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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모든 시조 : 이태순 시인 ♣ -2020년 3월 9일 월요일-
씀바귀
금모래 은모래
금모래 은모래 저 냇가 그래 맞아
도피안사
여기 와서 만나는 철불 닮은 내 북쪽
그에게도 잃어버린 북쪽이 있다했다
절 한 채 가만히 벗은 달빛 든 보름 뒷날
가까운 듯 먼 듯 저 뒷모습이 섭섭했다
대적광전 다 못 읽어 툭 떨어지는 눈물
그 눈물 거두어주는 내 북쪽은 달 혹은 적
옛집의 대문 밖에서
남장을 지나며
절집 아래 마을은 초겨울이 환합니다
처마마다 감을 걸어 달이 일찍 뜹니다
낡을 것 더 없습니다 가릴 것도 없습니다
등짐을 잠시 벗고 잿빛나무로 서 있습니다
대숲 바람소리에 또 길 잃을 뻔합니다
마음의 절집은 멀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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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순 시인은 경북 문경 출생으로 2005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습니다. 시조집으로『경건한 집』『따뜻한 혀』『북장을 지나며』등이 있습니다. 다섯 편의 시조를 소개합니다.
「씀바귀」는 봄나물 중 강한 쓴 맛을 가지고 있는 나물입니다. 처음에는 쓴맛을 내다가도 오래 씹으면 단맛이 나기도 합니다. 소태 씹은 것 같은 그런 날 그 떫은 날에 그냥 꿀꺽 삼켰다고 합니다. 태생이 흙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이면서. 목구멍 비집고 피는 씀바귀 꽃 지천이라, 는 종장은 인상적입니다. 씀바귀 꽃이 목구멍에서 지천으로 핀다는 것은 자아와 자연 즉 씀바귀 꽃과 한 순간 일체를 이루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흙과 씀바귀와 사람이 분리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상기하게 합니다.
「금모래 은모래」는 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를 생각하게 합니다.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하던 유년 시절 냇가에서 모래를 만지면서 놀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하여 화자는 금모래 은모래 저 냇가 그래 맞아, 라고 하면서 찰방찰방 걸어가면 복사뼈가 발개지고 조약돌 재잘거리던 고 작은 입 투명했던 것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간지러워 몹시도 간지러워서 땅의 실밥이 톡 톡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는 표현은 감각적입니다. 초록 뱀이 눈을 뜨고 냉이 향이 훅 번지는 때여서 봉긋한 분홍 언저리 숨소리가 가빴던 것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금모래 은모래는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꿈의 현장입니다.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삶을 추동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될 수 있지요. 「도피안사」는 이채로운 시편입니다. 화자는 북쪽에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북쪽을 사유한지 오래 된 것으로 보입니다. 누구나 사방팔방 중에 어느 한 방향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깊은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태생적으로 마음이 가는 방향일 수도 있겠습니다. 도피안사는 강원도 철원에 있습니다. 여기 와서 만나는 철불 닮은 내 북쪽이라는 첫 줄이 인상적입니다. 그러면서 문득 그에게도 잃어버린 북쪽이 있다했다, 라고 진술합니다. 이때 그의 잃어버린 북쪽은 또 다른 의미의 확대 의미의 파장을 일으킵니다. 절 한 채 가만히 벗은 달빛 든 보름 뒷날의 일입니다. 가까운 듯 먼 듯 저 뒷모습이 섭섭해서 대적광전 다 못 읽어 툭 떨어지는 눈물을 거두어주는 내 북쪽을 두고 달 혹은 적이라고 명명합니다. 그의 북쪽은 무엇이고 나의 북쪽은 또 무엇인가요? 그 북쪽이 달이기도 하고 적이기도 하다는 표현은 선적입니다. 도피안사라는 절 이름도 특별하고 시 세계도 보통 작품과는 차원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옛집의 대문 밖에서」는 아련한 추억담입니다. 촌수도 잘 모르는 마른버짐 핀 소년이 가끔씩 대문 밖에 멀찍이 서 있을 때 엄마가 쌀바가지를 호박잎 덮어 내놓으셨던 모습을 그리고 있군요. 그 무렵 채찍을 맞아가며 짐을 끌던 말이 오고 그 등짐을 내리면 등가죽이 벗겨진 늙은 말과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눈곱 낀 눈이 내 눈과 마주쳤던 것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아무나 겪지 못할 특이한 정경이군요. 해마다 이팝꽃은 배부르게 피는데 그때 그 장면인 등짐 벗은 늙은 말은 내 안에서 쉬고 있다고 말합니다. 화자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인지라 옛집의 대문 밖에서 서성거리면서 회상에 잠시 젖어든 것이지요. 그래서 옛집의 대문 밖에서 눈물 핑 돌 때가 있다, 라고 맺고 있습니다. 누구나 옛집에 대한 추억은 있게 마련이지요. 함께 했던 담벼락, 꽃, 나무, 나비, 강아지, 말, 친구 등과 얽힌 사연들이 있어 그 아련함은 불멸의 추억으로 남아 있지요.
「남장을 지나며」는 마음의 절집을 찾아 길을 나선 이의 심경을 담백하게 담고 있습니다. 절집 아래 마을은 초겨울이 환한데 처마마다 감을 걸어 달이 일찍 뜨기 때문이지요. 그곳은 낡을 것이 더는 없고 가릴 것도 없습니다. 화자가 등짐을 잠시 벗고 잿빛나무로 서 있는 것은 그 풍경 속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뜻에서일 것입니다. 대숲 바람소리에 또 길 잃을 뻔하고 마음의 절집은 멀어 보이지도 않는 어느 날 남장사에서 존재의 근원 혹은 연원에 대해 자신에게 묻고 묻습니다. 가끔 나는 누구인가, 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질 때 삶은 더욱 깊어지겠지요.
지독히 허기질 때 빈집으로 갑니다. 내가 나를 만날 수 있는 곳, 소요할 수 있는 곳 내 시의 발원지이기 때문입니다. 이태순 시인이 자전적 시론에서 한 말입니다. 나를 찾아 마음의 길을 나서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2020년 3월 9일 <세모시>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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