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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와 동등
1991. 07. 26. 김준호 선생
이 말씀을 듣는 사람도 오소서 하고 외치십시오. 목마른 사람도 오십시오.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은 거저 마시십시오. 나는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말해둡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덧붙이면 이 책에 기록된 재난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리실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에서 무엇을 떼어내면 이 책에 기록된 생명의 나무와 그 거룩한 도성에서 그가 차지할 몫을 하나님께서 떼어내어 버리실 것입니다. 이 모든 예언을 보증해 주시는 분이 그렇다. 나는 곧 가겠다. 하고 말씀 하십니다.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 주 예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8절 9절, 제가 다시 보겠습니다. 이것들을 보고 들은 이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그 일을 내게 보이는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저가 내게 말하였다.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이들과 함께 그리하지 말고 오직 여기서 하고 싶은 말씀은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이들과 함께 된 종이다. 그러면 우리들이 함께 모여서 사는 생활은 성경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사람은 앞으로 요한에게 일러주셨던 천사의 말씀을 따라서 비추어본다면 여기 앉아계신 분들이 육신을 벗고 천상에 갔을 때 모습은 천사가 되겠다, 그런 것을 배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요한 사도께서 천사에게 인사 경배를 하려고 할 때 하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다시 보면 그 천사들이 묵시록을 계시해줬습니다. 그 천사가 계시한 말씀들을 듣고 본 사람은 나 요한이다. 요한이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했습니다. 그래 천사가 말하기를 나는 너, 요한이지요. 네 형제 형제들은 여기 모인 사람들이 요한 사도의 형제들입니다. 우리들입니다. 요한사도나 우리나 또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을 말을 지키는 사람들과 함께 된 함께 된 종이다. 그러니 내게 경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이 말씀은 똑 떨어지게 우리라는 말이 들어있어요. 또 성경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그 뜻이 들어있어요. 또 나는 너 네 형제와 똑같이 된 사람들이다. 그러니 천사가 그렇게 말한 것을 보면 그 천사는 누구냐 하면 요한 사도와 더불어 형제 된 사람이요. 또 요한과 더불어 성경말씀을 지킨 분이 천사가 되었다는 점을 여기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믿어집니다. 그렇게 되어 집니다. 그러면 반드시 가령 우리 어머니 한나 어머니께서 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또 여러분들이 천상에 가서 어머니들을 찾아볼 때에 분명히 천사가 되셔서 계실 것으로 그렇게 되어 집니다. 또 그렇게 인식이 됩니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들이 천사가 될 신분들입니다. 또 예수님도 어느 날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이 땅에서 순결하게 사는 사람들은 천사와 동등이요. 그런 말씀도 하신일이 있는 것을 보면 예수님도 알기에 땅위에서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고 예수님과 더불어 깨끗이 살다가 죽은 사람들은 천사가 되어있을 것을 예수님도 미리 가르쳐주신바가 있습니다. 그 성경말씀 몇 절이십니까? 누가복음 20장 찾아 읽어주세요. 큰소리로 읽어주세요. 34절 3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가고 시집도 가지만 죽었다가 살아나서 저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장가가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습니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죽는 일도 없습니다.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예, 여기는 천사와 같이 된다는 뜻이 예수님 말씀에도 비춰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시는 장면 요한복음 20장, 제가 개역 옛날 성경말씀으로 읽겠습니다. 이 말씀 요한복음 20장으로 개역 읽겠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운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 새 둘이 같이 달음질 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쌓았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다른 곳에 개켜있더라. 그때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이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 가니라. 11절 마리아는 무덤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속을 들여다보니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 시체 뉘였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여기서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사람이고 여기 나타난 분은 천사들이십니다. 그런데 대화를 하시고 있어요. 물론 사람이 죽으면 자기 몸은 땅위에 내버리고 천사가 되어서 더 분명하게 천사가 되어서 찬송도 부르고 말씀도 할 것 같이 되어 집니다. 그렇게 느껴져요. 몸을 갖은 여자도 천사들과 같이 대화한 것을 보면 몸을 벗은 다음에야 더욱더 말하기 좋지 않습니까? 서로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분명히 사람이 몸을 벗은 다음에는 천사들과 같이 되어서 같이 천상에서 복락을 누리는 것이 아니냐? 그런 상식을 얻게 됩니다.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분명히 그 여자한테 대화하고 있어요. 그러면 또 그 막달라 마리아는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분명히 사람들이신지 천사들이신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사람과 천사가 같이 사이좋게 이야기한 장면이 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그러면 여기 서 계신 분은 3일전에 십자가에서 못 박혀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순교당하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몸 이십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3일후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살아나신 예수님이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옆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사람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줄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 이건 예수신지는 미처 몰라본 여자이지만 그래도 사람으로 보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동산지기로 보인 것이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몸은 천사와 동등이요. 또 분명히 하나님이신데 사람의 몸으로 보이신 것을 보면 하늘나라 가서도 막달라 마리아가 봤던 사람의 모양을 예수님이 하시고 계실 것 같이 그렇게 알아집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분명히 예수님이 마리아를 불렀군요.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그러면 그때는 삽시간에 예수님으로 다시 인제 정체가 밝아지셔서 보였습니다. 곧 아니 1초 2초 전에는 동산지기로 보이던 것인데 갑자기 예수님으로 보여 져서 예수님을 알아보는 장면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계세요. 막달라 마리아와 똑같은 신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가 만일 땅위에 몸을 벗고 천상에 갔을 때도 천사인지 예수님인지 또 예수님의 몸인지 막달라의 몸인지 서로 분간할 수 없을 만큼 한 인격적인 교제가 있지 않을 것이냐? 하는 그런 상식이 얻어집니다. 꼭 땅위에서 만나 뵈었던 그 분이 천상에서도 만나볼 수 있겠다. 그분 그 모습대로 볼 수 있겠다. 그런 상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문적인 그런 것은 모르지요. 그러나 짐작으로 성경말씀대로 한다면 땅위에서 만나 뵈었던 예수님 땅위에서 말씀 듣던 예수님의 음성 땅위에서 서로 속삭이던 예수님의 그 마음 그런 인격적인 대화를 천상에서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그런 상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아라. 나를 만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분명히 이분이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올라가실 분인데 아직 안가셨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고 계셔 아직은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 계신 것 같군요. 그러니까 아직 올라가지 않았다. 너는 네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하라. 천상에 가서 이야기인데 땅위에서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인격적인 신분이시고 또 마리아는 자기가 사랑하던 제자이신데 바로 이때는 내가 하늘나라에 아직 올라가지 못했다. 너는 네 형제들에게 가서 말하기를 내 아버지가 곧 너희들의 아버지라고 하라. 또 내 하나님이 곧 너희들의 하나님 이라고 그 말을 하라. 어디까지든지 인격적이세요. 자기 마음이 하나님이시고 신성을 입으신 그런 천신같이 행세 안하십니다. 똑같이 인성을 갖은 인격적으로 내 동생 내 형제 또 내 우리 아버지 우리 하나님 그렇게 평등적인 약속을 해주신 것을 보면 얼마나 참 흐뭇합니다. 그러면 너는 네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해라.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이르니라. 이렇게 말씀했다. 그 말은 내 아버지가 곧 너희의 아버지이다. 내 하나님이 곧 너희의 하나님이다. 그걸 이렇게 말씀했다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상식적인 상고를 했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을 드리려는 의향은 그런 뜻으로 말씀을 드릴시간은 아닙니다. 어쩌면 가장 땅위에서 더럽힘을 입었던 죄인의 대표인 마리아와 어쩌면 그렇게도 천상에서 오신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부활하신 절대 순결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라는 것이 그렇게도 극적이라는 것을 상고해 보려고 하는 시간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우리에게 감격을 자아내고 안심을 주시고 평화를 주시고 희망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사랑을 자아내는 장면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인격이지요. 분명히 인격을 갖추신 예수님이시고 인격으로 태어나셔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서는 가장 33년을 깨끗이 살다가 돌아가셨고 다 마치고 돌아가신 예수님은 다시 부활하신 몸이니 설령 전신이 흠이 있다. 하더라도 부활하신 다음에야 완전하신 신격과 인격을 갖추신 어른이십니다. 그렇게 무고하시고 깨끗하신 예수님은 더욱 깨끗해 졌다는 것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끗하신 예수님이 이 땅위에서 인류가 수억 수십억이 되련만 제일 깨끗한 사람 또 우리들이 흠 많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가장 순결한 동정녀 그런 분을 찾아가지고 이왕이면 사랑함직 하시고 또 처음으로 보신 시간이니 기념으로라도 가장 깨끗한 그런 동정녀를 찾아서 자기가 몸을 보여주시고 같이 영광을 누렸다면 하는 것이지요. 그런 생각을 품는 것은 우리들의 우월감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상식과 우월감과 모든 땅위의 영광을 다 초월하시고 그걸 다 모은 것이 하필이면 땅위에서 가장 죄 많은 여자 가장 상처가 많은 여자 가장 서러움이 많은 여자 가장 병이 많은 여자이지요. 정신적인 병이 가득 차 있던 여자 가장 죄 많은 여자를 만났다는 것은 예수님이 땅위에 오신 의도가 여기서 들어납니다. 말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이 왜 여기 오셨냐하는 그 목적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과연 자기가 선언하신 그대로 의인이나 성인이나 깨끗한 동정녀를 찾아오신 것은 절대로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분이 찾아오신 것은 버림당한 사람 탕자 창녀 죄녀 죄인 아니 병이 가득한 사람 그러니까 잃어버린 사람을 찾으러 오신 것이다. 그런 것을 두드러지게 극적으로 보이신 장면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른 때는 혹시 체면 인사라도 그렇게 죄인을 만나줬다고 합시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만은 생명을 걸고 오신 세상에 또 영원한 영광을 차지하고 하늘나라로 가실 몸이시니까 기념으로라고 깨끗한 죄 없는 사람을 만났다. 할 것이면 자기 본심이 의도가 거기 있지 않았다는 것이 정체가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자기가 떠나는 마당에 하늘나라 가는 마당에 가장 자랑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할 시간입니다. 과연 못 잊어, 못 잊어 가장 찾아보고 싶은 사람을 찾았다고 할 시간이에요. 자기가 제일 못 잊는 사람을 만나보는 시간이고 땅위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만나봤다고 하는 시간이에요. 그렇게 추측이 가요. 아니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제일 먼저 보고 싶겠지요. 외국을 갔다가 온 사람도 가장 사랑했던 자기 어머니나 자기 애인을 먼저 만나보고 싶지, 어떠한 사람의 감정을 갖은 사람이 미운사람을 먼저 만나보겠습니까? 그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시니까 자기가 영원히 땅위에 모범을 보이시기 위해서라도 꼭 자기가 가장 모범을 보이고 싶은 사람은 처음으로 제일착으로 면회를 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그 모습이 우리가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드러난 장면 부활하신 것은 천사들이 그 옷을 개어놓고 무덤을 지키는 것으로 봐서 그 한 몇 분인지 수십 분 전에 부활하신 몸이신데 분명히 자기가 그 땅위에서 사랑하던 요한이 찾아왔어요. 베드로 보다 먼저 달려간 요한은 자기 이름을 자기가 쓰지 않았지만 요한이라고 생각합니다. 땅위에서는 가장 사랑했던 요한이에요. 그러면 그때 예수님이 몰랐다고 할 수 없어요. 부활하시고 어디가 몸을 숨 키시고 엿보신 모양인데 천사들이 나타나기 전이겠지만 요한이 분명 무덤에 와봤어요. 안계세요.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 다음에 예수님이 가장 그 이 땅위의 모든 교회의 열쇠를 주마. 또 천상의 모든 대표권 사도 수제자로서 베드로를 그렇게 믿고 믿던 베드로 사도가 왔으니 자기가 뭐 다른 용무가 바쁘다면 아 베드로 왔니? 나 부활했다. 이렇게 말씀해야 해요. 그러나 그런 것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요한이나 베드로를 만나고 싶으셨다면 왜 숨어계셨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목적이 요한이나 베드로를 만나기보다는 더 큰 목적이 있다는 것이 여기 엿보여요. 그러나 안타깝게 요한은 찾아왔다가 또 베드로는 찾아왔다가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들어가 베드로가 사랑하는 수제자가 무덤을 들어왔어도 예수님은 감쪽같이 옆에 숨어 계세요. 또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쌋 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다른 곳에 개켜있더라. 이것이 분명히 세마포까지 눈여겨봤던 제자들이 분명히 무덤에 들어왔어도 숨어계신 예수님 그 의향이 어디에 계신가? 짐작이 가요. 그때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 그 다른 제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들어가 보고 믿더라. 과연 예수님은 수의만 벗어놓으시고 어디가고 안계실까? 무덤 속에 있는 시체가 없어졌던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는 것을 제자들은 망각했지요.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 가니라. 분명히 제자가 돌아가도록 그 섭섭해서 울고 가는 것 까지 다 보시고 또 참으신 점이 어디 있을까요? 이왕이면 아 나 여기 살아있다. 하시고 그 자기 부활감격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보였으면 좋으련만 그것까지 억제하시고 자기를 감추고 있는 의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한번 누구 대답해 보세요. 왜 사랑하는 제자들이 찾아왔건만 그 부활하신 기쁨과 감격을 제자들한테 그렇게 꼭 아끼시고 참고 계셨을까요? 자기가 먼저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자기가 부활하신 다음에 사랑하던 요한과 베드로를 제켜 놓고 더 사랑하고 싶고 더 만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옳은 말씀이에요. 막달라 마리아를 먼저 보고 싶은 그 뜻이 어디가 있어요? 가장 죄 많고 땅위에서 버림받은 동생 자기가 천상에서 잊어버리고 항상 울면서 헤매며 찾고 싶었던 그 동생 사랑하는 동생을 먼저 만나고 싶어서 그런 거지요. 아니 마리아의 죄 성, 죄악성이 요한보다 베드로보다 더 많았기 때문에 가장 죄 많은 동생을 먼저 찾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 예수님이 땅위에 찾아오신 근본목적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 시체 누웠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았더라. 13절은 천사가 물어보는 말씀이지요. 13절 천사가 물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그러면 여자가 울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요. 왜 울었을까? 이건 참 동정할만한 울음소리에요. 이울음이야말로 우리가 한번 뜻을 같이 느끼고 넘어갈 울음입니다. 그러면 성경 어제 밤에도 우리가 본바 있습니다만 예수님은 임종하기 위해서 막달라 마리아가 그 자기가 평생 기념하고 싶었던 향수를 머리에 부어 드릴 때 사도들이 다 불평 했습니다. 사도들뿐이겠습니까? 거기에 모였던 잔치 상에 왔던 모든 마을사람도 그 죄녀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드린 것이 그 인격 모독이라고 생각하시고 대단이 거북하게 생각 했지요. 그러던 그 여자인데 그러면 예수님이 참말로 죽어버리시고 부활 안했다면 막달라는 이 땅위에서 누구 한사람 그 죄녀가 벌써 죄를 해결하시고 깨끗함을 받으시고 천사와 동등같이 그 영성이 예수와 흡사하게 되었다는 것을 믿어 줄 이가 있었겠습니까? 사람은 한번 죄를 지으면 성인이 된 다음에도 의심하고 죄인이라고 그렇게 의심을 하고 미워하지요. 싫어하지요. 그 사람의 마음은 그래요. 그런데 그 회개하기 전에는 물론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신 후에는 예수님을 닮았지요. 예수님이 어떠하심 같이 그 마리아도 그 어떠한 사람이 되었어요. 예수님과 흡사한 인격 회복을 한 사람입니다. 그 영혼이 깨끗한 인물이에요. 그러면 중생한 사람을 몰라보는 세상에 예수님마저 안 계신다면 땅위에 아무 살만한 가치가 없어요. 땅위에 더 살고 싶은 욕망이 없어요.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보고 자기는 마음을 돌이켰건만 끝끝내 죄인으로 봐주는 세상에 살 마음이 있겠습니까? 차라리 아마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했다면 절망하고 죽었을지 모르겠어요.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죽었으니 얼마나,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예수님 한분만이 자기를 하나님의 딸로 믿어주고 자기 동생으로 사랑하던 분인데 그분이 죽어버린 세상은 얼마나 귀양살이이며 쓸쓸한 황야겠습니까? 얼마나 자기를 저주하는 세상에 더 살 마음이 있겠습니까? 자기 앞길이 탁탁하지요 땅위에 있을 수 없게 된 여자이지요. 그러니까 울지 아니할 수 없어요. 그래 인격을 회복한 영혼을 예수님만 믿어주고 내 동생이다. 하고 사랑해 주기 때문에 예수 없는 세상에 울지 않고 어떻게 살겠습니까?
우리도 매 일반이에요. 우리가 죄를 회개한 다음에도 예수님만 우리를 내 동생이다. 사랑하시지. 같이 사는 형제들도 심지어 어머니들도 의심할겁니다. 저애가 옛날에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인데 아마 지금도 죄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거듭난 후의 인격을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만 자기 인격 되살아난 인격 회복한 인격 회개한 인격 참 천사와 같이 마음이 닦아진 마음을 믿어주신 예수님이에요. 그렇게 사랑하던 선생님이요. 예수님이 또 동지요. 형제요. 오빠이던 분이 죽었으니 자기 홀로 살 세상이 슬프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이 상식으로 이 여자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믿음은 없어요.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자기가 죽은 셈이요. 예수님이 죽고 없기 때문에 자기는 땅위에 산다는 것이 죽은 목숨이었어요. 그래서 우는 것이라 그 말씀입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세상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기념으로라도 그 죽은 시체라도 자기 집이 가까운 동산에 묻어놓고 새벽마다 가서 거기서 울어봤으면 그런 아마 소망이 있겠지요.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러니 시체, 예수님의 시체라도 다시 찾아가지고 다시 묻어드렸으면 그 안타까워서 우는 것도 있어요.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그래 여기도 참 극적 장면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이렇게도 극적으로 마리아의 가슴에 자기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줌으로 참 그 영광을 찬양할 수 있도록 참 자기의 중생을 믿을 수 있도록 부활의 기쁨을 함께 더 깊이 나누고 싶어서 잠깐 몸을 변신하신 것 같아요. 예수님은 분명 예수님이지만 예수님이 안보인 것을 보면 예수님도 어떠한 뜻이 있어요.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우리도 그런 줄 압니다. 우리가 고달픈 일을 할 때 깔끄막(비탈)에서 나무지게를 지고 나무지게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려고 할 때 눈이 캄캄해지고 아이고 나 죽는다. 어찌할꼬? 하고 겁을 집어먹고 있을 때 어떻게 기적적으로 나무지게가 이렇게 바로 서가지고 내려올 때 아 하마터면 아까 그때 죽을 뻔 했다. 하고 가슴이 두근거리지요. 분명 예수님이 오셔서 그때 붙잡아준 건데 그 알 수가 있어야지요. 바람소리가 난 것같이 스쳐 가시니까 그래 예수님은 눈동자같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여러분을 지켜 주셨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렇게 무사한 것으로 믿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변신하시고 옆에 오시기 때문에 사람이 알 수가 없어요. 그런 것을 가르쳐주신 것도 되어요. 또 어떠한 때는 바로 한집에 사는 친구가 둘이 나무하러 갔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나무 짐을 지고 발이 벌벌 떨리고 위태한 고비에 헤맬 때 아득한 공포심을 가지고 놀랬을 때 뒤에 오던 언니가 팍 붙잡아 주면서 안자빠지게 했다면 그때 예수님이 속으로, 속으로 들어가 가지고 지혜를 주시고 총명을 주시고 그 사랑을 주셔가지고 자기가 대신 죽을 폭하고 앞으로 뛰어 들어가서 막아주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심리이지요. 예수님의 성신의 역사이지요. 예수님의 그 능하신 성신의 사랑이 친구 몸을 빌려가지고 친구를 보호해 줬다고 그렇게 해석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 저 사람이 인정 없는 친구인데 어째 오늘은 결사적으로 내대신 죽을 폭하고 나를 낭떠러지에서 구해줬을까? 아 그것은 참 하나님께서 시키셨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그렇다면 우리도 오늘 하루를 지내는 내 식구들 가운데 늘 옆에 친구 몸을 입으시고 빌려 입으시고 친구의 몸을 빌려가지고 옆에서 자꾸 모를 때가 있는 것은 안타깝습니다. 어느 때든지 친구가 자기에게 따뜻한 말을 해주고 위로의 말을 해줄 때는 예수님이 그 몸을 빌려가지고 말씀 해준 것으로 믿으십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분명 예수님 참 너무나 참 야속하시군요. 자기 때문에 울고 있는 마리아를 분명히 속까지 꿰뚫어 보시면도 자기 때문에 우는지 알면서도 모르시는 척 ‘마리아야’ 부르시지요. 그런데 마리아야 그 말은 그 억양이 감정이 풍부하게 떨리는 말씀이었을 것이고 아마 코에 울음이 맺혀가지고 아 마리아야 그랬을 것이에요. 못 참아서 벅차서 너무 반가워서 너무 사랑스러워서 마리아야 큰 소리로 했을 거예요.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알아봤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인 것으로 자기가 확 알았으니까 랍오니 그러니까 예수님, 예수님 그러고 아마 예수님 그러고 확 서양식으로 달려 들어가지고 어디를 붙잡았는지 발을 붙잡았는지 꽉 잡고 안 놓으려고 하니까 예수님이 겁을 집어먹고 뒤로 물러나지요.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아라. 나를 만지지 말라. 그 말도 그냥 만지지 말라 했겠어요? 나를 만지지 말아라. 큰소리로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분명 이 몸은 아버지 앞에 가서 보일 몸인데 땅위에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너의 동생들의 죄 짐을 지고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하면 내게로 오라. 하셨으니까 아버지한테 가시기 위해서 부활한 몸인데 동생인 마리아가 붙잡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못가시면 안 된다. 내 몸 잡지마라. 감격적인 장면이에요. 어떠한 뜻으로는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해서 한 말씀이에요. 싫어서가 아니고 내가 부활한 것은 너 때문에 부활한 것인데 너 이제 아버지한테 가서 잘했느니 못 했느니 말씀하고 내가 데리러 올 텐데 미리 네가 나를 붙잡고 못 가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 그런 말씀이 그런 뜻이 되어있겠지요. 내가 너한테 뭐 아까운 것이 있겠니? 너 위해 다 주었는데 또 너 때문에 부활했는데 내가 네가 내 발목을 잡는다고 무슨 섭섭한 것이 있겠냐? 그러나 나는 아버지한테 가서 아버지한테 모든 것을 말씀하고 내가 너를 다시 데리러 올 것이다. 그런 뜻이 들어있는 것 같아요.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다만 가시기전에 이 말을 부탁하고 싶은 말씀이야.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꼭 대표인 죄인을 대표한 마리아를 불러가지고 꼭 그 말을 일러두고 하늘나라 가시기 위해서 지금 나타나셨지요. 그러면 해도 무방 안 해도 무방한 말은 다음에 하지요. 중대한 말 끝난 다음에 하지요. 그러면 제일먼저 해야 했을 말씀이지요. 꼭 이 말을 땅위에서 해두고 이 약속을 하고 가고 싶은 중대한 발언입니다. 이 말만은 특별히 자기가 꼭 이 말만은 해야 할 것이지 안 해도 무방한 말을 한 것은 아니에요. 자기가 부활해서 꼭 이 말씀 하기위해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또 마리아를 만난 것은 꼭 이 말을 해두고 하늘나라로 가기위해서 만난 것입니다. 그래 이 말이 그냥 보고 넘어갈 말씀이 아니지요. 우리가 분명히 이 말씀은 예수님의 약속이니까 믿고 우리가 소망을 품어야 하겠습니다. 너는 네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말하되 그 말씀이에요. 여기서부터 요절 하십시다. 따라 합시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여기 말씀을 보면 언제 이렇게 아주 그냥 한 집안 식구같이 하나님은 아버지시고 우리는 형제간이고 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신데 또 너희들의 하나님이고 너희들의 아버지시다. 그 말은 살아 계실 때는 그렇게 한 일없어요. 그러니까 부활하시고 하늘나라 가시기 전에 이것은 약속이지요. 선언이지요. 인격적인 언도지요. 영원히 천년만년 영원히 변치 않는 자기 약속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이고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시고 또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고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간이고 자매간입니다. 이 말을 왜 해야 했냐? 인사같이 아 우리 형제 맺읍시다. 그런 말씀이 아니야. 영원한 천국이 너희들의 것이다. 그 뜻이 있어요. 영원한 천국의 영광이 바로 네 것이다. 그 뜻이 있어요. 나는 형이고 너는 동생이니까 우리들의 천국이다. 나는 형이고 너는 동생이니까 우리들의 하나님이다. 영원한 천상의 천사들도 우리의 천사들이요. 영원한 천상의 모든 복락은 우리의 것이다. 바로 네 것이다. 영원한 천상의 보배를 상속해 주겠다는 뜻이 들어있어요. 영원한 천성의 행복을 바로 네게 주겠다는 그 상속을 분배하겠다는 약속이 들어있다는 말씀입니다. 영원한 족보에 영원한 하나님의 족보에 바로 네가 기록되어 있다. 바로 너는 형제간이다. 그것을 확실히 하고 싶은 것은 이런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봐야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천상에 가서 이 약속을 자기가 지향하실 것입니다. 가사 우리가 우리 어머니가 한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합시다. 또 귀주 어머니도 곧 세상을 떠나시게 되셨지만 그러면 어머니들이 세상을 떠나신 다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이 곧 우리한테 하신 말씀이요. 보면 그래요. 가서, 가서 막달라 마리아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고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이르니라. 그러니까 올라간다. 하라. 하는 명령이 있어요. 너 마리아 너만 듣지 말고 네 형제들한테 가서 그렇게 말해라. 전해라. 그 말씀이지요. 그러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라는 말씀도 들어있어요. 여기 계명산에 찾아가서 내 아버지가 너희들의 아버지 내 하나님이 너희 하나님이라고 예수님이 하라고, 하라고, 하십디다. 그러고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씀 하신 것이 전전해서 사도들 입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들린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말을 들려주시기 위해서 하셨어요. 그러면 내 아버지가 너의 아버지다. 그 말씀은 한나 어머니의 하신말씀이 된다. 그 말입니다. 가령 말씀을 드리면 말씀입니다. 여기 한분, 한분 자매들에게도 바로 내 아버지가 네 아버지다. 그렇게 하신 약속입니다. 그러면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하늘나라 갔을 때 예수님이 오빠 아니겠소? 거기 가서는 형님 일려는지 모르지만 거기는 남녀가 없다고 그러니 형님이시겠지요. 형님이 예수님이 동생 한나 어머니 손을 꼭 잡고 아 고생하고 오셨군요. 계명산에서 어린 소녀들을 키우시느라고 얼마나 고생하고 또 땅위에서 슬픔을 당하고 온 자매들을 이끄시고 내 품으로 인도하신 우리 동생이 오셨군. 자 먼저 아버지 앞에 인사합시다. 하나님이 떡 앉아계시면 아버지 여기 계명산에서 수고하고 온 내 동생 한나가 왔군요. 자 인사하십시오. 인사해라. 그렇게 아주 다정하시고 인격적이세요. 예수님은 땅위에서 보이신 그 예수님 천상에서 똑 같으시지요. 무슨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사람은 사람이니까 사람의 말로 땅위에서 네 아버지다. 약속하신 점이 이것은 진실로 우리에게 정다운 사랑을 인식시켜 줍니다. 사랑을 일깨워 주세요. 우리가 가정적인 신비적으로 예수님을 믿을 것 이 아니에요. 아니 인격적으로 우리 형님이시다. 우리 오빠이시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다. 천국은 우리나라다. 천국에 있는 예수님의 집이 바로 내 집이다. 형님집이 내 집이다. 아버지 집이 내 집이다. 하나님의 입으신 옷이 바로 내 옷이다. 예수님이 입으신 옷이 바로 내가 입을 옷이다. 우리 옷은 똑같은 옷이고 우리가 먹는 밥은 똑같은 밥이다. 우리가 누릴 천상의 영광도 똑같다는 것을 서원하시고 약속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합니까? 천상에 대한 우리의 영광은 확실히 보장되었고 약속은 이미 확실합니다. 의심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이 말씀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사도들은 어떻게 깨달았는가? 히브리서 2장 11절을 다시 한 번 볼까요? 그 사도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했을 때 그 감격이랄지 영광은 무엇이냐? 땅위에서 부잣집에 들어가서 머슴 살고 월급 받는 그런 정도냐? 또 무슨 큰 경주에서 일등하면 칭찬받는 그런 정도이냐? 그런 것이 아니지요. 11절 보겠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함을 입은 이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하나라는 말은 아까 예수님이 내 아버지가 네 아버지요. 내 하나님이 네 하나님이다. 하신 말씀 그대로 이지요. 하나는 어디가 하나입니까? 한 아버지에게서 낳았다. 한 하나님 품에서 낳았다.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면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우리 예수님의 그 능력이지요. 예수님이시지요. 예수님의 보혈 예수님의 피로 우리 죄를 씻으시고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거룩하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고 거룩하게 함을 입은 사람들은 우리입니다. 대표적으로 말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거룩하게 함을 입은 여자입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모두 한분 한분이 거룩하게 함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거룩하게 하신 예수님과 거룩하게 함을 입은 여기계신 여러분들이 다 하나에서 났습니다. 한 하나님의 품에서 났습니다. 한 하늘나라에서 왔습니다. 한 아버지 품에서 났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리아를 막달라 마리아를 아 이건 내 동생이요. 나는 하나님이 너를 잃고 천상에서 얼마나 슬퍼하셨는지 나더러 너를 찾아오라고 해서 나왔다. 아이고, 네가 여기 유대에 살고 있었구나. 자 하늘나라로 가자. 너 왜 이렇게 헤매느냐? 왜 이렇게 인생의 거리를 헤매고 있니? 자 집으로 가자. 그렇게 자기 동생을 찾으신 다음에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어요. 자기 동생을 찾았을 때 부끄럽다. 하겠습니까? 감격하셨겠지요? 기뻐했겠지요? 동생을 찾으면서 오빠가 부끄러워해서야 오빠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또 우리를 찾으신 다음에 부끄러워 아니하셨습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보호해줌에서 찬송하리라.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볼지어다. 나와 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 자녀라면 인격적이에요. 인격적으로 형제간이에요. 어떤 뭐 천사나 무슨 그런 신비 체를 입은 신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몸을 가진 형제간 들이고 자녀들이지요.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예수님도 또한 같은 혈육을 입은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권세를 잡은 이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형제들을 그 죽음의 공포에서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하심이 아니다. 이미 몸을 벗어버리고 천상에 사는 천사들을 도와주러 오신분이 아니십니다.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아브라함 자손은 믿음으로 거듭난 여러분들이지요. 우리들이지요. 믿음으로 자손이 된 우리들의 몸을 붙잡아서 우리들의 영혼을 붙잡아서 하늘나라로 데려가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로부터 열까지 말 한마디 눈 한번 떠보시는 것 모든 일 범사에 우리와 똑같이 되심이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우리 사람 육신을 갖은 형제들과 똑같이 되심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에 자비하시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러 오셨습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으니까 시험을 받는 우리들을 능히 도우시는 오빠였습니다. 능히 도울 수 있는 형님이었습니다. 능히 도와줄 수 있는 대제사장 이었습니다. 능히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스승이었습니다. 그런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럼 다시 11절 기억하기 위해서 따라 읽읍시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이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습니다.’
그 요한복음 4장 25절 이하의 말씀을 볼까요? 다른 말씀을 다 아시니까 시간도 없고 생략하고 25절 26절 보겠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메사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 제가 아오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그 부인에게 물을 청하시고 또 생수를 주시마고 말씀하신 다음에 그 부인이 감격적으로 인제 예수님에게 말하고 있는 장면이지요. 그러니까 앞으로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하는 그리스도가 오시면 이렇게 죄가 있든지 없든지 마음속에 있는 비밀을 다 아시고 그 억울함도 다 풀어주시고 이 서러움을 다 눈물을 씻겨주실 분이 오신다는 예언이 있습니다. 그분이 오신다면 이 기가 막힌 저 같은 여자의 서러움을 알아주시겠지요. 또 얼마나 이 죄에 고민하는 이 마음을 다 아시고 용서해주시겠지요? 그분이 오시리라고 저는 소문을 듣고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말로 대답했군요. 그러니까 그 오시려하는 그리스도 메시아가 바로 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부인과 말하고 있는 제가 바로 그 사람이오. 바로 납니다. 그래 감격적인 여기도 상면이지요. 아까 부활하시고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를 상면하신 상봉하신 장면은 너무나 극적이지요. 그러나 이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부인과 만나는 장면도 너무나 극적이에요. 여기도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여기도 전과를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것을 알았으니까 아마 어떠한 뜻으로는 인격차별 했겠지요. 아마 영혼을 그 그냥 아프고 서럽게 해주고 떠났겠지요. 그 영혼에 평안을 못주고 해방을 못주고 떠났겠지요. 그러나 이 부인을 찾아오신 분은 예수님이신데 그 영혼의 모든 상처를 낫게 하시고 그 영혼의 서러움을 없이해주시고 영원한 평안 영원한 평화 영원한 기쁨 영원한 희망을 안게 해 주셨습니다. 바로 자기가 예수님이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바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했다는 말은 그 부인에게 완전한 해방을 주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 여인에게 완전한 천상의 기쁨을 주었다. 땅위에 있는 모든 죄를 완전히 용서했다는 말이 되겠어요. 예수님을 안 만났더라면 죄가 서로 두 사람사이에 알고말지요. 부끄러운 죄나 알지 무슨 죄가 없어지겠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은 모든 죄가 다 탕감을 받고 용서함을 받았다는 뜻이 있지요. 그러니 해방이지요. 이제는 천사와 동등이지요. 또 하늘나라에 가서 아버지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얻은 몸이지요. 구원 구원을 확실히 받았습니다. 고린도 전서 1장 9절 우리가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또 이 부인이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만난 부인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또 막달라 마리아가 극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상봉했다는 그 효과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믿음은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믿고 그 결과로 영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감격적이고 그렇게 기쁜 것입니다. 그렇게 기념할만한 것이라. 그 말씀입니다. 따라서 읽으십시다. ‘베드로전서 1장 9절 말씀.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그래 우리가 오늘 성경에 상고한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내 아버지가 네 아버지다. 내 하나님이 네 하나님이다. 그런 그 아주 중대한 약속을 하신 뜻이 네 영혼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을 믿어라. 그런 구체적인 말씀이에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고 또 예수님이 우리 구주이시고 또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간이고 그러면 땅위에 예수님이 와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자매를 만났다는 것은 네 영혼을 구원했다는 확실한 증거란 말씀입니다. 네 영혼을 구원했다. 라는 확실한 보증이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영혼이 구원 받았기 때문에 감격스러운 일이요. 기쁜 일이요.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을 믿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고 믿는 것은 우리 영혼이 구원 받았기 때문에 감사해야하고 찬미를 부르지 않겠습니까? 우리 영혼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찬송을 불러야 하겠습니다.
여기 이미 우리가 이야기 줄거리를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 말씀을 잘 모르는 사람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본 끝에 그것을 더 가깝게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이야기 그런 비유도 되고 예화가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지금 생각나는 대로 다시 해 보겠는데요.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아주 영광을 누렸던 솔로몬과 더불어 그런 호화찬란한 나라를 가졌던 어느 임금님의 이야기이지요. 그 임금님은 아주 그 다윗의 영광을 누린 사람으로서 그들이 자기 왕비 사이에 자식이 없는 것을 슬퍼했어요. 자 우리에게 자식이 있어야 할 텐데 이렇게 나이들은 먹어 가는데 왕통을 이어갈만한 태자도 없고 공주가 없으니 우리의 서러움은 어디 가서 이렇게 위로를 받을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서 그 한나께서 한나 어머니가 사무엘을 기도로 받으신 것처럼 우리 자손을 얻어서 하나님께 바쳐야지요. 우리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많은 기도를 하셨던지 기도한 후에 자녀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꺼번에 하나님이 주셨던지 그 자녀를 낳을 때 쌍둥이를 낳았어요. 그런데 물론 대왕의 품위나 왕비의 품위가 아주 고상하고 그 잘난 인물이겠지만 오히려 그 대왕보다는 아주 그 수려하게 그 아이 쌍둥이가 아주 혈통이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아이들의 혈색이 너무나 백옥같이 희고 아주 백설같이 아주 아름다운 나비같이 그렇게 참 어여쁘게 대왕이 이름을 지을 때 눈 설(雪)자 눈같이 살결이 희다는 뜻으로 남자 아이는 설남(雪男)이라 이름을 짓고 여자 아이는 설녀(雪女)라 이름을 지어주겠다. 그렇게 해서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이 땅위에 영광이라는 것이 다 흥망성쇠가 있다는 것이지만 그 왕국에도 그 행복했던 대왕의 나라에도 흥망성쇠가 있는 것이지요. 갑자가 나라가 소요가 일어나고 전쟁이 일어나서 힘껏 전쟁에서 싸웠지만 아깝게도 그 왕국은 망했습니다. 그 대왕은 이렇게 생포가 되고 사형을 당하고 왕비도 사형을 당하고 모든 군신이 다 포로가 되고 그 나라는 항복을 하고 망했습니다. 그 나라가 망할 때 그 백성의 마음은 다 똑같은 것이지요. 나라는 망했더라도 혈손만 왕통을 이어갈만한 왕자의 자식이 있으면 그 망명을 해서라도 기어이 우리나라를 다시 독립을 해야겠다. 그런 충성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고 나라가 몰락이 되서 망하게 되니까 피난 갔던 대신들이 우리는 포로가 되고 이 나라를 다시 못보고 돌아올 길이 없다. 할지라도 어찌하던지 그 유모님에게 이 자녀들을 맡겨서 우리가 죽은 다음에라도 독립이 되고 이 자녀들이 왕통을 이어가도록 하라고 그렇게 다 회의를 해서 결의를 해서 그 유모들에게 그 자녀들을 맡겨가지고 망명을 시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인제 간단하게 좁혀 이야기하면 설남 이라는 남자 아이를 맡았던 유모님이 남쪽으로, 남쪽으로 참 꽃이 피고 아름다운 그렇게 아름다운 남쪽으로 피난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도우심인지 애기를 죽지 않도록 전쟁이 끝날 때까지 참 누더기 속에 감춰서 그 왕자를 자기가 잘 길렀습니다. 나라는 빼앗기고 임금은 죽고 나라는 없어졌다. 할지라도 그 당시 이 아이가 어느 날인가는 다시 왕통을 이어줬으면 하는 염원으로 그 유모님은 정성을 다해서 그 아이를 키워갑니다. 교양이 풍부한 유모님이라 그런 것 같아요. 이 아이를 보통으로 키워서는 안 되겠다. 아주 유명한 그런 수도원에 맡겨서 아주 덕이 높은 성인의 가르침을 받아서 앞으로 한 나라를 맡더라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그런 성덕을 길러야겠다. 그런 뜻을 품은 양모님은 그 아이의 교육에 큰 관심을 갖고 꼭 성인이 되도록 가르쳤다고 합니다. 열 살 열다섯 스물 스물다섯 이렇게 키워갈 때에 꼭 자기는 자기가 낳은 아들로 키웠고 또 설남 이라는 아들도 꼭 자기 어머니로 믿고 양육을 받았지요. 그런데 망명하고 있는 이 왕자는 설남 이라 부르지 않고 가명을 썼다고 합니다. 설남 이라는 이름은 유모님만 알고 있는 비밀이에요. 그리고 가명을 쓰고 컸기 때문에 아직 설남 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지요. 설남이가 누군지 세상은 몰랐지요. 그러면 그 아이가 이제는 스물다섯 삼십이 되지요. 한 삼십이 될 무렵에는 아주 도가 높았어요. 그 성인의 품에서 제 2의 성인이 될 만큼 덕망이 높고 믿음이 깊고 그렇게 완전한 그 인격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유모님이 나이도 먹고 그래서 임종하게 됩니다. 그 설남이 자기 엄마를 유모라고 하지 않아요. 친 엄마라고 믿기 때문에 친 엄마인줄 아는 엄마가 임종하는 마당에 유언을 합니다. 아무도 없는 방에 자기 아들을 불러서 이제 정체를 이야기 하지요. 바로 네 이름은 대왕께서 지어준 네 이름은 설남 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죽은 다음에 네가 꼭 내 말을 지켜야 할 일이 있는데 너는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런데 한 아이는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설녀라고 아버지가 주셨고 그 네 여동생은 북쪽으로 망명했으니까 만일 살아있다면 네가 반드시 찾아서 앞으로 네가 왕통을 잇고 대왕이 된다던지 할 때는 그는 분명 공주의 신분이니까 네가 공주를 보호해 주어라. 그렇게 임종을 유언을 하지요. 이 땅위에 모든 사람이 너를 하잘 것 없는 이 가난한 여자의 아들로 모두 알고 있으니까 이것이 누설되지 않도록 네가 왕자라는 것이 땅위에서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해라. 나는 네 유모다. 생모가 아니다. 네 생모 그 왕비는 이미 돌아가셨고 대왕도 전사했다. 그래 사정을 다 이야기했지요. 그때 얼마나 그 설남은 자기 유모님한테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아 우리 어머니는 참 충신이었다. 참 충절이 있는 어머니였다. 자기 자식도 아닌데 이토록 나를 키워주시고 이렇게 일을 다 마치고 가시는구나. 하고 자기 어머니 앞에 참 감사했겠지요? 그러면 이제 설녀, 설녀는 어디 가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어요. 그 설남은 어머니가 유언하시고 죽은 말씀을 명심합니다. 아 나는 그러니까 왕자, 내 신분은 왕자다. 그러면 나는 어찌할까? 과연 이 나라가 다시 독립이 되면 내가 왕통을 이어야하나? 아니다. 나는 이미 믿고 하나님 아들이 되었으니까 나는 아무리 임금을 시켜도 임금이 될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 땅위의 모든 것을 영광을 다 포기하고 천상에 가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되겠다. 그런 결심이 섰겠지요? 그러나 어머님이 유언한 그대로 설녀 만은 자기가 천국까지 데리고 가고 싶은 동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죄 많은 세상에 자기 동생을 혼자 두고 싶지 않았어요. 왕국을 포기하고 어떠한 영광을 포기했다손 치더라도 자기 여동생만은 기어이 찾아가지고 영원한 나라에 가서 같이 살아야 되겠다. 그런 참 사랑이 불 일듯 일어났습니다. 그 옛날 성현들이 전도할 때 그랬듯이 많은 제자를 데리고 이제 성인이 된 설남은 북쪽을 향해서 여행을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