배치하여 주저항선인 용문산 서쪽에 제19연대, 동쪽에 제7연대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사단 수색대를 홍천강 북쪽에서 일반 전초로 파견하였다.
북한강 중공군 187사단
중공군 187, 188사단
청평댐 청평호 미사리 마곡리 홍천강
울업산 장락산맥
송산리
신천리 *장락산
창촌
무명산 *나산
마치고개
*벽암산 *427 설곡리 국6-2연대 미7-17연대
국2-31연대 국6-2연대
당시 좌인접 국2-31연대는 화야산에서, 우인접 미7-17연대는 두능산에서 철수하여 제2연대만 청평호 남쪽의 요지를 방어하고 있었다. 18일 낮에 중공군은 중대규모로 도하공격을 시도하다 격퇴되었다. 어둠이 오자 울업산에 대대규모로, 우전방 장락산맥에 연대규모로 도하공격을 감행하였으나 5개 포병 대대의 화력지원으로 적의 공격을 격퇴하게된다.
그러자 적은 이 일대가 주저항선으로 오판한 듯 19일 새벽에 제187, 188사단을 투입하여 돌파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홍천강변의 감제고지인 559고지의 제1대대는 항공지원 속에서 진지를 사수하였다. 그러나 계속적인 적의 파상공격으로 축차적으로 포위망을 탈출하여 나산의 지휘소로 철수한다.
중공군은 이번에는 우전방에 예비 1개 사단을 투입하여 울업산 일대를 공격하여 제2대대는 항공 폭격의 엄호속에 427고지로 철수하게 된다.
계속되는 적의 공격으로 탄약과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적은 총공격울 개시하여 제1대대는 나산에서, 제3대대는 353고지에서, 제2대대는 427고지에서 전면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조명지원하에 진내로 진입하는 적과 백병전으로 맞서 결국 적을 격퇴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19일 밤에 미 제8군사령관은 중동부 전선에서의 적의 공격이 현저히 둔화된 점을 고려 즉시 재반격작전으로 돌입, 중서부 전선의 미 제1, 9군단에 문산-포천-춘천을 연하는 토페카선으로 공격을 명하였다.
공격명령을 ㅅ구령ㅎ란 사단장은 20일 05:00시에 제7연대와 제19연대를 공격으로 전환하여 북한강 남안으로 진출하자 중공군은 포위공격을 우려하여 서둘러 강 북쪽으로 철수를 개시하여 제2연대와 연결하게 되었다.
결국 중공군은 이곳 장락산맥 일대의 전투에서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고 반면에 국군 제6사단은 사창리에서의 굴욕적인 패배의 불명예를 씻고 중부전선의 절단을 막아냄으로서 공세이전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