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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유재공의 가장[六有齋公家狀]
공의 휘는 용鏞, 자는 명구鳴久이다. 김씨金氏는 본래 신라 왕자新羅
王子 흥광興光의 후손으로 고려 시대에 서로 이어서 경상을 지냈는데
우리 조선 조정에 들어와서는 천리天利가 밀직사를 지냈다. 5세를 지나
부륜富倫에 이르러서는 벼슬이 현감이었다. 도산陶山 이 선생李先生(이황李
滉)에게 배웠는데 사문이 애중하였다. 호가 설월당雪月堂이다. 대부大父
는 영坽이니 벼슬이 사간이었다. 인조 때에 풍절과 독행으로 이름나 세
상에서 계암 선생溪巖先生이라 일컫는다. 지금 임금의 조정에서 이조 판
서에 증직되었는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휘두輝斗는 진사로 고상한
행실이 있었다. 호는 남간南澗인데 하계霞溪 권유權愈114가 이른바 ‘지조
가 능히 가법을 이었다.’고 한 분이다. 이 어른이 진주 강씨晉州姜氏에게
장가갔는데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계실繼室은 영해 신씨寧海申氏로 제용
감 부정濟用監副正 신건申楗의 따님이다. 대명大明 영력永曆 정유년(1657)
모월 모일에 공을 오천리烏川里 집에서 낳으니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
이 있었다. 정훈庭訓이 또 엄정하여 젊어서부터 과년한 자제가 없었다.
갑인년(1674)에 남간 공이 세상을 떠났는데, 위독해지자 단지斷指하여
입에 피를 흘러 넣고 초상이 나자 상례의 절차를 엄히 지켜 오직 예의를
따르니, 이때 공의 나이가 아직 스물이 되기 전이라 보는 사람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그 후 한 번 소과에 응시하였으나 입격하지 못하자
드디어 결단하여 과업을 버리고 날마다 고요한 곳에 거처하여 독서하였
다. 우리 영종 임자년(1732) 1월 5일에 육유재六有齋에서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76세였다. 8월 임오壬午에 안동부安東府 북쪽 동막산東幕山에 장
사 지냈다가 뒤에 예안禮安 현동玄洞 유향酉向의 언덕으로 옮겨 모시니
실은 할머니 홍 부인 묘소 앞이었다.
아, 공은 세상에 기구하게 나서 끝내 깊이 가려진 곳에서 늙어 세상에
베푼 것을 논할 만한 것이 없다. 유독 집안에 거처하며 일삼아 행한
것이 날마다 볼만한 것이었을 뿐이다. 어버이를 모심에는 모부인 받들
기에 마음을 다하였다. 양가養家가 본래부터 가난하였지만 맛있는 음식
올리기를 거른 적이 없었고 또한 그 장만하는 어려움을 모르게 하였다.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문안이나 추위와 더위에 거처를 적절하게 해드리
는 일은 내칙內則을 따르고 항상 기쁜 안색과 유순한 용모를 지었으므로
종족이 모두 “어버이 모시는 일은 아무개처럼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본가 어머니의 상례 때에도 이전의 상처럼 정성을 다하여 몇 리나 떨어
진 묘소를 한겨울 추위나 장마철의 더위에도 거르지 않고 매일 곡하며
성묘하였다.
자신을 단속함에는 비루하고 사리에 어긋난 말을 멀리하고 게으르거
나 거만한 습관을 몸에 베풀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한
다음 종일토록 공경하는 태도를 지켜 홀로 한가히 지내는 곳에서도 엄
격한 스승을 모시고 있는 것처럼 하였다. 집안에 거처할 때는 부부夫婦
가 손님처럼 서로 공경하여 50년을 해로하면서도 규방에서 한결같이
예법을 지켰다. 유인이 세상을 떠난 때에 병이 위독하자 공이 들어가
진찰하고 나와 “내 일찍이 발을 본 적이 없었거든, 지금은 발이 드러나
있는데도 수습할 줄 모르니 장차 돌아가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그 이튿날 과연 슬픈 일을 당하였다. 향리에 거처할 때는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세리勢利를 멀리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선행을 칭찬할 뿐 그 허물
을 말하기를 꺼렸다. 대체로 자신의 지조를 엄격히 지켜서 조금이라도
남에게 오욕汚辱을 당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러나 남들에 대해서는 경계나 간격을 두지 않고 오로지 정성으로
대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종족과 향당이 모두 공경하여 따랐다. 위급한
사람을 도와줄 때는 의리를 중시하고 재물을 가볍게 여겨 가난을 핑계
로 인색하게 처신하지 않았다. 일찍이 둘째 아들을 영천에 보내어 노복
을 추쇄하여 흉년을 견딜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그 길에 공의 질녀姪女
가 사는 곳을 찾아보게 하였다. 질녀의 생활이 몹시 곤궁하여 아들이
곧 실어 온 것을 남김없이 주어버렸다. 돌아온 후에 공이 “돌아오는
길에 아무개 질녀를 만나 보았느냐?”라고 물으니, 아들이 대답하기를
“만났는데 금방이라도 굶어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실은 물건을 주지 그랬느냐.”라고 하니 “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자들이 범가范家의 의장義庄115도 이보다 낫지는 않았을 것이
라 하였다. 학문을 할 때는 일정한 방에 정좌하고 정신을 집중하여 강습하였는
데, 돌아가시던 날 아침까지도 송독을 그치지 않았다. 경서와 사서 및
모든 성리서性理書에 무르익어 관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심경心經
과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에 대해서는 더욱 독실하게 공력을 기울였다.
일찍이 지은 시에,
수시로 맑은 정신을 불러 깨우는 것은 時時喚起惺惺主
일없이 선정에 들려 해서가 아니라네 不是空空入定禪
라고 하고, 또
저울 눈금 쌓여야 큰 것을 이루듯이 銖銖寸寸能成大
점점이 흐르는 물 오래되면 채워지리 點點涓涓久乃充
라고 한 곳이 있으니, 스스로 즐거워한 경지를 알 수가 있다.
거처하던 초당草堂에 육유재六有齋라고 편액하니 횡거橫渠 장 선생張先生
의 ‘낮에는 일을 행하고 밤에는 터득하며 쉴 때도 양성하고 잠깐 사이에
도 존심한다.’고 한 뜻이다.116 병이 위독하자 손으로 서안의 책을 쓰다
듬으며 시중드는 자에게 감실에 올려두게 하였다. 그리고 여러 아들들
에게 “내가 젊었을 때 미련하고 노둔하였다. 아버님이 일찍이 훈계하시
기를 ‘네 형은 재주가 있었지만 요절하였다. 네가 만약 배움에 힘써서
우리 집에 글을 읽는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수 있게 한다면 내가 눈을
감을 수 있다.’ 하신 적이 있으므로 못난 내가 감히 하루도 잊지 못하였
다. 지금 아무 이룬 것은 없지만 또한 지하로 돌아가 뵐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 대개 공의 집안이 대대로 이어온 가법에는 본래 연원淵源이 있었지만
이미 남간공의 유훈을 제대로 유념한 데다 계부 송파공松坡公에게서
전습傳習하여 마침내 속학俗學 이외에도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알았다.
개석介石의 자질117에 더욱 갈고 닦는 공부를 더하고 빙벽氷蘗의 지조118
에 치밀한 노력을 거듭하여 만년에 이르러서는 공부가 더욱 나아지고
덕이 더욱 높아져 외모에 나타난 것이 엄밀하면서도 신중하고 간이하면
서도 온화하여 동시대의 붕우들이 초당옹草堂翁이라 부르면서 자字를
부르지 않았다. 문인 여선겸呂善謙은 현감 여명주呂命周119의 아들로 일
찍이 공의 모습을 손수 그리고 직접 찬贊을 달았는데,
온화하고도 씩씩한 모습 和而莊
그 덕성이 드러나네 狀厥德
엄숙하게 바라보나니 肅然瞻
사특함이 절로 사라지네 邪自却
라고 하니, 공이 비록 가난한 집에서 늙었지만 덕의 광휘光輝가 사방에
도달하여 남들을 감복시킴이 이와 같았다. 가법이 본래 엄정하기로 선
세부터 영남에서 유명하였거니와 공에 이르러 더욱 조심하여 쇠퇴하지
않게 하였으므로 문정이 엄숙하고 방정하였다. 삼종질三從姪 아무개가
일찍이 그 집에서 아들을 안고 있었는데 공이 멀리서 보고 불러 꾸짖으
니 그 사람이 두렵고 부끄럽게 여겨 감히 다시는 그러지 못하였다.
문장은 두텁게 쌓은 공부가 발로하여 혼연渾然하고 순숙純熟하였고,
시 또한 전아典雅하고 충담沖澹하여 조탁하여 꾸미기를 일삼지 않아도
이치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벗이었던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이 일찍
이 “초당은 노둔하였지만 학문에 힘써 문장을 이루었으니, 재주 있는
사람이 미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약간의 책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유인孺人 진성 이씨眞城李氏는 판관 이성철李誠哲의 따님이니, 바로 퇴계
선생退溪先生의 5세손으로 아들 넷과 딸 둘을 낳았다. 아들로 장남 상학
尙學은 생원인데 행의로 향리의 중망을 받았으나 공보다 먼저 죽었다.
차남은 상질尙質인데 역시 공보다 먼저 죽고 그다음은 상문尙文인데 출
계하였다. 그다음은 상덕尙德으로 또한 출계하였는데 수직壽職으로 벼슬
이 동지중추부사이다. 딸은 사인 안서준安瑞駿·김서조金瑞朝에게 시집갔
다. 손자는 9인은 아무개 아무개 등이다.
아, 공이 세상을 떠난 지 지금 70여 년이 되니 언행이 날로 잊혀간다.
하루는 공의 여러 후손이 나에게 부탁하기를 “증조부의 학문 덕행은
마땅히 칭술해야 합니다. 그런데 못난 우리로서는 칭술하지 못하여 이
름이 인몰湮沒될까 두렵습니다. 장차 덕을 아는 입언 군자에게 묘갈문을
맡겨 후세에 전하게 하려 하니 그대가 가장家狀을 편차編次해 주십시오.”
라고 하였는데, 내가 공에 대하여 당형제의 후손이 되므로 감히 사양하
지 못하였다.
이에 공의 아들 생원공生員公이 손수 기록한 글과 공의 유고 및 지구
知舊들의 만사와 제문을 근거하여 대략 위와 같이 배열하였다. 어찌 감
히 조금이라도 근거 없이 지어내어 옳지 못한 죄를 범하겠는가. 후세의
공의는 선배 중 당대의 명류名流로서 공을 애도한 만사에 혹
즐겁고 편안히 여긴 바는 한 바가지 물 所樂安瓢飮
가까운 일상에 뜻을 붙여 공부하였네 工夫着近思
라고 하거나 혹
누가 능히 후학의 스승이 되랴 誰能師後學
경서를 읽는 분 다시 없으니 無復讀遺經
라고 하거나 혹
영남 인사 중 으뜸이었네 山南人士首
라고 하거나 혹
요금 소리 천년토록 남은 음률 고르리 瑶絃千載按餘音
라고 한 말 등에서 공의 덕행을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당대에 공을
안 사람의 공평한 칭송이 이미 이와 같았다면, 이것을 역사에 붙이더라
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오직 공의 중체重體를 받든 자손이 대를 이어 요절하고 다소의 문적이
보전되지 못한 까닭에 기술한 말이 너무 소략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 어찌 나중이라도 붓을 잡을 대가의 채택에 대비가 되랴
六有齋公家狀
公諱鏞。字鳴久。金氏本新羅王子興光之後也。在勝 國。代相承爲宰輔。入我朝。有諱天利。密直使。歷五
世。至諱富倫。官知縣。學于陶山李先生。爲師門所重。 號雪月堂。大父諱坽。官司諫。以風節獨行。名于仁 祖世。世稱溪巖先生。今上朝贈大冡宰。謚文貞 公。諱輝斗。進士。有高行。號南澗。權霞溪。所謂志操克 承家者也。聘晉州姜氏。不育。繼室寧海申氏。濟用副 正楗之女也。以大明永曆丁酉某月某日。生公于烏 川里第。幼有至性。庭訓又嚴。自少未嘗有子弟過。歲 甲寅。南澗公卒。其危劇。血指以灌之。旣喪。喪節嚴謹。 惟禮儀是遵。時。公年末及冠。見者皆奇之。其後一試 南宮不遇。遂决去之。日靜居讀書。我英宗壬子正月五日。考終于六有齋。享年七十有六。其年八月壬 午。葬于安東府北東幕山。後移奉于禮安之玄洞酉 坐之原。實祖妣洪夫人墓前也。嗚乎。公畸於世。卒老 於豊蔀之下。施之于世。無可論矣。獨居家事爲。日可 見者而己。其事親也。奉母夫人忠養。家素貧而瀡 未嘗闕。亦不使知其備之艱也。定省温凊。循內則。常 愉色婉容。宗族咸曰事親若某者可也。及後喪。自致 如前喪。墓距數里許。日哭省。祈寒雨暑不廢。其律身 也。鄙倍之言。遠於辭氣。惰慢之習。不設身體。朝起盥 櫛。終日欽欽。雖幽獨之中。有若嚴師在前。其居家也。夫婦相敬如賔。偕老五十年。閨門之中。一以禮。孺人 臨終病篤。公入診之。出曰吾未嘗見其足。今露而不 知收。將不歸乎。其翌。果遭慽。其居鄕也。守吾拙而㥘 於利勢。揚人善而耻言其過。凡厲自持。耻一點受汚 於人。而待人則不畦不畛。惟悃愊是以。是故。宗族鄕 黨。皆敬服。其急人也。重義輕財。不以貧窶而有所恡。 嘗送第二子榮川。斥臧獲。欲爲荒歲計。道過公從姪 女所。窘甚。遂傾所載與之。及返。公問歸路見某姪女 乎。曰見之。溝壑將面前矣。公曰何不與所載物乎。曰 與之。聞者以爲范家無以過之。其爲學也。靜坐一室。專意講習。逮觀化之朝。不撤誦讀。若經若史。若性理 諸書。無不淹貫。而於心經 朱子書節要。用工尤篤。嘗 有詩。曰時時喚起惺惺主。不是空空入定禪。又曰銖 銖寸寸能成大。點點涓涓久乃充。其所自樂者。可知 也。所居草堂。顔以六有。橫渠 張子。爲得養存之義也。 疾旣革。手撫案上書。命侍者。庋諸龕。語諸子。曰吾少 也。椎魯先君。嘗戒之。曰汝兄才而夭。汝苟力學。吾家 讀書種子。得以不絶。吾之目可瞑。不肖不敢一日忘。今 雖無成。亦可以歸拜地下。盖公家世裘飱。自有淵源。 而旣克念南澗公遺戒。又傳習於季父松坡公。乃於俗學之外。知有合做底事。介石之姿而加以磨礱之 工。氷蘗之操而重以銖寸之㓛。至其晚年。業益進而 德益卲。見於外者。嚴慄而謹慤。簡易而和粹。一時諸 友。皆皆呼草堂翁而不字也。門人呂善謙。邑宰命周 子也。嘗手寫公直係以贊。曰和而莊。狀厥德。肅然瞻。 邪自却。公雖窮老蓬蓽。而德輝之旁達而服人。如此。 家法自先世素嚴。聞於山南。至公又競競無替。門庭 斬斬焉。三從姪某。嘗抱子于其堂。公遥見而召責之。 其人惶愧不敢復之。文章積厚而發。渾然純熟。詩亦 典雅冲澹。不事藻繪而理自到。友人權蒼雪 斗經。嘗謂草堂鈍而力學以文。非才子可及。今有若干卷。藏 于家。孺人眞城李氏。判官 誠哲之女。寔退溪先生五 世孫。擧四男。長尙學。生員。以行義。重於鄕。先公歿。次 尙質。亦先公歿。次尙文出後。次尙德出後。以壽。官同 中樞。二女。士人安瑞駿 金瑞朝也。孫男九人。曰云云。 噫。公之下世。今七十餘年。言行日以翳然。一日。公之 諸孫。命是瓚。曰曾大父學行。宜有述也。不肖等。名湮 沒而不稱懼焉。將謁文于知德立言君子。俾傳于後。 爾其編次家狀。是瓚於公。爲堂兄弟之後。不敢辭。謹 依公之子生員公所手錄。又據公遺稿及知舊輓誄。畧加排列。如右。何敢一毫杜撰。以犯不韙之罪㦲。後 世公議。徵諸先輩一時名勝之輓公者。或云所樂安 瓢飮。工夫着近思。或云誰能師後學。無復讀遺經。或 云山南人士首。或云瑶絃千載按餘音。當世知公者 之公誦。己如此。是可以得附靑雲而無愧也㦲。惟是 承公重者。連世夭折。文蹟多少不保。所以記述者。不 免太疎畧。惡足以備秉筆之採擇㦲。
114 권유(權愈, 1633∼1704):자는 퇴보(退甫), 호는 하계(霞溪),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665년 문과에 급제하여 청요직을 지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한 후
대사간·대제학이 되고 지경연사에 올랐지만,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정권을 장악한
후에 유배되었다. 고문에 밝았고, 청빈하다는 평을 들었다.
인경왕후지(仁敬王后誌) 를 저술하고 조선의 역대 임금의 저술인 열성어제(列聖御製) 편찬에 참여하였다.
115 범가(范家)의 의장(義庄):범가는 송나라 오현(吳縣) 사람 범중엄(范仲淹, 989∼
1052)의 집안을 말한다. 범중엄이 참지정사(參知政事)의 벼슬에 오르자 자신의 봉급
을 덜어 전택(田宅)을 마련한 후 오현 일가의 대소사에 경비를 대도록 하였는데, 이것
을 의장(義庄)이라 하였다.
116 횡거(橫渠)……뜻이다:횡거는 북송의 철학자 장재(張載, 1020∼1077)의 호로, 자는
자후(子厚)이다. 장재의 정몽(正蒙) 「유덕(有德)」에서 일상생활에서 노력해야 할 여
섯 가지 일로 “말에는 교훈이 있고, 동작에는 법도가 있고, 낮에는 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밤에는 터득한 바가 있어야 하고, 숨 쉬는 사이에도 양성(養性)하는 공부가 있어
야 하고, 잠깐 사이에도 존심(存心)하는 공부가 있어야 한다.[言有敎 動有法 晝有爲
宵有得 息有養 瞬有存]”라고 하였다.
117 개석(介石)의 자질:돌처럼 확고부동한 자질이다. 주역 「예괘(豫卦)·육이(六二)」에서
“돌처럼 견고해서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지 않으니, 정하고 길하다. 절조가 돌과 같으
니 어찌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겠는가.
이를 통해서 군자가 결단하는 것을 알 수 있다. [介于石 不終日 貞吉 介如石焉 寧用終日 斷可知矣]”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118 빙벽(氷蘗)의 지조:얼음물을 마시고 소태나무를 씹는다는 뜻으로, 온갖 고난을 감내하
며 절조를 지키는 것을 비유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당(唐)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삼년위자사(三年爲刺史)」 시에서 “삼 년 세월 동안 자사로 있으면서, 얼음물 마시고
소태를 씹었노라.[三年爲刺史 飮氷復食蘗]”라고 한 데서 나왔다.(白樂天詩集 卷1)
119 여명주(呂命周, 1689∼?):자는 사신(士新),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1714년 진사시
에 입격하였고, 정릉 참봉(靖陵參奉)·종묘 부봉사·호조 좌랑 등을 거쳐 예안 현감(禮安
縣監)을 지냈다. 지방관을 지낼 때 선정으로 이름이 있었다. 김천(金泉) 구성에 살았다.
256 ∙ 일일재선생문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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