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촌과 천곡의 문경지교刎頸之交
문과 급제자 188명, 상신 5명, 대제학 2명 등을 배출한 광주 이씨는 조선 시대 명문가 중 명문가라 할 만하다. 시조공 이당의 묘가 경북 영천에 있는 것도, 광릉이라 불리는 것도, 그 위쪽에 천곡 최원도의 어머니 정부인 영천이씨의 묘가 자리한 것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고려 말기 요승 신돈이 전횡을 일삼으며 세상을 어지럽히자 천곡 최원도는 고향 영천으로 낙향하였다. 과거 동기인 둔촌 이집이 신돈을 신랄하게 비판하여 마침내 포살령이 떨어졌다. 신변위협을 느낀 둔촌은 연로한 아버지를 업고 밤중 산길을 택하여 간신히 천곡의 집에 당도하였다.
그날 천곡의 생일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천곡은 둔촌 부자를 보고 반기기는커녕, “누굴 망치려고 이곳까지 찾아왔단 말인가!” 대노하여 이들을 내쫓고, 역적들이 앉은 자리라면서 그들이 걸터앉았던 바깥채 툇마루를 불질러버렸다.
쫓겨난 둔촌은 천곡이 진심으로 내친 것이 아닐 거라 생각하고 멀지 않은 길옆 덤불 속에 몸을 숨겼다. 천곡은 손님들이 돌아가자 밤늦게 둔촌 부자를 찾아 나섰다. 아무도 모르게 그들을 자신의 다락방에 숨겼다. 식욕이 왕성해졌다면서 큰 그릇에 고봉으로 밥을 담게 하여 셋이서 나누어 먹었다.
이상하게 여긴 여종 제비가 문구멍으로 몰래 들여다보았다. 이 사실은 부인에게 전달되었고, 마침내 천곡의 귀에도 들어갔다. 천곡의 함구령에, 발설을 염려한 부인은 문지방에 혀를 얹고 문을 닫아 스스로 벙어리가 되었다. 제비 또한 비밀을 지키려고 자결하였다.
이듬해 둔촌의 부친 이당이 돌아가시자 천곡은 자신의 수의를 내어 주고, 어머니 산소 아래 자신이 묻힐 묘자리에 장사지냈다.
광주이씨는 이당을 시조로, 둔촌 이집을 제1대로 한다. 이당의 후손들은 지금도 시조 묘제 때 천곡의 모친 영천이씨와 양 집안의 멸문지화를 자결로 막아낸 제비의 제물까지 준비하여 같이 제사를 올리고 있다.
우정과 신의를 중히 여기는 두 사람의 문경지교는 일제강점기 교과서에는 ‘진우’로, 2001년부터는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교과서 ‘생활의 길잡이’에도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