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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대하여』
생명과 평화의 사상가,
위대한 교육가,
그러나 이상과 현실의 모순에서
끊임없이 고뇌하고 성찰해온
한 인간의 지적 여정
원전의 뜻을 정확하게 살린 번역과 현대적 디자인으로 만나는 톨스토이 "톨스토이 서거 110주년 기념"〈톨스토이 사상 선집〉. 톨스토이 사후 러시아 모스크바 테라TEPPA에서 펴낸 《톨스토이 전집》을 번역 저본으로 삼았다. 톨스토이는 소설뿐 아니라 다양한 주제에 대해 막대한 분량의 글을 남겼다.
테라의 《톨스토이 전집》은 이러한 글을 총망라해 100여 권으로 편찬한, 톨스토이 작품의 정본定本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연구자들이 기획 단계에서 함께 논의해 톨스토이 사상과 철학적 정수를 담고 있는 글을 선별했으며, 번역에서도 톨스토이가 쓴 원문의 뜻을 정확하게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삶과 죽음,
타자와 세계에 대한 사랑을
이보다 쉽고 강한 설득력으로
설파한 사람은 없다.”
레프 톨스토이. 우리는 그를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 등을 남긴, 19세기 말, 20세기 초가 낳은 위대한 작가로만 인식한다. 실제로 그가 발표한 작품들은 러시아를 넘어 전 세계 독자들에게 여전히 사랑받으며 걸작傑作이자 고전古典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톺아보면, 그는 세상의 변혁을 꿈꾼 ‘혁명가’이자 날카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응시한 ‘사회사상가’이기도 했다. 또한 톨스토이는 귀족이자 대지주로서 자신이 가진 사회 경제적 기반과 자신이 실천하고자 하는 소박한 삶 사이에서 오는 모순적인 상황에 끊임없이 괴로워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성찰해온 인물이기도 했다.
톨스토이가 남긴 다양한 주제의 산문들은 그의 이러한 고민과 성찰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그는 인생과 철학은 물론 교육과 종교, 예술과 문화, 사회개혁 등 다양한 주제의 산문을 남겼는데, 공허한 주장이 아니라 그 철학과 사상을 몸소 실천하고자 몸부림친 ‘실천가’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지금 다시,
톨스토이를 읽어야 하는 이유
- 평생 자기 안의 모순과 맞서온
‘거장’의 내면을 마주하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한 가지로 한정할 수 없는, 그야말로 ‘거인’이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와 같은 불멸의 고전을 남긴 작가이자, 비참한 생활을 하는 농민들을 위해 헌신한 교육가이자 직접 농민 학교를 세운 실천가였다.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다 오십이 넘어서야 비로소 예수의 가르침에 공감했던 톨스토이는 권력과 결탁한 기독교를 비판하고 반전과 평화, 생명주의를 설파한 종교철학자였다. 또한 간디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비폭력운동에 영향을 끼친 사회사상가이기도 했다.
이와는 반대로 젊은 시절에는 도박과 술,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보내기도 했고,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고자 했지만, 귀족이라는 신분에서 오는 편안함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가족들로 인해 몇 차례 가출을 시도했던 외로운 영혼이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평생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고통스러워하고 고뇌하는 등 자신의 모순을 안고 살았던 인물이었다. 이처럼 톨스토이의 글에는 모순적인 삶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성찰한 흔적이 남아 있다.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고, 부끄러운 과거를 담담히 고백하고 참회하는 톨스토이의 모습은 그동안 우리가 알아왔던 ‘위대한 스승’의 모습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도리어 톨스토이가 ‘완벽한 인간’이 아니었기에, 그의 글은 우리에게 더 깊은 울림과 설득력을 준다. 바다출판사에서 새롭게 펴내는 〈톨스토이 사상 선집〉은 그동안 ‘거장’이라는 명성에 가려져 알 수 없었던 톨스토이의 인간적인 면모와 사상을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톨스토이 사상 선집
《인생에 대하여》
“삶에 대한
가장 심오하고
명확한 통찰”
《인생에 대하여》는 톨스토이가 지향한 인생관과 세계관은 물론 삶에 대한 탁월한 인식, 생명을 바라보는 확장된 시선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흔히 《인생론》로 알려진 작품이지만 〈톨스토이 사상 선집〉은 정본定本 원전原典의 제목과 내용에 가장 가깝게 소개한다는 원칙에 따라 《인생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톨스토이는 《인생에 대하여》에서 인간이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나 이성적 존재로 성장하는 것은 자연법칙이며, 그 이성적 존재의 행복은 오직 세계와 타인에 대한 사랑에 근거한다는 것을 해박하면서도 쉽게 설명한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인생에 대해 무성한 말의 잔치를 벌이지 않고,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자 평생 연구하며,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인생에 대하여》를 번역한 이강은 경북대 노문학과 교수가 “《인생에 대하여》는 도덕군자의 고고한 설교가 아니라 그가 살아낸 인생의 생생한 증언이자 투쟁 강령과도 같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인생의 생생한 증언이자 투쟁 강령
톨스토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이나 생명 혹은 행복에 대한 자기만의 인식을 갖기보다 인류의 위대한 현자들이 되풀이한 인생론만 되뇐다고 주장한다. 그보다 더 답답한 일은 대개의 사람들이 인생의 모순을 풀어줄 현자들의 정의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대충대충 살아가는 현실이다. 인생에 수많은 모순이 존재함에도 “한 시기 혹은 전 생애에 걸쳐 오직 동물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 즉 “인류의 지도자로 자처하는 자들”은 “인생의 참뜻을 알지 못하면서 인생이란 개체로서 개인에게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기까지” 한다. 그릇된 교사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하디흔한 현상이라는 게 톨스토이의 일갈이다.
“눈앞에 보이는 인생 외에는
그 어떤 다른 인생의 가능성도
있을 수 없다고 보는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어떤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것도 부정하고
인생이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오직 동물적으로 생존하는 것에
다름없다고 과감하게 주장한다.
동물로서의 인간의 생활에
비합리적이랄 것은
어떤 것도 없다고 가르치는
현학자들이 그들이다.”
현학자와 율법학자들은 인간 이성의 중요성과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일, 즉 실천을 늘 간과한다. 하지만 진정한 삶이란, 그것이 다소 무의미해 보일지라도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 누울 때까지 발생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엮어내는 총합이다.
인간은 매일 수백 가지의 가능한 행동 중에서 하고자 하는 행동을 끊임없이 선택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천국의 삶의 비밀을 늘어놓는 율법학자의 가르침도, 세계와 인간의 기원을 연구하고 그 미래의 운명을 탐구한다는 현학자들의 가르침도 행동의 지침을 제공하지는 못한다”는 게 톨스토이의 주장이다.
인간은 행동의 지침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지만, 현학자들의 행동 지침으로는 인생 혹은 생명에 대한 진실한 접근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선언인 셈이다.
진실한 생명을 발견하는 길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은 결국 오롯한 시간의 몫이다. 톨스토이는 “인간 존재 속에 생명이 드러나는 것을 관찰하고, 이를 시간 속에서 고찰”할 것을 권한다. 그러면 “진실한 생명이 마치 씨앗 속에 있듯이 언제나 인간 속에 보존되어 있고, 시간이 지나면 그 싹을 틔우게 된다”는 극명한 사실과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씨앗의 발아 과정을 통해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그럼에도 인생의 의미를 발견해야만 하는 인간의 삶을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한다.
“씨앗은
일정한 조건에서 식물로 자라고,
식물에는 꽃이 피고,
꽃은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는 곧 씨앗이 된다.
우리는 이 모든 생명의 순환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적 의식의
성장에 대해서는
우리가 시간 속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그 순환과정도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이성적 의식의 성장과
순환을 볼 수가 없는 것은
우리들이 직접 그 과정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생명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의 탄생과 같이
우리 내부에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그것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볼 수 없다고 이성이, 그것을 인식하는 “이성적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톨스토이는 “이성적 생명, 오직 그것만이 존재한다”면서 “이성적 생명에게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1분이든, 5만 년이든 시간의 간극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진실한 생명은 “자신의 동물적 속성을 이성의 법칙에 복종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는 행복에의 지향”이기 때문에 “이성도, 이성에의 복종도 시간이나 공간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인간의 진실한 생명은 시간과 공간 바깥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여 우리는 죽어도 죽지 않고, 그것을 이해할 때 불멸의 삶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 혹은 생명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욕망은 자신을 파괴하고 세계를 파멸에 이르게 한다. 인간의 육체적 생명은 이성적 존재로 성장하는데, 그것은 새싹이 자라 나무가 되는 이치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결국 이성적 존재는 나 스스로 행복하기 위해서라도 타인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것을 인식하고 타인의 도움을 얻기 위해 내가 타인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최고 가치라고 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이를 논증하기 위해 세상에 널리 퍼진 사이비 과학과 주장들을 비판하며 생명의 가치를 최대한 옹호한다.
인간의 삶은 행복을 향한 지향
톨스토이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행복을 향한 지향이며, 지향하는 그것은 반드시 얻어질 것”이라고 강조한다. 인생에 있어 수많은 고통은, 결국에는 죽음이 그것을 방해할 것이지만 “인간이 자신의 육체적 동물적 실존 법칙을 자기의 생명 법칙이라고 생각”할 때에만 나타난다.
결국 우리 스스로 인간임을 인식하는 일, 이성을 지닌 존재로서 스스로의 존엄을 지켜가는 일이야말로 우리에게 삶의 보람과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
“죽음과 고통은 허수아비들처럼 사방에서 훠이훠이 소리치며 인간을 위협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그가 갈 수 있는 인간적 생명의 단 하나의 길로, 즉 이성의 법칙에 복종하고 사랑으로 표현되는 그 길로 나아가도록 만든다.
죽음과 고통은 인간이 자기의 생명 법칙을 위반하는 것일 뿐이다. 자기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죽음도 없고 고통도 있을 수 없다.”
톨스토이는 《인생에 대하여》를 통해 인생의 의미뿐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의 고귀함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는 허황된 말로 감언이설甘言利說하지 않는다. 톨스토이가 《인생에 대하여》에서 말한 모든 것은 그의 삶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톨스토이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시간들을 홀로 경건하게 인생을 생각하고 회의하며 살아내며 악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과 그 의의를 설파하고 위선적 종교와 전제 정권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을 쏟아냈다. 아울러 진실한 삶을 실천하고자 매진했다. 그런 그의 삶은 바로 《인생에 대하여》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생에 대한 인류의 위대한 현자들의 정의를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세상에는 훨씬 더 많은 대다수 사람들이 인생의 모순을 풀어줄 이런 정의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들은 인생에 그런 모순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한 시기, 혹은 전 생애에 걸쳐 오직 동물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이런 사람들 중에는 언제나 특별한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을 인류의 지도자로 자처하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들은 인생의 참뜻을 알지 못하면서 인생이란 개체로서 개인에게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기까지 한다. --- p.39
자기 개인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인생이란 악이요, 무의미일 뿐이다. 가족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조국과 인류를 위해? 그러나 나 개인의 인생이 보잘것없고 무의미한 것이라면, 개체로서의 다른 모든 인간의 인생도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것이고, 따라서 무의미하고 비합리적인 개인들을 아무리 많이 함께 모아 놓는다 해도 하나의 행복한 합리적 인생이 이루어질 리 없다.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면서 산다? 하지만 그 다른 사람들도 나와 똑같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이유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 p.60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다. 제아무리 인간이 동물적 개체를 지배하는 법칙과 물질을 지배하는 법칙을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 이들 법칙은 자기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빵 한 조각을 어떻게 처분하면 좋은가, 아내에게 주어야 하는가,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하는가, 개에게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자기가 먹어야 하는가, 즉 그 빵을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주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 어떤 가르침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바로 이런 문제들, 혹은 이와 유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그 요체가 있는 것이 아닌가. --- p.85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건들을 포기할 필요가 없듯이 개체성을 포기할 필요가 없고 포기해서도 결코 안 된다. 그러나 그런 조건들을 생명 자체로 인정하는 것은 결코 안 될 일이며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다. 생명의 주어진 조건들을 활용할 수 있고 활용해야만 하지만, 그 조건들을 생명의 목적으로 보아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다.
개체를 포기하지 않는 것, 하지만 개체의 행복을 포기하고 개체를 더 이상 생명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합일로 돌아가기 위해, 그리고 그의 생명이 추구해 마지않는 그 행복이 드디어 그에게 달성되도록 인간이 해야만 하는 일이다. --- p.136~137
우리의 육체는 불변의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이 변화하는 육체를 자신의 동일한 육체라고 인정하는 의식은, 시간적으로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일련의 변화하는 의식들 중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수많은 육체와 의식을 이미 경과해 왔다. 우리는 항상 끊임없이 육체를 상실하고 있고, 매일매일 잠들 때마다 의식을 상실하며, 매일 매시간 이 의식의 변화를 느끼지만 추호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죽을 때 상실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자기 자신의 ‘나’라고 부르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 ‘나’는 우리가 자신의 것이라고 부르는 그 육체 속에도, 우리가 내내 자신의 것이라고 부르는 그 의식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뭔가 다른 것 속에, 즉 일련의 연속적인 의식들을 하나로 연결해주는 다른 무언가에 존재함이 틀림없다. --- p.184
본질적으로 이성적 의식을 완전히 갖추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오직 이런 상태로부터 우리의 진정한 생명이 시작되고, 우리가 고통이라 부르는 그런 상태들도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통증에 대한 감각 의식은 가장 커다란 규모로 확대될 수도 있고 가장 작은 규모로 축소될 수도 있다. 사실 생리학을 연구하지 않더라도 감각 기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통증이 극단적으로 커지면 감각 기능이 마비되고 기절하거나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고, 아니면 죽음에 이르게 된다. 통증의 크기는 아주 정확하게 한계를 가지고 있어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통증에 대한 감각 의식은 그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따라 무한히 커질 수도 있고 무한히 최소한으로 줄어들 수도 있다. --- p.238~239
인간은 언제나 모든 것을 신앙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 인식한다. 인간이 이성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 인식한다고 확신하면서 속일 수는 있지만, 인간이 두 개의 신앙을 만나고 다른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그는 이성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슬람교를 알게 된 불교도가 여전히 불교도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이제 그가 신앙이 아니라 이성으로 불교를 알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신앙을 접하면 곧바로 자신의 신앙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제시된 다른 신앙을 버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는데, 이 문제는 불가피하게 이성에 의해 해결될 수밖에 없다. 즉 이슬람교를 알게 된 불교도가 여전히 불교도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부처에 대한 이전의 맹목적 신앙이 이성적 토대 위에 구축되어야만 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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