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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57
7월15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연중 제15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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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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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SclNHzAD5x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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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비빌 언덕도, 배경도 없던 철부지들>
성경에 의인이란 말이 가끔씩 등장합니다. 의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는 불의에 당당하게 맞서는 사람, 저항의 선봉에 선 투쟁가 등, 강성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뜻은 다른 데 있습니다. 한자 옳을 의(義)를 분석해볼까요? 양(羊)자와 아(我)가 결합되어 있네요. 그러고 보니 의인이란 ‘내 안에 양(羊)있는 사람’입니다.
양이란 동물은 고분고분, 순종, 순수, 순결함, 순박함의 대명사입니다. 결국 의인이란 진리 앞에 자신을 활짝 개방시킬 여유가 있는 열린 사람, 예수님이란 새로운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관대한 사람, 부드러운 사람, 다시 말해서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한 철부지들을 말합니다.
어제 예수님께서 신랄한 독설을 인정사정없이 퍼부으셨던 도시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 도시들에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율법학교, 회당들이 많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도시들은 당시 잘 나가던 율법학자들의 집결지였습니다. 가방끈 긴 사람들이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이 지니고 있던 지식은 산 지식에 아니라 죽은 지식이었습니다. 지도자요 학자로서 가장 중요한, 미래를 향한 열린 마음과 겸손함이 결여된 그들이었기에, 교만과 아집으로 눈이 먼 그들이었기에,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 아버지의 초대를 결정적으로 거절하는 큰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너무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한평생 목숨 걸고 하느님을 연구했지만, 따뜻하고 열린 가슴이 없었기에, 교만과 불손으로 눈이 가려져 있었기에,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하느님만 찾아 헤맸습니다.
평생에 걸친 그들의 공부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묘하게도 당대 내놓으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한 철부지들 앞에 더욱 자신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가난한 철부지들, 이 세상 그 어디 가도 믿을 구석 한 군데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빌 언덕도, 밀어줄 배경조차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저 황량한 들판에 홀로 서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보다 자연스럽게, 보다 쉽게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워낙 가진 것이 없다보니, 워낙 삶이 절박하다보니, 하느님의 도우심이, 하느님의 사랑이 더 간절했던 것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이 아니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시는 하느님은 오늘 우리에게 크나큰 위로로 다가오십니다. 시련의 크기가 큰 만큼 오래지 않아 다가올 그분 사랑도 클 것입니다. 고통의 깊이가 깊은 만큼 하느님 은총과 축복도 커져만 갈 것입니다.
가난한 철부지인 우리들이 조금만 더 노력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눈이 조금만 더 맑게 트인다면, 우리 영혼이 조금만 더 순수성을 회복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크신 상급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고통 그 한가운데 현존하심을 알게 해주실 것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들이 지루함의 연속이 아니라 신비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천국의 한 조각임을 알게 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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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똥파리는 꽃밭의 한 무더기 똥을 보며 꽃밭을 안다고 말한다>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FhuBUQDQY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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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떤 분들은 “나도 그 사람 알아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많은 경우에 그 사람의 좋은 점보다는 자신이 아는 단점을 쏟아냅니다. 그 사람의 단점만 말하며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아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완전히 모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꽃밭에 어떤 짐승의 똥이 있습니다. 그러나 꽃들이 너무 아름다워 그 똥은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여기를 지나가던 한 똥파리가 좋은 똥을 발견하고는 동료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나 그 꽃밭 잘 알아. 좋은 똥을 발견했어!”
꽃밭에 있는 작은 똥 무더기가 그 꽃밭을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 안에 있는 단점들을 몇 가지 안다고 해서 그 사람 전체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번엔 꿀벌이 날아가다가 그 꽃밭을 봅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나 그 꽃밭 잘 알아. 좋은 꿀을 발견했어!”
물론 그 꽃밭 안에 있는 작은 똥 무더기는 알지 못합니다.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곳의 본질이 ‘꽃밭’이기에 똥파리보다는 꿀벌이 그 꽃밭을 잘 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꽃은 더러운 습지에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우리는 그 습지를 보지 않고 그 꽃의 아름다움에 빠집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가서 연꽃을 보았다고 말하지 시궁창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둠을 보는 존재가 아니라 빛을 발견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보시지 않고 우리 선한 면을 보시며 키워주십니다. 우리는 똥파리가 아니라 꿀벌입니다. 그러나 죄가 우리를 똥파리로 만듭니다.
아담은 하느님을 보면서도 하와를 왜 만들어줘서 죄를 짓게 만드느냐고 한탄합니다. 완전한 선이시고 아름다움이시고 진리 자체이신 분에게서 더러운 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느님을 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떻게 빛 가운데서 어둠을 찾아내고 하느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자신을 가장 많이 사랑하시는 부모를 잘 아는 때는 언제일까요? 아이일 때일까요, 아니면 사춘기 반항의 시절일까요? 제니스 캐플런의 <감사하면 달라지는 것들>에 이런 예가 나옵니다.
한 어머니는 15살 아들을 비싼 컴퓨터 교육 프로그램에 보내며 고마운 마음을 보여주는 의미에서 일주일에 몇 번 정도 전화를 걸어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엄마, 뭘 고마워해야 하는데? 애들을 캠프에 보내는 것은 부모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아니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또 한 어머니는 딸을 학교에 차로 태워다주며 그 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애잖아. 운전을 못 하니까 당연히 엄마가 데려다줘야지!”
사춘기 아이들은 무엇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바로 엄마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너무 커져 버리면 눈이 멀어 사람 안에서 사랑을 찾아낼 수 없게 되고 그러면 안다고 믿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됩니다.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 자신도 부모가 되면 그제야 겸손해져서 부모의 마음을 볼 줄 알게 됩니다. 가수 김진호 씨의 ‘가족사진’처럼 부모가 자신들을 위해 거름이 되어주었음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부모님을 제대로 알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부모가 했던 것과 같은 수준의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것만 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누군가를 제대로 알게 될 때 나오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아담이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 불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온전히 아시는 분이시기에 항상 감사하십니다. 그것이 어린이의 마음입니다. 사춘기 때는 그 감사를 잊기 쉽지만, 어린이는 부모에게 감사합니다. 감사할 때 아는 것입니다. 사랑을 본 것입니다. 우리는 똥파리가 아니라 꿀벌입니다. 사랑을 보고 감사해야 그 사람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로 알 수 있습니다. 그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은 이 사랑의 선물 안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그 주시는 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사랑을 볼 눈을 잃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보아도 잘못 보게 됩니다. 그 증거로 감사가 사라집니다. 아버지의 철부지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에 집중합시다. 아는 만큼 감사해합니다. 모든 사람 안에 어느 정도씩은 사랑이 있으므로 반드시 감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해 감사해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을 안다고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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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25-27 :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25절) 이 말씀은 당신에 관한 신비를 지혜롭다는 이스라엘에게는 감추시고, 아직 철부지인 다른 민족들에게는 드러내신 아버지의 뜻에 대한 찬미이다. 우리도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지만,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도 외면을 당할 것이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란 말은 창조계 전체의 주님으로 하늘은 하늘에 있는 모든 것, 땅은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계시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들을 다 하시고도 아버지께서 그 일들을 하신 것으로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신다. 그럼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의 뜻이 하나임을 보여 주시며, 우리에게 좋은 것을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신다.
주님의 말씀에서 “철부지들”은 나이가 어려 철부지가 아니라, 죄와 사악함에서 거리가 먼 철부지라는 것이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이유가 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인지는 설명하지 않으신다. 다만 감사를 드리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져 물어서는 안 된다. 단지 그분의 뜻을 따리 실행하고 그분께 충성을 다하는 일만이 우리의 할 일이라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27절)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 다가간 사람들과 전에는 반항했으나 이제는 하느님을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을 맡기셨다는 뜻이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27절)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아는 점에 있어서 같은 본질이다.
같은 본질이 아니면 아들은 아버지를 알 수 없다. 그러기에 아들을 아는 사람은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알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넘겨주셨고, 이제 이 모든 것이 아들을 통해서만 드러나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신비를 통하여 아버지에게 있는 모든 것이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주님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잘 아시며, 아버지를 잘 아는 유일한 분인 만큼 아버지와 같은 본질이라는 것이 분명해 진다. 아버지의 모상이신 아들을 보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삼위일체 안에서만이 완전히 이해를 할 수 있다.
아버지만이 당신 본질의 열매인 당신의 아들을 아신다. 오직 아들만이 자신을 낳으신 아버지를 알아본다. 그리고 거룩하신 성령만이 하느님의 깊은 비밀들, 곧 아버지와 아들의 생각을 아신다.
하느님을 아는 우리는 그러기에 그분의 뜻을 알고 실천하여 참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 삶으로 하느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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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이런 말을 듣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 때로는 아는 것이 유익할 수 있고, 때로는 모르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 대상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자면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감사의 기도입니다.
‘지혜’는 선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지혜는 하느님의 신비를 알게 하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길을 걷게 하는 선물입니다. 지혜를 얻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고 그것이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슬기’ 역시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들은 ‘스스로 깨달았다고 자부하는’ 이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들 스스로 지혜롭고 모든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철부지들’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이들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그것에 목말라하고 그것을 찾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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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예수님께 넘겨주셨다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모든 권한’을 예수님께 넘겨주셨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이 권한은, 일차적으로 사람들을 구원할 권한과 구원하지 않을 권한입니다. 따라서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라는 말을 ‘모든 사람’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뜻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과 완전히 일치되어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권한 행사는 하느님의 권한 행사이기도 하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권한을 예수님께 넘겨주신 다음에 예수님과 떨어져서 따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만이 예수님을 아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진정한 신원은 ‘하느님의 신비 영역’에 속한 것이라는 뜻이고, 이 말은 곧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예수님을 온전히 알기를 바란다면, 우선 먼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아들 외에는, ......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되어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다르지 않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일하십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 5,19)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 8,29)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히브 1,3)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형상이신 분”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하느님께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이 구원받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고, 또 그것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고 공부해도, 그래서 뛰어난 학자가 되어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믿음 없는 지식은 구원받는 일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성경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데, 성경을 전부 다 외워서 자유자재로 인용할 수 있다고 해도, 예수님을 안 믿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한평생 명상을 하고, 수행을 해서 어떤 높은 경지에 도달한다고 해도 예수님을 안 믿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26)
여기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자기 자신이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자들, 즉 세속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한 자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는 자신의 지식과 능력에 대해서 잘난 체 하는 오만한 자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철부지들’은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보잘것없는 사람들, 그러나 겸손하게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루카복음 16장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를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자’로, 라자로를 ‘철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부자가 사는 모습을 보면, 그는 분명 세속적으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루카 16,19) 그는 자신의 출세와 성공에 만족하면서, 자신의 성공한 인생을 즐겼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난 체 했을 것이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쉬운 것 없이 살고 있었으니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하는 기도는 하지 않았을 텐데, 그러면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기도는 드렸을까? 어쩌면 감사기도는 드렸을지도 모르는데, 그 기도는 ‘진심으로’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잘난 체’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앞에 누워 있는 라자로에게 ‘먹고 남은 음식 부스러기’를 가끔씩 던져 주었던 것 같습니다.(루카 16,21) 그렇게 하면서 그는 자기가 ‘이웃 사랑 실천’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는 자기에게는 회개할 죄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 그래서 회개할 생각은 아예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잘난 체 하는 자들을 구원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자들이 회개하지도 않고, 구원받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말씀은, 인간의 세상에서는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서는 소외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감사드린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부자 같은 사람들도 회개하고,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르게 살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라자로 같은 사람들도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면서 부자들에 대한 복수심에 가득 차 있고, 물질적인 탐욕에 사로잡혀 있다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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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익숙하지 않은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자주 보게 되는 일기예보의 단위입니다. 한국은 섭씨를 사용하는데 미국은 화씨를 사용합니다. 70도에서 80도면 좋다고 하는데 들어도 체감이 잘 안됩니다. 90도에서 100도면 엄청 더운 거라고 합니다. 온도는 섭씨보다 훨씬 높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화씨에 익숙해지면 미국생활도 익숙해질 거라고 합니다. 운전하면서 속도를 나타내는 단위입니다. 한국에서는 킬로에 익숙했는데 마일을 사용하니 속도를 체감하기 어렵습니다. 70마일에서 80마일이면 꽤 빠른 속도라고 합니다. 고속도로에서도 70마일이 넘는 경우는 과속이라고 합니다. 속도는 킬로보다 낮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일에 익숙해지면 운전도 편해질 거라고 합니다. 무게를 나타내는 단위입니다. 한국에서는 킬로를 사용했는데 파운드를 사용합니다. 몸무게를 거의 재지 않기에 파운드를 이용할 일은 별로 없지만 마트에서 고기를 살 때는 필요합니다. 미국에 왔으면 미국의 관습을 따라야 합니다.
북미주 사제회의를 ‘줌(Zoom)'으로 하였습니다. 화상회의는 기업에서 하는 걸로 알았는데 줌으로 회의를 하였습니다. 서부는 오후 2시였고, 제가 있는 동부는 오후 5시였습니다. 익숙하지 않았지만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코로나19로 만날 수 없었는데 인터넷으로 서로 얼굴을 보면서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동 시간도 줄일 수 있었고, 장소를 빌리지 않아도 되었고, 화면으로 얼굴을 보면서 하니 집중이 잘 되었습니다. 코로나19를 지혜롭게 헤쳐 나가는 신부님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매일 교우분들에게 전화를 하시는 신부님도 있었습니다. 레지오 회합을 줌으로 하고, 강복을 주신다는 신부님도 있었습니다. 미사가 재개 되는 본당도 있었습니다. 본당 재정을 걱정하는 교우분들이 자발적으로 헌금을 보낸다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방송미사에 익숙해지면서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미사가 낯설어지지 않을까 걱정도 하였습니다. 2000년 공동체 미사를 함께 하였으니, 공동체 미사가 재개되면 곧 익숙해지리라 생각합니다. 익숙함은 분명 삶에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경건함과 엄숙함도 삶에는 필요합니다. 역사는 익숙함으로 발전하기 보다는 새로움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첫 부임지로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벌써 29년 전입니다. 모든 것이 서툴렀지만 열정과 패기만큼은 있었습니다. 성당의 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첫 본당에서의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떨리는 마음이었고, 설레는 마음이었습니다. ‘신부님!’이라고 부르면 다른 사람을 부르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매번 새로운 임지로 가면서 일의 방법은 더 알게 되었지만 첫 본당에서 가졌던 열정과 패기는 조금씩 줄어들었습니다. 연륜과 경험은 어느덧 익숙함이 되어버려 변화와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저를 통해서도 드러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허위와 욕심, 교만과 미움으로는 결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고, 신뢰를 얻을 수 없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숨겨진 하느님의 뜻을, 참된 가치를 만날 수 있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한두 번은 속일 수 있고, 세상의 잣대로는 이익을 얻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손으로는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거짓과 가식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가 어우러질 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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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라는 울타리 너머>
마태오 11,25-27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나’라는 울타리 너머>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울타리는
‘나’라는 울타리
세상에서
가장 갇히기 쉬운 울타리는
‘나’라는 울타리
그 안 갇힌 나는
홀로 모든 것
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나 아닌 너 없는 나
그리하여 나 아닌 나
나를 있게 하신 분 없는 나
그리하여 나 없는 나
‘나’라는 울타리를
힘겹게 애써 넘어
나 아닌 너를 만나면
너 아닌 나인 나
나를 있게 하신 분을 만나면
없는 나 아닌 있는 나
그리하여 비로소 참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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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주님을 향해 마음껏 달려 나갈 수 있을 때까지>
+ 찬미예수님
아이들에게 칭찬을 할 때, 재능이 아닌 노력에 대해 칭찬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재능에 칭찬을 받아온 아이들, 예를 들면 머리가 좋다고 칭찬을 받았던 아이들은 노력한 뒤 결과가 안 좋을 것을 두려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의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을 일부러 하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원래는 머리가 나빴나 보네’ 라는 말보다 ‘쟤는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하지 않아’ 라는 말이 훨씬 안전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노력 없이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모든 일에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보다는 재능에 칭찬을 받기 원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입니다. 밤새 공부를 열심히 하고는 다음 날 친구들에게 공부를 하나도 안했다고 하는 아이들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하고 시험을 잘 보면, ‘쟤는 공부를 하지 않는데 머리가 좋다’라는 기분 좋은 평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자신의 노력 보다 재능에 칭찬을 받기를 즐거워하는 습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머리 좋다, 능력이 출중하다’ 등 재능에 칭찬을 받게 되면 그 아이는 자연스럽게 노력을 경시하게 되고 성적 유지의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합니다.
반면, ‘너 정말 열심히 했구나!’ 라는 칭찬을 받으면 그 아이는 노력을 중요시하게 되고 성적 유지의 가능성 또한 높아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이 말씀 안에서 지혜롭고 슬기로운 이들은 재능이 뛰어난 이들을 의미합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부를 축적한 이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과 같이 구약의 율법을 연구하고 성실히 지켜온 이들이 이 그룹에 속합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으므로 구약에 대한 이해도도 높았고 신실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같은 재능이 있었음에도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멸시와 교만이었고 결국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데 있어 도태되기에 이릅니다. 반면 제자들은 완벽한 노력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동안 스스로의 한계를 재차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서투르고 철부지 어린 아이와 같았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이로써 구원 역사의 가장 커다란 축이 됩니다. 다시말해 그들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재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아주 높은 사람들도 아니었고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는 학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아무런 재능 없이 그저 예수님을 사랑하는 노력만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앞서 말씀드린 올바른 칭찬법을 매우 잘 알고 계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 안에서 주님께서는 그들의 노력을 하느님께 드러내 보임으로써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철부지와 같은 그들 안에서 이뤄졌음에 감사드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데에 있어서 스스로에게 재능이 없음을 한탄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아, 이 성인은 애초에 이렇게 타고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성인들의 삶에 비하면 저는 한 없이 나약하고 여러 가지 유혹에 쉽게 휩쓸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저에게 재능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재능이 없으니 조금이나마 더 노력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만큼 저의 노력을 인정해 주시리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가끔은 재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교만할 때도 있습니다. 어떠한 일을 행할 때 기도하고 행동하기보다는 먼저 저의 지혜를 내세워 판단하고 결정짓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만이 있을 때 예수님의 복음은 빛을 잃고 그 자리에는 저라는 인간만 덩그러니 놓여있음을 뒤늦게 깨닫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린 아이와 같아져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는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알아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입니다. 남들처럼 두발로 걷고 싶어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는 어린 아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뒤뚱거리며 수없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그러다가 또 넘어집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단번에 일어서서 걷는 아기는 세상에 없습니다. 어린 아이는 평균 2,000번을 넘어져야 비로소 걸을 수 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넘어지고 다시 일어섬을 반복할 수 있는 이유는 넘어지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되는 행동만이 답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아이가 ‘난 걸을 수 있는데 노력을 안 하는 거에요’ 라고 중얼거리며 계속 누워만 있다면 그 아이는 평생 걸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미움과 안락함과 사소한 질투와 물질적인 것들의 유혹 속에서 수십 번 수백 번 넘어지곤 합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는 나약한 자신이 자연스럽게 여겨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특출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치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할수록 노력을 귀중히 여기는 하느님을 생각하며 수없이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해야 합니다. 재능은 필요 없고 노력만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노력을 모두 알고 계시며 그 모습을 오히려 귀중히 생각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몸을 돌리는 그 순간, 행동으로 사랑을 드러내는 그 순간, 첫 걸음마를 떼는 부모의 심정으로 우리에게 팔을 벌리고 계시는 주님의 따뜻한 마음을 말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재능이 아닌 노력에 뜨거운 격려를 보내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부모에게 의탁하는 자세로 사랑을 실천할 것을 다짐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반복되면 우리는 분명 언젠가 주님을 향해 마음껏 달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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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석희 라우렌시오 신부님]
우리 모두는 이상한 행동으로 바보짓을 하는 멍청이 영구를 기억합니다. 바보스럽고 멍청하기 그지없는 그였지만, 아이들에게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어른들까지도 그의 행동을 흉내 내었고 잠시나마 잔잔한 웃음으로 또다른 영구가 되었습니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에 지쳐버린 우리들에게 신선한 피난처가 되었으며, 새로운 자신감과 상대적 열등감에서 벗어나는 심리적 효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덧 영구는 나의 경쟁상대가 아닌 웃음을 전해주는 친구가 되어 있었고 잘 생기고 멋있는 어느 탈랜트 보다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기억속에 남게 되어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똑똑함으로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작은 교훈을 영구에게서 발견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을 언급하면서 외부적인 율법에 정통한 율법학자들과 보통사람들 보다는 다르다는 우월감으로 젖어있는 권세가들을 향해서 질타와 새로운 교훈을 제시합니다.
또한 하늘나라의 신비가 연약한 어린아이를 통해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기도는 똑똑하고 지혜로움으로 포장된 약삭빠름에 익숙하거나, 그것을 능력으로 착각하는 사람에게는 이해될 수 없지만, 단순함과 순수함이 어리석음으로 비쳐지는 이들에게는 위안과 기쁨으로 전해집니다.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그시대 뿐만 아니라 지금도 예수의 복음 말씀 앞에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고 자신의 똑똑함을 내세울 때 복음은 그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복음말씀이 무식함과 우둔함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은 아니며, 또 복음이 지혜와 영특함을 배척하는 것은 더욱더 아닙니다.
복음 앞에서는 어린이와 같이 순수함과 신뢰하는 마음과 겸손한 자세가 우선적으로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올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신앙인의 자세는 신뢰와 받아들임입니다. 신뢰와 겸손의 대명사는 바로 철부지 어린이들이며, 보잘 것 없는 약자들입니다. 약자를 통하여 하느님은 당신의 강함을 드러내시고, 알려주시고자 합니다.
육신의 아픔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이웃에게 불평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를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심오한 신비를 전해주는 작자 미상의 “어느 환자의 기도”를 소개 하고자 합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출세의 길을 위해 건강과 힘을 원했으나, 당신은 제게 순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 건강을 청했으나 당신은 보다 큰 선을 하게 하시려고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부귀함을 청했으나 당신은 내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만인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되고 싶어 명예를 청했으나, 당신은 나를 비참하게 만드시어 당신만을 필요로 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홀로 있기가 외로워 우정을 청했으나, 당신은 세상의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서 내 삶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당신께 청했으나, 당신은 다른 모든 이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 삶의 길을 주셨습니다
내가 당신께 청한 것은 하나도 받지못했으나, 당신이 내게 바라던 그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이고 순수하고 모든 것을 내맡기는 신뢰가 물씬 풍겨나는 신앙고백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약삭빠름으로 유혹하지만, 어린아이같은 마음으로 거듭 태어나기를 간절히 하느님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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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백남국 요한 신부님]
본당에서 신자분들을 만나다 보면 참으로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바쁜 가운데서도 레지오를 하고, 재속회를 하고, 매일 기도를 드리러 성당에 나오십니다.
또한 각박한 경쟁 사회 속에서 살면서도 너그럽고 희생적이며, 동정심도 많은 우리 신자들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만큼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겠죠.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신부라고 그들 앞에 하느님을 더 많이 아는 척 나서지만 사실 정말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제가 아니라 신자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딴에는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한테는 당신 자신을 감추시고 가르쳐 주는 대로 당신을 믿고 따라오는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십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주님 앞에서 조금 아는 지식으로 까불대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 됩니다. 신부 노릇 하려면 모르는 것도 아는 척, 게을러도 열심한 척, 믿음이 약해도 강한 척해야 합니다. 물론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부족한 것은 하느님께 맡기면서 사는 겸손한 사제가 존경받고 사목도 잘하겠지요. 그러나 저같이 어설픈 겸손쟁이는 금방 들통이 나고 말기에 그냥 아는 척, 열심한 척하면서 살아갑니다.
뭐, 그렇다고 착하고 성실한 우리 형제·자매님들께 사기를 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우리 착한 신자들, 저 때문에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뿐이지요.
그러니 주님 눈 딱 감고 저같이 조금 안다고 껍죽거리는 사람한테도 당신을 드러내 주시면 안 될까요? 신자들 앞에 체면 좀 서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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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아버지는 ‘대장’이예요>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는 뚜렷한 대립을 봅니다. 세상이 원하는 삶, 때문에 우리들이 추구하며 살아가는 많은 것들이 하느님의 뜻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듣고, 하느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통해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모습은 결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높아지고 강해지고 커져야 하는 일이야말로 ‘현명해’지는 것이며 ‘내 손으로 모든 것을 움켜잡는’ 폼 나는 일이며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행위라 여기고 있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원하고 바라는 것들이 하물며 그분의 뜻을 위한 일을 하면서조차 우리는 내 뜻대로,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게 하는 위력’을 갖기 원하니까요.
이러한 가치관을 움켜쥔 채 그 질긴 꿈을 놓지 않는 우리에게 주님의 단호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때문에 인생은 하느님의 시각을 갖기 위해서 연습하는 여정일 따름입니다. 그분께서는 갖고 계신 세상의 ‘기대치’를 깨닫는 일이 지혜인 까닭입니다.
삶의 고비는 우리를 광야에서처럼 목마르게 하고 사막에서처럼 끝을 모르게 합니다. 때문에 곧잘 우리는 스스로를 부러진 막대기처럼 폄하하기도 하지요.
그 때 자신의 나아갈 방향을 무엇으로 삼으십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깨어나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원하십니다. 우리들이 짠맛을 잃었을 때 그 맛을 되찾기 위해 고투를 겪게 하시고 빛이 꺼져 갈 때 바람막이가 되어주시는 까닭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 주님께서 주신 삶 안에서 자신을 하느님의 뜻 안에서 관리하고 자신의 몫에 충실하다면 어린아이의 모습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불만스럽다 여기는 것은 그분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을 고집하고 내 생각을 우기는 어른의 삶일 뿐입니다.
오늘 스스로의 삶에 도전하기 바랍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버리고 자신의 앎과 지식을 놓고 포기하고 낮아지고 순명하는 연습을 하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이루실 대장아버지 모든 것을 살피는 좋은 아버지 내 전부를 챙겨 배불리시는 든든한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겨서 참 평화를 체험하기 원합니다.
그 좋은 아버지 때문에, 우쭐한 그 좋은 아버지 덕에, 충분한 그분의 어린아이가 되어, 그분의 눈에 가장 사랑스럽고 어여쁜 오늘을 살기를 정말로 원합니다.
이것이 그분의 선하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야말로 어린아이처럼 그분께 의지하는 사랑의 삶을 살게 합니다. 꼭 누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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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언젠가 어느 청년의 결혼식 주례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아는 지인들이 제게 다가와서 말을 건넵니다. “신부님, 오늘 주례사가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강론이나 강의에 대해 평소 부정적인 평가를 잘 받지 않는 저입니다. 긍정적인 평가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주례사가 좋았다고 하는 말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문득 ‘신랑 신부도 마음에 들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랑 신부에게 다가가 다시금 축하한다는 인사를 전하는데, 이번에도 신랑 신부가 거의 동시에 “신부님, 오늘 결혼식 주례사 너무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좋았다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지만, 어떤 내용이 좋았는지가 궁금해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신랑이 잠깐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글쎄요……. 음……. 짧고 명쾌했습니다.”
주례사의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좋았던 이유는 짧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내용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저의 큰 착각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착각에 빠집니다. 내 생각과 다른 이의 생각을 같게 여길 때도 있고, 내 생각과 판단에 세상의 모든 지혜가 담긴 것처럼 여겨서 나만 맞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나와 다르면 죄인 취급하는 것 역시 우리의 잘못된 착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 오류를 담고 있는 지금 우리의 모습은 인류의 역사 안에서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했다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이 착각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
진짜 지혜가 아니라 단지 지혜처럼 보이는 것뿐인데도,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철부지 같은 제자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겸손 안에서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겸손의 덕을 갖추고 있을까요? 그래서 주님께서 바치시는 감사 기도의 주인공이 되고 있을까요? 주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스스로 낮추심으로 인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범을 따라, 우리도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겸손 안에서만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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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야할 바람>
몇 년 전, 페루의 ‘이카’라는 곳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인데, 이 지역을 찾은 이유는 지상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는 ‘나스카’라는 유적을 보기 위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여기에서 유명한 샌드 지프, 샌드 보드 체험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경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바라보는 나스카는 정말로 신기했습니다. 그러나 더 재미있고 신났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샌드 지프’ 체험을 통해서였습니다. 사막을 질주하는 지프, 아무리 경사진 곳도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면서 스릴 넘치는 체험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사실 이 지프를 타기 전에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글쎄 저희가 탈 지프 자동차 바퀴의 바람이 다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탈 지프 차량이 불량이라고 이야기하자, 다른 차를 보여주면서 모든 사막의 지프는 바람을 뺀다고 말씀해주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래에 파묻혀서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나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자유자재로 사막에 운전할 수 있는 비결은 바퀴의 바람을 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바람을 빼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특히 어렵고 힘든 순간에는 더욱더 바람을 빼야 합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적인 마음 등등…. 빼야 할 바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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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겸손의 여정>
-너 자신을 알라-
새벽기도차 성전에 들어서는 순간 그윽한 향기에 눈을 들어 보니 고 이바오로 수사님의 빈자리였습니다. 빈자리에 놓은 백합꽃다발에서 나는 그윽한 향기였습니다. 수사님 떠나신 그 빈자리에서 발하는 ‘겸손의 향기’를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께 어서 와 조배드리세.”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아침 성무일도 초대송도 마음에 위로와 평화를 주었습니다. 실로 겸손할수록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께 가까워져 지혜로운 사람이 됨을 깨닫습니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얻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
말씀을 실감한 어제 고 이바오로 수사님의 장례일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장례미사후 화장터에서 화장하여 수도원에 돌아와 산골散骨할 때 참으로 숙연하고 겸허한 분위기였습니다. 산골 역시 수도자답게 수도원내 하느님과 수도형제들만이 아는 숨겨진 깊고 그윽한 ‘가난하고 겸손의 빈터’에 했습니다.
“+무덤에 묻히셨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셨으니 이곳에 묻히는 교우 이바오로 수사도 부활하게 하시어 성인들과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끝없이 기뻐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산골후 기도를 바치며,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시편을 되뇌이며 주님의 위로를 받으니 더욱 겸허해지는 마음이었습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흙에 어원한 겸손이요 사람입니다. 흙같이 겸손해야 참으로 사람입니다. 겸손의 아름다움이요 성덕과 영성의 잣대도 겸손입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의 삶은 겸손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제 지난 겨울에 피정을 다녀간 어느 자매가 보내준 바오로 수사님 사진도 가슴 뭉클한 감동이었습니다. 수도원 앞뜰 정원에서 노니는 개들을 사랑어린 눈길로 바라보던 바오로 수사님의 겸허한 모습이 참으로 마음 편안하게 했습니다. 한생애 욕심없이 겸허하게 사셨던 분입니다.
겸손과 관련하여 떠오르는 두 일화입니다. 얼마전 70대 후반의 자주 보아오던 모습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너무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습니다. 그동안 웬지 부자연스럽고 불편해 보였는데 말입니다.
아, 바로 검정으로 염색해오던 머리칼을 염색하지 않고 본디 그대로 놔두니 반백半白의 휘날리는 머리칼이 참 멋있고 자연스러웠습니다. 가을의 단풍처럼 무욕無慾의 가을 인생에 참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또한 순리에 따른 겸손한 모습이겠습니다. 가을 단풍 계절의 나이에 봄 꽃의 계절을 탐한다면 참 꼴불견의 추醜한 모습일 것입니다.
겸손은 지혜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는 자가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바로 지혜는 눈과 같고 창窓과 같습니다. 겸손한 자만이 이런 눈과 창을 지닙니다. ‘용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찍는다’는 화룡정점畵龍點睛이란 사자성어도 생각납니다.
사람에 눈이 없다면, 방에 창이 없다면 얼마나 답답할까요. 제의방과 제 집무실 안에 있는 핀란드 흰 올빼미 도자기가 빛나는 것은 그 눈동자 때문입니다. 커다란 몸뚱이만 있고 눈이 없다면 존재 가치의 상실일 것입니다. 글도 삶도 말도 그렇습니다. 무지에 눈먼 참으로 답답하고 공허空虛하게 느껴지는 눈없는, 창없는 글이나 말, 삶도 많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삶과 글과 말에 눈을, 창을 주는 것이 겸손이자 지혜입니다. 겸손이 없는 사람은 그대로 ‘지혜의 눈’이 없는, ‘지혜의 창’이 없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의 아시리아가 상징하는 바 무지에 눈먼 자기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로 시작되어 하느님을 잊고 자기가 주어가 된 오만한 아시리아는 바로 무지의 교만한 자를 상징합니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자만하는 아시리아를 벌하시는 하느님이요, 마침내 오만으로 멸망하는 아시리아입니다.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뽑낼 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그러므로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그 비대한 자들에게 질병을 보내어 야위게 하시리라.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 버리리라.”
자기를 몰라 무지로 인한 주객전도, 적반하장, 배은망덕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여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는 자기 ‘삶의 문장’에 결코 나를 주어로 하지 않고 하느님을 주어로 합니다. 내가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수도원에 보내셨다 고백합니다.
그러니 참으로 겸손하여 지혜로운 자가 밝은 마음의 눈, 마음의 창을 지닌 자입니다. 지혜로 마음의 눈이 밝고 맑을 때 온몸도 환해질 것이고 마음의 방도 빛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겸손으로 마음의 눈이, 마음의 창이 활짝 열려 감사와 찬양기도를 바치는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바치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마음의 눈밝고 마음의 창밝은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철부지들이 상징하는 바, 겸손으로 지혜의 눈, 지혜의 창이 활짝 열린 이들이요, 바로 예수님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대우大愚의 사람들같으나 역설적으로 대지大智의 사람들입니다. 우리 역시 겸손의 여정을 통해 주님과 일치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주님과 더불어 나에 대한 앎도 깊어져 무지에서 벗어나 참으로 지혜로운 ‘참나眞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13세기 프란치스코회의 위대한 주교학자, ‘세라핌 박사(Doctor Seraphicus)’라는 칭호의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당대 도미니코회의 위대한 학자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라는 칭호의 토마스 학자와 쌍벽을 이루었던 참으로 두분 다 지극히 겸손하고 거룩한 성인이었습니다. 성 보나벤투라의 겸손한 일화도 인상적입니다.
성인이 로마로의 여행중 교황 사절이 추기경 임명 칙서를 가지고 왔을 때 마침 성인은 식사후 세기중이었다 합니다. 성인은 설거지를 다 마칠 때까지 추기경의 모자를 나무에 걸어두라고 명했다는 일화로 바로 성직에 대한 욕심의 전무함을 통해 참으로 초연하고 겸손하신 성인의 풍모風貌를 대하는 느낌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참으로 우리 모두 참 밝고 맑은 마음의 눈, 마음의 창을 지닌 겸자謙者와 현자賢者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시편86,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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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철부지가 되어야>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내로라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최고였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이 들어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야말로 촌놈들, 상것들, 별 볼일 없는 못난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순함이 있었고 부족하다고 인정하는 겸손이 있었기에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일찍이 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으뜸이요, 모르면서 아는 게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때 묻지 않은 철부지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철부지들의 특징은 의탁입니다. 철이 없고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보호자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함께야) 그들은 그야말로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을 미덥게 여기십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보호가 절실한 이들이고 우리는 하느님의 철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결코 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리키며 친숙해 지는 것,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가장 깊이 만나는 것을‘안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고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태11,27). 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그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 자세가 “어린이와 같이”(마르10,15)단순한 마음으로 온전히 의탁하며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정희성씨의 <교감>이라는 시입니다.
“전깃줄 위에 새들이 앉아있다. 어린아이가 그를 보고서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 ‘내려와 위험해여’”
그런 순수함이 사라진 시대이라서 더욱더 어린이의 마음이 간절해지나 봅니다. 순진무구함으로 하느님을 알고 전할 수 있는 은혜가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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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존재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물으십니다.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아버지는 아들을 아시고, 아들도 아버지를 아십니다. 또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이도 아버지를 압니다. 우리는 자기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 덕분에 하느님을 알아갑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앎이 철저히 예수님께 달려있다는 뜻이지요.
세상은 소위 발전과 성장이라는 명목으로 변화되어 왔습니다. 많은 이들이 오로지 과학, 기술, 의학 등 인간의 지력과 능력으로 여기까지 도달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로써 "앎"의 영역은 철저히 신의 영역과 분리되어 기술의 차원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하느님 안에서 "앎"은 곧 사랑이니, 사랑이 제외된 "앎"은 자칫 폭력도 무기도 될 수 있지요. 자본주의의 도구가 된 "앎"이 되려 인간을 소외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며 아버지께 외치십니다. "철부지"에 불과한 제자들을 통해 이루신 일들이 놀랍고 신비로울 뿐입니다. 이렇듯 자기 힘으로 지식의 탑을 쌓았다고 믿으며, 스스로 만족하고 도취하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지혜는 모습을 감추십니다. 반면 세상이 인정하는 학벌도 가문도 타이틀도 직업도 지니지 못한 단순 소박한 이들에게는 당신을 마음껏 드러내시며 그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아버지는 스스로 하느님 앞에 부족하고 모자란 철부지라 느끼는 이들을 통해 당신의 "앎"을, 곧 사랑을 퍼뜨리십니다. 그에게는 애초에 내세울만한 제 것이 없기에 이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을 알지요. 그래서 스스로도 놀라고 신비스러워합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 커갈수록 그의 겸손도 깊어갑니다.
제1독서에서는 아시리아에 대한 주님의 매서운 심판이 울려퍼집니다.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이사 10,5)
당신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벌하시려 주님은 아시리아를 "막대기"처럼 도구로 쓰십니다. 하지만 아시리아는 기고만장해져서 주님께서 바라시는 징벌적 수준을 넘어 아예 하느님 백성을 "멸망"시키고 "파멸"하려 들지요. 아시리아는 잠시 분노하셔도 결코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 소유를 저버리지 않으"(화답송)시는 주님의 본심을 헤아리지 못했기에 선을 넘은 것입니다. 이것이 아시리아의 첫째 과오입니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이사 10,13)
그들은 승리와 약탈을 자기 손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오만히 떠들어댑니다. 아시리아의 둘째 과오지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문화가 달라도 인간의 바벨탑 근성은 본능적 욕망인가 봅니다. 하지만 이런 교만을 주님은 그냥 넘기시지 않으시지요. 이는 역사가 증명해 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드러나는 현상만으로 판단하자면 제 힘과 제 지혜로 재물과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이들이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철부지는 영원히 약자이고 가난하고 변두리만 맴도는 가련한 인생 같지요.
하지만 구원은 양편 모두에게 주어집니다. 세상 꾀와 힘으로 성공한 듯 보이는 이들도 자신이 하느님의 도구임을 겸허히 인정하고 자기에게 많은 것을 허락하신 이유를 찾아 그분 뜻을 이루려 협력할 때 구원 상태를 누립니다. 또 비록 세속적으로는 힘겹게 허덕이며 살더라도 자신의 지혜와 힘이 오로지 주님 것임을 믿고 의탁하는 가난한 이 역시 구원의 상태를 누립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주인이시고 목적이십니다. 아무리 자유 의지를 발휘하며 산다고 해도 우리는 하느님 섭리 안을 걷는 중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존중하신다고 해서 그분께 있는 우리 삶의 주도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에게로 가는, 그분께 속한 존재니까요. 이것이 하느님을 아는 지혜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보나벤투라 주교학자는 겸손하게 하느님의 지혜를 탐구한 프란치스칸이었습니다. 우리 삶을 통틀어 주님께서 철부지인 내게 쏟아 주신 사랑의 업적을 기억하고, 아울러 나를 도구로 쓰시느라 내게 안겨 주신 과분한 성취와 보람의 순간들도 함께 떠올려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리하여 보잘것없는 우리를 통해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져가는 신비를 관상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벗님에게도 "보나 벤투라"(Bona ventura!), 즉 "좋은 일이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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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피조물도 희망에 차 있고, 멸망치 않을 것이다.
바오로 사도에게 희망은 일상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간의 자세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피조물 전체를 관통하는 희망에 대해서도 말한다. “실상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한 것은 본의가 아니라 굴복시키신 그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은 피조물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로마 8,20) 피조물은 따라서 희망에 차 있다. 피조물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스스로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과 딸임을 증명하게 되면 피조물의 영광은 드러날 것이다.
-안젤름 그륀, 「믿음」에서
♣희망은 온 피조물의 기본 자세이다.
희망은 우리가 멸망의 환상에 빠지거나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비관적인 각본을 가지지 않게끔 막아 준다.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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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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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으로 깊고 아름답습니다.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 찬양의 기도요, <뒷 장면>은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를 부르시면서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곧 아버지께서 우주의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는 동시에, 모든 피조물의 소유권을 가지신 분임을 고백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드리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이 고백은 하느님의 뜻은 지혜나 슬기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드러내주셔야만 알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주신다고 해서 모두가 알게 되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라야 알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나는 모른다.”라는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묻습니다. 그리고 ‘모른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는 안다.”라는 태도를 지녀가게 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우주의 주권자이기에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감추시고”와 “드러내시고” 라는 표현을 통해서, 영적 진리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배려에 의해서만 알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주권적인 배려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드린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찬양을 나타내는 감격스런 고백을 뜻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말합니다. 곧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시는’ 아버지의 뜻과 섭리에 대한, 완전히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감사의 이유를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오늘 우리도 이렇게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고 일하셨음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하는 일입니다. 당신의 일하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하는 일입니다. 비록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는 일입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감사드리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 입니다.’(1코린 5,18)라고 말씀하신 사도 바오로처럼 말입니다. ‘하늘나라의 장막에 머무는 길은 우리 안에 일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라’(수도규칙 머리말 30)고 제시하신 성 베네딕도의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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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마태 11,25)
주님!
지혜롭다는 자에게서 감추시니, 믿음 안에 저를 가두소서!
철부지에게서 드러내시니, 신비 안에 저를 가두소서!
아버지의 뜻 안에 저를 가두시어, 신뢰하고 의탁하게 하게 하소서.
감사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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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xhdtYJL1QLo&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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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 26)
오히려의
철부지와
참으로의
십자가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비 그친 하늘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거기에
있습니다.
오히려
철부지를 통해
드러나는 사랑의
기쁨이며 사랑의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은
낮아지는
기쁨입니다.
낮아질수록
더 깊어지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철부지들은
단순합니다.
어려운 것이 아닌
쉬운 것에서
기쁘게
출발합니다.
약하고 작으며
모자라고
부족한 데서
하느님의 뜻은
더욱 풍요롭습니다.
넘치는 것이 아닌
모자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버지의 선하신
참된 뜻입니다.
어리석은
십자가에서
오히려
선하신 뜻이
드러납니다.
철부지들처럼
기꺼이 아래로
내려올 수 있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철부지들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은
기쁨이며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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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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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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