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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좌(10)】 "구경 마지막 뜻이 하나님" 信天함석헌
구경 마지막 뜻이 하나님
이제 나사로 이걸로 여기 영광이라고 그럴 땐, 아주 하나가 십자가에 달리는 것, 그건 요한복음 마지막에 내려가야 이제 압니다. 십자가에 달리게 되는 데는 아들이 영화롭게 했다고 그러고, 그러면 그 생각을 하고 하면 다 아는 거지만, 이 나사로 죽은걸 살린 것 때문에 더구나 예수님 붙잡혀 미움을 사고 그렇게 되고 그러지 않아요? 그런 관계도 있을 겁니다만 그렇게만 그건 그때 역사 사실로만 아까대로, 그런 것만이 아니고 어느 특수한 시간에만 국한을 시키진 말고 일반적인 의미를 우리가 거기서 읽어보도록 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얻기 위해 그런 거다, 병에는, 병만 아니라 글쎄 이 우주 간에 있는 일체 모든 병이 다 하나님에게 가 맺혀요. 하나님에게 다 맺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에게 가 맺혀요. 하나님의 아들이란 볼 수 없는 하나님이 볼 수 있게끔 나타난 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얻는다는 것은 예수라 하는 사람이 십자가에 달린다하는 그렇게만 보지 말고, 여기 이 역사적으로 교육적인, 역사의 교육적인 의미가 역사책에 다 모든 것이 일절 하나님한테 집중이 돼 가지고, 따지고 따지고 들어가면 뭐냐?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거저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떤 의미의 완성을 위해서 이렇게 나가요. 그게 교육적인 의미가 있다, 그게 여기 바로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그런다,
부모님이, 참 잘된 부모님이라면 집안의 모든 일을 자식의 교육적인 목적을 위해 할 겁니다. 어디 가서 옷감 하나를 사와도 저것을 이담에 바른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하는 목적을 늘 잊지 않고 그 표준에서 가 사요. 먹을 걸 사러가도 그거요, 손님이 와도 그렇지. 이담에 자기 후견을 얻을 자식을 어떻게 교육을 그 자식에게 직접 간접으로 어떤 영향이 갈까하는 것을 생각을 하고 하는 게 참 아버지 아니겠어요?
그런 모양으로 이 우주 안에 뜻에 뜻에, 마지막에 구경 마지막 뜻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에요. 그 하나님이라는 이가 이 우주를 마련을 하는데 어떻게 마련을 했나 그러면 모든 것이 의미가 자기한테 오도록, 자기한테 오되 거저 오는 게 아니라 이것이 발전해서 여기에 나타나 아들이 영광,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얻는다면 저기 신령한 데는, 그건 영원 부동하는, 영원불변하는 세계고, 그것이 현실로 이렇게 나오면 그게 여기 우리의 이 세계라는 건데, 그게 아들이에요. 아들이 돼.
“말씀이 하나님과 같이 계셨다, 말씀으로 만물이 됐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 생명이 사람 안에 있을 땐 빛이더라.” 그러고 보면 여기 아들이 영광을 얻기 위한다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거냐? 이 세계가 쉬운 말로하면 이 세계가 완성이 되기 위해서, 이 세계가 아주 하나님 자리 그대로를 들어내는 자리에까지 가도록 하는 데가 일체 대소사, 이 우주 안에 있는 대소 현상의 구경의 의미에 있는 곳이다, 그래 여기 이 사람이 앓게 돼. 이 사람만이 인생을 앓게 되는 것도 왜 그런가하니 쉬운 말로하면, 하나님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기 위해서, 다른 말로하면 이 세상에 인간이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모습을 좀 더 완전히 드러내는 자리에 가기 위한 교육적인 한 수단이라, 교육적인 의미가 들어있는 거야, 그건 병만 아니에요, 죽음도 그거고, 의식주 일체 모든 게 다 그런 거예요.
그렇지만 그 중에도 특히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죽음과 병까지도 그거라 하는 데가, 예수님이 그 전에 이걸로 인해서 인생관의 대혁명이 온 겁니다.
지금 우리는 벌써 그런 얘기를 많이많이 이렇게 아까 말씀대로 우리가 체험을 못해도 남이 전해들은 걸 듣고 듣고 그랬기 때문에 그게 익숙해졌어. 익숙해진 것이 아까 맨 처음 하듯 길바닥 같이 굳어졌어. 그렇기 때문에 있긴 있는데 뜻을 몰라요.
거기 물이 떨어지면 쭉 흘러가 버리지. 잦아먹지를 못해. 진리가 내게 힘이 되려면 내 마음에 잦아먹어야 하겠는데, 내 마음이 길바닥 같기 때문에, 떨어지면 쭉 흘러버리지. 흘러도 잦아먹지를 못하기 때문에 굉장히 더 많은 것 같지. 길바닥에 물 떨어뜨려 보세요. 조그만 비가와도 비 많이 왔다고 그러지. 밭에 떨어지면 몰라. 한데 그게 온 것이 내 마음에 부슬부슬 올수록 자꾸 잦아먹어서 내 힘이 되면 있는지 모르지만, 아주 받은 바는 없는데 제 체험으로 하지 않고 남 말 받아 돌리는 사람이 제일 아주 말이 많은 거야. 성경에 이랬습니다. 이랬습니다. 예수님 이랬습니다. 그러고 큰소리로 자꾸 그러는 것이 마음에 잦아먹지를 못하는 사람이 도리어 마음이 그래, 뭐 물이 많은 것처럼 그래. 허지만 실력 없다는 그 말이야. 실력은 정말 죽음을 이겨야하겠는데 말이야. 그렇게 돼서 우리는 그 의미를 깊이 알지 못 합니다 마는, 언제나 오기는 예수님의 이걸로 이런 생각으로, 그게 그전에 다 죽음이라는 이게 아주 화라, 그러고 말이야. 병이라면 불행이라고 그렇게만 알았지. 이런 의미가 있는지 누가 알아요?
기독교는 죽음을 이기는 것
우리 평안북도 옛날에 참 소 시대에 전도 처음으로 했던 강재건 노인이라고 있었습니다. 나이도 팔십 아주 마지막에 처음 전도할 때 강개, 후창 지방으로 전도 자기가 했다고 하고 전도대회 나가 먹을 것 없어서 배고파서 오줌이라도 받아먹으니깐 조금 낫더라, 그럽디다. 그렇게까지 고생했던 노인인데. 그이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
손자 딸이 있는데, 손자 딸이 애기를 못 낳아, 열심히는 믿는 사람이야. 아들 낳게 해달라고 자꾸 기도하고 그래. 네가 기도하는 건 참 기특하다, 허지만 너 아들 낳게 해주면 고맙다고 그러고 낳게 해주지 않으면 섭섭하다고 그러겠고, 그건 믿음 아니다, 그건 나이 많지만 용치 않아요? 그런데 그러한 정도에 걸려있는 신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 말이야. 머리만 아프면 말이야, 아유, 배가 좀 탈이 나면 내가 언제 또 무슨 죄지었나보다, 안 그러는 것보다 조금 낫지만 말이야. 아니 예수님이 하시려는 건 뭔고 하니. 무슨 걸 내게 새로 주시려고 이러실까? 그럴는지 몰라요. 하지만 이건 그 믿음인 것 같긴 같지만, 거기 틀려먹은 데가 뭔고 하니 죽음은 나쁜 것, 병은 나쁜 것이라 하는 게 꽉 들어있어. 그건 기독교 전부터 있던 생각이야, 그러면 뭣이 기독교가 나을 것 어디 있어요? 기독교라면 죽음을 이기는 것, 병을 능히 이기는 것, 불행을 불행으로 알아야 알게 되는 것, 불행으로 알아야 할 뿐 아니라 불행 속에 도리어 정말 참맛을, 그러니까 거꾸로 입에서 “슬퍼하는 사람 복이 있다, 배고픈 사람 복이 있다” 그러지. 그게 말로만 그래. 시를 쓰는 것 아니라, 사실로 정말 느껴야 되는 데가 이제 하늘나라는 자기들이 뒤바뀐 점이 있는데 말이야, 그 점을 전 체험도 못하고 받아만 보는데 입은 까발나서 굉장한 열심 있는 신자 같은데, 실제로 보면 뭔고 하니 배만 아파도 아이구, 무슨 죄 지었나 보다, 이제 벌 받았구나! 벌로 밖에 모른다고 하는 데가 벌인지도 모르는, 그분 보다는 조금 나을 런지 모르지만 근본 뜻을 말하면, 그런 게 아닌데, 그렇게 생각을 하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영원한 지옥에 갈 겁니다. 웬고하니 그런 교리 다 죄 값인데 제가 뭐 어찌할 수 없이 지옥엘 누리겠지, 천당은 구경 하지도 못할 거예요. 그러니 기독교에 이런 말을 다시금 생각해 볼 것 아니냐? 하나님이 아들이라 이 말은 간단한 말인 것 같지만 굉장히 아주 전체의 가치표준을 전도시킨 것 아닙니까?
죽을병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얻기 위해 그런다, 그러니까 이제 한 마디 더 할 말은 그러면 병이라는 건 예수님이 그랬다 그 말이야. 이젠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봐, 예수님에게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또 하나님의 아들이 어디 있냐? 하나님의 아들이 여기에 있어. 여기를 내놓고 있을 데가 없다, 이 아들이 여기 있는 이 아들이, 이게 영광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고통도 있고, 병도 있고, 죽음도 있다 그 말이야.
우리는 다 옛날 기독교 전에 어리던 때, 인류가 유치하던 때에 믿던 믿음대로 말이야, 뭐 인간이 어려우면, 어 하나님이 노했지, 그래서 그 종교는 그때 공포의 종교예요. 바람만 심히 불어도 하나님이 노했구나. 비만 많이 와도 하나님이 노했구나. 그냥 벌벌 떨고 아이고! 하나님의 노를 풀어야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노를 풀까? 그래서 금식도해요. 우리가 되도록이면 먹지도 않고, 본래 금식이라는 거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기독교에서 나온 거 아니에요. 머리에 재를 쓰고 될수록은 죄인의 모양으로 이렇게 하고 해서 노했던 이가 노를 풀기 위해서, 그러게 노를 푼다하는 건 지금도 오늘날까지 그건 인류가 지금까지도 있는 구경을 말하는 유화라 하는 거, 우리와 둘 사이에 컨슬테이션(consultation)이라고 하는 거. 근본 진리가 될 겁니다만, 그래도 그때와 지금과 정도가 대단히 다릅니다. 종교라는 건 순전히 하나님을 무서운 이로만 알고 그 밑에 벌벌 떨면서도, 그때는 인류가 이렇게 정신을 가질 때 나 가지고 모든 게 주위환경에 위험을 많이 느꼈더니 만큼 욕심이 많은데, 모든 게 나를 못살게만 하는 것 같아,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저 세상에 저기에 어디 한 신이라,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가 굉장히 노해 가지고 있어. 우리가 이러지 않은가? 그런 생각에 그를 자꾸 이렇게 이렇게 가서 하나님한테 노여움을 풀도록 하는, 그 옛날 종교에 그게 주되는 거예요.
그래 이스라엘 사람도 그러기 위해서 이스라엘 제단에 만날 피가 뚝뚝 흐르고 있어야 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한데 가서 될수록은 노여움을 그쳐 달라고 하기 위해서 아침에 양으로 제사하고 저녁에 양으로 제사하고 날마다 했어요. 아침저녁으로 그리고 일년에 특별히 한번 대 속죄제라 해서 어느 의미로는 참 끔찍해요. 그 제단이란 늘 선지피가 뚝뚝 흘러가지고 있어야 하나님의 노가 좀 식는다, 그렇게 했어요.
그런 것을 생각을 하고 이제 예수님의 이 신약을 읽어보면 차이가 어떻게 있나? 옛날에 이렇게 무섭고 우울 했던 종교에 대해서 예수님의 종교처럼 이렇게 명랑하고 이렇게 평화롭고 이렇게도 기쁜 종교가 어디 있나? 그런 것을 또 다시 옛날, 그래 이제 바울이 열심이 나 가지고 이건 옛날에 벗어버렸던 그 의무를 즐겨하던 의무 속에 다시 도로 돌아가려고 그러느냐 하고 바울이 그래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바울한테 난 속았다고, 바울이 십자가 공로로 그런다고 하고 하나님의 어린양이 죽었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또 옛날 그린 그대로 가져다가 도로 조경을 해가지고 바울 때문에 그런다고 난 그런 겁니다만, 바울이 사실은 그 마음을 그러자는 게 아니라, 옛날의 그 끔찍했던 그 무서운 하나님의 벌벌벌 떨던 거기서 해방을 시킬라 해서, 거기 죽이는 그 양 대신에 예수님에게다, 양의 옛날에는 하나님 무서워서 죄 값으로 죽이는 줄만 알기 때문에 그래서 그렇지. 양 죽여서 해증한다, 예수님 죽은 거 뭐냐? 이제 그럴 거 아무 것도 없다, 지금 이 복음인데 그런 음울한 생각은 왜하냐? 그러고 했는데, 아니 ‘보라는 달은 안보고 손가락만 본다’ 그 말이야. 달을 가리키고 저기를 보라니까 손가락만 본다, 바울이 가르쳐준 그건 안보고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가 예수님이 대신 죽었다고 이 소리만 자꾸 하는 건, 그게 달은 안보고 손가락 보는 게 아니에요? 바울의 그 공로가 어디에 있는데, 옛날같이 그런 못생긴 음울한 생각 가지고 밤낮 벌벌 떨고 그게 종의 버릇 아니냐? 그게 죽음 아니냐? 그런 종교는 내버리고 이 지금 이 종교가 무슨 아들의 종교인데 말이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곈데 잘못이 뭐야? 잘못했다 기로서 우리의 참 믿는 맘으로 나기만하면 자기들이 용서를 못해주고, 무슨 그런 생각을 해 가지고 무서워서 하느냐? 그 무서워하는데서 인간의 일체 악덕이 나오는 거예요.
종교 목적은 마음의 해방
사람이 남의 무엇을, 쉽게 합시다. 여기 지금 이 정권을 쥔 지금 이 공화당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건 공포심이에요. 우리가 정권을 놨단 어드렇지? 죽을 거다, 그러니까 세상없어도 삼선개헌을 해야겠다, 뭐 4.19가 또 난대도 어떻게든 이거 해야 돼. 왜? 안했다간 우리가 정권 놓았다가는 힘들다, 그 사람들이 보는 건 밤낮 무서운 것만 봐요. 왜 그 원인이 어디에 있냐? 제가 못할 짓 했으니까 원수 갚으련다, 그런 생각에 정권만 바뀌면 우리는 왼통 죽는다 하는 그 공포심에 모든 정책이 그러니까, 모든 이 남을 의심하는 것, 저놈은 스파이, 저놈은 또 아니야, 저놈은 또 아니냐? 나 요전에도 얘기합니다만 글쎄 이 말, 이날까지 지금 내 잘못 생겨 물론 그런 줄 압니다만, 수십 년을 말을 했는데, 그만 했으면 내가 무슨 말하는지 말 들어보지 않아? 새 말이 있을 리가 있어요? 그렇지만 실컷하던 그 말, 요새도 다 말 할 수가 없어요. 동국대학에서 오라더니 그 날 가서 그만두라, 못한다고 그러지. 서울법대에서 오더니 그날 가서 안 된다고 하고, 경희대에서 오라더니 안됐지. 공대에서도 안됐지, 무슨 이렇게 저렇게 지금 말은 학생들은 오라고 말은 하는데, 보이지 않는 어디서 오는 손인지 길을 막아서 지금 말 못하게 하잖아?
그거 왜 그러냐? 이 사람들 신경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들이야. 무서워서 그래. 나 이따금 그 하나가 그렇게, 나 하나가 무슨 그렇게까지 무서우냐? 무슨 소리를 한다기로서니. 그건 내가 무서운 거 아니라 무서운 거 너 속에도 있지 않나?(웃음)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사람이 그 내 마음에 화평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공포심을 가지면, 하는 모든 동작이 다 정상을 잃고 잘못하게 마련이에요. 그래 필요한 것은 뭐로든지 이 마음이 평화하게 되어야 돼.
그래 신약에서 자꾸 하는 것이 은혜와 평안이 있을 지어다, 은혜와 그 평안이라는 마음에, 사람의 마음이 평안해야 생각을 바로하게 생겨. 마음에 하나님이 노했지? 하나님이 우리를 잡아먹을 라고 그러지? 언제 어느 책에 보니까 그랬더라. 저 어느 토인들이 그런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으라고 그러면 말이야. 이 우주 간에는 우리 인간보다 뛰어난 그 하나님이라는 이가 있다, 그를 믿으라 그러면 그 사람들 아주 이상하대, 그런 하나님이 있다하면 왜 우리를 잡아먹지 않을까?(웃음) 우릴 잡아먹는대요. 그거 무슨 소리냐? 그러면 이거는 다른 강한 부족한테 늘 압박 받아오는 부족이거든. 그러기 때문에 강한 놈한테 늘 죽어버려졌기 때문에 강하면 우리를 잡아먹겠지. 강하면서도 우리를 은혜를 준다, 그런 건 있을 수가 없다는 거래요. 이거 생각해보시오. 이게 어떻게 그렇게 역사적으로 있는 환경이 어떠냐 하는 것에 따라서 저기 진리의 체험이 이렇게 다르다는 거요.
이것 참,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종교 그 점과, 바울이 그래서 그 일곱 이야기가 이 복음이라고 하는 그렇게 역설을 하는 것인데, 그거를 그 바울이 도리어 지금 우리에게 오는, 도리어 옛날 것 도로 되살리는 것처럼 됐으니, 이런 답답한 일이 어디에 있냐 그 말이야. 바울 때문에 도리어 신앙이 음울한 것이 됐어. 아주 이렇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대하는 맘 놓고 하는 어린애들 얼마나 좋아요. 아버지 앞에서 거꾸로 서거나 바로 서거나 상관이 없어요. 아버지 앞인데 마음 놓고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래 아마 필시 루터가 너희는 마음 놓고 죄를 짓지 못하냐? 그러고 마음 놓고 죄짓는 것이 잘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애는 아버지의 뺨을 때려도 마음을 놓고 때려. 마음 놓고 때리지만 다른 데서 오는 손님은 절을 해도 두려운 마음으로 하지 않아요?
그래. 어느 게 더 가치가 있냐? 아버지의 뺨을 때려도 마음을 놓고 하는 데가 그 아들다운 데지, 좋은 데지 말이야. 절을 하면 뭘 하겠어요. 이제 내가 절 했던가 안했던가, 모르리만큼 신경이 잔뜩 과민이 돼 가지고 하는 것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런데 종교의 목적이 이 마음을 해방을 해서 그렇게 해야만 사리 판단을, 사람을 봐도 옳게 볼 수 있고, 자연을 봐도 옳게 볼 수가 있는데, 마음에 공포심을 잔뜩 들어가지고는 자연을 봐도 옳게 볼 수가 없고, 사람을 봐도 옳게 볼 수가 없다 그 말이야. 그래 난 자꾸 하는 얘기, 전쟁 기분 어떻게든 없애자는데, 이거 정치한다는 사람들 이 불쌍한 국민을 끌고 말이야. 자꾸 전쟁 기분 속에 몰아넣으려고 그래. 이거 어떡하렵니까? 참말 안타까워 죽겠군요. 전쟁 기분 속에 몰아넣으면 어드런 줄 알겠어요? 그러면 독재하는 놈들이 맘대로 해먹기만 좋고 말이야. 점점 민중이 더 어리석어져요, 책임감이 점점 더 없어져요.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처럼 이렇게 착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한번 혁명기분이 돌면 어드랬지요? 해방이 되니깐 말이야 학교 유리창이, 이거 일본놈들이 했던 거, 이까진 것 그거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일이지만, 그 일본 그 사람들이 지은 걸, 학교 다 빠셔먹고, 나무 심었던 거 다 뽑아버리고, 그게 다 뭔고 하니 마음이 정상적인 마음에 못 들어가고 어느 무엇 때문에 삐뚤어져서 흥분된 마음엘 가면, 무서운 일을 한다 그 말이야. 근데 그걸 누가 그렇하면 정치에서 그래. 국민전체가 전쟁 기분 속에 말려 들어가면 나쁜 것이 그겁니다.
그래 우리나라 뭐 민족부흥이 어쩌구 그래. 야 너희들 민족부흥 소리 했거든 전쟁부터 그만 둬라! 전쟁 확장, 그것 그것부터 그만 둬야지. 그러기 전에는 부흥 안된다, 마음이 이렇게 이상하게 긴장이 되는 이것 가지고 제대로, 왜 시가 좋은 시가 나오고, 그림이 좋은 그림이 그려질 리가 있어요? 가치 있는 게 나올 리가 있어요? 사람이 뭘 그럼 마음씨가 좋아야. 그래 그런 의미에서 아내가 좋다는 거. 나가서는 무슨 무슨 모욕을 당한 말이 집에 쓱 들어오면 아내가 있는 정성을 다해서 해주는데, 가정이 그래서 다 풀리고 마는, 해독제에요. 그렇하고 마음이 평온해지니까 그래 또 원고도 쓸 수 있고, 또 그래도 설교도 할 수가 있지. 루터의 살림은 루터 부인이 어떻게 조언했다고 여러분이 알잖아요?
그러니 사회전체가 못 그렇다 해도 어느 한 군데가 평화가 있는 곳이 있어야 돼. 거기가 가정이라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제 가정조차도 그것을 유지해 갈 수가 없이 되가지고 그렇게 만들지 않습니까? 자꾸 그러니 이제 우리 평화라는 책임이 커요.
사는 것이 좋다면 죽은 것도
어떡하면 우리 사회에서 이걸 제거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오늘 이 문제는 직접 관계 안 되는 겁니다만, 말로다 그 얘기가 나왔군요 해도, 그렇게 도대체 우리가 공포 속에서 사느냐, 아니냐? 그래 이런 말도 이게 다 극복이 되는 거야. 아, 죽음 무서워할 것 없다, 그것도 아버지가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거야. 병 무서워할 것 없다, 우리 아버지가 뜻이 있어 우리를 잘 길러내기 위해 그래, 교육적인 의미가 들어있다는, 내가 아까 했는데, 또 우리 사람 만들기 위해 그런 거다, 또 아닌 말로 사실이 그렇지. 사람이 이렇게 잘못된 이 지능이 옅고 감정이 고르지 못하고 말이야. 생각이 깊지를 못하는데, 병도 없고, 죽는 것도 없었다고 그래보셔. 그럼 세상이 어떻게 됐겠나? 결단 났을 거예요. 내가 늘 입담 하는 소리지만 재미있는 얘기 또 반복을 해.
옛날 제나라에 제경공(齊景公)이라는 하는 임금이 있었어요. 제경공(齊景公)의 아래에서 도우면서 안자(晏子)라는 사람이 안평중(晏平仲)이라는 공자님이 칭찬을 해서 안평중세내인교로다. 안평중이 참사람 잘 사귄다, 오래 갈수록 더 대접을 해. 사람들이 다 사귀어 오래가면 버릇이 없어져서 그러면 이이는 오래될수록 대접한다, 그래서 안평중이 그 안평중이야요. 안평중은 훌륭한 신하야. 한번은 요새로 치면 좋은 날씨라. 야외에 소풍을 나가서 만조백관을 데리고 나가 먹고 두드리고 놀아요. 저녁 때가 쓱 돼 오니까 현종이 “이렇게 좋은 세상에 죽어야겠구나.” 그 생각을 하니 눈물이 쭐쭐 난단 말이야. 그래서 울어요. 우니까 아 만조백관이 “아유, 대왕께서 왜 우십니까?” “이렇게 좋은 세상에 인데 이제 놓고 죽어야겠는데 어떻게 하냐?” 그러니까 신하들이 “안 그렇습니다. 대왕께서 만세나 하십시오. 만세나 하십시오. 안돌아 가실 겁니다” 그러니까 아 좋아서 또 조금 그러는데, 안자만이 저기서 아무 소리 안하고 있어. 그래서 “아니, 만조백관이 날보고 다 그러는데 경(卿)만은 아무소릴 안하나?” 그러니까 “어리석은 임금하고 어리석은 신하들하고 수작을 하는데 내가 무슨 소리를 하겠냐?”(웃음)
그거 왜 그러냐? 그러니까 “생각을 해보시오. 아니 사람이라는 건 났다가 죽는 건데 말이야. 대왕께서 안 죽고 싶어 그러지만 말이야. 안 죽는다고 사람이 나서 죽지 않는다고 그래보시오. 당신이 오늘날 있을 것 같아? 진시황이 이날까지 살아있다고 그래봐. 너는 어떻게 됐을 것 같으냐 그 뜻이야.” 그러니까 사람이 다행히 났다가 죽었으니까 네 차례가 왔지. 세상에 사람이 악하지만, 세상이 아주 못쓰게 안 되는 건 아무리 악하던 놈도 하다가 죽는 시간이 와.(웃음) 그러니까 우리 여기가 끝이나. 새 출발을 또 할 수가 있어. 그러면 고쳐야하고 되풀이 되풀이 그 꼴인 것 같지만 그러면서도 이 세상이 돼 가는 것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싸이클 에프터 싸이클(cycle after cycle)이야. 주기적으로 또 이렇게 고치고 고치고 그 죽음이라는 것이 오묘한 거룩한 뜻이 있습니다.
싫다고만 그러지 말고. 동양에 장자나 노자는 초월한 생각에 아주 이렇게 선오생자(善吾生者) 선오사야,(善吾死也) 생이 기쁘다면 사도 기쁘지. 그건 초월하니깐 그렇습니다만, 이것은 그보다도 뜻이 깊은 겁니다. 물론 그래. 아, 사는 것 좋다면 죽는 것도 자연대로 자연의 법칙이지. 자연의 법칙대로 나오는 거 마찬가지다, 그래 장자는 뭔고 하니 생(生)은 부췌현우(附贅縣疣)로라, 그래 생이 뭐야? 살았다는 것 혹 같은 거야. 괜히 군더더기가 달려 그러는 거야. 부췌현우(附贅縣疣)요 사위결환궤옹(死爲決환潰癰)이라, 죽었다는 거는 뭐야? 부스럼 잔뜩 곪겨 쭉 짜버리고 고름 쏟아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야. 시원한 거지 나쁠 것 있냐? 그러고 이제 말한 것 있습니다만, 그것도 꽤 높고 통쾌한 사상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에게 영광이 돌아가기 위한 거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아들이 영광을 얻기 위해 그런 거다, 하는 데는 그런 것이 아닌, 높은 목적을 두고 이 우주를 이렇게 가꾸어 완성이 돼. 그런 가운데 싫은 것이 싫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고마운 것이 되니, 그러니 이게 복음이 아니냐? 전화위복이라니 이게 정말 전화위복 아니냐? 참뜻을 알고 보면 싫은 게 싫다, 좋다는 우리 생각에 옅은 생각에 하는 소리지. 하나님의 자리에서 볼 때 싫다도 없고, 좋다도 없다, 다 좋지. 다 좋은 게 참 좋은 거지. 싫고 좋고를 가리는 것은 참 좋은 거 못되는 겁니다.
내가 올 그다
그래 이건 생각을 하면 깊은 데가 있는 거. 한량이 없는 얘깁니다. 말하자면 그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건 예수님이라고 그렇게 물론 보지만. 그걸 본 다음에는 거기서 내게로 와야 돼. 아까 말씀대로 밖에 있는 예수를 보지만 말고, 내속에 있는, 그러니까 내가 곧 그다, 내가 곧, 내가 곧, 내가 곧, 영광을 얻어, 하나님의 아들로써의 영광을 하나님의 참 아들 자리에 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죽음이라는 법칙도 인류에게 주셨고, 병이라는 것도 있고, 고통이라는 것도 있고, 죽음이라는 것도 있고, 다 그렇다. 그러해야 이게 정말 믿음이라. 믿음의 길에 적어도 들어서는 거라.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그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앓는다는 말을 들으시고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유하셨습니다.”(요한11;5-6) 이건 뭐 죽음이 무섭지 않으니까 죽는다는 소리는 죽게 됐다는 소리, 그래 하던 일 접어두고 무엇보다도 가봐야겠다, 나사로 죽는단다, 큰일 났다, 그럴 건데 태연하게 뭐 있을 일 아닐 겁니다. 무슨 아마 일 있어서 그랬겠지만 그러는 것은 그게 뭐 그걸로 문제가 결정이 안나, 죽음은 다라 하니까 졸업시험을 못 치루더라도 아버지 돌아간다는데 가야지, 그러고 가야할 죽음 이상 없으니까 할거지만 그게 최종이 아니라고 하니까 듣고도 이틀을 더 계시다가 “이틀이나 더 유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다시 유대로 가자고 이젠 아무래도 가서 살려야, 가자고 아, 그러니까 대답이 “선생님 방금 유대사람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했는데, 또 그리로 가잡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 대답 보시오. 이게 역시 다 한 가지 마음에서 나와, 죽음이라는 걸 초월한, 죽음이 무섭지 않은 그보다도 죽음이라는 것이 도리어 아들의 영광, 하나님 아들로 영광자리에 가도록 하기 위한 거라고 하는, 그 인생관이 있기 때문에 나오는.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낮이 12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낮이 길어 긴 낮인데 말이야. 그러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은 빛이. 낮에 다니는데 언제 넘어지느냐? 간혹 가다 어떻게 넘어지는 수도 있지만 12시간은 나가돌아다니는데 더구나 자동차가 이렇게 오고가고 그러는데 이날까지 묘하게 치지 않고 살아오지 않았더냐?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그래도 서로 이마를 부딪치고 코가 깨지는 짓도 하는데, 그렇지도 않고 다니지 않았어? 왜 그랬느냐, 그건 눈이 있어 그렇잖아? 이 세상에 해가 있어 그러지 않아? 근데 12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 세상의 빛이라니, 여기 세상의 빛이라는 것 있어. 태양이라 빛이라는 전장에도 사람의 눈이라는 거 있는데 빛을 보기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어드렇냐? 밤에 다니면 뭐 잘 넘어지잖아? 아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으므로, 빛이 그 사람 안에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 육체에 관한 한은 빛이 저기 있으니까 낮에 이 사람들이 안 넘어지지만 밤만 오면 꼼짝 못하고 넘어져. 거길 보면 뭐냐? 빛이 속에 있지 않고 겉에 있어. 겉에 있는 빛이니까 빛이 있는 때는 안 넘어지지만 빛만 없으면 넘어지지. 그러면 그 사람 안에 없으므로 그러는 데가 요게 무슨 뜻이냐? 그러면 이 세계에서는 그렇게 돼 있지만, 정신생활에서는 하면 이 속에 빛이 있어. 속에 빛이 있는 사람은 상관이 없다, 마치 겉에 이 세상에 빛이 있으면 어린애들이라도 나가 하루 왼 종일 나가 다녀도 걱정이 없이 다니는 모양으로, 너는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혹 선생님이 또 실수나 당하지 않을까? 저녁이 되면 매나 맞지 않을까, 돌아가지나 않을까? 그 걱정을 하지만 속에 빛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지. 빛만 있으면 낮에 다니는 사람이 겁이 없는 걱정이 없는 모양으로 걱정이 없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관한 한은 빛이 속에 있지 않고 겉에 있으니까 밤낮의 차이가 있지만, 사람의 속을 말한다면 이 속이 빛이니까 밤낮이 없어. 어디를 가거나 상관이 있냐? 풀어 말하면 그런 뜻이 여기 있어요.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빛이 그 사람 안에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그들에게 우리 선생님은 그러면 자기 망신 안 당하니까 걱정이 없어, 내속에 빛이 있는 한 염려도 없다, 그리고 이제 우리 친구 나사로는 잠들었다.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니까 조금 재미있게 하시는 말씀으로 “잠들었다, 내가 가서 깨우겠노라” 고 덧붙여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도무지 모르니까, 어 잠들었다면 저절로 안 깨나오겠어요? 깰거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답답해서 예수님께서 있는 대로 말해. 나사로가 죽은 것을 말씀했는데, 제자들은 그걸 정말 자는 건줄 알고 그러니까 이때 예수님께서 밝히 말씀하시어 “나사로가 죽었단 말이야.” 야 이 바보들아 죽었단 말이야. 너 말대로 하면 죽었단 말야. 나로 하면 자는 거지만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은 너희를 위하여 도리어 기쁘게. 친구가 앓는다면 친구가 죽었는데 가보지도 못하고 있으니까 아이구 미안해. 미안해. 그래서 거기 있었더라면 다 약이라도 써보지 않겠나? 그러겠는데 있지도 않고 그만 잘됐어, 잘됐어. 자기가 안간 거 잘됐다는 거예요. 왜 잘됐어? 내가 거기 있지 않은 것은 너희를 위해서 도리어 기쁘게 생각한다. 왜 그런 고하니 마지막에 살아날 것 뻔한 거니까. 그게 영 죽는 사람에게는 보면 아이구, 마지막엔 너 보지도 못했구나. (녹음10, 3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