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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에 들어선 아이들은 동물이야기, 그러니까 우화를 배운다.
1학년 아이들은 아직 세계가 하나이고 세상과도 하나이며, 아이들도 하나이다.
그랬던 1학년 아이들이 2학년쯤 되면 하나였던 세상이 분리가 된다.
둘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아이들은 좀 혼란스럽다.
하나가 둘로 분리되는 시기인데 어찌 혼란스럽지 않을까?
(실은 대부분의 짝수학년에서는 아이들의 감이 요동친다. 매년 좀 더 강하게...
그러기에 발도르프 학교에 보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거라 생각하신 부모님들은
아이들과 함께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탈 수 있으니, 짝수학년이 되기 전에 미리미리 마음의 준비를 다잡으셔야...^^::)
그래서 아이들안에 하나로 섞여 있던
성스러운 고차원적 모습들과 동물적인 낮은 차원의 모습들이
2학년쯤 되면 분리되어 나타난다.
1학년 때는 조금 욕심이 있어보이면서도 착한 듯 하나의 사건에서 함께 보였는데
2학년이 되면서는 선하고 착한 모습과, 욕심부리거나 감정적인 낮은 동물적 모습들이 각각의 사건에서 따로 보인다. 착한 일을 한 모습. 혹은 어이없는 욕심과 고집을 부리는 모습.
그래서 우화와 성인이야기가 말과 글 시간의 텍스트로 사용된다.
(1학년의 동화이야기에는 성인과 동물의 모습이 한 번에 드러난다.)
그렇게 시작된 우화 이야기.
지난 5월에는 주로 영리한(머리만 쓰는) 여우를 위주로 다루었다.
꾀를 써서 남을 곤경에 빠뜨리거나,
자기 꾀에 스스로 넘어가 곤경에 빠지거나.
그런 여우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은 즐거워했다.
내면에 빛이 있는 자만이 빛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반대의 경우도 비슷하리라 본다.
'나는 어떤 동물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지'를 바라보는 것도 좋은 생각거리일 듯하다.
이번 7월은 '늑대'에 관한 이야기이다.
헛된 고집과 멋대로인 당나귀가 개인적으론 탐났지만, 늑대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필요할 듯 했다.
'늑대'는 인간 안에 있는 '탐욕'에 관한 상징이다.
그런데 이번에 늑대 이야기들을 준비하다 보니, 재밌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학년 때 동화들이 사방팔방에 나뉘어져 있지만, 실은 주~~욱 연결되는 것처럼(곰이 군인이 되고, 양복장이가 구두수선공이 되고 등등)
2학년 이솝 우화도 그렇게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늑대에 관한 이야기들을 꿰어 읽어보니, 정말 늑대를 꼭 뭐라 할 수 없는 안타까움들도 느껴졌다.
우화를 가르칠 때, 교훈을 주지 않는 것을 중요한 배움원칙으로 가져가는지에 대해 다시 이해하게 되었달까?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우리가 잘 아는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 있지 않은가?
두루미를 초대하는데 평평한 접시에 음식을 줘서 다음엔 두루미가 똑같이 긴 주둥이의 접시에 음식을 주는.
(원본은 여우가 아니라 늑대로 되어있다. 주인공이 여우인 것과 늑대인 것은 전혀 다른 이해를 가지게 한다.
따라서 함부로 이야기를 바꾸거나 주인공을 바꿔서는 안된다. 내가 알지 못할 뿐, 더 원형적인 의미가 있다.
그래서 아래에는 늑대와 두루미로 이야기 하겠다.)
어떤 판본에는 이렇게 뜬금없이 시작한다.
"마음이 불편했던 망나니 늑대는, 어느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학부인을 식사에 초대한다.
학부인이 친절을 베풀어 준 것에 대해 보답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평소 욕심많고 버릇없는 늑대로서는 무척 갸륵한 일이다 싶어 별로 기대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늑대가 어떤 것을 내놓을지 궁금하여, 학부인은 서둘러 늑대의 집으로 갔다.
차린 것은 없지만, 하는 늑대의 말 그대로 음식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어 보였는데,
부엌에서 맛있는 스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망나니 늑대 치고는 제법이라고 속으로 잔뜩 기대를 하며 테이블에 앉아있던 학 부인은. . ."
아이들에게 이솝우화를 가르치려 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저 늑대와 두루미 이야기였다.
특히 내게 궁금했던 것은 '누가 먼저' 자기에 맞는 접시를 내놓았는가? 그리고 왜 그냥 넘기지 못하고 복수의 복수를 계속하는가였다. 단순히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단순함을 가르치려 함은 아니었으리라.
심지어 늑대와 양, 늑대와 노파, 늑대와 개 등 다른 이솝 우화를 읽을수록 늑대가 탐욕스러워지는(탐욕스러워 질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눈에 들어왔다.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시간적, 공간적 힘.
아이들에게도 비슷할 것이다. 아이들의 겉모습만 보고 "넌 욕심이 많아~"라고 쉽게 이야기하고 고칠 점을 이야기 할 수 없다.
20년전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아마 동호였을 것이다. 그당시 의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때 였는데, 동호와 단비는 그 동네 대부분 아이들이 그렇듯, 부모님은 도시로 돈 벌러 떠났고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6학년 육상부 아이들을 데리고 군 체육대회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중국집에서 음식을 사 줬는데, 손으로 만두를 허겁지겁 집어 먹으면서도 다른 손에도 만두를 집고 있었다. 그당시만 해도 깔끔한 서울내기였던 내 눈에는 그런 행동이 버릇없어 보였고, 예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혼냈던 기억이다. 그런데 동호, 단비네 집은 하루 한 끼 학교에서 점심 먹는 것이 다였다. 심지어 동생 단비(우리 반이 아닌 옆 반이었음)는 어느날 우리반 아이들이 내 집에 놀러왔을 때 눈총을 받으면서 함께 놀러와서 라면을 무지하니 먹어댔다. 애들이 돼지라고 놀렸는데 그때 단비가 자기 꿈이 돼지라 그랬다. 돼지는 많이 먹을 수 있어서, 그래서 돼지라 그랬다. 울컥하는 마음에 내가 돼지를 살찌우는 이유는 단지 다시 먹이로 쓰이기 위해, 죽기 위해 먹는 거라 했는데... 그럼에도 단비는 죽어도 먹다 죽으면 좋다고 이야기했다.
(언젠가 학교 홈피에 쓴 단비 이야기
https://m.cafe.daum.net/waldorfschule/kIkd/147?svc=cafeapp )
어떤 사람을 보던, 일을 보던 보이는 현상 아래 그 뿌리를 보아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은, 그 잎과 꽃은 사실 부분이고, 또 변해 사라질 어떤 것들이다.
나이를 먹고 그런 경험들이 쌓여가다보니 무엇을 가르친다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 특히 단순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그 안에 감추어진 지혜를 잘 품게하는 발도르프 교육에서는 더더욱.
그런데 이번에 눈에 띤 대목은 뜬금없이 '마음이 불편했던' 망나니 늑대였다.
왜 앞에 내용없이 갑자기 마음이 불편했던 늑대일까?
그래서 더 책을 뒤져 늑대와 두루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살펴보니, 왜 우리가 잘 아는 그 이야기가 나왔다.
늑대 목에 걸린 생선가시를 뺀 두루미. 목에 걸린 가시때문에 죽을 것 같이 소리치던 늑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 두루미였다. 지옥에서 부처님이라도 만난 듯, 목에 가시만 빼 주면 뭐든 해 주겠다고, 소원 다 들어주고 모시고 살겠다던 늑대. 그러나 목에 가시가 빼지고 나서는 무엇을 해줄 것인지 기대하는 두루미에게, "늑대의 입안에 머리를 넣고도 무사했던 건 아주머니뿐일 거유"라고 능청스럽게 겁박을 하던 늑대.
여러 일이 떠올랐다.
내 삶의 과제 중 하나가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를 이해하는 일이다.
사람들이 도와달라 할 때마다 그들을 도왔다. 무엇때문이었을까? 공명심? 남을 도운다는 명예심? 그러나 시간이 지나 내게 돌아온 것은 잊혀짐이었다. 아마 고마움을 가지고 살기를 바랐을 수도 있다. 뒤늦게 알게된 것은 내 멍청함이었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내 어리석음이 일종의 '착한 척'과 함께 섞여 묘한 공명심을 만들어 낸 것이 맞았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오는 일도 힘들었지만, 항상 다시 돌아왔을 때는 떠날 때와는 다르게 무엇 하나씩 떨어져 나가 있었다. 하긴 공명심이든 착한 척이든 내 것을 다 챙기며 도울 수는 없는 일이겠지.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돌아온 자리를 복구하여 다시 좀 있을 만할 때마다 어디선가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은 내게 도와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그들을 돕기 위해서는 나는 하나 둘씩, '내 것이 아니었던 내 것'들을 떼어내야 했다. 가족을 넘어, 가정을, 직장을, 친구를, 돈을, 심지어는 내 몸도 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준 후, 내게 돌아오는 건 내 보따리는 어디있는가 였다(아마 구하는 과정에서 내가 잃어버렸을 터이다). 마치 이야기 속의 늑대가 두루미에게 그러했듯이.
아이들을 가르칠 텍스트를 놓고 다시 생각해본다. 그럼 아파 죽어가는 늑대를 다른 동물들처럼 그냥 지켜보아야만 했을까?
아니면 어떤 선생님 말처럼 누군가를 도울때는 돕는다는 생각 자체를 없애고, 보답받을 생각 역시 없앤 채 도와햐 하는 거였을 것이다.
그래, 그게 맞지만 아직 난 그런 수준이 되지 못한다.
실은 인생의 이야기는 이것보다 더 뼈저리다.
사람들이 도와달라고 손 내민 일들은, 그들에겐 아파도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었고, 당장 돕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었을 일이었다.
아마 내가 내 품은 헤아리지 못하고, 스스로를 슈퍼맨이라 착각하며 살았을 수도 있었을게다.
아니 어쩌면 신이 내게 좀 더 버리고 떼어내야 할 것들을 겪게 해주신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떠올리며 교재 연구를 하려하니, '우화'라는 것이 참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교사가 어느정도까지 이해를 품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늑대 이야기들을 찾아보니 늑대가 그렇게 지낼 수 밖에 없었음에 마음이 간다. 동정심( 同情心)
여지껏 우화가 한자로 어리석을 愚자를 써서 愚話(어리석은 이야기)인 줄 알았다.
왠지 좀 다를 것 같아 찾아보니 우화의 한자가 寓話로 나온다.
寓 머무를 우;
머무르다, 객지에서 묵다, 숙소, 여관, 객사, 붙여 살다, 임시로 살다, 남에게 의지하여 살다
늑대는 어느 순간, 늑대로 충실히 머물러 살아야 스스로의 본성을 보고 그 업(業)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여우같은 아이를, 까마귀같은 아이를,
혹은 늑대같은 아이를 바꾸어 내는 일이 아니라 이해해 보는 일일게다.
그가 여우이고, 까마귀일 수밖에 없었던 그런 삶들을.
父母未生前 本來面目.
어쩌면 그것이 이번 삶 이전의 삶을 이해하는 일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리고 그 전에,
누구를 돕는다는 헛된 미망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도울 수 있기를.
첫댓글 선생님~ 이 글을 연합 기관지에 기고해주시면 좋겠어요.(제가 필자를 섭외하고 있거든요;;) 다음 이야기도 기대가 되네요^^
기관지에 기고할 만한 글인지는...
만약 그래야 한다면 다시 수정해서 써야 할텐데, 그럴 시간이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바꾸어 내는 일이 아니라 이해해 보는 일..
마음속에 담아 두고두고 떠올려야겠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네, 이해해야 도울 수 있겠지요.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또 생각을 댓글로 나눠주셔서 더 감사드립니다.
힘내세요, 선생님~~
속사정은 잘 모르지만 그 많은 일들을 하시고 한켠으로 힘든 마음이 느껴집니다^^;
저에겐 아직도, 초창기 어려울 때, 바지위에 팬티는 입지 않았지만 파란색 점퍼입고 수퍼맨처럼 짠 나타나셨던,
나이보다 10년은 젊어보이셨던 은인 장샘이 각인되어 있습니다요~
하핫, 그때가 아래 사진의 시절이던가요?
엊그제 재용, 성무와 소주 한 잔 했는데 좋더라고요...
십년은 젊어보였단 말을 듣는 게 좋은 걸 보니, 저도 나이를 먹는가봅니다.
늘어간 건 주름이요.
달라진 건 몸무게 뿐이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https://m.cafe.daum.net/staringwithfixedeyes/YJwN/175
놀러오세요~
지난 일들, 잘 떠나보내 볼까요? ^^
@장승규 이 화면이 뜨는걸요 ㅋㅋ
@이안,해리엄마 https://m.cafe.daum.net/staringwithfixedeyes/YJwJ/257?svc=cafeapp
"어리석다" 愚 는
心증에서
마음 心 을 버리고
갓머리 宀 지붕을 빌려 쓰면
임시로 붙어, 잠시 쉬어갈 寓
쉼자리가 되는군요 ...
2학년의 교사는
우화를 들려주는 교사는
아이들을 판단, 분류, 해체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내 어리석음의 지붕 아래, 잠시 붙어 살다ㅡ
지나가도록
갓머리 지붕을 하면 되는구나 ...
합니다.
나의 어리석음을 지나
나의 늑대를 지나
너의 동물에게로.
너의 정신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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